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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 사업 과거·현재 그리고 미래 ① 사업의 시작] 1970년대 식량자급 위한 대규모 간척농지 확보 첫 발

1971년 '옥서지구 농업종합개발계획' 새만금 기원 / 사업계획 무산·보류 등 진통끝에 1987년 공식 등장 / 1991년 첫삽…당시 여당 대선후보 전북공약 발표

▲ 1991년 11월 28일 새만금 간척공사 종합개발 기공식에서 노태우 대통령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발파 버튼을 누르고 있다. 전북일보 자료사진

‘단군이래 최대의 국책사업, 한반도의 지도를 바꾸는 사업’

 

세계 최장의 방조제(33.9㎞)를 쌓아 여의도 면적의 140배에 달하는 1억2000만평(401㎢)의 국토를 새롭게 조성하는 새만금 사업이 지난 1991년 시작된 이래 올해로 착공 25년째를 맞았다.

 

지난 25년간 새만금 사업은 반복된 공사중단과 재개 등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변신을 거듭했다. 시대상황의 변화속에서 농지 조성 목적의 사업은 산업과 관광·경제 등이 어우러진 복합공간 조성사업으로 바뀌었고, 비전은 동북아 경제중심지와 글로벌 경제특구 등으로 크게 변화됐다.

 

사업 지구 또한 바다를 가로지른 방조제가 축조되고, 매립공사가 진행돼 물 밑에 감춰졌던 땅이 드러나면서 개발이 본격화되고 있다. 최근에는 세계굴지의 외국 기업들이 새만금에 속속 입주해 생산을 시작하는 등 먼 미래로만 느껴졌던 새만금 사업이 가시화되고 있다. 새만금 사업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점검해 본다. 편집자주

 

△새만금 사업의 기원= 현재의 새만금 사업은 ‘동북아 경제중심지, 글로벌 명품도시’의 조성이 목표이지만, 그 시작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식량자급을 위한 농지조성이 출발이었다..

 

식량자급이 정부의 최우선 과제였던 1970년 초, 간척과 야산 개발 등을 통한 새로운 농경지 확대가 시급했던 정부는 군산을 포함한 서해안 일대를 주목했다.

 

1971년 정부(당시 농림수산부)는 금강·만경강과 동진강 하구를 둘러싼 갯벌을 개발해 새로운 농지를 조성하는 내용의 ‘옥서지구 농업종합개발계획’을 수립했다. 1단계(5만3900㏊)로 금강 하굿둑을 건설해 논산과 서천·익산·옥구지역의 관개배수시설을 정비하고, 2단계(4만6600㏊)로 김제지구에 방조제를 축조해 간척농지를 개발하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이 바로 현재 새만금 사업의 기원으로, 새만금 사업은 2단계 계획에 포함됐다. 그러나 이 계획은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해 무산됐다.

 

이후 정부는 1975년 10월 농지 확보차원에서 대규모 간척사업을 위한 서남해안 간척농지개발사업 기본계획을 수립했다. 서남해안 일대 132개 지구를 대상으로 간척사업 가능지를 조사하고 최종 59개 지구를 선정했다. 계획에는 앞서 수립된 옥서지구 개발계획(김제·옥구·부안지구)이 포함됐다.

 

이 계획 또한 보류됐다. 그러다가 1980년대 초 냉해로 인한 쌀 흉작 등 식량안보 문제가 발생하자 본격 검토됐다. 1987년 정부는 김제·옥구·부안 지구를 통합, 사업지역을 확대하고 이를 새만금지구로 명명했다.

 

▲ 노태우 대통령이 새만금 간척공사 종합개발 기공식에서 설명을 듣고 있다.전북일보 자료사진

△새만금 사업의 등장= 농림수산부는 1987년 5월 새만금사업과 서남해안 간척농지 개발계획을 발표했다. ‘새만금’이란 명칭이 정부의 문서에 공식 등장한 게 이 시기로, 농림수산부는 ‘부안지구 복지농어도 종합개발사업’계획안을 수립했다. 계획안은 그해 10월 대통령에 보고됐고, 대통령의 지시로 관계기관 검토회의가 잇따라 열렸다. 그러나 검토 결과, 새만금 지구는 경제성이 낮다는 이유로 보류됐다.

 

사장될 위기에 처했던 새만금 사업은 그해 12월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재부상했다.

 

농림수산부가 새만금 사업을 차기 정부의 대통령 선거공약사업으로 건의했고, 당시 민정당 노태우 후보 선거대책본부가 이를 전북지역 선거공약으로 채택했다. 노 후보는 그해 12월 군산에서 열린 선거유세에서 새만금 사업을 대통령 공약사업으로 발표했다.

 

△ ‘대통령 공약 코드 넘버 20-07-29’= 새만금 사업은 노 후보가 당선되면서 ‘대통령 공약 코드 넘버 20-07-29’로 관리됐다. 이후 새만금 사업은 1989년 11월 농림수산부와 건설부 등 8개부처와의 협의를 기본계획이 확정되는 등 후속 절차가 순조롭게 진행됐지만, 1990년까지 사업 예산이 확보되지 않아 공사는 착수되지 못했다.

 

지지부진하던 새만금 사업은 1991년 돌파구를 마련했다. 그해 7월 청와대에서 열린 노태우 대통령과 김대중 당시 신민당 총재와의 영수회담에서 김대중 총재의 새만금 사업예산 확보에 대한 건의가 받아들여지면서 사업비 200억원이 확보됐다. 이후 새만금 사업 시행계획이 고시되면서 3개월 후인 11월 방조제 사업이 착공됐다.

 

이같은 오랜기간 산고의 진통을 견뎌낸 새만금간척종합개발사업은 1991년 11월 28일 오후 3시 부안 변산면 대항리 새만금사업 현장에서 기공식을 갖고 첫 발을 내디뎠다. 당시 기공식 현장에는 노태우 전 대통령을 비롯 이연택 총무처·진념 동자부·조경식 농수산 전 장관, 최용복 전 도지사를 비롯한 2800여명의 도민 및 관계자들이 참석, 역사적인 새만금사업을 축하했다.

 

● [새만금 명칭 유래] 새로운 '만금' 평야·국제 명칭'아리울'

 

‘새만금’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새만금 사업 구역에 위치한 김제·만경평야와 같은 옥토를 새롭게 일궈내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게 공식 해석이다. 옛 부터 드넓은 곡창지대인 김제·만경평야를 일컬었던 ‘금만(金萬)’이란 말을 ‘만금(萬金)’으로 바꾸어 새롭다는 뜻을 붙인 것으로, 간척사업으로 ‘새롭게 만금(萬金)평야가 조성된다’는 뜻이다.

 

이 명칭은 1987년 11월 당시 정인용 부총리 주재로 열린 관계 장관 회의에서 황인성 농림부장관이 ‘새만금간척사업’을 언급하면서 처음으로 사용됐다.

 

이후 새만금은 글로벌 이름을 얻게 된다.

 

지난 2009년 정부는 새만금이란 명칭이 외국인들이 발음하기 어렵고, 새만금 사업이 대규모 간척지 개발로 갯벌 파괴 등의 환경문제 제기 등으로 부정적 이미지가 강했던 점과 새만금 사업의 국제 마켓팅을 위해 글로벌 네임 개발에 착수했다.

 

당시 총리실은 전북도와 공동으로 국민공모를 실시했다. 공모에는 1만1476건이 접수됐다. 네이밍 개발전문가 등의 아이디어 등을 종합해 후보안을 4개로 압축한 정부는 내외국인 선호도 조사 및 의견수렴 절차를 거쳐 ‘아리울(Ariul)’을 새만금의 글로벌 네임으로 확정했다. 아리울은 아리(물의 순 우리말)와 울(울타리, 터전의 순 우리말)의 합성어이다. 더불어 정부는 새만금의 비전을 미래 한국을 이끌어갈 성장동력이자 국제적인 자랑거리가 될 새만금 사업을 함축적으로 상징하는 ‘새로운 문명을 여는 도시’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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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호 kimjh@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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