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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다리길

▲ 이연희

아랫목이 없는 아파트에서 구들목 대신 온수매트에 몸을 부린다. 뒈작뒈작 앞뒤로 몸을 뒤집자니 푸른 바다에서 막 건져낸 고등어라도 된 양 몸이 땀으로 비릿해진다. 몸을 굴리듯 생각도 요리조리 굴려서 쓸 만한 심상心象 몇 개 건져 올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잡생각뿐이다.

 

하릴없이 누워있는데 건넌방에서 부는 섹소폰 소리가 울려온다. 평생지기 그이가 문 꽁꽁 닫아걸고 높낮은 음표들과 노는 소리다. 그 초보적인 음률은 내 기분에 따라 감미롭거나 우울하거나 서글프게 들린다. 오늘은 흐느적거리는 음계 마디마디가 검은 장막을 두른 듯 칙칙하다.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난 차암 ~으~으~음~~’ 그 대목이 성급히 삼킨 생선가시처럼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다. 몸이 흐느적거리면 맘마저 무너지는 것인지 지난 시간, 지난 일들, 어긋난 관계들이 ‘난 참 바보처러엄~~~’으로 다가온다. 하필, 나뭇잎 몇 장 거느리고 서 있던 그 길이 떠올랐다.

 

드라마 ‘겨울연가’로 인해 연인의 섬으로 더 잘 알려진 곳. 반달 모양의 남이섬은 파란 하늘을 향해 곧게 자란 잣나무와 연인들의 속삭임처럼 부드러운 황금색 은행나무, 금슬 좋은 노부부의 뒷모습 같은 메타세콰이아 길이 향기롭고 아늑하다.

 

어느 길을 먼저 걸어도 편안한 마음이었다. 만나고 헤어짐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림 같은 풍경이 걸음을 느리게 한다. 따스한 바람과 다정한 눈빛의 사람들, 상냥한 새들과 벗하며 두어 시간쯤 걸었을 무렵 흙길이 끝나고 통나무길을 만났다. 길의 초입에 ‘헛다리길’이라고 쓰여 있다. 헛다리길이라니?

 

햇볕에 찌든 통나무는 남루하고 초췌한 모양새로 낡아가고 있다. 굴비처럼 엮어진 한 귀퉁이는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밧줄 사이로 낡아빠진 나무가 푸서석 밟히니 바스라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든다. 기우이겠거니 여기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한 해의 수명을 다한 나뭇잎들이 통나무길 아래 호수 위에 떠 있고 저 멀리 납작 엎드린 집 몇 채와 그만그만한 능선의 곡선이 하늘과 맞닿아 있다.

 

하, 서정적인 이 길이 헛다리길이라니. ‘헛’ 이라는 단어가 행여 ‘쓸모없는’의 뜻으로 들렸고 그 울림 때문에 조심스럽게 살피듯 건너왔다. 한걸음씩 발을 내디딜 때마다 삐걱거리며 가볍게 흔들리는 모습에 맘속 어디에선가도 삐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난날 헛다리짚어 부끄럽고 부질없던 헛, 헛, 헛것들에게 저항하는 절규가 들려온다. 본의 아니게 헛짚기도 하고 헛짚이기도 해서 억울했던 기억들에게 손사래를 쳤다. 이미 지나간 것은 죽은 것이다. 과거의 아픈 기억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재탄생된다는데……끄무레한 날씨 탓인지 구슬픈 가락 때문인지, 나는 헛다리길 위에 서서 맥없이 설움에 겨웠다.

 

“세상엔 헛수고, 헛일이 많습니다. 하지만 헛것이 헛것만은 아니랍니다. 헛것들이 인생입니다.” 헛다리길 안내판에 쓰인 글귀로 나를 달래보지만 이울어가는 나이 탓인가? 헛산 것처럼 헛헛하고 쓸쓸했다.

 

하지만 생명의 존재는 살고자 하는 존재. 나는 아직 살아있고 내일은 새 힘 새 마음으로 잘 살고 싶다.

 

헛다리길을 걸으며 헛 산 날을 잠시 돌아보았다.

 

다시는 미래라는 앞길에서 헛짚어 살지 않으리라.

 

△이연희씨는〈수필과비평〉으로 등단했다. 전북수필과비평 작가회의 회장과 전북문인협회 부회장을 지냈으며, 산문집 〈풀꽃들과 만나다〉 외 수필집 1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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