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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명산, 회문산의 속살] ④순창의병, 전국 확산에 기폭제 역할

나라가 기울던 조선말에도 회문산은 격랑의 한복판에 있었다.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던 전봉준·김개남·손화중·김덕명 장군이 회문산권 지역을 기반으로 혁명을 꿈꿨고, 전봉준·김개남 장군이 혁명의 좌절을 맛보며 체포된 곳 역시 회문산 기슭이었다. 동학농민혁명 이후 일제의 침탈에 맞섰던 의병항쟁은 회문산권에서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항일의병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최익현 선생의 ‘순창의병’은 의병항쟁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데 기폭제 역할을 했다. 격동기 역사에서 첩첩산중의 회문산이 거악에 맞섰던 민중의 보금자리였던 셈이다.

 

유학의 거두 최익현의 거병

회문산권 의병활동의 중심에 있었던 면암 최익현(1833~1906)이 누구인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를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됐을 때 조약의 무효화와 박제순·이완용 등 을사 5적의 처단을 주장한 ‘청토오적소(晴討五賊疏)’를 올리며 위정척사와 항일의 선봉에 섰던 유학의 거봉이지 않던가. 그가 지역 연고가 없는 회문산권에서 의병활동을 하게 된 것은 정읍 태인(현재 산내면 종성리)에서 기거하던 군산 출신의 돈헌 임병찬(1851~1914)이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충남 청양에 머물던 면암은 충청지역에서 이미 민종식 등이 거병한 상태에 있어 영호남과 서로 호응해야 한다는 큰 그림 속에서 태인을 택했다.

면암은 1906년 3월 태인에서 임병찬을 만나 두 달 남짓 준비를 거쳐 그 해 6월 태인 무성서원에서 창의 구국을 결의한 뒤 의병부대를 편성해 순창으로 향했다. 순창에 입성할 당시 의병 수는 500명 정도였고, 곡성에서 무기와 병력을 증강시켜 순창으로 회군했을 때 의병은 900명으로 늘었다.

그러나 정부에서 지방군대인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를 출동시켜 공격하자, 면암은“왜라면 마땅히 한 번 결사하여 보겠지만, 왜가 아니고 진위대 군사라면 우리가 위를 치는 것이니 어찌 차마 할 수 있겠느냐”며 접전 중지를 명령하고 진위대에도 포위망을 풀 것을 종용했다. 의병진이 붕괴된 후 면암과 함께 끝까지 남았던 13인이 현장에서 체포되면서 막을 내렸다. 회문산권 의병은 짧은 기간에 규모도 크지 않았으나 면암의 상징성 때문에 전국 의병항쟁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일제는 최익현과 임병찬을 서울로 압송해 굴복시키려고 회유와 강박을 가했으나 굴하지 않자 이들을 일본 대마도로 데려갔으며, 최익현은 그 해 12월 순절했다. 이듬해 1월 시신으로 환국했을 때 민중들이 만기를 붙들고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면암과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의병 13인은 ‘순창 13 의사’로 기려지고 있다.

 

임병찬의 활약 - 면암 의병에 실질적 토대 제공

임실군 산내면 종성리에 위치한 임병찬 의병장의 의병훈련터인 창의유적지가 풀만 무성한 채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사진 = 오세림 기자
임실군 산내면 종성리에 위치한 임병찬 의병장의 의병훈련터인 창의유적지가 풀만 무성한 채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사진 = 오세림 기자

최익현의 거병에 중요한 역할을 한 분이 돈헌 임병찬이다. 낙안군수를 역임한 돈헌은 나라가 기울어지자 관직 제수를 거절하고 회문산 북쪽 기슭 정읍 산내면 종성리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돈헌은 학당을 지어 놓고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단순히 학문만 익히게 한 것이 아니라 활쏘기와 말타기 등 무예를 익히게 해 후일을 대비했다. 면암의 명성에 가려 있지만 면암 의병의 실질적 토대를 제공한 분이 바로 돈헌이었던 셈이다.

면암과 함께 체포돼 대마도로 유배됐던 임병찬은 이듬해 귀국해 회문산에 은거하면서 다시 후일을 도모했다. 그는 1912년 고종황제가 내린 밀명에 따라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고 전국 조직으로 확대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기밀이 누설되면서 체포돼 거문도에서 옥고를 치르다 1916년 순국했다.

지금도 회문산 중턱에 토성과 훈련장의 흔적이 있었으나 지금은 유적비와 조감도만이 당시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그의 무덤은 현재 순창 회문산 정상 부근 기슭에 있다.

 

순창 양대 의병장 양춘영과 신보현

춘계 양춘영(1875~1910, 자 윤숙)은 면암 의병진이 무너진 후 바통을 이어받아 회문산을 근거지로 항일투쟁을 벌였던 순창 출신의 대표적 의병이었다.

무성서원 거병부터 가담했던 춘계는 면암·돈헌의 의병진이 무너진 후 1908년 의병대장으로 추대됐으며, 호남 각지와 향교에 통문과 의격문을 띠워 700여명의 의병을 선발했다. 그는 회문산 중봉 아래 돼지툼벙이라는 곳에 훈련장을 마련하고 1909년 12월 피노리 수비대에 잡힐 때까지 1년5개월간 유격전을 벌였다. 총 270정과 칼 300자루를 무장했다는 내용, 부하 최산흥으로 하여금 의병 40명을 이끌고 남원에 있는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했다는 등의 항쟁 사실이 재판기록으로 남아 있다.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는 “한국이 일본 제국의 보호를 받음은 한국의 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일로 보고, 이에 불만을 품고 일본 수비대를 격퇴함과 함께 일본 관헌, 그밖에 일본인을 한국국외로 추방하고 또 한국정부를 개조하여 한국 정치를 변경할 것을 계획했다”며 교수형을 선고했다. 1910년 전주감옥에서 처형된 춘계의 무덤은 인계면 도룡리에 있다. 순창군이 2000년대 중반 춘계 생가(구림면 국화촌)를 중심으로 의병공원을 추진하다 중단했으며, 춘계가 항일투쟁을 도모했던 회문산 기슭 의병훈련장도 현재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아 아쉬움을 준다.

순창의병에서 양춘영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의병장이 신보현(1868년~?)이다. 순창을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에서 활약했던 그의 가계나 성장 등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복흥면 출신들이 그의 휘하에서 대거 활약한 것으로 나와있어 복흥을 기반으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보현의 휘하에서 활동했던 의병 중 교수형 선고를 받거나 중형을 받아 옥고를 치른 의병이 줄잡아 10여명이다. 1907년부터 많게는 300여명의 의병을 이끌었던 신보현은 1909년 12월 정읍 석계촌에서 체포되면서 그에 대한 활동기록은 여기서 멈췄다.

면암·돈헌 순창의병에서 양춘영과 신보현으로 이어지는 순창의 이런 의병활동은 전북에서 의병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으로 꼽힌다. 면암의 순창의병에 가담해 체포된 후 형을 받은 순창 출신 의병이 80명에 이르며, 그 중 교수형을 받은 의병만 7명이다. 양춘영, 신보현 휘하에서 활동했던 많은 의병들의 고초도 재판기록에 드러나 있다. 그러나 순창 의병 활동을 종합적으로 아울러 체계화시킨 연구가 미약하고 역사자원으로 활용하려는 노력 또한 미흡하다. 경술국치 후 독립의지를 다지며 쌍치면에 설립된 정자인 ‘영광정’(迎狂亭)이 전북도문화재자료로 지정 보존되는 정도다. 한 때 추진하다 중단했던 의병공원 조성 등에 관심이 요구된다.

 

동학농민혁명 속 회문산

순창군 쌍치면 전봉준 장군 피체지에 조성된 '녹두장군 전봉준관'에 창의문을 선포하는 전봉준 장군 동상이 서있다. /사진 = 오세림 기자
순창군 쌍치면 전봉준 장군 피체지에 조성된 '녹두장군 전봉준관'에 창의문을 선포하는 전봉준 장군 동상이 서있다. /사진 = 오세림 기자

회문산은 동학농민혁명의 좌절을 지켜본 곳이다. 동학농민혁명 총대장이었던 전봉준 장군이 관군에 체포된 곳이 회문산 아래 쌍치면 피노리다. 농민군의 또 다른 거두였던 김개남 장군 역시 피노리에서 20여리 떨어진 회문산 기슭 정읍 산내면 종성리에서 전봉준과 같은 날 체포됐다.

전봉준이 피노리로 간 것은 태인전투에서 패한 후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종성리에 숨어있던 김개남과 만나 재기의 기회를 노리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옛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전봉준이 관군에 잡힌 뒤 일본군에 넘겨져 서울로 압송돼 재판을 거쳐 효수형을 당했다. 서울 광화문에 세워진 전봉준 동상이 당시 압송과정에서 찍힌 사진이다. 전봉준 피체지인 피노마을에 ‘녹두장군 전봉준관’이 설립됐으며, 피노마을에서 구림면 금상마을까지 압송경로를 따라 둘레길이 조성됐다.

김개남 장군은 매부 집에 숨어 있다가 관군 80명의 급습으로 체포됐고, 재판도 받지 않은 채 전주 풍남문 밖 초록바위 부근서 처형됐다. 김개남의 소재를 밀고한 이가 바로 인근에 기거하던 임병찬으로 알려졌다. 척왜를 부르짖었던 동학농민군 지도자가 훗날 의병대장으로 항일투쟁에 나섰던 돈헌에게 고발됐다는 게 아픈 역사의 뒷면이 아닐 수 없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해서는 특별법 제정을 통해 명예회복과 국가기념일 지정이 이뤄졌고, 의병활동과 마찬가지로 참가자들에 대한 독립운동 서훈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김원용 선임기자

김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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