속세의 영화 잊으려했던 이유, 비문에 오롯이
생전에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문무왕은 그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신비한 설화가 가득하다. 선고인 김춘추(태종무열왕)가 언니의 괴이한 꿈을 산 문희(文明王后)와 혼인하여 낳은 이가 문무왕(法敏)이다. 어머니 문명왕후는 김유신의 누나이며, 신라 최고의 외교가로 꼽히는 김인문은 문무왕의 동생이다. 삼국 통일의 배경에는 이들의 절대적인 후원이 있었다. 이렇듯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문무왕에 대한 기록이 역대 어느 왕보다도 자상하다. 신비한 설화적 내용이 정치적 상황과 결부되어 묘사되었다.
두 사서에서 주목되는 것은 문무왕의 유조(遺詔)이다. 삼국사기에는 그 유조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왕가의 독실한 불교 전통을 계승한 문무왕은 불교식 장례대로 자신을 화장하여 동해에 뿌려 줄 것을 명한다. 곧 산골(散骨)을 명한 셈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만파식적 설화에는 장골(藏骨)로 기록되어 있다. 뼈를 동해의 대왕암에 수장했다는 말이다. 해룡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조가 새삼 숙연해지는데 수중릉이라는 대왕암에서는 아직까지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유조에 따라 화장을 했지만 무언가 문무왕을 기리는 상징적인 왕릉이 있지 않았을까. 앞서 언급한 두 사서에는 왕릉을 조성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호국불교의 정신을 담아 독특한 양식으로 건립한 사천왕사지에 문무왕릉을 조성했음을 보여주는 비편이 발견되었다. 조선후기 금석학자인 이계 홍양호가 1796년 (정조 20년) 경주 낭산의 선덕왕릉 아래에서 문무대왕릉비 비편을 처음 발견하였고, 이후 추사 김정희가 다시 두 개의 비편을 발견했다는 사실이 해동비고에 전하며, 청나라 유희해의 해동금석원에도 비편의 내용이 기록되었다. 그러나 비편은 다시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다가 1960년 하단부 비편과 2009년 9월 2일 상단부 비편을 발견함으로써 비로소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금석기록과 비편을 재구성하면, 신문왕 2년(682) 7월 25일에 건립했으며, 비문을 지은 사람은 급찬 국학소경(國學少卿) 김아무개이고, 비문의 글씨는 한눌유(韓訥儒)가 썼으며, 문장은 사륙변려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만 전모는 알 수 없다.
비면은 좌우보다 위아래가 약간 긴 장방형의 계선을 긋고, 그 안에 2cm 안밖의 전형적인 구양순체 필의로 새겨져 있다. 이로써 문무대왕릉비는 당과의 밀접한 교류 속에서 서예문화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며, 태종무열왕릉비에 이어 비의 형식이 정형화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비명과 찬자가 비문의 첫머리에 나오고, 서자가 비문의 끝에 자리하는 양식을 갖추었다. 구양순이 쓴 구성궁예천명과 같은 형식이다. 서자와 관련하여, 이전에 서술한 바와 같이 각석에서 이미 서자(書者)의 직함과 이름이 출현하였지만, 태종무열왕릉비와 문무대왕릉비의 경우 비의 형식이 정형화되고, 당의 전형적인 서법을 핍진하게 구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눌유는 단순히 서자보다는 서가(書家)로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신실한 불심으로 파격적인 유조를 전한 문무왕, 그러나 차마 성고(聖考)의 흔적을 지울 수 없어 세웠던 비는 이렇게 무참히 조각나고 말았다. 문무왕이 속세의 영화를 잊으려했던 이유를 여기서 알겠다.
/ 이은혁(전주대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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