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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전주 출생의 개혁 유학자 홍계희

'경세치용' 조선 영조대 개혁·실용주의자

봉동 구미리 구호서원 전경, 인군 홍술해 집터와 정유옥사 당시 홍삼범, 효임의 피난처가 있다. (desk@jjan.kr)

"옛날에 홍술해라는 사람의 아내가 살았는데, 시아버지의 밥상을 차려놓고 축지법을 써서 한양에 금방 날아서 다녀왔으며, 다녀 올 때마다 임금님 궁궐의 기왓장을 한 장씩 뒤집어 놓고 왔다."(구미리 박찬경, 박헌우씨 증언)

 

완주군 봉동읍 구미리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범상치 않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역사속에 실존하는 인물로 드라마 '이산'으로 잘 알려진 정조 임금에 대한 암살 미수사건(1777·일명 정유옥사)과 관련된 홍술해의 아내 벽진이씨 효임(孝任)에 대한 전설이다. 효임이 아들 홍상범과 함께 모의하여 자객을 궁궐로 잠입하는가 하면, 정조와 홍국영을 저주하여 반역을 꾀하였던 중심 무대가 바로 이 곳 완주군 구미리였다는 것이다.

 

효임의 남편인 홍술해는 전라도 감사·경주 부윤을 거쳐 1776년 황해감사에 오른 인물로, 당시 세손인 정조 즉위에 반대세력이었다. 홍술해의 아버지는 영조대 균역법을 실시하는 등 많은 국가 정책과 경세활동을 한 핵심 관료였던 홍계희(洪啓禧·1703~1771)이며, 홍계희가 죽은 후 그 자손들은 홍인한·정후겸의 외척당 계열에 서서 정조의 왕위 등극을 반대했다가 결국 역적으로 몰려 멸문지화(滅門之禍)을 입게 된 것이다.

 

▲ 잊혀진 인물, 전주 사람 홍계희

 

정유옥사를 이해하는 중심 키워드는 홍계희라는 인물에 있다. 그의 가문은 숙종, 경종, 영조대를 거치면서 경기도 양주에서 전북 전주로 낙향한 노론 중심 가문으로 대대로 서인, 노론 계열로 홍계희가 활약한 영조대에 대표적인 벌열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임피현감을 지낸 할아버지 홍수제 때에는 김제 만경에, 진안현감을 지낸 아버지 홍우전은 완주 고산에 그 근거지를 두고 살게 되는데, 어버지 홍우전이 경종 때 신임옥사로 인해 1722년 삭직하고 전주 구만동(龜灣洞·현 구미리)으로 돌아와 스스로 구만(龜灣)이라 호를 짓고 살게 되면서, 홍우전-홍계희-홍술해-홍상범에 이르는 4대에 걸친 54년(1722~1777)의 구미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홍계희의 아버지 홍우전은 영조가 등극한 이후 당쟁의 한복판에서도 대쪽 직언으로 소론을 공격하는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는데, 스승이자 장인이며 송시열·송준길의 제자인 전의현 살았던 이상(李翔)의 영향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홍계희는 이러한 친가와 외가의 탄탄한 기반 아래 청풍김씨 처가까지 벌열가문과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성장하였다.

 

그의 출생과 관련한 '담와유고초'에 보면 홍수제-홍우전의 옛 터인 만경현 몽산(현 김제시 만경읍 몽산리)에서 태어났는데 '몽산이 맑고 깨끗한 기운을 머금고 있는데 홍계희가 태어난 해에는 풀이 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사롭지 않는 출생 이야기를 가진 홍계희는 23세가 되던 해인 1725년(영조1)에 전주향교에서 치른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이후 영조 당대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정치 관료이며 최고의 경세가로 활동하게 된다.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영조가 탕평과 함께 자신의 치적으로 내세웠던 균역법 제정·청계천 준설 등 실제적인 경세정책을 주관하였고, 왕명을 받아'균역사실','삼운성휘','경세지장' 등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특히 그는 앞서 부안에서 살았던 반계 유형원의'반계수록'에 심취하여, '반계수록'를 직접 편찬하고 이를 토대로 개방적이고 실용적인 정책을 실행하려 했다. 이는 명문가 자손으로 노론의 색목을 지닌 벌열가에 기반을 두었지만, 호남 출신의 개방적·개혁적 사상을 기반으로 반계 유형원의 사상 등 다양한 분야의 학문에 열정을 갖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특히 상수학 연구에 깊은 관심을 가져 수학과 산학을 기초로 한 균역법을 시행하였고, 국가에 필수적인 경세서 간행, 음악·세금·건축·예학·역사·음운·상수·의학 등 여러 분야의 해박한 지식을 갖고 다양한 학문적 영역을 소화는 박학·실용적 인물로 평가된다. 따라서 홍계희는 영조대의 대표적인 경세적 정치관료의 모범으로 평가된다. 또한 그는 1747년 일본으로 통신사 정사, 1760년 중국으로 연행사 정사로 사행(使行)를 통한 개방적이고 실용적인 서적을 통한 학문 접근 등을 시도했다. 일본에 후쿠젠지에는 그와 아들 홍경해가 남긴 글이 현판에 남겨져 있으며, 중국 심양관 기록화는 현종 탄생지를 찾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또한 일본과 중국에서 많은 서적을 대량구입하는 등 다양한 학문에 관심을 표출하였고, 이는 향후 젊은 신진기예 학자들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리·금석학에 두각을 나타내는데, 1742년 북도별견어사로 있을 때 왕명을 받들어, 상수역학을 바탕으로 함경도 북부 지역의 지도, 백두산 지역의 거리 측량 등을 하였고, 금석·서예에도 조예가 있어 고산 소농골의 아버지 홍우전신도비, 대둔산의 안심사사적비, 남원 사매에 양사형묘비, 용인에 유형원묘표 등의 글씨를 남겼다.

 

▲ 홍계희의 재평가

 

홍계희는 전주 출신으로 영조 때에 가장 대표적인 현실 관료 정치가로 평가된다. 그는 다양한 학문을 정책에 반영하여 실용적인 국가운영을 전개하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홍계희는 정치가로서 임오화변(1762)에 깊이 개입되었고, 그의 후손들에 의한 정유옥사(1777)로 인해 그가 추진한 여러 경세정책은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그의 국가 운영의 새로운 경세적 개혁을 위한 열정은 충분히 인정하고 재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 홍계희와 전주, 호남이라는 지역사의 재인식이 중요하다. 특히 그는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모델로 실용적이고 개방적인 경세사상을 바탕으로 이후 많은 학자, 특히 호남 출신의 박학다식한 유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을 개연성이 크다. 같은 시기를 살았던 흥덕의 이재 황윤석, 순창의 여암 신경준 등과의 교유도 이러한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홍계희의 직접적인 제자로 알려진 인물로는 목산 이기경이 있는데, 그는 성리학자였지만, 제자백가와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시문과 서예에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이기경은 동생 이기정과 함께 홍계희 가문과의 친분으로 정유옥사때 북방으로 유배를 가기도 했다. 이처럼 정유옥사로 인한 호남의 타격도 충분히 컸으리라 생각된다.

 

1589년 정여립의 기축옥사, 1777년 홍술해의 정유옥사는 성격은 다르지만,전주를 중심으로 하는 호남 지역에 그 근간을 두고 있다. 잊혀진 인물 홍계희, 정유옥사는 이처럼 새롭게 조명해 보아야 할 화두라고 생각한다.

 

/ 김승대 문화전문시민기자(전북도청 문화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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