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하얗게 내린 그날
어느 운동장에선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했지만
어느 비탈에선 한 소년이
겨울 토끼보다 시시하게 숨을 거두고 있었다.
육중한 〈캐터필러〉 소리를 자장가로
나면서 철조망을 보았고
죽으면서 철조망을 본 雲川里의 소년.
나면서 깡통을 보았고
죽으면서 깡통을 본 雲川里의 소년.
- 미안하다
언어는 밑창으로 貯炭되고
내일은 흑인 병사의 얼굴처럼 불길하던
雲川里의 철망가
누가 여기에 꿈과 사랑을 주었고
누가 여기에 휴식과 錢票를 주었는가?
[...]
오늘도 雲川里엔 요란한 八軍車의 엔진소리
깡통소리, 껌 씹는 소리
그리고 비오는 날의 찢어진 우산처럼
독버섯처럼
삼류극단의 셋트처럼
펼쳐진 판자집
[...]
단 한 번 상학종의 의미를 갈구하던
소년은 갔다.
마호니군의 사랑을 따라간
宋仁子양의 고향- 雲川里에서
〈책임전가〉의 상표를 또 한 번 확인한 채
그리고는 조용하였다.
그것은 안으로 안으로만 피를 새기는
木鐘이었기에......
-「목종」(1964,2)에서
이 시는 미군부대로 통조림 몇 개를 훔치러 들어간 소년이 무참하게 사살된 사건, 그러나 그것을 안으로만 삼켜야만 했던 1960년대 한반도의 현실을 고발한 시다. 〈육중한 캐터필러/하얀 눈〉, 〈철조망/토끼〉 등, 〈미군/남한〉이라는 '점령자/ 현지인' 관계에서 빚어진 민족적 비애와 분노를 강자와 약자, 폭력과 순수의 대비적 이미지로 클로즈업시켜주고 있다. 당시, 이 사건을 침묵으로 일관하던 1960년대 초, 주한미군에 대한 민족적 자각과 비판을 최초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는 분명 한국의 문학사, 곧 한민족 저항시사(詩史)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하겠다.
아직 푸르름이라 말하지 말자
분단이 분단을 낳고 또 분단이 분단을 부르려는
지금
아직 푸르름이라 하지 말자
끊어진 칡뿌리에 토막 난 무쪽에 새 움이 돋기 전엔
아직 푸르름이라 하지 말자
넋두리라 하지 말자
그러나 지금 기쁠 것도 서럴 것도 없는
전라도 허허 벌판에 봄이 오고 있다.
당당한 진군처럼 봄이 오고 있다.
- 「봄날 전라도」에서, 1995
소외와 단절의 역사에서 통합과 복원 그리고 소생의 봄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순리이고 진리이기에 그에 대한 그의 열망은 이 고장, 아니 이 민족, 이 시대의 보편적 명제요 시대선(時代善)이 아닌가 한다.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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