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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향

수필가 라환희

▲ 라 환 희

햇볕이 신호등에서 머무는 사이 한 줄 바람이 인다. 은행나무가 일제히 잎을 흔든다. 한순간 진한 향기를 터뜨리며 노란 오후가 아스팔트 위로 흩날린다. 고만고만한 상가건물이 어깨를 겯고 있는 이쪽과는 달리 길 건너는 가을 색이 짙다. 등교하는 아이들을 배웅하고 도서관에 가는 길이다. 단풍에게 곁을 내준 도서관이 보인다. 신호가 바뀌었다. 멈춰선 자동차들의 흐름을 거슬러 시간을 건넌다.

 

아이들의 상급학교 진학에 맞춰 전주로 거처를 옮긴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두 번째 가을을 맞았다. 주거지를 옮기는 일은 생각보다 챙겨야 할 일들이 많다. 번거로운 일들이 며칠 만에 끝나자 마음에 틈이 생겼다. 가구를 이리저리 옮기고 윤을 내며 몸을 닦아세워도 틈 사이로 꽃샘추위가 파고들었다. 그 해 꽃샘추위는 유달리 맵차 사월에도 겨울 외투를 면하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신학기를 시작한 아이들의 설렘과는 달리 바뀐 환경은 붙임성 없는 나를 강마르게 했다.

 

겨울의 되새김질과 봄날의 아지랑이가 아침저녁으로 교차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한적한 마음이 먼 곳의 친구 생각을 불러왔다. ‘유붕 자원방래 불역낙호’라. ‘有朋이 自遠方來하니 不亦樂乎라.’ 흘러 들은 풍월도 내 마음인 양 중얼거려졌다. 차가운 콘크리트 벽과 닫힌 문안에서의 시간. 침침한 날을 걷어내 줄 햇귀가 필요했다. 간절함은 아름다운 날을 함께 한 친구에게 손편지를 쓰게 했다. 격조했던 시간을 접어 시집에 끼워 보낼 요량으로 우체국을 찾은 날이었다.

 

우체국까지 산책 삼아 10여분 걸으면 된다는 경비 아저씨 말대로 가벼운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포장한 시집의 기분 좋은 무게가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무게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 것 같다. 힘을 써 들어올려야 하는 무게가 있는가 하면 마음에 얹히는 무게도 있다. 생활에서 느껴지는 이런저런 무게가 있지만 다른 이를 위해 갈무리한 선물의 무게나 등 뒤에 업힌 아기의 무게는 흐뭇하다. 책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 주변에 귀를 세운 건물들과는 달리 완만한 곡선의 건물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낯선 골목 걷기를 즐기는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약국 뒤편 골목을 지나 만난 그 건물은 도서관이었다. 문득, 가지마다 등 밝힌 백목련을 만난 듯, 고목에 만개한 벚꽃을 만난 듯, 그날의 기쁨과 놀라움은 지금도 미소 짓게 한다. 누구나 살면서 가슴 뛰게 하는 대상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사물이 되기도 하고, 사상이나 종교, 철학이 될 수도 있겠다. 우연히 마주친 도서관은 내 가슴을 뛰게 했다.

 

그 날부터 바람길이라도 발견한 듯 도서관을 찾았다. 궁형을 커피나 녹차를 택하는 것처럼 선택사항쯤으로 여겼을까, 큰 사내 사미천의 손을 잡고 중국 역사 한가운데를 종횡무진 달리고, 하루키의 섬세한 시선을 따라 걷기도 했다. 니체, 장자 그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고전들……. 책향에 묻혀 쉼표처럼 읽은 시집들. 그곳은 소통의 부재로부터 나를 심호흡하게 했다.

 

어느새 도서관이다. 입구 느티나무는 갈변한 잎들을 바람결에 띄우고 있다. 잠시 나무에 기대선다. 낙엽이 허공에 쓰는 시를 읽는다. 생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도서관 마당에서 묵은 이 아름진 나무는 수많은 책을 품고 있을 것 같다. 책장을 넘기듯 가만히 나무를 쓸어본다. 향기가 깊다. 책향 묻어나는 가을이다.

 

△라환희 수필가는 전북수채화협회 회원, 솔바람소리문학회 동인으로 문화관광해설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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