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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아름다운 사랑의 고장 남원] 흐느끼는 여인의 울음 소리…아직도 그곳에 서려 있는 듯

▲ 만복사 전경

인류가 이 세상에 존재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 ‘사랑’이다. 그 사랑을 두고 수많은 예술이 탄생하였다.

 

“인류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뿐입니다 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것도 사랑이요, 감각이 있는 샘물의 영혼도 사랑입니다. 부드러운 사랑만이 최고의 수단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인 볼테르가 지은 〈깡디드〉에 실린 글이다. 그는 덧붙여서 사랑을 다음과 같이 예찬한다. “감정의 극치요, 우리들 영혼의 정수가 바로 사랑입니다.” 수많은 애절한 노래와 문학작품이 만들어지기도 했고, 심지어 왕의 자리까지도 포기할 만큼 커다란 반향을 남기는 것이 사랑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소설에 묘사된 글을 보자.

 

“인간은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만 몸을 떠는 법이다. 우리의 행복이 더 이상 사랑하는 이의 손 안에 있지 않을 때, 우리는 그 곁에서 얼마나 침착하고, 편하고, 대담하게 행동하는가!”

 

그토록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이 역사 속에 길이 남을 문학과 판소리로 사람들에게 널리 회자되고 있는 고을이 남원이다. 남원의 만복사지를 배경으로 지은 매월당 김시습의 한문소설 〈만복사 저포기〉와 판소리의 대명사인 〈춘향전〉이 이곳 남원을 배경으로 탄생했기 때문이다.

▲ 만복사 5층 석탑

남원에서 순창으로 가는 남원시 왕정동에 폐사지 만복사 터가 있다. “만복사(萬福寺) : 기린산(麒麟山) 동쪽에 5층의 전당이 있고 서쪽에 2층의 전이 있는데 그 안에는 길이 53자의 동불(銅佛)이 있으니 이는 고려 문종(文宗) 때 창건한 절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남원도호부 불우 편에 실린 글이다. 사적 제 349호로 지정되어 있는 만복사터는 전해오는 얘기에 의하면 신라 말기에 도선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도선이 당나라 군사를 기묘한 말로 제압한 뒤 이곳에 절을 짓고 불상을 봉안하였으며, 탑을 건립하였다. 또 철우와 철환을 설치하고 호산과 용담에도 탑을 세웠다고 전한다. 그 뒤 만복사는 남원일대의 가장 큰 절로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수백 명의 승려가 아침에 시주를 받으러 나갈 때와 저녁에 돌아올 때의 행렬은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만복사귀승(萬福寺歸僧)은 예로부터 남원 8경 중의 하나로 손꼽혔다.

 

그러나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선조 30) 8월 14일에 왜적이 남원 서문을 통과하여 이 절에 와서 방화를 하였으므로 이 절은 2칸의 불전과 석불만을 남긴 채 모두 불타버렸다. 당시에 불탄 건물로는 대웅전·약사전·쟝륙전·영산전·종각·천불전·나한전·명부전 등이었다고 한다. 그 뒤 1678(숙종 4)에 남원부사 정동설이 중창을 하고자 하였으나 절터의 규모가 워낙 크다보니 원래의 형태로 복원하지는 못하고 승방 1동을 지어 불전에 올리는 향이 끊이지 않게 하였다.

 

현재의 절터에 남아있는 문화재로는 보물 제 30호인 만복사지 오층석탑을 비롯하여, 보물 제 31호인 만복사지석좌, 보물 제 32호인 만복사지 당간지주, 보물 제 43호인 만복사지석불입상 등이 있어 화려 했던 옛 모습을 무언으로 전해주고 있다. 만복사지는 동전서탑(東殿西塔) 양식이며, 탑과 금당의 중심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밖에도 많은 석물들이 남아있으며, 1979년부터 전북대학교에서 발굴을 시작하여 현재 많은 유물이 수습되었다.

 

보물 제 32호로 지정되어 있는 규모가 큰 당간지주는 작품 수법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그 앞에는 석등 대좌가 있다. 그 뒤에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추정되는 중문(中門)터가 있고 중문터 뒤에 5층 전각의 목탑 터가 있다. 그 옆에 서 있는 탑이 만복사지 오층석탑이다. 보물 제 30호인 만복사지 오층석탑은 높이가 5.5m로 현재는 4층 옥개석까지만 남아 있다.

 

이 만복사지에 소설 속이지만 한 남자의 애틋한 사랑이 싹트고 그리고 슬프게 끝난 여운이 남아 있다.

 

조선의 아웃사이더인 매월당 김시습이 경주의 금오산(현재 남산)에서 지은 소설이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다. 이 소설은 15세기 후반 매월당 김시습이 지은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 중에 나오는 이야기다. 원본은 전하지 않는데 일본 동경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된 〈금오신화〉에 실려 있다. 국내의 것으로는 김집이 편찬한 〈이생규장전〉과 더불어 필사된 것이 남아 있다. 이 소설은 산 남자와 죽은 처녀의 사랑이 주를 이루는데 아래의 글은 〈금오신화〉 중 ‘만복사저포기’에 실린 일부분이다.

 

전라도 남원 땅에 양서생이라는 늙은 총각이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양서생은 만복사의 불전에 찾아가서 부처님께 저포놀이를 청했다. 그가 부처님에게 지면 매일매일 부처님에게 불공을 드리고 부처님이 지게 되면 아름다운 여인을 중매해달라는 것이었다. 부처님이 흔쾌히 승낙하고서 양서생이 먼저 저포를 두 번 던졌다.

 

결국 양서생이 저포놀이에서 이겼다. 서생이 불상 뒤에 숨어서 그의 배필이 될 여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데 그때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나서 부처님에게 자신의 외로움을 하소연하며 좋은 짝을 만나게 해 달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것을 지켜본 양서생이 그 여인 앞으로 나가서 자신의 사연을 말하자 그 여인도 그의 말에 이끌려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왜구가 쳐 들어왔을 때 왜구의 손에 죽은 처녀의 환신(幻神)이었다. 다음날 그 여인은 양서생에게 그가 사는 마을로 가기를 원했고 그곳에 따라간 서생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사흘이 지나 양서생이 돌아가는 날 그 여인은 은주발 한 개를 선사하였다. 그 은주발은 그 여인의 무덤에 함께 묻힌 매장품이었다. 그 다음 날은 그 여인의 대상(大祥)날이었다. 그들은 보련사에서 다시 만났고 제가 끝난 뒤 그 여인은 인연이 다해 저승으로 떠나가야 했다.

 

이윽고 영혼은 떠났다. 여인이 전송을 받을 때는 울음소리가 끊어지지 않더니 문밖에 이르러서는 은은한 소리만 들려왔다.

 

저승길이 촉박하여 애달프게 떠납니다.

 

비나이다, 님이시여. 저버리진 마옵소서.

 

슬프다 우리 부모 내 배필 못 지었네.

 

아득한 저승에서 원한만이 맺히리.

 

남은 소리가 점점 사라지면서 목메어 우는 소리와 분별할 수가 없게 되었다. 여인의 부모는 그제야 모든 것이 사실임을 알고 다시는 의심하지 않았으며, 양서생도 또한 그 여인이 귀신임을 알고는 더욱 슬픔이 복받쳐 여인의 부모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슬피 울었다. 여인의 부모가 양서생에게 말했다.

 

“은주발은 그대의 뜻에 맡기네. 그리고 내 딸에게는 토지 몇 백 이랑과 노비 몇 사람이 있으니 자네는 그것을 신표로 지니고 부디 내 딸을 잊지 말아주게.”

▲ 광한루 오작교

이튿날 양서생은 고기와 술을 가지고 개령동을 찾아가니 과연 시체를 임시로 안치한 관이 있었다. 양서생은 제물을 차려놓고 슬프게 울면서 그 앞에서 지전(종이로 만든 돈 저승에서 쓰인다고 함)을 불사른 뒤 정식으로 장례를 지냈다. 그리고 제문(祭文)을 지어 장사를 지냈는데 그 제문은 다음과 같다.

 

오오, 님이시여! 당신은 어릴 때 천품이 온순했고 커서는 얼굴이 깨끗했소. 모습은 서시(월나라의 미인으로 오왕의 총희가 되었다)와 같았고 시부(詩賦)는 숙진(송나라 때의 여류시인)을 능가하였소. 스스로 규문 밖에 나가지 않았고 언제나 가정의 교훈을 고이 받아왔었소. 난리를 당하고도 오히려 정조를 지켰으나 끝내 왜구의 손에 목숨을 잃었소. 황량한 다북쑥 속에 몸을 의지한 채 홀로 살면서 피는 꽃 밝은 달에 마음만 슬퍼했소. 봄날엔 애끓는 두견새의 울음을 슬퍼했고 서리 내리는 가을엔 비단부채의 무용함을 탄식했었소.

 

지난 하룻밤 당신과 만나 정을 나누었더니 유명(幽明)은 비록 서로 달랐으나 물 만난 고기처럼 서로 즐겁지 않았소. 장차 백년을 해로하려 했는데, 어찌 하루 저녁에 이별이 있을 줄 알았겠소. 님이시여. 당신은 응당 달나라에서 나는 새를 타는 선녀가 되고 무산에 비를 내리는 낭자가 되리니 땅은 어두침침해서 돌아볼 수가 없을 것이오, 하늘은 아득해서 바라보기가 어렵겠소.

 

나는 집에 들어가도 그저 멍멍히 지내고, 밖에 나가도 아득하여 갈데없는 몸이 되었소. 영혼을 모신 휘장을 대하면 얼굴을 가리어 울게 되고, 좋은 술을 따를 때엔 마음이 더욱 슬퍼지오. 요조한 그 모습은 눈에 삼삼하고 명랑한 그 음성은 들리는 듯하오.

 

아아! 슬프기 한이 없습니다. 총명한 당신의 슬픔, 정밀한 당신의 기상, 몸은 비록 흩어졌을지라도 영혼만은 남아 있을 것이니 응당 내려와서 뜰에 오르시고 어쩌면 나타나서 곁에 있겠는지요. 비록 저승과 이승은 다를지라도 당신은 이 글월에 느낌이 있을 것이외다. 상 향

 

장례를 지낸 양서생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땅과 집을 다 팔아 절로 가서 사흘 저녁 제를 올렸다. 그러자 그 여인이 나타나 양서생을 부르며 말했다.

 

“저는 낭군의 은덕에 힘입어 이미 다른 나라에서 남자의 몸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비록 저승과 이승이 막혀 있지만 낭군의 은덕에 깊이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낭군께서도 이제 부디 착한 업을 닦으시어 저와 함께 속세의 우에서 벗어나도록 하십시오.”

 

양서생은 그 뒤 다시는 장가를 가지 않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약초를 캐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어디에서 세상을 하직했는지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만복사 터에서 천천히 발길을 옮겨 호남의 3대 누각 중의 하나인 광한루원에 이른다. 〈남원부지(南原府誌)〉에는 “동쪽에는 지리산이 병풍을 두른 듯하고 서쪽에는 중진이 띠를 두룬 것처럼 흐르고 있으며, 인물이 번성하여 남방에 하나의 큰 도회가 되었다” 하였다. 또한 황수신(黃守身)은 ‘광한루기(廣寒樓記)’에서 “남원은 옛 이름이 대방(帶方)인데, 산천이 수려하고 옥야가 백리에 뻗쳐 실로 천연의 부자고을”이라 하였다.

▲ 광한루

광한루는 장수가 고향인 명재상 황희가 세운 아름다운 누각이다. 황희의 아버지인 황감평이 일재(逸齋)라는 조그만 서실을 지었는데, 양녕대군 폐위를 반대했던 황희가 이곳으로 유배를 와서 누각을 짓고 광통루(廣痛樓)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 뒤 남원부사 민여공이 중수하였고, 다음 해 전라감사인 정인지가 이 광한루에 올라 펼쳐진 경관을 감상하다가 “달나라에 있는 궁전 광한청허부가 바로 이곳이 아닌가.” 감탄하고서 광한루라고 이름을 바꿨다.

 

보물 제 281호로 지정되어 있는 광한루에는 강희맹, 김시습, 김종직 .정철 등의 시문들이 걸려 있으며, ‘호남 제일루’ ‘광한루 등의 현액들이 걸려 있다.

 

이곳이 바로 판소리 〈춘향전〉이 시작된 곳이다. 기생 월매의 딸 춘향이 떠나간 낭군을 기다리다 변사또에게 모진 고난을 당하는 이야기가 시작된 곳이 광한루다. 이곳 광한루에서 〈춘향전〉의 주인공 이도령과 춘향이의 험난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이 시작되었다.

 

이도령이 어느 봄날 방자를 불러 물었다. “너희 고을 좋은 승지 강산 어디가 제일 좋으냐.” 방자가 대답하기를 “북문 밖에 나가오면 교룡산성 좋사옵고 서문 묘 나가면 관왕묘도 경치 좋고 남문 밖 나가면 광한루 좋사온데, 오작교 영주각은 삼남 제일의 승지로소이다.”

 

이도령과 성춘향이 운명적으로 만나 사랑을 했다. 하지만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고, 이 도령이 떠난 고을에 변사또가 오면서 이들에게 시련이 닥친다.

 

결국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어사 출도’를 외치며 사랑이 완성되는 〈춘향전〉이 판소리로 구전되어 온 것이 한편의 드라마 같은 사랑의 이야기다.

 

〈춘향전〉이 나라 안에 널리 알려진 것에 비해 〈만복사저포기〉를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늙은 총각 양생이 귀신처녀를 그리워한 〈만복사저포기〉가 남아 있고 춘향이가 이도령을 그리워한 〈춘향전〉이 있는 고을이 남원이다. 이런 독특한 이야기가 남아 있는 남원을 〈사랑의 고장〉이라 명명한 뒤, 아름다운 사랑을 승화한 〈사랑 축제〉를 개최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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