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이 다시 쌓았던 흔적 확인 / 유사시 대피 위한 피난성 추정
전주 동고산성은 1981년에 처음으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그 해에 전북도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됐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7차례 이뤄졌다. 그간의 발굴조사에서는 대형 건물터를 비롯해 전주성(全州城)이라고 찍힌 기와가 나와 명실상부 후백제 도읍임이 자명해졌고, 후백제 견훤왕에 의해 성을 다시 쌓았던 흔적들이 확인됐다.
그러나 아쉽게도 중요한 고고학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도기념물로에 머문 채 국가의 중요한 사적으로 끈을 잇지 못하고 맥없이 32년의 시간을 흘러 보냈다.
후백제 정통성의 희미한 맥은 전주 동고산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전주 동고산성은 전주도성의 일부이자 전쟁시 피난할 수 있는 배후산성으로 견훤의 정치와 군사가 살아 있던 곳이다.
지난 1990년과 1994년에 조사된 대형 건물터는 정면 22칸, 측면 4칸으로 산성의 중앙부 계단상의 대지에 자리하고 있다. 규모면에서 고구려 안학궁(남궁, 정면 11칸, 측면 4칸)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아주 큰 편이다. 안학궁은 고구려 행정부가 평상시 거주하며 정치를 의결하였던 것과 상대적으로 전주 동고산성의 대형 건물터는 유사시 임시로 사용됐던 정전이었다.
더욱이 전주성이 찍힌 기와류가 이 대형 건물터에서 출토되었는데, 기와에 그려진 문양은 신라말에서 고려초에 제작된 것으로 해당된다. 이 대형 건물터 이외에도 규모가 남달리 큰 건물터가 성벽의 남쪽을 따라 줄지어 지어졌으며, 그 중에 제 7건물터는 정면 16칸, 측면 4칸에 이른다. 이러한 건물터에서는 주로 토기와 같은 그릇보다는 기와가 많이 출토되었으며, 벼슬 관(官)이 찍힌 기와가 다수 확인됐다. 이와 똑같은 기와는 전주시내 경기전과 구도청의 발굴조사에서도 확인되고 있어 견훤의 평상시 행정을 맡은 곳은 전주시내 일원으로 볼 수 있겠다.
동고산성에는 4개 성문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에 북문터와 동문터가 확인됐다. 서문터는 아직 찾지 못했다. 다만 서문터에서는 문기둥 밑에 박았던 화금(신쇠)이 출토돼 그 빌미를 남겨주고 있다. 서문터는 동고산성의 정문으로 추정되는데 대형 건물터의 방향이 서향이고, 북문터는 어긋문, 동문터는 현문(다락문)으로 암문(비밀리 출입하는 문)인 점에서 그러하다.
올해 발굴조사가 이뤄졌던 서문터에서는 성문의 흔적은 찾지 못했으나 견훤에 의해 성벽이 다시 쌓아졌던 흔적이 확인됐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전주는 신문왕 5년(685)에 완산주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견훤왕은 효공왕 4년(900) 완산주에 도읍하고 후백제왕이라 칭하고 대대적인 토목공사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 일환으로 기존의 성벽을 대신하는 성벽축조도 이루어졌던 사실이 밝혀졌다.
즉 성벽의 외부에 네모나게 잘 다듬은 석재를 사용하여 만든 성벽이 바로 새롭게 축성된 것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의 남아 있는 전주동고산성에서 후백제 견훤왕은 도읍을 정비하면서 유사시 대피할 수 있는 피난성을 견고하게 구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네모반듯한 성돌은 그의 지도력과 도도한 미적인 면도 엿보인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