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재 (시인·전주 우석고 교감)
고향 뒷동산에는 키 큰 밤나무가 있었다. 어린 시절, 추석 무렵이면 알밤을 주우러 새벽같이 그 밤나무 아래로 달려갔다. 이슬에 젖어 촉촉한 황토 위에서 반짝거리는 갈색의 알밤, 밤송이의 속살에서 금방 떨어져 나온 알밤 밑동의 뽀얀 색깔, 그것을 손에 쥔 감촉은 참으로 행복했다. 먹기 위해 알밤을 주웠지만 그 맛의 즐거움은 잊은 지 오래이나 알밤을 손에 쥔 순간의 아름다운 감각은 오늘까지도 내 신경과 세포를 간질인다.
생각해보면, 새벽 알밤줍기는 먹거리가 궁핍했던 시대의 동심을 움직이는 생존의식만은 아니었다. 키 큰 나무와 오염되지 않은 흙과 새벽공기와 이슬, 그리고 고요한 밤이 지나면 알밤이 떨어져 있는 알밤나무 밑의 변화 - 살아있는 자연의 숨결과 내 생명의 호흡이 만나는 순간이었다. 지구의 한 지점에서 태어나 짧지 않은 인생길을 걸을 때 가슴에 품을 꿈과 소망의 원천이 각인되는 시간이었다.
이건청 시인의 '하류(下流)'라는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거기 나무가 있었네./ 희미한 하류로/ 머리를 두고 잠이 들었네./ 나무가 아이의 잠자리를 찾아와/ 가슴을 다독여 주고 돌아가곤 했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일만 마리 매미 소리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네./ 모든 대답이 거기 있었네./ 그늘은 백사장이고 시냇물이었으며/ 삘기풀이고 뜸부기 알이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이제는 무너져 흩어져 버렸지만/ 둥치마저 타 버려 재가 돼 버렸지만/ 금관악기 소리로 퍼지던 노을/ 스쳐가는 늦기러기 몇 마리 있으리./ 귀 기울이고 다가서 보네./ 까마득한 하류에 나무가 있었네."
인생은 어쩌면 유년의 기억에서 시작하여 그 기억으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순수한 동심에서 인식한 세계의 연소과정이 아닐까. 이건청의 시처럼 인생은 '하류(미래)'로 머리를 두고 꿈을 꾸는 나무와 같다. 백사장과 시냇물과 삘기풀과 뜸부기의 알……제법 깊어진 인생의 하류에 도달하여 귀 기울이고 다가서 보면 이런 것들이 정말 삶의 모든 대답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동안 우리는 시냇가의 백사장에 도시와 고속도로를 건설했고 삘기풀 대신 초콜릿과 아이스크림을 만들었으며 뜸부기의 알이 아니라 황금과 명예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어린 시절 우리를 행복하게 했던 삘기풀 하나만도 못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제 추석을 맞아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명예와 부를 싣고 우리가 만든 고속도로를 가득 메우고 고향을 찾아 간다. 수만 가지 사연과 상념들이 함께 가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 귀향이다. 고향 뒷동산 새벽의 알밤을 줍던 유년의 꿈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제는 둥치마저 다 타버렸을지라도 꿈을 꾸던 그 나무 밑에 다시 서서 상처뿐인 삶을 어루만지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 세상에는 아직도 순수한 호흡이 살아있고, 지루하고 혼잡하지만 고속도로의 귀성차량은 아름답다.
그런데 우리의 아이들은 알밤을 모른다. 그들은 알밤 대신 초콜릿을 찾는다. 당연하다. 그들의 새벽은 바람이 부는 자연이 아니라 컴퓨터 속의 아바타와 교감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고향에는 알밤과 시냇물과 삘기풀과 뜸부기가 없다. 그들은 사이버 세계와 영상을 통해 감각과 정서를 익힌다. 토속적인 알밤의 떫은 풋내 대신 뇌신경을 자극하는 초콜릿의 세계화 된 단맛을 안다. 그들의 잠자리를 찾아와 가슴을 다독여 주는 것은 분명 시냇가의 나무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추석날 알밤 대신 초콜릿을 먹어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우리 세대가 그들의 꿈을 망가뜨린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이루지 못한 꿈을 아이들은 달콤한 초콜릿 맛에서 더욱 아름답게 꾸고 있는 것인지 그것을 알지 못하겠다.
/ 이세재 (시인·전주 우석고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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