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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23)초야에 묻혔던 시인, 양상은

한학에 조예…한글 운동에도 깊은 관심

양상은(也靑 楊相殷·1907~1978)은 순창 금과에서 태어난 시인이다. 그의 생애나 시세계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이 전무하다. 그가 고향에서 산 기간이 짧았고, 서울과 광주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하직한 탓이다. 그는 1929년 '조선지광'사의 기자로 입사하였다. 그것도 잠깐, 한 달 후에 그는 당시로서는 번듯한 직장을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그만두고 낙향하였다. 그때의 인연으로 그는 김억 등과 서신을 왕래하며 교분을 유지하였고, 환향한 후에는 시작에 전념하면서 식민지민의 비애를 달래었다.

 

1929년 8월 양상은은 '문예공론'에서 독자들의 작품을 공모하자 시 '花山小景'을 응모하여 입선을 차지하였다. 그로부터 그는 여러 잡지에 한시와 시조, 시 등을 활발히 발표하기 시작했다. 시작 활동 외에 그는 한글 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나타내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였다. 그 예가 1935년 이극로의 훈민정음 탄생 기념일 강연 문제를 시비한 일이다. 특히 양상은은 당시에 식자층에서 유행하였던 외국어 사용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 실태에 관해서 그는 "한문을 쓸 때에도 궁벽한 문자 쓰기를 좋아하며, 근래로는 남이 잘 모를 일문을 잘 쓰더니 일본문이 보통이고 보니, 또 지금은 조선문 가운데 영어, 불어, 기타 외국어가 아니면 쓸 줄을 모른다"고 힐난하였다. 그의 할이 크게 들리는 것인즉, 요새라고 해서 별반 달라진 게 없는 탓이다.

 

양상은의 '야청시조집'(1991)을 보노라면, 대부분 시조와 한시로 이루어졌다. 그가 시조와 한시 창작에 남다른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어릴 적에 배웠던 한학의 힘이 컸다. 그는 신학문을 배우기를 고대했으나, 엄격한 가문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집안 어른들은 설진영 선생을 고빙하여 사사하도록 하였고, 그때 엄청난 한문 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런 영향인지 그의 작품에는 압록강, 대동강, 한강, 백마강, 무등산을 비롯하여 국토를 예찬하는 작품들이 많다. 또 그는 송강 정철의 문학을 찬미하였고, 백범 김구에게는 최상급의 예를 갖추어 올리는 등 한국사의 훌륭한 시인 묵객과 위인들의 업적을 기리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그밖에도 그의 작품에는 정읍사와 광한루 등의 전북의 문화유산을 찬양하는 시편들이 즐비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시인으로서의 바람직한 자세를 되돌아보게 한다.

 

이러한 시풍은 양상은이 국권을 강탈당한 채 식민지의 원주민으로 살아오면서 느꼈던 울분에 터한 것이리라. 또한 그의 성품이 올곧아서 생겨난 산물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그가 한시에 조예가 깊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옛 선인들의 시회 모습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시작품의 도처에서 명승지를 호출하고, 자신의 느낌과 고적의 사연을 결부시킨 것을 보면, 그가 수백년간 전해 내려오던 조상들의 시작 풍습을 몸에 익힌 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점은 그의 시세계에 접근하려는 독자들을 멈칫하도록 부추기는 요인이기도 하다. 근래에 들어 독자층이 엷어진 한시라는 양식이 으뜸가는 이유이고, 작품의 여기저기서 뛰쳐나오는 한자어의 돌출이 둘째가는 이유이다. 게다가 다소 관념적인 취향을 내비치는 작품이 주는 '가까이 하기엔 먼 당신' 같은 선입견이 그와 독자의 사이에 거리를 두도록 조장한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양상은의 작품들은 유구한 역사와 함께 면면히 계승되어 온 한시와 시조의 맥락을 잇고 있다는 점, 한국시사에서 한 줄기를 이루고 있는 형이상학적 성향의 시세계를 증언한다는 점에서 시사적 의의를 획득한다.

 

1936년 3월 양상은은 정든 순창을 떠나 광주로 이사하였다. 그곳에 새롭게 삶의 둥지를 튼 그는 1949년 광주에서 발행되던 '동광신문'의 기자로 입사하여 혼란기의 사회상을 취재하는 소임을 맡았다. 그 후 1951년 조선대 부속고교에 근무하면서 대학에 출강하는 등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 혼신을 쏟았다. 1962년 그 학교를 사직한 그는 주로 시조와 한시를 쓰면서 산야를 주유하며 소일하였다. 아호에서 짐작 가듯이 그는 세상의 평판이나 문명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그의 작품들은 한참의 세월이 흐르기까지 세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것이다.

 

양상은의 작품은 먼지에 묻혀 있다가, 효성이 지극한 아들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장남 양충희는 1991년 구름재 박병순 시인을 찾아가서 유고집의 출판 계획을 설명하고 머리글을 부탁하였다. 이에 박 시인은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흔쾌히 글을 써서 작품집을 빛내주었다. 설령 그의 부연 설명이 없었더라도, 가친의 유고집을 여섯 남매가 뜻을 모아 불효의 징표로 세상에 내놓는 일은 우러를만하다. 자기 아버지의 작품집을 내주어도 의례적인 공치사조차 안 하는 유족들이 태반인 세태에 비추어 보면, 자식들의 정성에 힘입어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작품들을 세상에 내보내게 된 양상은은 복 받은 시인이다. 이제부터라도 그의 시세계에 대한 후학들의 관심이 높아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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