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자라고 배운 내 고향 전주는 멋과 맛으로 이름난 예향의 도시다. 이름에 걸맞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다정다감하고 유순하였으며 학자와 양반의 풍모를 지녀 어린 시절만 해도 이름난 교육도시였다. 그리고 그 규모로도 전국 5대 도시에 들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산업화 바람으로 도시들은 공장이 들어서 검은 연기를 내뿜고 빌딩들이 치솟기 시작했으며 몰려드는 인구를 소화하기 위해서 아파트들이 우후죽순처럼 자리하다 보니 도시들이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우리 전주의 규모는 후순위로 밀려났지만 나는 별로 부럽지 않았다. 오히려 발전은 좀 더디지만, 비교적 맑은 공기와 적당한 문화 공간이 있고, 체계적이고 부족함 없는 의료시설과 편리한 교통 등은 내 정신적, 육체적 삶을 전혀 불편 없는 전주가 좋았다. 도시가 아담하여 길거리를 나가면 정겨운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고 도시 풍경도 소박해서 아름다웠다.
사변 뒤의 어린 시절은 나무들이 주 연료여서 산의 나무들은 물론 심지어 풀조차 남아나지 못했다. 중학교 때 선생님은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우리나라 민둥산의 사진과 부강한 나라의 울창한 숲을 비교하여 보여주며 우리나라 산에 나무를 심기를 역설하시곤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크게 실감하지 못하고 먼 나라 그림으로만 받아들였다.
하기야 사랑하는 사람과 만날 때도 까맣게 물들인 군복 하나 입고 어깨에 힘주던 시절, 가난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던 청춘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산사태를 연례행사처럼 받아들이기만 했지 잘 먹고 잘사는 일이 무엇이며 ‘참살이’가 무엇인지 알 리가 없었다. 당시는 한 뼘의 빈 땅이라도 있으면 화초보다 채소 한 포기 심는 일을 더 중히 여겼다. 푸른 산이 국력이라며 학창 시절부터 직장인이 되어서까지 꾸준했던 나무 심기는 그나마 애국심으로 뭉쳐진 선각자들의 산림정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마다 식목일 즈음이면 소나무와 잣나무 묘목을 들고 나무 심기 행사에 나섰던 내 등 뒤로 따사롭게 내리던 봄 햇살이 학창시절의 그리움으로 되살아난다.
그런데 이제는 어디서고 녹음 짙은 울창한 숲이 나를 반긴다. 푸른 숲에 들어서서 적당한 숨을 몰아쉬면 빈 의자는 넉넉한 마음으로 내게 쉴 자리를 내어준다. 햇살을 품은 초록과 연두 잎은 영롱한 빛으로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되어 내게 다가오며 평화를 준다. 내 몸 안의 모든 찌꺼기가 다 빠져나가는 청량감을 준다.
요즘 들어서는 삭막했던 길거리에 푸른 숲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구간마다 융단처럼 돋아난 새파란 잔디에 내 눈의 피로를 씻는다. 많은 이들의 노력이 내 고향 전주를 아름답게 바꿔가고 있다. 전주, 바로 이곳이 ‘참살이 생활’을 추구하는 진정한 우리네의 삶터다. 여름 불볕을 사정없이 되쏘는 포장길에서 강렬한 태양으로 헉헉거리며 뜨거운 숨을 잠시 쉬어갈 도심의 가로수 길은 사막의 오아시스요, 생명수다.
△김덕남 씨은 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임했다. ‘에세이스트’로 등단했고 아람수필문학회 부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물사랑 공모전 은상, 글벗문학회 동상을 수상했다. 수필집으로 <아직은 참 좋을 때> 가 있다.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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