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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사람] 우석대 강단에 선 야구스타 박노준씨

"전북 야구 부활하는 모습 보고파"

초대형 스타 야구 선수였던 박노준(49), 그가 이젠 정식 대학교수가 돼 강단에 서자 강의를 들으려는 학생들이 쇄도하고 있다.

 

우석대에서 설강한 교양과목 '운동과 건강관리'란 강좌엔 무려 117명이 수강을 신청, 평소보다 3배 이상 늘어났다.

 

유명 선수 출신이기도 하지만, 숱한 부상을 거듭하면서 쓰러진 뒤 오뚝이처럼 일어났던 자신의 체험담을 전하자 이에 공감한 학생들이 앞다투어 그의 강연을 듣기위해 모여든다.

 

"교수의 싸인(Sign)을 꼭 받아오라"는 부모님의 부탁을 받은 학생들은 수시로 그를 귀찮게한다.

 

스타 출신답지 않게 직접 만나본 그는 매우 겸손했고, 인터뷰 내내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란 인상을 강하게 풍겼다.

 

야구인 박노준이 대학 교수가 된 경위와 삶의 궤적, 향후 계획을 들어봤다. <편집자 주>

 

프로야구가 태동하지 않았던 1970년대 고교 야구는 전 국민의 사랑의 받는 스포츠였다.

 

군산상고 출신의 김봉연, 김성한, 김준환은 물론, 최동원, 김시진, 선동렬, 류중일 같은 기라성같은 고교 스타들은 요즘 프로야구 선수의 인기를 능가했다.

 

그중에서도 국내 고교야구 역사상 최고의 스타는 단연 박노준이었다.

 

선린상고 주전 투수겸 4번 타자였던 박노준은 수천명의 여고생 팬을 몰고 다닐만큼 인기를 구가했다.

 

왼손잡이 투수겸 타자여서 더욱 눈길을 끌었다.

 

야구선수 박노준에겐 언제나 '천재'란 별명이 따라다녔다.

 

야구인들은 오직 그에게만 천재란 표현을 썼다.

 

원래 목포에서 태어난 박노준은 서울시 관악구 봉천초 5학년때 인생이 바뀐다.

 

아버지는 당시 국제그룹 중견 간부로 근무했고, 어머니는 부동산 관련 일을 해서 집안이 부유한 편이었다.

 

하지만 1남2녀중 장남인 그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부모님이 "좀 건강해지라"며 3개월만 하는 조건으로 야구부에 입단시켰다.

 

몸이 약한 외아들은 야구를 시작하자마자 천재성을 보였다.

 

당시로선 매우 드문 왼손잡이 투수겸 왼손타자인 그는 초등학교때 이미 전국무대에 널리 알려졌다.

 

타고난 투·타 감각과 겸허하게 훈련을 거듭하면서 전국대회 우승의 주역이 됐다.

 

선린중에 가서는 전국 최고의 선수란 명성을 얻어 유명한 고교감독들이 그를 스카우트 하기위해 매일 집에 찾아왔다.

 

그가 선린상고로 진학한 이후 김건우-박노준 콤비를 무너뜨릴 팀은 어디에도 없었다.

 

고교 2학년때인 80년 황금사자기때 선동렬(광주일고)을 상대로 맹타를 휘두르며 우승컵을 차지했던 장면이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그해 전주에서 열린 전국체전때 전주고와의 4강 경기가 열린 전주야구장은 선린상고 박노준을 보려는 사람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신은 인간에게 재주와 행운을 함께 주지 않았다.

 

그가 3학년때 선린상고는 모든 대회를 석권할 것처럼 보였으나 81년 봉황기 결승에서 박노준은 홈으로 파고들다 발을 크게 다쳐 경기도중 병원으로 실려갔고, 수술도중 통한의 역전패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이는 대학과 프로에서 겪게될 숱한 부상의 전주곡으로 시련의 첫출발이었다.

 

대학에 가서도 4년 내내 그는 국가대표를 지냈고, 프로에선 쌍방울, 해태팀에서 12년동안 선수로 활동했다.

 

국내 프로야구 29년 역사를 통틀어 전 선수 평균수명이 7.3년인 점을 감안하면 남들보다 오래 버팀 셈이다.

 

대학이나 프로시절 그는 고교때만큼 각광을 받지 못했다.

 

투수와 타자를 고루 잘해 둘 다 겸한 것이 화근이었고 잦은 부상이 그를 괴롭혔다.

 

선수생활을 정리한 뒤 그는 스펙을 쌓기위해 성균관대 스포츠산업학과에서 석사, 호서대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최근 취득했다.

 

이미 고려대 경영학과 재학시절 나름대로 경영을 공부한게 큰 힘이 됐음은 물론이다.

 

우연한 기회에 우석대, 호서대, 서울과학기술대에서 겸임교수나 초빙교수로 출강하면서 강의를 하는 보람을 알게됐다.

 

최고의 선수로 각광을 받다 부상을 당해 벤치에 앉아 있을때의 참담한 경험담을 들려주며 화려한 스타의 이면엔 온통 눈물과 땀이 점철돼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어릴 때 정치나 비즈니스 하는게 꿈이었는데 전혀 생각지 않게 야구선수를 했고, 이젠 대학교수가 됐다"는 그는 요즘 우석대에서 접하는 학생들에게 "긍정적 사고를 갖고 언제나 노력하라"고 주문한다.

 

야구인들 사이에 항상 회자되는 말이있다.

 

"땀은 배반하지 않는다"

 

그게 바로 박노준 교수의 인생철학이다.

 

운동 선수가 접하기 쉬운 술과 담배를 한번도 하지 않은 것도 이러한 믿음 때문이다.

 

박 교수는 선수 시절부터 집에 가면 야구 이야기를 절대 하지 않는다.

 

중매로 만난 아내(전윤주·47)나 대학생인 두 딸이 야구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진지하게 큰 딸의 전공(경영학)이나, 작은 딸의 전공(정치외교) 문제를 주제로 많은 대화를 한다.

 

쌍방울에서 선수로 뛸때 경기장에 찾아와 "열심히 해서 전북을 빛내달라"며 손을 잡아주던 유종근 당시 도지사의 모습이 선하다는 박노준 교수.

 

야구선수 출신답게 그는 "전북을 연고로 한 프로구단이 꼭 생겼으면 좋겠다"며 "언젠가 전북야구가 부활하는 모습을 보고싶다"는 개인적인 소망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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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병기 bkweegh@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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