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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명산, 회문산의 속살] ⑨역사문화관광자원 활용 방안

회문산은 천의 얼굴을 하고 있다. 산 자체 험준하지 않지만 큰지붕(정상)을 중심으로 첩첩산중을 이룬다. 빼어난 절경은 아니지만 참나무류 단풍나무 산벚나무 철쭉 진달래 등 다양한 식생물들이 봄가을 등산객들을 즐겁게 한다. 회문산을 둘러싸고 삼면으로 흘러내리는 크고 작은 하천들이 섬진강과 합류해서 빚어내는 풍경도 특별하다. 여기에 빨치산, 의병, 종교, 명당 등 역사적으로 많은 사연을 품고 있다. 이런 자연과 역사적 자원을 가진 회문산이지만 그 가치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산림청이 운영 중인 자연휴양림 정도가 회문산을 상징한다. 역사적 자산들은 그저 형식적으로 보존되거나 아예 방치돼 있다. 빨치산은 치욕의 역사로 꽁꽁 가둬두고 있고, 의병활동 무대는 산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다. 회문산의 잠자는 역사를 깨워야 한다. 역사의 깊이를 더하는 재조명 작업과 함께 흩어진 역사를 모아야 한다. 각계 의견을 종합하면, 도립공원화가 답이다. 회문산권이 순창 임실 정읍 3시군에 걸쳐 있고, 회문산이 품고 있는 역사문화적 자산 성격이 각기 달라 하나의 테마로 삼기 어렵기 때문이다. 회문산의 중심에 자리한 자연휴양림은 회문산이 갖고 있는 역사문화적 자산을 거의 활용하지 않는, 말 그대로 산 속 휴양림에 머물고 있다. 회문산 역사관이 설치됐으나 역사적 장소임을 간략하게 소개한 패널이 사실상 전부다. 의병빨치산종교발상지동학농민혁명명당 등 테마별로 구분해 각각의 전시실을 갖추고 관련 내용을 유물과 사진 등으로 담아낼 필요가 있다. 현재 30평 남짓한 회문산 역사관은 빨치산 역사관으로 쓰기에도 왜소하다. 산림청은 당초 회문산 자연휴양림에 빨치산 전북도당 총사령부 건물과 빨치산 숙소인 움막, 통신기계를 사용하기 위해 활용했던 물레방아 발전시설 등을 설치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일부 복원된 사령부마저 붕괴위험이 있다고 철거하고 그 자리에 지금의 회문산 역사관을 신축했다. 빨치산 사령부가 있었던 자리에 6.25 양민희생자 위령탑을 세우고, 빨치산 교육시설인 노령학원이 있던 곳을 물놀이장으로 만들었다. 지리산 빨치산 활동과 관련해 경남 하동과 산청은 그 점에서 시사점을 준다. 경남 하동군과 산청군은 각각 지리산역사관과 지리산빨치산 토벌전시관을 만들어 당시 빨치산 생활상과 총기류 등을 전시해놓고 있다. 함양산청하동군 등 경남 3개 군은 6,25전쟁 50주년을 앞두고 지난 99년 잊힌 빨치산의 자취와 이동통로를 발굴, 빨치산 루트까지 조성해 역사교육장과 테마등산 코스로 활용하고 있다. 회문산에서 의병의 역사가 묻혀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전북에서 의병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순창의 의병 활동을 종합적으로 체계화시킨 연구가 미약하고 역사자원으로 활용하려는 노력 또한 미흡하다. 순창군이 회문산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양윤숙 의병장 생가와 흉상공원다목적 운동장 등을 갖춘 의병공원 조성을 추진하다가 이마저도 중단했다. 순창에서 면암 최익현과 함께 눈부신 의병활동을 했던 돈헌 임병찬이 의병들을 교육하고 훈련시켰던 회문산 서북쪽 기슭의 훈련장은 풀이 무성한 채 당시 역사를 소개한 유적비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회문산 정상 부근에 돈헌의 무덤이 있으나 이 역시 역사적 자산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양대 거봉이었던 전봉준과 김개남의 피체지가 공히 회문산권이지만, 행정권역에 따라 기리는 상황이 아주 다르다. 순창군은 전봉준 장군 피체지인 쌍치면 피노리에 기념관을 만들고 피노마을에서 회문산을 따라 구림면 금상마을까지 압송루트를 복원하고 있다. 반면 정읍 산내면 회문산 기슭에서 붙잡힌 김개남의 피체지는 그저 장소 표시만 남아 있다. 회문산의 역사적 자산을 관광자원화 하는데 문화예술의 역할도 중요하다. 이태의 자전적 소설 <남부군>과 이를 바탕으로 한 영화 남부군을 통해 회문산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 좋은 예다. 그러나 회문산에 관련 문학비 하나 없다. 한국전쟁에 희생된 이들을 위로하고 치유의 장으로 삶기 위해 휴양림 내 비목의 숲과 해원의 숲을 조성했으나 감흥을 줄 콘텐츠가 없다. 한명희 시 비목과 김소월 시 산유화 등의 작품을 돌에 새겨두고 있으나 역사성지역성과 거리가 있다. 이태와 함께 빨치산 활동을 한 후 전향했던 순창 출신 김영 시인의 문학적 성과를 조명하고 시비를 건립한다면 회문산의 문학적 자산이 될 것이다. 영화 남부군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데도 인색하다. 영화 줄거리의 중심 무대며 실제 영화 촬영 분량이 적지 않았던 회문산에 영화 관련 안내문조차 없다. 고창과 장수 등 전국 여러 곳에서 영화남부군촬영지라고 관광홍보에 활용하는 것과 대비된다. 80년대말부터 90년대까지 회문산을 소재로 간간이 학생백일장과 작가회의 연수 등 문예활동이 열리기도 했으나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사장된 것도 아쉽다. (끝) 이영춘 신부 회문산은 박해를 받던 초기 천주교 신도들의 피신처이기도 했다. 천주교 교우촌은 박해시대에 형성된 종교인 취락으로서 독특한 취락형태를 지니고 있다. 지금은 그 모습이 사라져 자취만 남아 있지만, 특정한 시대특정 집단의 취락구조와 형태를 알 수 있는 역사문화사적 의미가 크다. 경계지역에 자리잡은 위치성, 세속과 떨어져 영적인 가치를 추구한 진정성(수도자적인 삶), 교우촌에서 이루어졌던 여러 가지 독특한 종교문화, 선교사들도 감탄한 이상적인 공동체성 등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의미들을 천주교 교우촌은 담고 있다. 일본의 경우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고토지역을 보존하여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 전라도 지역은 교우촌이 가장 많았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런 취락형태의 현장을 잘 보존한다면 역사문화적, 교육적, 관광문화적으로 훌륭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회문산에 묻힌 김난식은 김대건 신부의 유일한 형제이다. 최근의 성지순례는 이름난 성지보다는 신자들이 살았던 교우촌이나 잘 알려지지 않은 사적지들을 순례하는 추세이다. 이런 기회에 김난식과 김현채를 조명함은 큰 의의가 있을 것이다. 전라북도는 김대건 신부의 집안들이 가장 많이 내려와 살았던 곳이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박해를 피해 전라북도로 내려온 그의 집안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김난식과 김현채를 기억하는 일은 순교자와 순교자적 삶을 함께 기억하는 중요한 자리매김이 될 것이다. 특히 동정(부부)으로 산 삶은 치명자산의 복자 유중철과 이순이 동정부부의 맥을 잇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회문산은 피난처이자 희망처이다. 다양한 시대의 다양한 사람들이 회문산으로 피신해 희망을 키웠다. 그런데 이들이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의 맥으로 이어지는 공통점이 있다.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세상을 향한 희망을 꿈꿨다는 공통점이 있다. 때문에 이런 곳들을 연계하여 회문산역사문화지구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된다. 회문산은 다양한 역사문화 콘텐츠를 품고 있으며, 가까이 옥정호를 끼고 있어 현재에도 많은 도민들이 찾고 있는 곳이다. 때문에 이 지역을 도립공원으로 지정하면 더 확장된 역사문화관광 활성화에 유익하리라 생각한다. 전라북도 전체를 보면 이 지역에 국립공원이나 도립공원이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곳에 도립공원이 지정되면 도민들에게나 지역민들에게 경제적문화적 유익의 창출에 크게 도움되리라 생각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기획
  • 김원용
  • 2021.11.08 17:02

[전북 명산, 회문산의 속살] ⑧문화예술로 녹아든 회문산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무겁게 짊어졌던 회문산은 문화예술적으로 어떻게 형상화 됐을까. 회문산의 역사적 무게에 비해 문화예술적 성취는 전체적으로 크지 않다. 그럼에도 회문산을 무대 삼거나 소재로 한 문예창작 활동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빨치산 활동을 기록한 이태의 수기 <남부군>과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가 대중적으로 알려졌지만, 회문산을 조명하기 위한 지역 작가들의 문예 활동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전쟁 당시 종군기자로 빨치산에 가담했던 이태(1922~1997)가 저술한 수기 형식의 <남부군>은 회문산을 일약 빨치산 활동의 중심무대로 올려놓았다. 1988년 <남부군>이 발간됐을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병주와 조정래가 각각 장편소설 <지리산> <태백산맥>을 통해 빨치산 문학의 길을 열었다면, <남부군>은 작가의 직접 경험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갖는다. 이 책은 저자가 빨치산에 입문한 회문산에서부터 지리산에서 체포될 때까지 기록이다. 서울에서 합동통신 기자로 활동하던 저자 이태(본명 이우태)는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온 뒤 조선중앙통신사 기자로 흡수돼 전주지사에서 근무하게 된 것이 빨치산 입문 계기였다. 1950년 9월 연합군이 군산에 상륙하면서 조선노동당 전북도당 유격사령부를 따라 그 대원이 되어 회문산으로 들어가게 됐다. 회문산 독수리부대를 거쳐 이현상의 남부군에 편입돼 17개월간 체험을 기록한 것이 바로 <남부군>이다. 저자와 빨치산들이 어떻게 활동했는지 <남부군>이 생생하게 전한다. "구림천 골짜기 거너너 저편에 봉리는 7백미터대의 장군 회문연봉, 그리고 어느 골짜기엔가 사령부가 있을 시퍼런 산덩이는 마치 난공불락의 성채처럼 믿음직하게 보였다. 섬진강가로부터 급경사를 이루며 솟아 오른 회문봉의 나무 없는 정상은 옛 얘기에 나오는 고성처럼 장엄하고 신비로웠다. 거기서 말안장처럼 한 번 숙었다 다시 솟은 장군봉은 거대한 바윗덩이를 잇고 있어 투구바위로 불렀다. 회문산괴를 이루는 이 두 봉우리는 이듬해 3월 사령부가 소백산맥으로 이동할 때까지 언제나 우리들의 마음의 메카였다. 어떤 위기를 당했을 때도 아득히 그 봉우리들이 바라보이면 말할 수 없이 마음이 든든했다" 회문산 무대는 국군의 집중 진압작전에 따라 덕유산까지 1개월에 걸쳐 이동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이후 이현상 지리산 빨치산 투쟁과 체포될 때까지 과정을 이 책은 기록하고 있다. 이태의 <남부군>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이태 본인의 빨치산 활동이 17개월에 불과하고 하급 간부로서 정보를 접하는 데 한계가 있어 일면만을 다루거나 잘못된 기술이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래서 <남부군>은 이태의 풍부한 화술로 묘사된 개인사의 정리일 뿐 당시 빨치산의 집단적 삶과 의식을 객관화한 것은 아니라는 비판이 곁들여진다. 그럼에도 이 책은 회문산 빨치산 활동을 이해하는 길잡이 역할을 한 작품으로, 회문산의 빨치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이태는 1952년 생포된 후 사상 전향하였고, 이후 6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1980년대 민추협과 YS의 민주산악회 간부를 지냈으며, 회문산을 몇 차례 다녀간 것으로 전해진다. 영화 '남부군' 포스터. 회문산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계기가 된 데는 영화 남부군이 큰 몫을 담당했다. 이태의 <남부군>을 원작으로 한 영화 남부군은 1990년 개봉 당시 서울에서만 37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영화는 대체로 원작을 충실히 따랐으나 개봉 당시 이념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금기시됐던 빨치산 소재라는 이유로 종북논란도 제기됐으나 이후 오히려 반공물 성격이 짙다는 비판도 나왔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87년 6월 항쟁 이후 변화된 사회환경을 수용하고 시대적 담론을 반영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빨치산의 치정관계를 다뤘던 영화 <피아골>(1955)마저도 고뇌하는 빨치산을 등장시켰다는 이유만으로 친공영화로 매도됐던 걸 감안하면 큰 변화며, 임권택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태백산맥이 나올 수 있었던 밑거름도 됐다. 이 영화로 정지영 감독이 청룡영화제 감독상을 받았고, 안성기최민수최진실은 각 남우주연상남우조연상여자신인상을 수상했다. 영화는 여러 후일담을 남겼다. 제작기간이 3년으로, 원작자의 빨치산 활동 기간이었던 1년 7개월보다 길었고, 동원된 엑스트라가 연인원 3만명에 달했다. 주연이었던 안성기가 89년 한 해 꼬박 이 영화를 촬영하느라 그 해 출연 작품을 내지 못했으며, 극중 역할을 실감나게 보여주기 위해 27일간 머리를 감지 않았다고 한다. 최진실과 임창정(고교 1년)의 영화 데뷔작이기도 했다. 영화 촬영지는 오대산을 중심으로 지린산포항 보경사 등 전국에 걸쳐 있다. 주인공 이태가 활약했던 회문산에서 촬영한 장면은 주요 전투 장면과 철수 장면이다. 또 회문산 입구 안정 마을 앞 치천에서 빨치산들이 모여 식사하는 장면 등이 촬영됐다. 아지트를 배경으로 한 빨치산 활동상은 고창 선운산 정상과 용문굴 일대에서 촬영됐고, 이현상의 남부군 빨치산 500명이 목욕하는 장면 촬영지는 장수읍 덕산리에 있는 덕산계곡이었다. 구절초공원으로 가는 길인 정읍시 산내면 능교리 능다리(만경대 다리)에서는 경찰과 전투 중 총상을 당한 이태를 박민자(최진실)가 치료해주던 장면이 촬영된 곳이다. 이곳은 영화 타짜와 드라마 전우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회문산 로케이션 촬영때 영화 제작진과 주요 배우 등 약 30~40여 명이 순창읍에 숙소를 정하고 1주일 정도 숙식을 했으며, 당시 지역에선 영화배우 이야기가 큰 화젯거리였다고 한다. 김영 시인 회문산부터 지리산까지 이태와 함께 빨치산 활동을 함께 한 순창 출신의 김영 시인(1929~1995, 본명 김웅)은 <남부군>에 실명으로 비중있게 등장한다. 영화 남부군에서 최민수가 그의 역할을 맡았다. 이태가 남원수용소에서 6개월만에 풀려난 것과 달리 김영은 사형선고를 받은 뒤 20년형으로 감형을 받고 복역 중 폐결핵으로 12년 9개월만에야 가석방으로 출소했을 만큼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순창농고를 졸업하면서 시집을 내며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김영은 1988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한 후 그 해 첫 시집 <깃발 없이 가자>를 출간했다. 그는 또 자전 수기 <총과 백합꽃>(1988년) <빨치산 철창수첩>(1990년)에 이어 서간집 <두 하늘에 띄우는 그림>(1991년) 등을 잇따라 내놓으며 자신의 삶과 시대적 아픔을 절절하게 토해냈다. 그의 삶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이에 앞서 <신동아>(1965년 12월호, 논픽션 우수작)에 게재된벽과 인간을 통해서다. 고향 순창으로 내려와 쓴 어느 전향자의 수기라는 부제를 단 이 논픽션은 그가 어떻게 빨치산에 들어가게 됐으며 그 후 포로수용소와 형무소 생활이 어떠했는지 일기체 형식으로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처음 기독교사회주의에 가까운 생각을 품고 있었으며 원거리에서 코뮤니즘을 경험했으나 차츰 환멸을 느껴 오래 방랑과 고민 끝에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 코뮤니즘을 청산하고 전향하게 됐다. 그가 빨치산에 들어가게 된 것은 연세대에 재학 중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순창으로 내려왔을 때 열성 남로당원 친구와 붉은 완장을 찬 여친 영향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12년 감옥살이 후에 남은 것은 폐병과 심장병과 위궤양 뿐이나, 만신창이 몸으로 생존경쟁의 광장으로 나선다. 제로. 아무것도 없는 영에서 출발해야 한다. 나는 지금 아무런 이력서도 없고 증명서도 없다. 도민증도 없고 당원증도 없다 보호자도 없고 집도 없다. 어디로갈까. 쿼바디스. 이제야 나의 구원자는 내가 되리라. 목숨보다 소중한 자유의 선물을 헛되게 해선 안된다.(1964년 12월19일자 일기) <빨치산 철창수첩>에서 그의 역사적 인식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책 서문에서 (빨치산) 비극의 역사가 그대로 망각의 늪에 빠져버린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고 저술 배경을 설명했다. 또 책 발간과 관련한 언론 인터뷰에서도 묶은 상처를 다시 헤집어내는 것은 더없이 아프고 쓰린 일이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하고, 또다른 비극을 방지하는 일이자 살아남은 자의 책무라고 강조했다. 장교철 전북문인협회 부회장은 순창이 낳은 천재로까지 일컬어졌던 김영 시인은 분단이 준 처절하게 함몰되고 희생된 시인이다며, 김영 시인의 삶과 문학세계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기획
  • 김원용
  • 2021.11.01 16:57

[전북 명산, 회문산의 속살] ⑦회문산에 얽힌 설화와 전설

조선 500년 역사에서 회문산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때는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회문산을 검색해보면 선조 때 토적들이 험지를 점거하고 도발하여 적의 소굴이 됐다는 기록 정도가 나온다. 험준한 산이어서 민중들의 삶과도 괴리가 있었다. 그래서 회문산은 이 일대 민초들에겐 늘 경외의 대상이었다. 민중들이 오랫동안 영산으로 여겨온 까닭에 신비스러운 여러 이야기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회문산은 오늘날 순창을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고추장에 얽힌 설화부터 명당과 종교 관련 숱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회문산(回文山)이름이 어떻게 붙여졌는지부터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 회문산자연휴양림 역사관에는 홍성문설과 조평설 두 가지가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인물과 관련된 지명 이름이다. 홍성문설은 조선 중기 때 전설적 풍수가인 홍성문 대사가 지은 <회문산가(回文山歌)>에서 그 이름이 유래됐다고 보는 것이다. 조평(1569~1647)설은 고향 임실군 덕치면 회문리에서 병자호란 때 의병을 지원하고 많은 덕을 베풀었던 조선 중기 문신인 조평이 살았던 마을 이름을 따서 회문산이라 부르게 됐다는 설이다. <회문산가>를 지었다고 전해지는 홍성문과 관련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그의 생몰연대에 대해 조선 중종 때인 혹은 영조 때 인물로 전해진다. 임실군 운암면 금기리 텃골에서 홍진사와 마을 주막집 주모 사이에서 서자로 태어난 그는 홍진사가 죽은 후 어린 나이에 회문산 만일사로 들어갔다. 회문산 자락 사자암 등에서 27년 도를 닦아 풍수의 이치를 깨닫는다. 그는 팔도를 답산한 후 회문산에 많은 명당이 있음을 알고 세상에 전하려 했지만, 사람들은 명당에 욕심만 있지 그것을 감당할 덕을 갖춘 사람이 없음을 개탄했다. 그는 양반들의 횡포에 분노하여 명당 장사로 양반을 희롱했다고도 한다. <회문산가>를 통해 회문산에 오선위기혈의 큰 명당이 있다고 해 지금도 많은 풍수가들이 이를 좇고 있다. 회문산 이름과 관련해 또 다른 해석도 있다. 回文이란 앞으로, 뒤로, 이리저리 돌려 읽어도 동일한 내용의 문장을 뜻하는데, 회문산은 투구봉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서 바라보아도 서로 같은 모습의 형태적 측면에서 이름 붙였을 것으로 추정했다.(김성암 도선-풍수비기 연구원)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는 회문산 주변을 물이 감아서 흐르기 때문에 回를 붙였고, 삼각형 모양의 투구봉은 문필봉과 같이 쓰일 수 있어 투구봉을 문필봉으로 보면 회문산이라는 이름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석했다. 회문산 고찰인 만일사는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고추장에 얽힌 설화가 담긴 절로 유명하다. 백제시대 건립된 천년고찰의 이 절은 무학대사가 이성계의 왕위등극을 위해 절을 중건하고 만일동안 기도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27년이나 되는 1만일을 기도했다는 게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기도를 한 것만큼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조용헌 교수는 추정했다. 조 교수는 전북에서 이성계와 관련된 기도처로 만일사 외에 임실 성수산 상이암과 진안 마이산 은수사 등 3곳이나 사찰이 있는데, 이성계의 남원 왜구토벌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성계는 왜구토벌의 와중에서 전북의 지세를 자세히 파악했을 것이고, 어느 사찰이 영험한가도 알았을 것이란다. 만일사 존재를 이성계가 이때 파악한 것 같고, 무학대사가 만일사에서 기도를 하게 된 배경으로 해석했다. 전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만일사비가 그 역사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3조각으로 부서진 것을 1978년 복원해서 건립한 비는 마멸이 심해 비문의 정확한 내용을 알아보기 어렵다. 다만 2003년 예원대 전북역사문화연구소가 실시한 탁본 및 연구조사에 의하면 정유재란때 소실됐던 만일사를 지홍대사와 원측대사가 1658년에 중건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후 한국전쟁 때 빨치산 소탕에 나섰던 국군에 의해 소실된 후 1954년 재건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설화와 상관없이 만일사는 곧 회문산의 증언자인 셈이다. 조계종 제24교구 선운사의 말사인 만일사 경내는 현재 대웅전, 삼성각, 무설당, 일주문, 비각, 종각, 요사채, 순창고추장 시원지 전시관 등으로 이뤄져 있다. 순창 고추장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계기로 이성계와 관련된 설화가 전한다. 이성계가 만일사에서 기도중인 스승 무학대사를 찾아 회문산으로 가던 중 점심때가 돼 어느 농가에 들러 고추장과 함께 차려진 점심 먹게 됐다. 그 고추장 맛에 반했던 이성계는 왕으로 등극한 후 그 맛을 잊지 못해 순창현감에게 고추장을 진상토록 하면서 순창 고추장이 유명해졌다는 설화다. 그러나 조선조 이전 간장과 된장 관련 기록은 있지만(<삼국사기>) 고추장에 대한 기록이 없어 일각에서 설화의 진정성을 문제 삼기도 한다. 고추장 관련 문헌 기록은 이수광이 1614년에 편찬한 <지봉유설>에고추에는 독이 있다. 일본에서 비로소 건너온 것이기에 왜겨자라 한다는 내용으로 처음 등장한다. 임진왜란 시기에 중국과 일본 양쪽에서 전래됐을 가능성이 높다. 고추 대신 당초라는 이름의 문헌(1766년 <증보산림경제>)이 있어 임진왜란때 구원군으로 들어온 명군에 의해 동시에 들어왔을 가능성도 학계에서 거론된다. 설화는 설화다. 설화를 사실적으로 규명하거나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순창고추장이 유명하기 때문에 설화가 생겼을 게다. 실제 조선시대 순창고추장 명성이 자자했던 사실은 문헌으로 나타나 있다. 1800년대 초 생활경제 백과사전인 <규합총서>에 순창과 천안, 함양 고추장을 팔도 명물로 소개했으며, 그 중 순창 고추장을 최고로 쳤다. 오늘날 순창은 고추장으로 특화됐다. 고추장 설화를 상기시키는 고추장 익는 마을이 회문산 아래 위치해 있고, 고추장민속마을은 순창의 대표적 관광지로 자리 잡고 있다. 고추장이 순창경제를 지탱하는 버팀목이라고 할 정도다. 고추장 익는 마을은 각종 항아리들이 해학적으로 쌓여 있다. 숙박시설과 식당, 강당, 세미나실, 캠프파이어 등 여가시설도 갖추고 있으며, 농사체험을 할 수 있다. 20여년 전 순창읍 백산리 일대 조성된 고추장민속마을은 장류연구소장류박물관장류체험관옹기체험관발효미생물진흥원전통발효식품(장류)전용공장전통절임류세계화지원센터 등의 지원시설을 갖췄다. 매년 장류축제를 통해 순창고추장을 전국에 알리고, 순창세계발효소스 박람회를 통해 순창 장류의 세계화 노력도 병행하고 있다. 한국전통발효문화산업 투자선도지구도 새로 조성했다. 이곳에 참살이발효마을(발효테라피센터, 누룩체험관, 고추다년생식물원, 세계발효마을농장, 추억의 식품거리), 월드푸드사이언스관, 발효미생물전시관, 어린이실내놀이터, 고추장상설문화마당이 들어서 또 하나의 명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이렇게 지역의 허브산업이 된 데는 순창 고추장만의 독특한 맛과 풍미가 있기 때문이다. 식품영양 전문가들은 그 비결이 발효식품을 만드는데 중요한 물과 기후 등에서 찾는다. 똑같은 재료를 같은 방법으로 고추장을 담가 다른 지역에서 숙성 시키더라도 순창고추장 같은 맛이 나지 않는 건 기후 때문으로 분석한다. 은은하고 감미로우며 검붉은 순창만의 독특한 고추장 만드는데 순창지역 기후 영향이 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조선시대 설화에서부터 순창고추장의 유명세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게 대단하다.

  • 기획
  • 김원용
  • 2021.09.23 17:42

[전북명산, 회문산의 속살] ⑥명당자리가 있다?

회문산 정상에 서면 전북의 대표 산이라고 할 모악산 내장산 변산 지리산까지 사방으로 조망할 수 있다. 회문산 정상(큰지붕)까지 1시간이면 오를 수 있는 단거리 코스부터 연봉으로 이어진 능선 코스를 취향과 시간에 맞게 선택해 즐길 수 있다. 정상에 접근할 수 등산 시작점도 여러 곳이다. 이렇게 회문산은 등산객을 유인할 수 있는 여러 매력을 갖췄다. 그럼에도 회문산 등산객은 그리 많다. 회문산에서 등산객을 마주칠 때가 드물다. 배후지 인구수가 적고, 휴양림 외에 달리 편의시설을 갖추지 못한 이유가 클 게다. 인근 강천산과 경쟁에서 밀린 것도 원인일 수 있다. 회문산에서 등산객보다 더 눈에 많이 띄는 게 무덤이다. 산 사람의 산이 아닌 죽은 이들을 위한 산이라는 말이 나올 법하다. 실제 회문산 정상으로 가는 길에 바위가 있는 곳이면 위아래 좌우를 가리지 않고 무덤이 있다. 심지어 산 정상의 암반위에 억지로 만들어 놓은 무덤도 볼 수 있다. 낭떠러지 가까운 곳에 어떻게 흙을 옮겨 묘를 썼는지 신기할 정도다. 회문산 자락에 묻힌 무덤이 1000기 안팎으로 추산된다. 이렇게 많은 묘가 회문산을 덮은 데는 오래 전부터 회문산에 명당자리가 있다고 전해지면서다. 대표적인 게 풍수지리의 대가인 홍성문 대사가 썼다고 전해지는 풍수가사 <회문산가>다. 18세기 초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회문산가>는 6~7개 혈(穴)을 소개하면서 특히 오선위기(五仙圍碁)를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오선위기에 묘를 쓰면 당대부터 발복하여 59대까지 갈 것이라는 예언을 곁들여서다. 이에 앞서 1600년대 활동한 분으로 알려진 일이승 스님은 산도(묫자리 그림)를 통해 회문산 오선위기와 함께 그 적합자로 배씨를 언급했다. 오선위기에 집착하는 풍수가 중에는 통일신라시대 풍수대가인 도선 국사까지 끌어들이기도 한다. 즉 도선의 풍수비기라는 <유산록> 순창편에 나오는 선녀직금혈(선녀가 베를 짜는 형상)을 일이승과 홍석문이 오선위기로 이름 붙였다는 것이다. 회문산 오선위기형 명당이 널리 회자된 계기는 증산교를 창시한 강증산에 의해서다. 강증산은 모악산과 회문산에서 천지공사(天地公事)가 펼쳐진다고 역설하면서 회문산에 24개 명당이 있고 그 중 오선위기형을 으뜸으로 꼽았다. 이런 바탕 위에 오늘날에도 많은 풍수가들이 <회문산가>의 오선위기를 금과옥조로 여기며 그 혈을 찾겠다고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다. 오선위기 명당이 어떤 곳이기에 풍수가들이 여기에 꽂혀 있을까. 오선위기형은 다섯 가지 서로 다른 모양 산들이 둥글게 모인 형상을 말한다. 다섯 산의 가운데 바둑판을 두고 있는 형국이 오선위며, 풍수에서 아주 좋은 명당으로 여긴단다. 그러나 <회문산가>에서 그 혈 자리가 구체적으로 지목되지 않아 풍수가들이 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 오선의 산이 어떤 산인지조차 의견이 분분하다. 주인격을 놓고도 회문산 큰지붕과 장군봉, 깃대봉 등으로 엇갈린다. 그럼에도 잊힐 만하면 오선위기혈을 찾았다는 주장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근래만 해도 회문산 정상에서 1.3km에 위치한 문터바위를 지목한 이가 있고, 그 위천근월굴에 혈이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최근 깃대봉 아래 능선에서 오선위기혈을 발견했다는 제보도 있었다. 풍수가이기도 한 제보자가 지목한 곳은 임실군 덕치면 일중리 마을 바로 위쪽으로, 회문산 마지막 파구(물이 빠져 나가는 곳) 지점과 닿아 있다. 제보자는 오선이라고 할 봉우리들이 둘러싸여 바람을 피할 수 있고, 단단히 물을 틀어막는 파구를 갖췄으며, 거북이 목이 죽 밀고 나오는 형상을 지니고 있단다. 여기에 오선위기에서 말하는 다섯 개 반석이 땅 밑에 감춰져 있었다는 설명을 곁들여 일이승이나 홍성문이 말하는 오선위기혈처라고 주장했다. <회문산가>에 의한 오선위기를 허구로 보는 견해도 많다. 풍수가 김성암은 회문산가는 누군가가 도선 국사의 옥룡자 유산록에 있는 인근의 몇 혈처들을 찾아 모아 미사여구로 그저 재구성한 것에 불과하다며, 회문산가에 의한 오선위기는 없다고 단언했다.(대한풍수지리연합회,회문산-오선위기 그리고 여러 혈들에 대한 세찰). 오선위기형을 떠나 풍수가들이 회문산에 명당자리가 많다고 여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임실에서 활동하는 풍수가 신남식씨(60, 식품가공업)는 회문산은 특이하게 동서남북 큰 봉우리에서 분파된 혈들이 내려오면서 각기 좌청룡우백호로 혈을 맺어 그만큼 많은 혈을 품고 있고, 섬진강이 물을 막아 다른 곳으로 흩어지지 않게 기를 가둔다고 했다. 풍수에서 물도 중요한 데, 회문산을 둘러싸고 물이 돌면서 유속을 떨어뜨려 명당에 필요한 조건을 갖췄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바위가 많은 것이 말해주듯 강한 기운의 산이어서 7부 능선 이상에서 혈을 찾기 힘들며 3부 능선 밑에 혈이 있다는 게 신 씨의 소견이다. 또 회문산에는 음기도 많아 피해볼 수 있는 곳도 많다며, 현재 산 능선 곳곳에 관리 되지 않는 사묘들이 그 예라고 덧붙였다. 높은 산에는 낮은 곳에, 낮은 산은 높은 곳에 혈이 있다는 풍수 원리를 벗어나 회문산 높은 곳만 찾는 것도 잘못됐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러나 순창 출신의 풍수학자 김두규 교수(우석대)는 회문산 명당에 대해 부정적이다. 김 교수는 명산은 그 기의 응결이 대단히 강하기 때문에 하찮은 인간 유골 하나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크다며, 명산과 영산에 명당이 없다는 철칙이 회문산에도 그대로 해당된다고 했다. 또 한국전쟁에서 수많은 젊은 목숨들을 앗아간 회문산은 악산이어서 음택이나 양택으로서 적절한 곳이 아니다며, 더 이상 부질없이 조상 유골을 높은 산, 험한 곳, 바람 부는 곳, 음습한 곳, 잡초 우거진 곳에 내버리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했다. (전북전통문화연구소 순창지역의 풍수지리) 실증적으로 회문산 일대 명당자리로 큰 인물이 났다는 말은 풍수가들 사이에서도 회자되지 않는다. 다만 조선의 실학자 이재 황윤석 손자 묘가 만일사 위쪽에 자리하는데, 북한의 서열 안에 꼽히는 황병서가 그의 후손이라는 정도의 이야기가 나돈다. 명당 여부를 떠나 구한말 임병찬 의병장의 묘소가 큰지붕 아래 눈에 잘 띄는 자리에 모셔져 있고, 조선인 최초 신부인 김대건 신부의 동생 묘가 정읍 산내쪽 회문산 기슭에 묻혀 있다. 회문산 명당을 거론했던 강증산과 관련한 선대 묘가 깃대봉 기슭에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회문산만이 아닌 순창에 명당이 많아 예부터 외지 세력가들이 묘지 명당을 많이 찾아 썼다. 그래서 생거부안(남원) 사거순창이라는 말이 보통명사가 될 정도다. 김두규 교수는 순창에 명당이 많아 풍수답사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만큼 이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묘지뿐 아니라 들판에 서 있는 석장승이나 남근석, 선돌, 정자, 전통 가옥, 서원, 향교, 사찰, 도시입지와 지명에 이르기까지 풍수와 관련된 명당들을 순창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복흥면 용지마을에 위치한 조선 성리학 대학자인 기정진의 할머니 묘, 복흥면 화용리와 쌍치면 보평마을에 있는 인촌 김성수의 9대조 묘와 증조모 묘, 복흥면 외양실에 있는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의 선조묘, 동계면의 논두렁 명당, 남원양씨 세거지인 동계면 구미리, 조선 최고의 정자 명당으로 꼽히는 귀래정, 팔덕면 산동리 남근석, 순창읍의 기울어진 진산을 바로잡기 위한 정자, 허한 쪽을 막아주기 위해 세운 순창읍 북쪽의 석장승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델을 갖고 있어 풍수지리의 산교육장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봤다. 물 좋고 산 좋은 곳이 많은 순창인 만큼 사거순창이 아닌 생거순창으로 바뀌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다. /김원용 선임기자

  • 기획
  • 김원용
  • 2021.09.02 16:48

[전북명산, 회문산의 속살] ⑤종교성지 : 민초들 삶 위로하고 새 세상 열고자 한 열망 간직

회문산을 흔히 호남의 영산(靈山)이라고 한다. 회문산이 품고 있는 종교적 신비스러움 때문이다. 실제 회문산을 성지로 여기는 종단이 여럿이다. 한 때 수십만 명의 신자를 뒀던 갱정유도회의 발상지가 회문산이며, 증산도에서는 지구의 아버지 산으로 회문산을 신성시 하고 있다. 회문산에 있는 만일사는 이성계의 조선건국과 관련된 설화를 간직한 사찰이다. 회문산 기슭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김대건 신부의 동생과 조카가 묻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종교와 사상은 달라도 민초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하고 새 세상을 열고자 했던 이들의 열망과 숨결을 회문산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갱정유도는 오늘날 일반에게 이름조차 생소하지만 광복 직후 한때 50만이 넘는 신자를 거느릴 만큼 교세를 떨쳤다. 갱정유도의 발상지가 바로 회문산이다. 순창 구림 출신의 강대성(1898~1954)이 회문산에서 수도하고 성도하고 또 교당을 짓고 포교활동을 했다. 유불선 합일의 신흥종교인 갱정유도가 널리 알려진 계기는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내면서다. 특히 1965년 신도 500여명이 흰 고무신과 갓망건에 두루마기 차림으로 중앙청 앞에서 벌인 시위는 당시 언론의 비아냥거림을 받으며 대서특필됐다. 이들은 미소를 멀리하고 남북한이 화합할 것과 우리의 미풍양속을 지키고 충효를 바탕으로 세계평화를 주장했다. 당시 당국은 미소를 멀리하자는 주장을 잘못 해석해 주동자들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했다. 이에 앞서 강대성 도조는 1954년 혹세무민과 대한민국 전복 혐의로 구속될 당시 심한 구타를 당해 사망했다. 이후 갱정유도 일부 신자들은 정권의 탄압을 피해 지리산 기슭 청학동으로 들어가 자급자족형 공동체를 만들었다. 방송 등을 통해 유명세를 탄 청학동의 김봉근 훈장도 갱정유도 신도로 알려져 있다. 종교연구가 김홍철 전 원광보건대 학장은 갱정유도를 보고 흔히들 시대에 뒤떨어진 종교, 문병의 배타지대에 사는 사람들, 신비를 좇아 사는 이방인이라고 하지만, 이들이야말로 진실로 천지만물과 인간을 사랑하며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실천하는 생활 속의 수도인들이요, 혼탁한 사회에 한줄기 맑은 샘물줄기로 생각한다고 평가했다.(<순창의 문화와 역사>에 게재한 회문산과 갱정유도에서) 교단의 쇠퇴와 함께 본부조차 남원으로 이전하면서 회문산은 발상지라는 이름만 갖고 있다. 향토사학자 박재순 순창문화원 사무국장은 어렸을 때만 해도 고유 한복을 입고 상투 튼 이들이 많았으나 지금은 그런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다고 했다. 강대성 도조가 수련하고 성도하며 포교했던 회문산 내 승강산에 있었던 초가삼간은 이미 오래 전 없어졌고 그 자리에 발상지임을 알리는 표지석만 세워져 있다. 강대성 도조의 아들인 강을선씨가 쌍치면 용전마을에서 발상지로 가는 길목에 경화궁 서당을 만들어 훈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강씨가 4~5년 전 작고하면서 이곳도 현재는 폐가로 방치된 상태다. 강대성 도조의 생가(구림면 봉곡리) 역시 터만 남아 있다. 남원 도통동에 있던 도조의 묘소는 몇 년 전 유족들이 생가 인근 선산으로 모셨다. 박재순 국장은 종단이 활성화 되지는 않았지만 한 종단을 탄생시킨 강대성 도조 묘소에 지난 역사를 기록한 묘비조차 없는 게 아쉽다고 말했다. 증산교 계열의 종교에서 회문산을 성지로 여긴다. 증산교 창시자인 강일순(호 증산, 1871~1909)이 회문산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면서다. 강증산은 회문산과 모악산을 부모산이라 하여 이곳을 바탕으로 천지공사(天地公事)가 펼쳐진다고 역설했다. 강증산은내가 이제 천지의 판을 짜러 회문산에 들어가노라. 천하대세를 오선위기의 기령으로 두 신선은 (바둑)판을 대하고 두 신선은 각기 훈수하고 한 신선은 주인이라고 했단다. 바둑판의 주인은 한반도, 대국과 훈수를 하는 신선은 주변 4대 강국을 의미한단다. 예부터 명당자리의 하나로 전해오는 오선위기혈을 세계정세로 파악, 한반도가 세계의 중심에 서고 회문산이 대 역사가 펼쳐지는 것으로 증산교는 해석했다. 강증산이 회문산을 찾아 오선위기 도수를 보러 왔다는 말은 전하고 있으나 그와 관련된 구체적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증산교 계열 신자들이 회문산을 성지로 보고 순례에 나서고 있으나 특정 장소를 기리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회문산 정상 가까운 등산로에 바위에 새겨진 천근월굴(天根月窟)이 증산도와 관련됐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도 있다. 참고로 강증산 제자로 한때 700만명이 넘었다는 보천교 교주였던 차경석은 자신이 거주하던 정읍 입암면 대흥리를 오선위기의 명혈이라고 했단다. 회문산은 박해를 받던 초기 천주교 신도들의 피신처이기도 했다. 박해를 피해 산중에 살았던 교우들이 신앙의 자유를 얻으면서 점차 산 아래로 내려와 회문산 일대 한때 58곳이나 되는 공소가 있었다고 한다. 1884년 작성된 교세통계표에 처음 등장하는회문산 공소 신자 수는 1883년 35명이며, 1894년에는 81명으로 나와 있다. 현재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쪽 회문산 중턱에 자리 잡은 한국의 첫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동생과 조카의 묘소가 회문산권 천주교 역사를 대변한다. 동생 김난식 프란치스코(1827~1873)와 7촌 조카 김현채 토마스(1825~1888)는 박해를 피해 현 묘소 아래에 교우촌을 형성하고 살았다. 그 교우촌이 먹구니였으며, 이는 먹을 만들어 생업으로 삼았던 데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두 분은 교우들과 함께 먹구니에서 1873년까지 화전을 일궈 조로 끼니를 때우며 굶주림을 극복했다. 또 토종벌을 치며 생계를 유지했으며, 구체적으로 벌 50통을 쳤다는 이야기도 구전되고 있다. 두 분이 살았던 먹구니 교우촌은 현재 사람이 살지 않아 무성한 나무들과 풀들로 덮여 있으나 당시 신자들이 살았던 흔적들이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박해시대 김대건 신부 집안은 전라도로 많이 내려와 살았어요. 특히 1866년 병인박해 때 논산 금산 고산 익산 부안 정읍 등지로 여러 집안들이 내려왔는데, 김난식 프란치스코와 김현채 토마스가 아무 연고도 없는 회문산에 내려왔을지 추적해봤어요. 박해시대 경계지역이 피난처로 많이 선택됐는데 회문산도 정읍 임실 순창 경계지역이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이들의 삶에서 드러나듯이 세속으로부터 벗어나 수도자처럼 살기 위해서였다고 봅니다. 이영춘 호남교회사연구소장(용진성당 신부)은 김현채를 기억하는 일은 순교자와 순교자적 삶을 함께 기억하는 중요한 자리매김이 될 것이며, 특히 동정부부로 산 삶은 전주 치명자산의 복자 유중철과 이순이 동정부부의 맥을 잇는 일이기도 하다고 평가했다. 두 분이 작고한 뒤 1899년 먹구니 교우촌에서 조금 떨어진 산내에 능교 공소가 생겼으며, 능교 공소는 지금까지 유지되는 회문산 자락의 가장 오래된 공소다. 천주교는 이를 기려 2007년 교우촌 영성센터를 건립했다. 이 소장은 천주교 교우촌은 박해시대 형성된 종교인 취락으로서 어느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취락형태를 갖고 있어 역사문화적 의미가 크다며, 이런 취락형태의 현장을 잘 보존한다면 역사문화적, 교육적, 관광문화적으로 훌륭한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 기획
  • 김원용
  • 2021.08.05 16:57

[전북명산, 회문산의 속살] ④순창의병, 전국 확산에 기폭제 역할

나라가 기울던 조선말에도 회문산은 격랑의 한복판에 있었다.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던 전봉준김개남손화중김덕명 장군이 회문산권 지역을 기반으로 혁명을 꿈꿨고, 전봉준김개남 장군이 혁명의 좌절을 맛보며 체포된 곳 역시 회문산 기슭이었다. 동학농민혁명 이후 일제의 침탈에 맞섰던 의병항쟁은 회문산권에서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항일의병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최익현 선생의 순창의병은 의병항쟁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데 기폭제 역할을 했다. 격동기 역사에서 첩첩산중의 회문산이 거악에 맞섰던 민중의 보금자리였던 셈이다. 회문산권 의병활동의 중심에 있었던 면암 최익현(1833~1906)이 누구인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를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됐을 때 조약의 무효화와 박제순이완용 등 을사 5적의 처단을 주장한 청토오적소(晴討五賊疏)를 올리며 위정척사와 항일의 선봉에 섰던 유학의 거봉이지 않던가. 그가 지역 연고가 없는 회문산권에서 의병활동을 하게 된 것은 정읍 태인(현재 산내면 종성리)에서 기거하던 군산 출신의 돈헌 임병찬(1851~1914)이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충남 청양에 머물던 면암은 충청지역에서 이미 민종식 등이 거병한 상태에 있어 영호남과 서로 호응해야 한다는 큰 그림 속에서 태인을 택했다. 면암은 1906년 3월 태인에서 임병찬을 만나 두 달 남짓 준비를 거쳐 그 해 6월 태인 무성서원에서 창의 구국을 결의한 뒤 의병부대를 편성해 순창으로 향했다. 순창에 입성할 당시 의병 수는 500명 정도였고, 곡성에서 무기와 병력을 증강시켜 순창으로 회군했을 때 의병은 900명으로 늘었다. 그러나 정부에서 지방군대인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를 출동시켜 공격하자, 면암은왜라면 마땅히 한 번 결사하여 보겠지만, 왜가 아니고 진위대 군사라면 우리가 위를 치는 것이니 어찌 차마 할 수 있겠느냐며 접전 중지를 명령하고 진위대에도 포위망을 풀 것을 종용했다. 의병진이 붕괴된 후 면암과 함께 끝까지 남았던 13인이 현장에서 체포되면서 막을 내렸다. 회문산권 의병은 짧은 기간에 규모도 크지 않았으나 면암의 상징성 때문에 전국 의병항쟁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일제는 최익현과 임병찬을 서울로 압송해 굴복시키려고 회유와 강박을 가했으나 굴하지 않자 이들을 일본 대마도로 데려갔으며, 최익현은 그 해 12월 순절했다. 이듬해 1월 시신으로 환국했을 때 민중들이 만기를 붙들고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면암과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의병 13인은 순창 13 의사로 기려지고 있다. 최익현의 거병에 중요한 역할을 한 분이 돈헌 임병찬이다. 낙안군수를 역임한 돈헌은 나라가 기울어지자 관직 제수를 거절하고 회문산 북쪽 기슭 정읍 산내면 종성리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돈헌은 학당을 지어 놓고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단순히 학문만 익히게 한 것이 아니라 활쏘기와 말타기 등 무예를 익히게 해 후일을 대비했다. 면암의 명성에 가려 있지만 면암 의병의 실질적 토대를 제공한 분이 바로 돈헌이었던 셈이다. 면암과 함께 체포돼 대마도로 유배됐던 임병찬은 이듬해 귀국해 회문산에 은거하면서 다시 후일을 도모했다. 그는 1912년 고종황제가 내린 밀명에 따라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고 전국 조직으로 확대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기밀이 누설되면서 체포돼 거문도에서 옥고를 치르다 1916년 순국했다. 지금도 회문산 중턱에 토성과 훈련장의 흔적이 있었으나 지금은 유적비와 조감도만이 당시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그의 무덤은 현재 순창 회문산 정상 부근 기슭에 있다. 춘계 양춘영(1875~1910, 자 윤숙)은 면암 의병진이 무너진 후 바통을 이어받아 회문산을 근거지로 항일투쟁을 벌였던 순창 출신의 대표적 의병이었다. 무성서원 거병부터 가담했던 춘계는 면암돈헌의 의병진이 무너진 후 1908년 의병대장으로 추대됐으며, 호남 각지와 향교에 통문과 의격문을 띠워 700여명의 의병을 선발했다. 그는 회문산 중봉 아래 돼지툼벙이라는 곳에 훈련장을 마련하고 1909년 12월 피노리 수비대에 잡힐 때까지 1년5개월간 유격전을 벌였다. 총 270정과 칼 300자루를 무장했다는 내용, 부하 최산흥으로 하여금 의병 40명을 이끌고 남원에 있는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했다는 등의 항쟁 사실이 재판기록으로 남아 있다.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는 한국이 일본 제국의 보호를 받음은 한국의 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일로 보고, 이에 불만을 품고 일본 수비대를 격퇴함과 함께 일본 관헌, 그밖에 일본인을 한국국외로 추방하고 또 한국정부를 개조하여 한국 정치를 변경할 것을 계획했다며 교수형을 선고했다. 1910년 전주감옥에서 처형된 춘계의 무덤은 인계면 도룡리에 있다. 순창군이 2000년대 중반 춘계 생가(구림면 국화촌)를 중심으로 의병공원을 추진하다 중단했으며, 춘계가 항일투쟁을 도모했던 회문산 기슭 의병훈련장도 현재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아 아쉬움을 준다. 순창의병에서 양춘영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의병장이 신보현(1868년~?)이다. 순창을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에서 활약했던 그의 가계나 성장 등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복흥면 출신들이 그의 휘하에서 대거 활약한 것으로 나와있어 복흥을 기반으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보현의 휘하에서 활동했던 의병 중 교수형 선고를 받거나 중형을 받아 옥고를 치른 의병이 줄잡아 10여명이다. 1907년부터 많게는 300여명의 의병을 이끌었던 신보현은 1909년 12월 정읍 석계촌에서 체포되면서 그에 대한 활동기록은 여기서 멈췄다. 면암돈헌 순창의병에서 양춘영과 신보현으로 이어지는 순창의 이런 의병활동은 전북에서 의병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으로 꼽힌다. 면암의 순창의병에 가담해 체포된 후 형을 받은 순창 출신 의병이 80명에 이르며, 그 중 교수형을 받은 의병만 7명이다. 양춘영, 신보현 휘하에서 활동했던 많은 의병들의 고초도 재판기록에 드러나 있다. 그러나 순창 의병 활동을 종합적으로 아울러 체계화시킨 연구가 미약하고 역사자원으로 활용하려는 노력 또한 미흡하다. 경술국치 후 독립의지를 다지며 쌍치면에 설립된 정자인 영광정(迎狂亭)이 전북도문화재자료로 지정 보존되는 정도다. 한 때 추진하다 중단했던 의병공원 조성 등에 관심이 요구된다. 회문산은 동학농민혁명의 좌절을 지켜본 곳이다. 동학농민혁명 총대장이었던 전봉준 장군이 관군에 체포된 곳이 회문산 아래 쌍치면 피노리다. 농민군의 또 다른 거두였던 김개남 장군 역시 피노리에서 20여리 떨어진 회문산 기슭 정읍 산내면 종성리에서 전봉준과 같은 날 체포됐다. 전봉준이 피노리로 간 것은 태인전투에서 패한 후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종성리에 숨어있던 김개남과 만나 재기의 기회를 노리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옛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전봉준이 관군에 잡힌 뒤 일본군에 넘겨져 서울로 압송돼 재판을 거쳐 효수형을 당했다. 서울 광화문에 세워진 전봉준 동상이 당시 압송과정에서 찍힌 사진이다. 전봉준 피체지인 피노마을에 녹두장군 전봉준관이 설립됐으며, 피노마을에서 구림면 금상마을까지 압송경로를 따라 둘레길이 조성됐다. 김개남 장군은 매부 집에 숨어 있다가 관군 80명의 급습으로 체포됐고, 재판도 받지 않은 채 전주 풍남문 밖 초록바위 부근서 처형됐다. 김개남의 소재를 밀고한 이가 바로 인근에 기거하던 임병찬으로 알려졌다. 척왜를 부르짖었던 동학농민군 지도자가 훗날 의병대장으로 항일투쟁에 나섰던 돈헌에게 고발됐다는 게 아픈 역사의 뒷면이 아닐 수 없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해서는 특별법 제정을 통해 명예회복과 국가기념일 지정이 이뤄졌고, 의병활동과 마찬가지로 참가자들에 대한 독립운동 서훈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김원용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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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22 17:50

[전북명산, 회문산의 속살] ③핏빛어린 회문산 - 화해와 상생의 길

한국전쟁 시기 회문산권 민간인 희생자 수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집계된 자료는 없다. 다만 전북도의회가 1994년 6.25양민 학살 진상실태조사에서 현장조사와 국회, 국방부 자료 등을 통해 전북지역에서 3956명의 학살된 양민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지역별로 1개 면(공음면)에서 576명이 집단 학살된 고창군(1418명)을 제외하고 순창군 (1028명), 임실군(928명)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온 것으로 집계했다. 정확한 수는 아니더라도 빨치산 전북사령부가 주둔했던 회문산권의 순창과 임실에서 피해가 컸음을 확인한 조사 결과다. 회문산권뿐 아니라 한국전쟁 전후 전국 곳곳에서 자행된 비무장 민간인들에 대한 집단 학살에 대한 진상은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2004년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가 발족되면서 그 진실이 조금씩 드러났다. 회문산권 민간인 피해가 좀 더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도 진화위의 조사를 통해서다. 회문산권 민간인 학살은 국군과 빨치산 양쪽에서 자행됨으로써 피해가 컸다. 특히 빨치산 토벌과정에서 국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가 많았다. 진화위는 순창지역 민간인 피해와 관련해 적대세력 사건과 민간인 희생사건으로으로 구분해 사실 관계를 규명했다. 진화위에서 조사한 순창지역 적대세력 사건의 경우 1950년 7월말부터 이듬해 5월까지 총 43명이 희생된 것으로 확인 또는 추정됐다. 전북도의회 조사에서는 279명이 희생된 것으로 집계됐는데, 이 차이는 진화위가 신청된 사건을 중심으로 조사했기 때문이다. 이들 희생자는 마을유지나 우익인사, 공직자, 군경 가족 등으로, 좌익과 빨치산에 의해 구타 또는 총살 등의 방법으로 학살당했다. 순창 주민들의 피해가 컸던 때는 국군이 빨치산 토벌을 위해 초토화 작전을 실시한(견벽청야작전) 1951년 4, 5월이었다. 빨치산은 당시 구림동계복흥쌍치 등 미수복지구 및 인근에서 주민들을 동원해 거점까지 식량을 운송하게 하고, 이 과정에서 우익인사들을 학살했다. 빨치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대부분 개별적으로 이뤄졌으나 구림면 운남리 방화천변에서 주민 40여명이 빨치산에 의해 총살당했다는 증언도 있다. 회문산권에서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은 보다 더 심각했다. 진화위는 1950년 11월부터 이듬해 말까지 국군과 경찰에 의해 공비토벌작전과 빨치산 거점 제거를 이유로 적법한 절차 없이 순창군 민간인 129명이 살해됐다고 밝혔다. 진화위는 이 숫자가 신청사건을 중심으로 조사한 것이며, 유족이 타 지역으로 떠났거나 일가족이 몰살된 경우도 많고, 아직도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사건 신청을 하지 않은 사람도 많기 때문에 실제는 이를 훨씬 상회하는 수 백여명에 이를 것으로 보았다. 사건 당시 군경은 민간인과 빨치산을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빨치산에게 협력했다고 의심되는 주민들을 무차별하게 사살하여 작전상의 위험을 제거하고 공비토벌의 전과를 극대화하려는 전략을 구사했으며, 그에 따라 많은 주민이 희생됐다고 진화위는 판단했다. 사실상 군사요원이 될 수 없고 정치사회 활동을 하지 않은 여성과 어린이, 노인이 절반 가까이 달했다. 조사 과정에서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가족 전원을 몰살하거나 민간인의 귀를 잘라 전과를 보고과시하는 야만적 행위가 있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은 대부분 집단 학살로 나타났다. 순창읍 순화리와 남계리, 팔덕면 청계리 강천마을, 복흥면 답동리에서 각 30여명이 희생됐다. 특히 군경의 수복이 늦고 빨치산 출몰이 잦아 토벌작전이 오래 지속된 쌍치면 일대에서는 각 마을마다 10~30명씩 광범위하게 희생된 것으로 진화위는 판단했다. 군경과 빨치산 양쪽의 경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회문산권 주민들로선 선택지가 없었던 게 당시 상황을 경험한 사람들의 진화위 증언에서 알 수 있다. 그때 군인에게 잡히면 죽는 줄 알았다. 피난을 가지 않으면 마을에 출몰하는 빨치산은 반동이라 했다. 살기 위해 피난을 안 갈 수 없었다. 군인은 피난 가는 사람을 빨치산측 사람으로 생각했다. 마을에서 젊은 사람만 보이기만 하면 죽였다. 교전과정에서 국군이 사망하는 경우가 생기면 군인들 눈빛이 달라져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사람들을 죽이고 다녔다. (민간인 20여명이 희생된 쌍치면 전암리 오류마을 황기봉 옹 진술). 쌍치면 전 가옥을 소각했다. 토벌작전에서 빨치산과 민간인에 대한 구별이 어려워 마을에 남은 주민은 빨치산으로 간주했다. 정보장교나 하사관에 즉결권을 줘 살해한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았다.(1951년 공비토벌작전에 참여했던 당시 국민방위군 특별소대장 증언) 집을 그냥 두면 빨갱이들이 집에서 잠을 자고 활동을 하니까 그걸 막기 위해 집을 태워야 한다며 집집마다 돌아다니면 불을 질렀다. 그 때 우리 집에도 불을 질렀고 아버지가 물동이에 물을 따다 끼얹으며 불을 끄려하자 총을 쏴 죽였다(쌍치면 용전리 양촌마을 오석기 옹 진술) 전주 방면에서 회문산으로 가는 통로인 임실군 덕치면 암치마을에서는 어처구니 없이 주민 모두가 학살됐다. 당시 10살이었던 이 마을 박한영씨(41년생)에 따르면 마을에 살던 점쟁이 집에 빨강 깃발이 꼽아져 있어 빨갱이 마을로 간주하고 국군이 주민 49명을 당산나무 아래서 총살했단다. 1950년 음력 동짓달 닷샛날이었다. 피난을 떠나 불행을 면한 그가 3년 뒤 마을로 돌아오니 20여호에 이르던 집이 모두 불에 탔더란다. 마을에 사는 희생자 유족 2명이 재출범한 2기 진화위에 뒤늦게 올 진실 규명을 요청한 상태다. 빨치산에 의해서든, 군경에 의해서든 회문산권 민간인 희생은 전쟁이 나은 민족의 비극이었다. 사건 현장에서 살아난 생존자들과 희생자 유족들이 겪은 정신적 피해는 실로 컸다. 연좌제에 걸려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다. 구림면에서 만난 한 증인은 다른 가족의 빨치산 연루 의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가 3번이나 군대에 자원입대했으며, 자신 역시 그 굴레를 벗기 위해 타 지역으로 유학을 가서 공부했으나 공기업은 물론 대기업 취업조차 막혔다고 술회했다. 회문산권 희생자 유족들은 이렇게 속울음을 삼키며 70년 세월을 건너왔다. 다행스러운 것은 당시 역사를 두고 주민 모두가 피해자로 생각하기에 별다른 지역사회 갈등을 겪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회문산의 빨치산 역사는 여전히 어둠 속에 갇혀 있다. 2005년 회문산에서 열렸던남녘 통일 애국열사 추모제에 학생들을 인솔하고 참석했던 임실지역 한 중학교 교사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뒤 대법원 재판거래 의혹까지 낳을 만큼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빨치산 사령부 재현 건물이 철거되고 회문산 역사관이 그 자리를 메꿨다. 회문산 일대에서 진행됐던 통일교육 연수나 학생 백일장도 자취를 감췄다. 회문산 역사관 한켠에 보일 듯 말 듯 자리한 빨치산 사령부 모형물과 양민희생자 위령탑, 비목공원만이 당시 역사를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회문산 빨치산 문제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회문산 빨치산 관련 독립적인 학술대회 한 번 개최되지 않았다. 제대로 된 역사관을 만들려는 노력도 보이지 않는다. 회문산에서 활동했던 빨치산과 토벌과정에서 많은 주민들이 희생된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진실규명과 기억의 장이 마련돼야 할 것이다. /김원용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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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08 17:45

[전북명산, 회문산의 속살] ②핏빛 어린 회문산-산이 기억하는 빨치산

한국전쟁 당시 종군기자로 빨치산에 가담했던 이태(1922~1997)는 저서 <남부군>에서 토벌군의 공격을 받고 후퇴하면서 수 개월간 의지했던회문산에 대한 소회를 이렇게 적었다. 이태가 1988년 내놓은 수기 형식의 <남부군>은 회문산을 일약 빨치산 활동의 중심무대로 올려놓았다. 그때까지 빨치산 관련 이야기는 토벌군 입장에서 소수 소개됐고, 이 또한 토벌군에 쫓기며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지리산권 중심으로 다뤄졌다. 참여정부 때 진실화해위원회가 발족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 규명이 이뤄지며 빨치산 관련 사실들이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남북분단 아래 이데올로기적 제약 등으로 빨치산 관련 문제는 지금도 어려운 숙제다. 특히 본의든 아니든 빨치산과 연루돼 오랫동안 고통을 겪어온 회문산권 주민들에게 빨치산 이야기는 상처일 수밖에 없다. 빨치산에게 보금자리였던 회문산이 정작 지역민에게는 아픔의 산이 된 셈이다. 회문산 빨치산 활동이 시작된 것은 1948년 10월 여순사건과 관련돼 있다. 제주도 4.3항쟁 진압에 반대하며 일어났던 여순 봉기사건 참여자들이 진압을 피해 지리산 회문산 덕유산 등으로 들어가 유격 투쟁을 벌인 것이다. 6.25 이전 입산한 이들이 구 빨치산이다. 6,25 전까지 회문산 주변 산악지에서 활동하던 구 빨치산은 토벌 작전으로 거의 진압 단계 있었으나 전쟁 발발 후 세력을 확대했다. 회문산이 빨치산 본거지로 전면에 등장한 것은 9.28 서울 수복 이후다. 9, 28 서울 수복 후 조선노동당 각 도당 위원회 조직이 모두 산악지대로 이동했고, 전주에 있던 전북도당도 이즈음 회문산으로 들어갔다. 전북도당 유격사령부가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회문산 인근 순창군 구림면 여분산 골짜기로 전해진다. 이태는 <남부군>에서 전주에서 대피해온 도당 간부들을 중심으로 인근 쌍치 구림 팔덕 덕치 운암 강진 청웅 태인 등의 민청원, 여맹원 등 300여명이 풀밭 둘레에 초막을 지었다고 당시 사령부 모습을 소개했다. 전북도당 위원장 겸 유격대 사령관은 경남 거제 출신의 방준표(1906~1954)였다. 그는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월북한 후 모스크바 유학을 다녀온 중앙당의 신임을 받은 엘리트 당원으로, 1954년 덕유산에서 토벌대에 체포되기 전 수류탄으로 자폭한 것으로 알려졌다. 도당 사령부는 이후 회문산 기슭으로 옮겨 세를 확대시켰다. 회문산에서 활동한 빨치산 수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평균 대략 400~500명 정도로 추산된다. 빨치산이 가장 득세했던 1951년 2월경에 그 수가 1000명을 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전북도당은 여러 차례 조직을 바꿨다. 전성기 때는 병단체제로 운영하며 탱크 병단까지 뒀다. 전투부대와 별도로 사령부에 병원과 피복과 병기제작을 담당하는 기구에다 노령학원이라는 정치군사 훈련소를 뒀다. 또 현재 회문산자연휴양림 입구 안시내 마을에서 생산된 창호지로 당보인 <전북도당통신>를 발간했다. 사령부 연예대가 농가의 넓은 마당에 가설무대를 만들어 모닥불을 피우고 위문공연을 벌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회문산 빨치산들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한 게릴라 전술로 통신 체계를 교란하고, 관공서 습격과 우익세력 살상, 좌익 사상 선전교육 등을 벌였다. 전북도의회가 1994년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구림 동계 복흥 쌍치 등 순창 4개면에서 빨치산에 의해 279명이 희생됐다. 공산치하 인민군이 점령했던 순창경찰서만 해도 수복 10일만에 빨치산에 의해 두 차례나 전소됐다. 회문산 빨치산에 의한 순창지역 피해 상황은 순창문화원이 발간한 <내가 겪은 6,25>(1988)에 생생히 전해진다. 순창이 고향인 김병로 대법원장의 부인도 부산으로 간 가인과 떨어져 친정인 순창 인근 담양에 머물다 빨치산에게 총살을 당했다. 현직 대법원장 부인이 빨치산에게 희생당했다는 사실은 한국전쟁의 비극을 보여줌과 동시에 가인의 공인 의식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한인섭 서울대 교수는 저서 <가인 김병로>에 적고 있다. 빨치산이 발호하면서 군경의 토벌작전도 강화됐다. 최덕신 사단장이 이끄는 11사단은 남원에 사령부를 두고 1950년 11월부터 1951년 3월까지 견벽창야(堅壁淸野)(말썽의 소지가 있는 곳을 초토화)라는 작전을 수행했다. 군경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견디지 못한 전북도당 사령부는 회문산을 탈출해 운장산으로 거점을 옮겼다. 이 때가 1951년 3월로, 6개월여의 빨치산 회문산 시대가 사실상 막을 내렸다. 전북도당은 이후 1951년 7월 덕유산 6개 도당회의를 거쳐 이현상이 이끄는 지리산을 거점으로 한 남부군 산하로 흡수돼 활동을 계속 이어갔다. 회문산 빨치산 잔당 활동은 56년 서남지구 공비토벌작전을 통해 마침표를 찍었다. 회문산 빨치산 활동으로 인한 회문산권 주민들의 피해는 컸다. 9.28 서울 수복 이후에도 빨치산으로 인해 쌍치 등 일부 회문산권 지역은 미수복지구로 남아 군경과 빨치산 사이 교전이 지속됐다. 순창 관하 전지서가 완전 수복된 것이 1952년 2월이었다. 미수복지구 주민들은 살아남기 위해 빨치산에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 과정에서 국군과 빨치산 양쪽으로부터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특히 군경에 의한 순창지역 희생자가 1028명으로, 빨치산에 의한 희생자보다 훨씬 많다는 게 전북도의회 조사 결과다. 지금의 회문산에서 빨치산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당시 빨치산이 만들었을 방호나 초소 모습은 오간데 없다. 다만 능선을 따라 나뭇잎으로 두텁게 쌓인 곳을 어렴풋이 방호가 아닐지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회문산이 빨치산 무대였음을 알려주는 것이 회문산 휴양림 안에 설치된 회문산역사관과 위령탑, 비목공원 정도다. 회문산 역사관은 90년대 후반 빨치산 사령부가 사용했던 지하 벙커 모습으로 만들어졌으나 빨치산 관련 유물은 아예 없다. 사령부 모습을 짐작케 하는 작은 부조물 하나가 고작이다. 그 곁에 빈틈을 노리는 국가안보의 위협을 111로 지켜주세요라고 적힌 국정원 홍보판이 서 있다. 영화촬영지에 대해 흔히 지방자치단체에서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홍보하지만, 회문산에서 영화 <남부군> 촬영지라는 안내판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빨치산 활동에서 비롯된 회문산의 비극을 그저 부끄러운 역사, 감추고 싶은 역사로만 치부하는 안타까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그 역사를 정면으로 마주할 때도 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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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원용
  • 2021.06.17 16:32

[전북명산, 회문산의 속살] ① 프롤로그 - 굴곡진 근·현대사 품은 산, 그 깊은 상흔을 다시 본다

회문산은 전북 16개 산이나 포함된100대 명산 명단에도 올리지 못할 만큼 전국적인 인지도가 낮다. 기본적으로 산 규모와 절경 등 외형적인 부분에서 특별히 내세울 게 없어서다. 그러나 회문산은 근현대의 굴곡진 역사와 애환을 고스란히 담은 산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어느 산천인들 당대 사람들의 애환을 간직하지 않을까마는 회문산은 그 이상의 아픔과 상처를 묻고 있다. 본보가 회문산에 주목한 이유다. 동학농민혁명을 이끌었던 전봉준김개남 두 지도자가 회문산에서 혁명의 꿈을 접었고, 임병찬양춘영을 중심으로 한 구한말 의병활동의 근거지가 회문산이었다. 또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전북도당 유격대 사령부가 자리 잡아 700여 빨치산들이 오랫동안 저항했던, 분단의 비극을 안고 있는 산이다. 이 정도 규모의 산 중에서 이리 파란만장한 한국 근현대사를 겪은 곳도 많지 않을 터다. 산 규모도 크지 않고, 험준하지도 않은 회문산이 왜 근현대사 사건의 중심에 있었을까. 기본 배경은 약자들이 숨기 좋은 지리적 위치와 지형에 있다. 회문산은 주봉인 회문봉(큰지붕, 837m)을 중심으로 장군봉깃대봉 등 많은 연봉으로 둘러싸여 있다. 동서 8㎞, 남북 5㎞에 걸쳐 순창 구림면쌍치면복흥면, 임실 덕치면강진면, 정읍 산내면이 연접해 있다. 국사봉 성미산 무직산 여분산 내장산 추월산 등 산봉우리들이 사방으로 첩첩이 옹위하고 있어 피신 및 은신처로 좋은 여건을 갖춘 것이다. 회문산이 근현대사의 여러 사건 중에서도 잘 알려진 것은 빨치산 활동무대로다. 빨치산 무대로 각인된 나머지 지역민들에게 회문산은 자긍심보다 오히려 외면하고 싶은 대상일 수 있다. 빨치산의 성격 여부를 떠나 빨치산과 군경에 의해 많은 양민 희생자가 발생했고, 지금도 온전히 털어내지 못한 상처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문산이 빨치산 무대로서만 역사성을 갖는 장소가 아니다. 회문산은 빨치산 활동 훨씬 이전부터 이 일대 주민들의 소중한 삶의 터전이었다. 회문산에 얽힌 여러 설화들이 이를 말해준다. 오늘날 전국 최고를 자랑하는 순창고추장과 관련한 만일사 설화가 대표적이다. 고려 말 이성계 스승인 무학 대사가 조선 건국을 위해 만일사에서 1만 일 동안 기도할 때 이성계가 만일사로 가던 중 순창의 한 농가에 들러 고추장 맛에 반해 고추장을 진상토록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진위와 상관없이 오랫동안 명성을 이어온 순창고추장의 역사성을 풍성하게 해주는 설화다. 회문산은 예부터 명당자리가 많은 영산으로 풍수가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18세기 초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풍수가사 <회문산가>에 회문산 24혈(穴)이 기록됐다. 그 중 다섯 신선이 바둑판을 둘러싸고 있는 형상(오선위기형)을 증산도 창시자인 강증산이 으뜸으로 꼽아 더욱 유명해지면서 지금도 풍수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회문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물론, 정상까지 곳곳에 수많은 무덤을 볼 수 있다. 그 폐해를 떠나 명당에 대한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들여다보게 한다. 회문산 곳곳에 종교 성지가 자리하고 있다. 모악산을 어머니 산으로 여기는 증산도는 회문산을 아버지 산으로 여겨 도인들이 치성을 드린다. 인근 여분산은 한 때 50만 신도로 위세를 떨쳤던 갱정유도교의 발상지다. 천주교 전래 초기 박해를 받을 당시 교인들의 피난처가 회문산 자락 정읍 산내면 종성리였으며, 그곳에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의 친동생 김난식과 조카 김현채의 무덤이 있다. 회문산을 말할 때 섬진강을 빼놓을 수 없다. 회문산 북쪽 산기슭의 물은 옥정호를 이루고, 남쪽 산기슭의 물은 구림천을 통해 섬진강 본류로 합해진다. 회문산을 휘어 감고 도는 섬진강 지천과 본류는 회문산을 자연경관적으로 더욱 돋보이게 한다. 속울음 지으며 견뎌온 아픔의 땅, 종교 성지, 명당의 영산, 섬진강을 뒷배로 한 독특한 경관. 회문산은 이렇게 천의 얼굴을 하고 있다. 어떤 위치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회문산의 모습은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다. 본보는 새 세상을 열고자 했던 열망의 근거지로, 이념 대립의 첨예한 현장으로, 지역민의 삶의 터전으로서 풍부한 역사문화적 자산을 품고 있는 회문산에 대해 재조명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기획은 10회에 걸쳐 격주로 게재할 예정이다. 연재 계획 -1회 프롤로그 - 2회 핏빛 어린 회문산-산이 기억하는 빨치산 - 3회 -화해와 상생의 길 -4회 동학농민혁명, 의병 활동 무대 -5회 종교의 성지 -6회 명당 자리가 있다? -7회 전설과 설화, 그리고 오늘 -8회 문화예술 속에 담긴 회문산 -9회 회문산의 오늘-자연생태계, 시설물 -10회 회문산의 미래-지역 역사자원으로 활용 방안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 기획
  • 김원용
  • 2021.05.31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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