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경강 해상교통로 확보 통한 대 중국 외교관계 유지 주 목적
'삼국사기'권 제50 열전 제10 견훤전에 견훤의 인물평이 기술되어 있다. 견훤은 누구인가. 그는 신라인이면서도 신라가 당나라인 외세를 끌여들여 나당연합작전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것에 매우 분개할 정도였고, 그는 신라의 변방을 지키는 방수군의 비장이면서 부패하고 타락한 신라 정부에 강한 적개심을 품고 경주에 쳐들어가 경애왕을 처형하고 경순왕을 옹립할 정도의 권세를 가진 정의로운 인물이었다. 경애왕의 처형은 흉년 기근과 도적떼 발호, 전염병이 만연하는 난리통에 백성을 돌보지 않는다게 직접적 요인이었다. 그리고 지방호족들을 끌어안는 포용력과 용맹스러운 기풍과 군사들의 선봉에 서는 리더쉽을 갖고 있었다. 견훤은 매우 정의로운 장수였고 민족 자주의 국가의식이 강한 지도자였다.
견훤은 백제가 익산 금마에서 일어났다는 일통삼한의식(一統三韓意識)을 갖고 있었으며, 백제의 국가계승 의식이 매우 투철하였다. 그가 892년에 무진주(현 광주)에서 지방호족들을 규합하여 국가창업의 기반을 조성하면서도 스스로 감히 왕이라 칭하지 못할 정도로 겸손함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견훤은 전주를 매우 좋아하였다. 그가 광주에서 후백제의 창업기반을 조성하면서도 전주에 도읍을 정할 구상을 하고 있었다. 견훤은 전주사람들에 대한 믿음이 강하였다. '삼국사기'열전에 "견훤이 서쪽을 순행하다가 전주에 이르렀는데, 전주고을 사람들이 열렬하게 맞이하자 견훤은 인심을 얻어 기뻐하였다(萱西巡至完山州 州民迎勞 萱喜得人心)는 내용에서 전주인들에 대한 호감을 드러냈다. 또한 백제 의자왕의 오랜 울분을 씻어주기 위해서 전주에 도읍하겠다(今矛敢立都於完山)고 천명하였으며, 마침내 900년에 전주에 후백제의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왕이라 호칭하였다. 그리고 국가 운영에 필요한 관제를 설정하고 사무를 분담하는 정부 조직도 갖추었다. 후백제 국호도 백제의 국가계승의식을 선언하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견훤은 왜 광주에 도읍하지 못하고 전주에 도읍할 정도(定都) 구상을 하였을까?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전남지역 호족들에게서는 백제의 귀속의식이 매우 낮다는 판단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영산강 유역의 해상교통로를 장악하지 못한 것이 직접적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런점에서 전주천도가 아니라 전주정도가 맞다.
그렇다면 왜 견훤이 전주에 도읍을 정하였을까. 첫째, 전주가 백제권의 중심이라는 인식. 둘째, 전북지역 백제인들이 앞장서서 백제부흥전쟁을 치른 호국의식을 높이 평가. 셋째는 만경강 교통로의 확보를 들 수 있다. 견훤은 국가를 세운 후에 상국에 사신을 보내 국가의 외교적 승인을 받는 일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데, 대중국 해상교통로인 영산강 교통로가 왕건의 측근 세력들에게 차단당하였기 때문에 광주에 도읍을 정할 수가 없었다. 견훤에게 영산강 교통로의 차단은 숨통막히는 일이었기에 전주에 정도한 이후에도 줄곧 영산강 교통로를 장악하고자 몇차례 공략하지만 끝내 실패하고 만다. 오로지 영산강 교통로의 장악은 대중국과 대외교류를 위한 해상교통 확보가 목적이었다.
견훤은 전주에 도읍을 정한 즉위년에 중국 양자강 유역에 위치한 오월국(吳越國)에 사신을 보내고 검교태보(檢校太保)라는 벼슬을 제수받는다. 이후 줄곧 오월국과 외교관계를 유지한다. 후백제가 중국의 오대십국가운데 유독 오월국과 외교관계를 집중한 것은 백제의 국가계승에 집착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가 중국의 남조문화를 황해남부 사단항로를 통해서 받아들였는데, 전주에서 만경강 교통로를 이용하여 사단항로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고, 오월국의 사신도 황해남부 사단항로와 만경강 교통로를 이용하여 후백제 수도 전주로 들어왔다.
만경강 교통로는 전주 덕진에서 나룻배로 출항을 하면 회포-춘포-목천포-불포-심포-군산도-위도-죽도-소혹산도를 경유하여 중국 절강성 영파 정해현 보타산으로 건너가는 바닷길이었으며, 중국에서도 정해현 보타산에서 같은 사단항로를 따라 전주로 들어오는 바닷길이 열려 있었다. 오월국 수도 항주에서 후백제 수도 전주까지 건너오는데 1주일이면 족했다. 921년 9산선문 가운데 동리산문의 동진대사 경보스님이 중국에서 배를 타고 전주부 임피군으로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경보스님이 당도한 곳은 군산시 임피면 신창진나루터였을 것이다.
후백제는 군산만, 변산반도의 황해남부 사단항로를 장악하고 있었고, 오월국도 중국 양자강 유역과 사단항로의 바닷길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후백제와 오월국은 해상교통이 매우 용이하였다. 이 사단항로의 바닷길을 통해서 불교문화와 해양신앙과 성황신앙, 도자문화 등 다양한 문물교류가 양국 사이에 이뤄졌다. 전주가 도시 면모를 갖추고 품격있는 문화능력을 갖기 시작한 것도 후백제 도읍 시기부터다. 왕도의 전통은 고려시대 내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으며, 이러한 왕도의 기운으로 조선왕조의 본향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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