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호족 지지로 가능 청천강까지 영토 확대
918년 6월, 왕건은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의 장군에게 추대돼 왕위에 올랐다. 궁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창업주인 태조(太祖, 918~943)가 되었다. 그는 우선 나라 이름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고려(高麗)라 했다. 신라에 대해서도 궁예와는 달리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궁예가 새로 설치한 관계와 군현의 명칭을 다시 신라식으로 환원하였다. 신라에서 오는 사람들도 후대했다.
후백제에 대해 즉위 초기에는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다 920년(태조 3)에 견훤이 신라의 합천·초계를 공격하고 신라의 구원 요청에 고려가 응하면서 둘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924년에 일어난 조물군(曹物郡, 구미 부근으로 추정) 전투 이후 인질 교환으로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그들은 927년(태조 10)에 왕건이 용주(龍州, 지금의 예천)를 선제공격하면서 다시 대립했다.
그 후 견훤의 신라 침공 후 공산(公山, 지금의 대구 팔공산)에서 후백제군을 만나 싸웠으나 크게 패했다. 그러나 930년(태조 13)에 고창군(古昌郡, 지금의 안동) 전투에서 김선평(金宣平)·권행(權幸)·장길(張吉) 등의 도움으로 견훤군을 크게 무찔렀다. 승기를 잡은 왕건은 견훤과 경순왕(敬順王, 927~935)의 귀순을 받고 후백제 신검(神劍)과 선산 부근의 일리천(一利川)에서 마지막 결전을 벌였다.
여기서 패배한 신검은 황산군(黃山郡, 지금의 충남 논산군 연산면)으로 도망해 진영을 정비했다. 그러나 이를 추격한 고려는 여기서도 크게 승리,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했다. 이 기념으로 왕건은 연산에 개태사(開泰寺)라는 절을 세우기도 했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개인적 자질과 역량 때문이기도 했지만 '호족(豪族)'의 협조 덕택이기도 했다. 그는 호족의 딸과 결혼을 추진해 29명의 부인을 뒀다. 호족의 자제를 기인(其人)으로 삼아 수도에 올라오게 하는 조치도 취했다.
한편으로 그는 일반백성을 위한 정책적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우선 농민의 조세부담을 경감했다. 그리고 흑창(黑倉)이라는 빈민구제기관을 설립해 가난한 백성에게 곡식을 나눠 주기도 했다. 또 억울하게 남의 노비가 된 자들을 양민으로 풀어주는 정책도 실시했다.
이러한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외부세력의 간섭 없이 진행된 것이 특징이며 북방정책을 추진해 영토를 청천강까지 확대했다. 또 경주 진골 중심의 골품제 사회가 붕괴되고 지방 호족 중심의 능력 사회로 변한 점이 특징이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동북아시아사의 전개에서 중국 및 북방민족과 함께 삼각의 축을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 고려(高麗)-송(宋)-요(遼, 또는 金)의 삼각구도를 형성해 견제와 균형을 통해 거란(遼)의 침략과 여진(金)의 압력을 물리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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