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을 건너는 코끼리의 발자국처럼…탄탄하고 살아있는 필획
谿山無盡(계산무진): 시냇물도 산도 다함이 없어라.
谿:시내 계(=谿)/ 山:메 산/ 無:없을 무/ 盡:다할 진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서 추사 김정희 선생의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기로 유명한 간송미술관(서울 성북동 소재)이 특별히 아끼며 자랑하는 작품이다. 간송미술관은 이 작품을 추사의 대표작 중의 대표작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혹자는 추사의 다른 글씨에 비해 필획이나 결구가 너무 파격적이라는 점을 들어 추사가 이런 글씨를 썼을 리 없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잘못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이 정도의 큰 작품에 아무런 관기(款記: 낙관하는 글)도 없이 도장만 하나 달랑, 그것도 작품의 크기에 걸맞지 않는 아주 작은 도장만 하나 찍혀 있다는 점을 들어 의문을 제기한다면 모를까 필획과 결구를 들어 말하자면 추사가 아니고서는 이만한 작품을 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탄탄한 필획, 살아있는 필획을 설명할 때 흔히 '향상도하(香象渡河)'라는 말을 한다. '코끼리가 강을 건너듯이'라는 뜻이다. 불경에 나오는 말이다. 토기와 말과 코끼리가 함께 강을 건넜단다. 토끼는 강에 들어선 다음, 몇 발자국 가지 못해 물살에 밀려 둥둥 떠내려 가버리고, 말을 강을 건너긴 했어도 사나운 물살에 밀려 더러는 다리가 강바닥에 닿기도 하고 더러는 다리가 들리기도 하면서 뒤뚱뒤뚱 아주 불안하게 겨우 건넜다. 코끼리만 아무리 강의 물살이 급하고 세어도 전혀 흔들림이 없이 발바닥을 강바닥에 철저히 달라 붙이고서 쭉쭉 밀어가며 당당하게 건넜다.
글씨를 쓸 때 붓과 종이도 그렇게 만나야 한다. 강을 건너는 코끼리의 발자국처럼 붓이 종이에 완전히 밀착하여 강한 마찰력으로 부딪혀야 한다. 그렇게 운필을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필획이 바로 살아있는 필획 즉 '향상도하'와 같은 느낌의 필획이다. 추사의 작품 〈계산무진〉은 바로 그런 향상도하의 필획으로 썼다. 어느 필획 하나 천근 만근의 무게로 종이위에 달라붙어 있지 않은 게 없다.
필획뿐이 아니다. 결구도 기묘하기 이를 데 없다. 오른 편에 큼지막하게 자리를 잡은 변형된 모습의 '谿'자는 해서(楷書)적 관점에서 보자면 분명 잘못 쓴 오자(誤字)이다. '谿'의 왼편 윗부분에 있어야할 '爪'부분을 생략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 글자를 오자로 보지 않는다. 비록 변형이 되기는 하였지만 자형으로 보나 전체적인 문장의 의미로 보나 '谿'자로 밖에 불 수 없기 때문이다. 옛 사람들은 이처럼 그 글자로 읽을 수밖에 없는 글자는 그 글자로 읽을 수밖에 없는 범위 내에서 기상천외의 변화를 추구하여 이체자도 만들고 별체자도 탄생시켰다. 추사도 그런 변형의 대가였다. 그렇다면 '爪'부분을 왜 생락 했을까? '谿'의 오른 편에 자리하고 있는 '谷'을 지금의 모습으로 오묘하게 변화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변화시켰기 때문에 오묘한 결구의 '谷'자와 그렇게 정히 잘 어울리게 된 것이다.
'山'자는 자형은 전서이면서 필획은 완전히 예서의 필획으로 썼다. '山'자 아래 부분에 과감하게 여백을 남긴 것도 빼어난 장법의 운용이다. '無'자는 괴석처럼 단단하게 뭉친 필획으로 '山'보다 약간 올려서 썼다. 아래에 '盡'자를 놓기 위한 포석이다. 마지막으로 '盡'을 '無'아래에 튼실하게 배치함으로써 작품 전체를 안정된 분위기로 이끌었다. 가히 귀신같은 솜씨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이런 필획과 결구와 포치(章法)가 의도적인 계산으로부터 나온 게 아니라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순간적으로 그렇게 써져 버린 작품이기 때문에 더욱 빛나는 명작이다.
이 작품은 추사가 만년에 당시 세도정치의 한 복판에 서서 세도를 부리던 안동김씨 김수근(金洙根)에게 써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수근의 호가 '계산초로(溪山樵老:시냇물 따라 산에 올라 나무하는 늙은이)'이기 때문에 그렇게들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김수근은 호는 비록 마치 은자(隱者)인양 '계산초로'라고 지었지만 실지 생활은 권세의 중심에 서서 '계산초로'와는 영 멀리 떨어진 생활을 하였다. 추사는 그런 김수근과 별로 친하지 않았다. 친하지 않은 사람이 써달라는 글씨라서 맘에 내키지 않아 한 마디의 관기도 쓰지 않았고 도장도 그렇게 소극적으로 자그맣게 찍은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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