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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고창 문수사~장성 축령산 숲길] 단풍 아름다운 산길 지나 호젓한 편백나무 숲으로

▲ 문수사 가는 길.

인생이란 처음도 끝도 찾을 길 없는 무한한 천지 사이에 속절없이 놓여 진 것이고, 한번 죽으면 영영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토요테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의 뒤를 이어 일본을 제패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은 다음과 같은 유훈을 남겼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 서둘지 말라.”

 

그의 말과 같이 세상의 일이란 것이 그렇게 서둔다고 되는 것이 별로 없다. 그런데도 나이가 들어 갈수록 무엇인가에 쫓기는 듯 서두르는 일들이 많아진다. 그래서 아직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기엔 시간이 한창 남은 단풍의 명소인 문수산 자락에 자리 잡은 문수사로 향하는 마음 역시 편치가 않다.

 

고창 지나 고수면 소재지에서 문수사로 향한다. 푸른 대숲만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을을 지나는 길은 어느 사이에 잘 뚫린 2차선 포장도로가 되어 있다. 세월이란 것이 그렇게 만드는 것인지, 사람이 그렇게 만드는 것인지 모르지만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데도, 그 변화의 흐름을 타지 않고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그래도 몇 곳이 있다. 그 중에 한곳이 김제 귀신사 대적광전의 아무렇게나 쌓여진 돌 계단과 지금 내가 가는 문수사 들목의 호젓하고 쓸쓸한 길이다.

 

문수산 아래 첫 마을 칠성리는 마을의 돌담이 그렇게 정다울 수가 없는 마을이었는데, 마을 앞 주차장이 넓어지고 길도 넓어져 그때의 정취를 찾을 길이 별로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다른 곳보다 변화의 속도가 느린 것만은 분명하다.

▲ 문수사 단풍길.

‘문수산 500m’ 라는 안내판을 뒤로 하고 한참을 올라가 고갯마루를 넘어서자 세운지 오래되지 않은 문수사의 일주문이 보이고 드러누운 듯한 단풍나무 둘레에 잘 정돈 된 주차장이다. 멀리 문수산 정상이 보이고, 그곳에서부터 내장산의 단풍보다 더욱 울창하게 우거진 단풍나무 숲길이다.

 

약간은 쌀쌀하고 적적한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인지, 오랜 가뭄 탓인지 아직 물들지 않은 단풍잎들이 마른 나뭇잎으로 떨어져 길을 가득 메우고, 나는 그 마른 나뭇잎 위에 누워서 단풍나무, 소나무, 서어나무, 굴참나무가 사이좋게 하늘을 향해 뻗은 그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을 바라다본다. 푸르고 푸른 한국의 가을 하늘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대지〉의 작가 펄벅이 “한국의 가을 하늘을 세모 네모로 접어 편지에 넣어 보내고 싶다.”라는 말을 남겼을까.

 

“나뭇잎이 떨어져서 가을바람에 불려가네. 붉게 물든 단풍잎이 한잎 두잎 떨어지네.” 김추자의 노랫가락을 읊조리며 갈지(之)자로 걸어가는데, 차 한대가 오더니 창문을 열며, “신정일씨 아니세요?” 하고 손을 내 미는 스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인사 치례로 “어디 가세요” 했더니,“절에 가지요,‘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하고 물어 여차여차 했다는 말을 하면서도, “스님이 절에 가는 데 어디를 가느냐고 묻다니, 글쎄 내가 또 우문을 던졌구나.”하고 먼저 보내드린다. “그제야 그 스님이 십몇 년 전에 이절의 주지스님이었구나”하고 오래전 기억이 떠오른다.

 

느릿하게 걸어도 작게 노래를 부르며 걸어도 누구하나 탓하지 않는 단풍나무 숲길을 걸어갈 때 문득 우정인지 사랑인지 모를 은은함으로 사귀었던 옛 사람들 생각이 났다.

 

단풍이 가장 아름다웠던 가을에 유람을 떠난 박제가에게 이덕무(李德懋·정조 때의 개혁 사상가)는 시 한편을 보냈다.

 

단풍이 한창일 제

 

향산에는 들렀다가

 

어서 빨리 돌아와서

 

그리운 회포 풀어보세

 

그 편지를 받은 박제가는 묘향산의 퇴락한 상원암을 보고 다음과 같은 가슴 아린 글을 남겼다.

 

“나는 일찍이 옛일이란 어떤 것이건 매양 찾을 데 없음을 한하여 오던 터이다. 이제 가을 산 조각돌이 거친 풀, 찬 이슬 속에서 옛일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옛것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에 이를 대하여 서글프고 심란해서 저축저축 머뭇머뭇 오래 동안 가지를 못하는가! 빈 산, 떨어지는 해, 끊어진 다리, 흐르는 물, 이는 예로부터 회고의 정서를 하염없이 자아내게 하는 곳이로구나!”

 

떨어져 내리는 나뭇잎 하나하나에도 가슴속이 텅 빈 것처럼 저며 오는 것을 보니 가을은 가을이다. 가을이 노랗고 빨갛고 푸르스름한 단풍으로 물든 길이 끝나는 곳에 문수사가 있다.

 

문수사(文殊寺)는 문수산 북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절로 사지(寺誌)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 의자왕 3년(643)에 신라의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자장율사는 당나라의 청량산에 들어가 삼십칠 일 기도를 거듭한 끝에 지혜를 표상하는 문수보살의 가르침을 깨닫고 귀국하였다. 우연하게 이곳을 지나가던 자장율사는 이곳의 산수(山水)가 중국의 청량산과 너무나 흡사한 것을 이상하게 여겨 산기슭의 암굴을 찾아 이레기도를 올렸다. 그 때 문수보살이 땅 속에서 솟아나오는 꿈을 꾸고 그 자리를 파보니 화강암으로 된 커다란 문수보살이 나왔다. 그래서 이 산을 청량산 또는 문수산(文殊山)이라 이름 짓고 절을 세운 후 문수사라 이름했다.

 

그 이후 취령산이라 부르던 것을 문수산, 혹은 청량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문수사는 그래서 문수보살상에 얽힌 전설적 의미와 문수도장의 창건 기록에 힘입어 대웅전보다 문수전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자장율사가 당나라로 갔던 때가 신라 선덕여왕 5년(636)이며 그로부터 8년 후에 귀국하였다. 백제가 멸망하기 20년 전이었고, 의자왕 3년에 선덕여왕 12년 이었다. 그 때는 두 나라가 정치적으로 심하게 대립되었던 시대였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과연 자장율사가 고창의 문수산을 통과했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고, 신라의 고승이 백제 땅에 와서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믿겨지지는 않으나 그 무렵 이 나라를 스치고 지나간 불교의 파급효과를 생각한다면 그럴 수도 있지 않았겠느냐가 개인적인 내 생각이다.

 

그 뒤 문수사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지만 1653년(효종 4)에 성오대사(性悟大師)와 상유비구(尙裕比丘)에 의하여 재건되었고, 신화(信和). 쾌영(快英)이 중창하였고, 1835년(현종 1)에 주지인 우홍(宇弘)이 중창하였다고 한다.

 

문수사 대웅전은 조선 후기에 지은 건물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51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내의 중심부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는 이 건물은 1823년 1차 중수 이후 1876년에는 고창현감 김성로(金星老)의 시주로 묵암 스님이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에 측면 3칸이며, 공포는 다포식(多包式)이고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 문수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25호로 지정되어 있는 문수전에는 이 절의 창건설화와 관련이 있는 문수석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이 석불은 상체가 큰 불상으로 좌대와 하반신 일부가 땅 속에 묻혀 있는 것이 특색으로 높이는 약 2.5m쯤 된다.

 

가끔씩 등산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문수산(630m)은 고창의 진산 방장산에서 시작한 산줄기가 여러 봉우리를 지나 양고살재, 솔재, 검곡재를 이루고 전 남북을 가르며 뻗어 내린 곳에 우뚝 솟은 산이다.

 

단풍나무가 길길이 이어지는 숲. 가을이면 핏빛 붉은 노을로 타오를 것이고, 나는 다시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이 문수산을 찾아올 것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이렇게 적막이 나를 반겨 맞아줄까 생각하며, 아직 물들지 않은 단풍잎이 봄날에 지는 매화꽃잎처럼 흩날리는 문수사를 뒤로하고 장성군 서삼면으로 행했다. 수렁이 많다는 수랑동을 지나자 해넘골이고 야트막한 잔등 같은 초치산(草峙山) 자락에 있는 초치재를 넘어서자 변동해씨 집이다. 사람 좋다고 소문이 나서 사람이 들끓는 변동해씨 집에서 하룻밤 묵었던 적이 있었다. 그 밤 주인이 손님보다 더 취해서 내 오던 그 술맛이 지금도 가슴속에 아련히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술맛이 좋기는 좋았던가 보다. 바로 아랫마을이 금곡 영화마을이다. 장성읍에서 태어나 남면 월곡리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한국 영화의 거장 임권택 감독은 이곳 금곡마을을 무대로 ‘태백산맥’ ‘서편제’ ‘내 마음의 풍경’ 등의 영화를 촬영했다. 그래서 영화의 무대를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 금곡 마을 뒷산을 뒤덮고 있는 나무숲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삼나무 편백나무 측백나무들이 숲을 이룬 곳, 그곳이 바로 축령산 휴양림이다. 전북 순창 출신의 임종국(1915~1987)씨는 1956년 무렵부터 이곳 축령산 자락에 나무를 심기 시작해 세상을 뜨기 전까지 숲을 가꿨다. 이 숲은 2000년에 ‘보전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 되었고 그런 연유로 얼마 전에 산림청에서 사들여 관리를 하고 있다.

 

그래서 이 고개를 넘지 않고 조림 왕 임종국씨가 심은 편백나무 숲길을 따라서 넘는 길을 택한다.

▲ 장성 축령산 편백나무 숲길.

이렇게 걷기에 가장 좋은 길인데도 걷지 않고 차타고 가기를 택한 사람들이 타고 오는 자동차가 지나는 길을 조금 지나자 편백나무 숲이 나타난다. 삼나무, 층층나무, 편백나무, 참나무와 소나무가 간간이 섞여 있는 내리막길을 가다가 쉬고 가다가 쉬고 하며 내려간다. 이런 호젓한 나무숲 길이 얼마나 사람들의 가슴속을 아릿하게 만드는지 가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나무숲이 우거진 길이 끝나며 추암리에 닿는다. 바로 길 건너에 나의 오랜 도반(道伴)인 조용헌 선생이 집을 마련한 것은 오래 전 일이다. 그러나 며칠 째 출타중인지 대나무 대문이 잠겨 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신발만 가지런하고 방안을 들여다보자 전기 콘셋트들이 모두 꺼져있다. 첨성대 닮은 굴뚝에는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고 오로지 집 앞 감나무 가지만 알맞게 부는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을 뿐이다.

 

추암리는 추서와 충암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추서에 있는 추서사터에는 고려 때 글씨로 유명한 운묵 스님이 만든 석탑(石塔)과 큰 석종(石鐘)이 있었다는데, 그 종을 일제 때 일본인들이 가져갔다는 취서사터가 남아 있다. 이곳에는 유독 암자가 많았었다. 통적골 북쪽에는 가섭암이 있었고, 망월 서쪽에는 망월암(望月庵)이라는 암자가 있었다. 망월 북쪽에 있는 백련(白蓮)마을에 백련암의 터에는 백련암의 축대만 남아 있고, 백련 북쪽에 있는 골짜기에는 관불암(觀佛菴)의 법당터가 남아 있다. 한편 백련 북쪽에서 전북 고창군 고수면 은사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너무 가팔라서 오르는 것이 되다는 뜻을 지닌 된재이다

 

이곳 추서리로 부르는 추서마을은 한국전쟁 당시 마을을 없앴던 곳인데 현재 드문 드문 있는 집들은 그 뒤에 새로 들어선 집들이다.

 

한 배미가 열두 마지기나 되어 열두마짓걸, 송계 서쪽에 있는 송강골, 바위 틈에서 물이 나오는데 매우 차고 맛이 좋아 참 샘 등이 이곳 추서리에 있는 지명들이다. 고창 은사리에서 장성 추서리로 넘어 오는 길 그 길이 끝나는 곳에서 바라본 산에 흰 구름이 두둥실 떠있다.

 

어떤 시인은 말했지. “일 년 중 다른 계절에 나는 어딘가에 숨어 있으리라. 내가 구름이 되는 가을까지”.

 

얼마나 아름다우면 다른 계절에는 숨어 있다가 가을에 나타나겠다고 말했을까? 하지만 그보다 더 구름을 사랑했던 사람은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였다.

 

“너는 누구를 사랑하느냐? 수수께끼 같은 사람아, 말하여 보라. 너의 아버지냐, 또는 형제 자매이냐? “내게는 부모 형제자매도 있지 않다.” 그러면 너의 친구냐? “지금 당신은 뜻조차 알 수 없는 어휘를 쓰고 있다.”그러면 너의 조국(祖國)이냐? “그것이 어느 위도(緯度)에 자리하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면 아름다운 여인이냐? “아아, 불사의 여신이라면, 나는 그를 사랑할 수도 있으련만,” 그러면 돈이냐? “나는 그것을 가장 싫어한다. 마치 당신이 신을 미워하고 있는 것처럼,” 그러면 너는 무엇을 사랑하느냐? “세상에서도 보기 드문 에뜨랑제여!

 

“나는 저 구름을 사랑한다…저 하염없이 흘러가는 구름을 사랑한다…보라, 다시 보라…저 불가사의한 몽롱한 구름을.”

 

‘보들레르’가 〈이방인〉이라는 시에서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내가 누구를 아는 것도,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것도, 알고 보면 모두가 다 개별적인 것이리라.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각기 다른 우주라서 저마다 외롭고 외로울 뿐이다. 어느 순간 푸른 하늘에 나타나 흐르다가 소멸되는 하얀 구름 같은 우리들의 생(生), 그 길목에서 하루를 보낸 문수사에서 추서사에 이르던 오늘의 여정이 먼 훗날 어떤 의미로 남을 것인지.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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