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열정 불살랐던 그대의 혼, 오래도록 기억하리"
살아갈수록 기억해야 할 슬픔이 많아지니 익숙한 듯 묵은 아픔을 꺼내 자네 이름을 덧씌워 새기다가 어느 새 등을 돌려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친구들을 안쓰럽게 바라보네. 그러나 자네가 오랫동안 응시했던 곳은 보이지 않네. 아무에게도 말해주지 않은 자네 눈길과 몸속의 따뜻한 온기를 옮겨놓은 곳은 어디인가. 가을의 찬 기운이 땅에 내리기도 전에 자꾸 몸이 춥다고 말한 자네에게 살아서 눈물을 만드는 이 몸의 온기 한 점 불어넣지 못한 우리가 죄인이 되어 자네가 만든 높은 산 아래서 자리 하나를 만들고 있는 오늘, 친구라는 말이 이렇게 대책 없이 허술한 것이었던가를 생각하니 우리가 주고받던 웃음과 말과 술잔들을 일시에 잃은 듯 낯선 사람처럼 망연히 서 있을 뿐이라네.
그러나 친구여 들리는가. 어렸을 적 자네가 휘돌린 진안 백운면 시골마을 집 곁을 흘러내리는 데미샘의 물줄기도 오늘 잠시 이 자리에 와서 머무는 것을. 매일같이 출퇴근하며 시를 떠올리던 생계의 길 위에서 자네를 기다리는 잎들이 가늘게 떨리며 너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을. 무엇보다도 자네를 살려내어 우리 곁에 함께 세우려는 친구들의 허망한 눈물이 네 가슴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느냐고 어깨를 흔들어 묻고 싶네.
자네는 이 세상 누구보다 순수하고 해맑은 감성을 지닌 친구였지. 우리가 잠들고 있을 때 맑은 시를 썼고 게으르고 무딘 우리들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자네가 간밤에 뒤바꿔놓은 아름다운 세상을 눈으로 볼 수 있었네. 그것이 자네가 불면의 고통 속에서 이룬 밤샘 작업이었음을 알고도 우리는 따뜻한 위로 한 마디 건네지 못했으니 서서히 닫혀가는 문밖에서 이제야 자네를 찾아보지만 훌쩍 모든 것 거두어 가버렸구나. 밤 열두 시만 되면 우리의 호주머니 속에서 홀로 울던 자네의 목소리 이제는 들은 지 오래되었으니 짐짓 강한 척 했던 우리가 전송하지 못한 젖은 목소리는 이제 누구에게 들려주어야 하는가.
눈 내리는 겨울날 덕진의 어두운 자취방에서 오랜 후에 찾아올 미래도 모른 채 웃어대던 날들이 떠오르는데. 은행나무 노란 서리 지붕 밤새워 녹이던 그날의 온기를 하늘을 날고 있는 금구의 왜가리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데. 자네를 따라 오르던 태백산 주왕산 산길 위에 우리가 남기고 온 세상을 짓밟던 호기는 이제 별로 떠서 가물거리며 어서 따라오라고 손짓하고 있는데.
남은 아내와 예쁘고 잘생긴 아들딸들 이제 어찌하여야 한단 말인가. 친구라는 호칭은 본래 우리 감정이 당겨놓은 말이라서 남겨놓고 간 자네의 걱정을 끝까지 짐 지지 않는 법이지. 그러하니 하늘에 간 친구여, 아니 저 높은 산 아고산대쯤 바람으로 불어 우리 머리 위를 날고 있을 친구는 굽어 살펴 주리라 확신하네. 이제 남은 날들은 생명 있는 자의 차지여서 자랑스럽게 살아 보일 테니 자네는 시를 지어 하늘에 펼쳐 보여주기 바라네. 자네의 서늘한 삶의 열기를 맞고 싶으면 자네 좋아하는 막걸리를 받아 고결한 생각이 지치는 곳으로 굽이쳐 갈 것이라네.
가야할 길 바쁜 삶들이 밀어낸 자리에 가다가 한 사람을 그리워하며 한 움큼 슬픔을 되살리면 그때는 자네가 보여주었던 치열한 시의 열정만이 손에 잡히리라. 그리하여 우리 힘차게 시를 아는 자 시를 쓰고 소설하는 자 소설을 다시 쓰고 세상과 싸우는 자의 싸움도 처절해져야 하리. 유고시집 한 권에 담겨 나올 친구의 시를 보면서 그 누구보다 눈부시게 문학의 열정을 불살랐던 그대의 혼을 오래도록 모시며 그리워할 것이라네. 이제 아프던 삶의 몸살은 끝났으니 깨달음은 남은 자의 몫일 것이고 편히 쉬다 보면 어느 날 그대의 이름 부를 날 있을 것이네. 잘 있게.
임영섭 남성여고 교사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