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여유가 없다.” 많은 사람들에게 많이 듣는 말이다. 그런데, 요즘처럼 그 말이 실감이 나는 때도 없는 듯하다. 세상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실속은 없고, 여기저기서 불평만 해일처럼 넘쳐나고 있다.
“증오는 넘치고 마음의 여유는 없다.” 예이츠가 자기 조국인 에이레에 대해서 한 말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개인 이기주의가 팽배한 사회가 되다가 보니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기 때문이 아닐까?
“방안에 빈 곳이 없다면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싸움을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오장육부가 서로 부딪쳐 조화를 잃게 된다. 큰 숲이나 높은 산이 사람을 반갑게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세속에서 쪼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장자〉 잡편 제 26 외물(外物)에 실린 글이다.
“자연이란 흙, 나무, 연못, 산 등에 국한되지 않는다. 속도를 줄여 넉넉한 시간 여유를 가지고 자연을 음미할 때, 우리는 평화, 생명의 순환, 계획, 그리고 탐험에 대한 위대한 교훈을 얻게 된다. 자연은 하나의 실존으로서 고유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대양이나 황야는 우리의 오랜 친구였던 것처럼 감동으로 다가온다. 자연의 품안에 자신을 맡긴 채 귀를 기울이면 우리가 자연의 한부분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이렇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한가하게 살아도 길지 않은 인생인데, 허겁지겁 쫓기듯 사는 게 일상화 된지 이미 오래인 것은 무슨 연유일까?
“삶을 더욱 괴롭게 하는 것은 시간이다. 눈 깜짝할 새 지나가 버리는 시간에 쫓겨 좀처럼 숨 돌릴 여유조차 없다. 시간은 교도관처럼 우리 등 뒤에서 회초리를 들고 감시한다. 그리고 시간은 권태라는 이름의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 준다.” 쇼펜하우어의 〈인생을 생각한다〉에 실린 글이다.
아, 하고 숨 한 번 쉬면 훌쩍 지나가는 시간의 틈바구니에서 그래도 한가하게 산다고 자처하는 나도 가끔씩 바쁘다고 푸념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부질없이, 부질없이 영국의 시인 W.H 데이비스의 ‘여유’라는 시를 읊조려 본다.
“무슨 인생이 그럴까. 근심에 찌들어
가던 길 멈춰 서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양이나 젖소들처럼 나무 아래 서서
쉬엄쉬엄 바라볼 틈 없다면
숲속 지날 때 다람쥐들이 풀숲에
도토리 숨기는 걸 볼 시간 없다면
한낮에도 밤하늘처럼 별이 총총한
시냇물을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조금 더 한가하게, 여유롭게 해찰도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너무 빠른 속도에 인간의 정신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나라 안의 명산들을 두루 다니셨는데, 서쪽으로는 평양과 묘향산, 남쪽으로는 속리산과 가야산, 화양동과 단양 등 여러 명승을 유람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다. ‘나는 과거를 일찍 그만두어 마음이 한가하고 거리낌이 없었다. 그래서 산수 유람을 많이 했었다.’” 박종채가 지은 〈나의 아버지 박지원〉에 실린 글이다. 나 역시 박지원 선생과 같이 시험이나 취직을 할 것이 없었으므로 자유스럽게 세상을 떠돌아다닐 수 있었고, 부담 없이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글을 쓰면서 살고 있을 것이다.
●속도와 느림, 그리고 한가함
생각해보면 현대인들은 모두다 축지법을 쓰는 것이나 다름없다. 세계가 한 지붕이라서 그런지 마치 바람을 쏘이고 돌아오듯 오늘 점심은 미국, 저녁은 영국, 다음날 아침은 터키, 내일 점심은 러시아, 이러한 생활이 일상이 된 사람들에게 버스에 실려 멀다고 돌아다닌 거리가 얼마나 가까운 거리겠는가?
현대인들을 현대인들이게 지탱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아무래도 속도가 아닐까? 그렇다면 속도란 과연 무엇일까?
〈국어사전〉에 “빠른 정도, 단위 시간에 움직이는 거리, 빠르기”라고 실려 있는 속도를 두고 “기억의 속도는 빛의 속도보다 빠르다고 한다.”라는 말이 있고, “속도가 빠르면 영혼이 못 따라 간다.” 라는 말도 있다.
아랍의 속담에도 “영혼은 낙타의 속도로 움직인다.” 라는 말이 있는데, 속도 전쟁의 시대에서 더욱 더 필요한 것은 빠르기 빠르게, 즉 속도가 아니라 느림이고 한가함이다. 피에르 쌍소는 느림을 두고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은 삶의 방식”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혼자만의 자존을 확인하는 ‘한가로이 거닐기’ 타자와 공존하는 ‘듣기’, 일상을 새롭게 발견하도록 이끄는 순수한 ‘권태’ 의식의 내면을 일깨우는 ‘꿈꾸기’, 무한한 마음의 지평을 여는 ‘기다리기’,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마음의 목소리를 옮겨보는 ‘글쓰기’ 등을 통해 느림을 실천할 수 있다고 강변한다.
“속도는 기술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형태이다. 인간이 기계의 속도 능력을 위임하고 나자 모든 게 변한다. 이때부터, 그의 고유한 육체는 관심밖에 있게 되고 그는 비 신체적, 비물질적 속도, 순수한 속도, 속도 그 자체 속도 엑스터시에 몰입하게 되었다.”
밀란 쿤데라의 말이다. 그 말이 어찌 그리도 맞는 말인지.
“몸이 한가한 것이 마음이 한가한 것만 못하고, 약을 먹어 몸을 보하는 것이 음식으로 몸을 보하는 것만 못하다.” 〈산거사요(山居四要)〉에 실린 글이고, 연산군 때의 풍류객인 용재 이행(李荇)도 느리게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사람이다.
“편안하고 한가함이 약이 되고, 잎이 피고 지는 것에 봄과 가을을 안다. 멀리 알리거니와 산중의 객(客)인 나는 길이 그러한 가운데에서 살아왔다오.”
한가하게 여유롭게 사는 것이 그리도 어려운 일인가?
“삶이 시작되면서부터 내게 부여된 인생의 괴로움 때문에 하루를 허둥지둥 보내고 지금은 체념한 자세로 멍하게 보내는 새벽 시간이다. 삶이여! 더도 덜도 아닌 내 인생이여!”
그래,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일까? 답은 두 개가 없는 하나 밖에 없다. 조금 더 한가하게 사는 것,
●한적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재산’
중국의 시인 백옥섬(白玉蟾)은 자신의 서재를 ‘나재당(懶齋堂)’이라 명한 뒤 다음과 같은 기문을 지었다.
“내키지 않으면 노자도 읽지 않는다. 도(道)는 책(冊) 안에 없기 때문이다. 내키지 않으면 장구(章句)도 보지 않는다. 장구는 도보다 깊지 못하다. 도의 체묘(諦妙)는 허(虛)에 있고 징(澄)에 있고 냉(冷)에 있다. 그러나 나는 진일토록 바보스럽다. 또 어디서 허를 구할 것이냐. 내키지 않으면 시서(詩書)도 펴지 않는다. 놓으면 시신(詩神)이 떠나 버리기 때문이다.
내키지 않으면 거문고도 잡지 않는다. 노래가 줄 위에서 죽기 때문이다. 내키지 않으면 바둑도 두지 않는다. 그림의 흥취는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내키지 않으면 풍월(風月)도 대하지 않는다. 선경(仙境)은 스스로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내키지 않으면 속세와도 인연을 끊는다. 의관(衣冠)과 제품(諸品)이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내키지 않으면 봄가을도 모른다. 천행(天行)이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소나무는 죽으리, 바위는 썩으리, 그러나 나는 나, 영원한 나. 이 집을 나재당이라고 부르기에 어찌 타당치 않겠는가?”
한적한 생활을 더 할 수 없이 예찬한 글이다. 그렇다면 한적이란 도대체 무엇을 말함일까?
‘한(閒)’자의 자의(字義)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달(月)이 대문(大門) 안에 들이비치는 것이 바로 한(閒)자라고 한다. 옛날에는 모두 문(門) 안에 일(日)을 넣은 간(間)자와 같이 보아 왔지만, 그 음(音)만은 달리 쓰이는 경우가 있다.
하여간 한가로움이란 저마다 얻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살고자 하는 순간 마음도 몸도 가벼워지는 것, 그래서 두목지(杜牧之)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을 것이다.
한인이 아니고야 한가로움을 얻을 수 없으니
이 몸이 한객(閑客)되어 이 속에 놀고파라
한적(閑寂)하다는 것, 그것이 글로 쓰기는 쉽지만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누리기가 힘든 것 중의 한가지이다.
소크라테스는 한적(閑寂)을 ‘세상에서 가장 좋은 재산’이라고 예찬하였다 ‘고 디오게네스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비밀을 알고 있고 그래서 매일 한적을 꿈꾸면서도 바쁘다고 핑계를 대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으니.
●마음이 한가로우면 몸도 또한 한가롭다
“사람 만나 세상일 말하지 않으니, 그가 바로 세상에서 한가한 사람이다.(逢人不說人間事, 便是人間無事人) 당나라 두순학(杜荀鶴)의 〈증질상인(贈質上人)〉에 실려 있는 글과 같이 한가하게 지내기 위해 답사를 가지 않는 날이면 혼자서 약속한다. 내 집을 누가 범접하지 못할 깊은 산속에 있다고 여, 잠시 사람과의 만남도 멀리하자.
그리고 우선해서 직업병(사진과 글쓰기) 때문에 아픈 팔을 위해서 조금은 한가하게, 조금은 게으르게 일을 할 것이며, 아직은 괜찮지만 언제 나빠질지 모르니까 눈을 혹사하지 않도록 조금은 책을 가까이 하지 않아야겠다고 굳게 다짐을 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습관이 그 약속을 지키게 하는가. 자다가도 일어나 글을 쓰고 책을 읽다가 보니 오히려 평상시 보다 더 많이 혹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출퇴근이 따로 없는 프리랜서 작가의 비애일 것이다.
조금은 더 한가하게 살아야 하는데, 그런 나의 마음을 거울에 비추듯 쓴 글이 한 편 남아 있다.
“사방으로 통하는 큰 길 가운데에도 한가로움은 있다. 마음이 진실로 한가롭기만 하다면 굳이 강호(江湖)이어야 하며, 산림이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내가 사는 집은 저잣거리 바로 옆이다. 해가 뜨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소란(騷)하고 해가 지면 마을의 개들이 떼를 지어 짖어댄다. 그러나 나는 다만 편안하게 책을 읽는다.
때때로 문밖을 나가보면, 달리는 자는 땀을 흘리고, 말을 탄자는 달려가며, 수레와 말이 섞이어 복잡하게 오간다. 나는 홀로 천천히 걸어서 일찍이 소란함으로 인해서 나의 한가로움을 잃지 않았으니 그것은 나의 마음이 한가롭기 때문이다.
저들은 마음이 소요(騷擾)하지 않은 자가 적으니 그들의 마음에는 제각기 영위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장사하는 자는 저울눈을 가지고 다투고, 벼슬을 하는 자는 영욕(榮辱)을 다투며, 농사짓는 자는 밭 갈고 김매는 일을 가지고 다툰다.
돈 벌이에 급급(汲汲)하여 날마다 생각하는 것이 있으니 이 같은 사람들은 비록 영릉(零陵) 남쪽 소상강 사이에 데려다 놓는다 해도 반드시 두 손을 깍지 낀 채 앉아서 졸면서도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꿈꾸고 있을 것이니 어찌 한가로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마음이 한가로우면 몸은 저절로 한가롭다.” 고 말하는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덕무의 〈원한(原閒)〉이라는 글이다.
이덕무가 표현한 것과 같이 무엇을 위해 다투는 시절을 지났는데, 아직도 제대로 된 ‘한가(閑暇)’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내 마음 속에 버리지 못했거나 극복하지 못한 욕심들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신선은 별다른 사람이 아니다. 마음속에 한 점의 누도 없어 도(道)가 이미 원숙한 지경에 이르고 금단술(金丹術)이 거의 이루어졌을 때를 말한 것이다. 매미처럼 껍질을 벗고 날아서 하늘에 오른다는 것은 억지 말이다. 만약 내 마음에 잠깐이라도 누가 없으면 이는 잠깐 동안 신선이 된 것이고, 반나절동안 누가 없으면 반나절동안 신선이 되는 것이다. 나는 비록 오랫동안 신선이 되지는 못하지만 하루에 두세 번쯤은 신선이 된다. 세상을 발밑에 두고도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신선이 되려 하는 사람은 일생동안 한 번도 될 수 없을 것이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제 63권 선귤당농소에 실린 글이다.
이덕무 선생의 표현대로라면 신선이 되는 것이 별 것이 아니다. 한가하게 사는 것이 매양 쉬운 일만은 아니지만. 한가하고 너무 한가해서 어슬렁거리며 살다가 가는 그 삶을 꿈꾸어 본다. (끝)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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