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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미래속의 태권도원-⑤에필로그] 진정한 '태권도 성지' 되려면 대승적 자세 필요

지라도가 다 해 먹는다미국 태권도계에서 들을 수 있는 속된 표현이다.지라도란 지도관과 전라도의 합성어다. 따라서 지라도가 다 해먹는다는 말은 전라도의 지도관이 미국에서 큰 위세를 떨치고 있다는 뜻이다. 지난 6월 콜로라드스프링스에서 열린 태권도한마당 대회에서도 한글로 지도관이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은 검은 얼굴, 흰 얼굴의 태권도인들이 적잖게 눈에 띄었다.사실 지도관은 엘리트 출신의 전상섭에 의해 조선연무관이라는 이름으로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전상섭의 동생 전일섭 관장에 의해 전주를 중심으로 전북에서 꽃을 피웠다. 전북의 태권도는 일찍부터 대타(對打)를 중시해 태권도의 경기화를 선도했으며, 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전국체전 금메달을 거의 휩쓸었다.이처럼 전북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태권도의 종주도이다. 국내외적으로 그 흔적이 뚜렷하다. 따라서 도내에 태권도원이 들어선 것도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그러나 올해 문을 연 태권도원은 유치열풍에 휩싸였던 10년 전의 조감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지역발전을 견인할 큰 그림을 기대했지만, 별다른 관광매력성도 없고 관심도 끌지 못하고 있다.무엇보다도 자립 운영에 대한 미래 전망이 회의적이다. 그러다보니 입장료가 너무 비싸다, LG나 삼성 등의 연수원처럼 운영하려는 것이냐는 등의 말들이 나오고 있다. 태권도원을 널리 알리고 홍보하는데 주안점을 두기보다는 운영비 마련에 급급한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제한된 방문객을 대상으로 우선 입장료부터 챙기거나, 대상을 가리지 않고 단체로 숙박 손님을 챙기려는 듯한 모습 등이 그 것이다.미국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이상철 관장은 세계의 태권도인들을 향해 왜 태권도원에 와봐야 하는지 이유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운영주체는 우선 당장의 필요에 급급하고 있다며 세계인들을 초청하려면 세계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나라의 정서와 문화도 알아야 한다. 여러 나라의 사범들에게서 좋은 아이디어를 받아서 운영해야 한다고 말했다.태권도 관련 기관들의 대승적인 자세와 희생도 필요하다. 국기원과 세계태권도연맹은 원활한 업무처리와 세계화 지향 등을 핑계로 태권도원으로 이전을 꺼린 채 국기원의 연수기능만 이전할 태세다.미국대학태권도연맹 회장을 지낸 박용진씨(전 아이오와주립대 교수)는 세계태권도연맹을 태권도원 밖에 두는 것은 먼 훗날에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지금은 우리나라 사람이 회장을 맡고 있으니까 그럴 일 없겠지만, 유럽이나 미국 사람이 회장이 돼서 원활한 업무처리를 이유로 유럽이나 미국으로 사무실을 옮기겠다고 하면 막을 방법이 없다. 태권도의 성지인 태권도원에 사무실이 있어야만 이를 막을 수 있다며 국기원과 세계태권도연맹, 대한태권도협회 모두 무주 태권도원에 들어가야 한다. 이들 기관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오면 호텔도 짓게 되고, 지역사회에서 먹고 자게 된다. 그렇게 돼야 태권도원이 살 수 있다. 태권도 종주국은 한국이다. 성지를 만들었으면 거기 들어가서 일을 하고 해야만 올바르게 커갈 수 있다고 말했다.우석대 태권도학과 최상진 교수도 국기원과 대한태권도협회, 세계태권도연맹 등 관련 기관이 이전해야 한다는데 적극 동조했다. 그는 또 (현재로서는) 태권도원에 한 번 더 올만한 필요성을 못 느낀다. 태권도학과가 있는 도내 대학들과 연계하고, 온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생활체육으로서 태권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생활체육의 발전없이 엘리트 체육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오클라호마 털사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하는 강동원 사범은 프로태권도 경기화에 관심이 매우 높다. "태권도가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프로태권도가 생겨나야 한다"는 그는 태권도원에 와서 보니 태권도경기장 등에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너무 부족하다. 장애인들도 제약없이 태권도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태권도가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도 제한과 차별없이 태권도를 배우고 익힐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정부는 2011년 국가브랜드 10대 과제로 태권도의 명품화를 내걸었고, 올 들어서는 아리랑, 한글과 함께 태권도를 한류문화 확산을 위한 3대 문화브랜드로 선정했다. 그러나 정부가 말로만 태권도를 팔고 있을 뿐 실제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게 많은 태권도인들의 불만이다. 〈끝〉

  • 태권도
  • 이성원
  • 2014.10.08 23:02

[3부 미래속의 태권도원 - ④ 지역 관광자원 연계] "태권도원 중심축, 동부권 발전계획 착실하게 준비해야"

막대한 예산이 투입된 태권도원이 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관광자원화가 이뤄져야 한다. 볼 것도, 배울 것도, 느낄 것도 별로 없는 그저 그런 시설이라면 관광객들의 발걸음은 점차 사라지고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멀어질 것이다. 단순한 행사 등을 유치해서 그 때 그 때 사람을 끌어 모으는 것도 한계가 있다. 관광매력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행사는 일회성에 그칠 뿐 아니라 다른 자치단체 등과의 갈등 소지도 안고 있다.그러나 관광자원화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기에는 부족하다. 주변과 연계되지 않고 홀로 동떨어진 관광자원만으로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다. 지역내 문화관광자원과 유기적으로 결합돼야 시너지 효과가 높아지고 지역에 도움이 될 수 있다.10년 전인 2004년 12월 30일 무주군이 태권도원 조성 후보지로 최종 확정되자 강현욱 지사는 태권도원과 연계한 전북도 차원의 동부권 발전전략을 적극 추진하겠다는 뜻을 곧바로 밝혔다. 태권도원과 장수 경주마목장, 남원 통합문화권, 섬진강 영상벨트를 연결하는 개발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도내 서부권이나 중부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된 동부권을 발전시키겠다는 구상이었다. 태권도원이 동부권 발전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동부권의 발전이 궁극적으로 태권도원 운영에 도움이 되는 그림을 그린 것이다.박근혜 정부의 생각도 비슷했다. 새누리당은 대선 공약으로 지리산덕유산권 힐링 거점 조성사업을 제시했고, 지난해 1월 전북에서 열린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한 황우여 대표는 대선 과정에서 전북 동부권에 특별한 애정을 갖고 두 번 돌았다며 무주 태권도원 조성 사업에 대해 공약 이상으로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그러나 전북도의 동부권 균형발전 의지는 지금까지 가시화된 것이 거의 없고, 현 정부의 지리산덕유산권 힐링거점 조성사업도 알맹이 없는 구두선에 그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현 정부 출범 2년이 되도록 구체적으로 이뤄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은 전문가들은 지금부터라도 태권도원과 연계시킬 수 있는 동부권 발전계획을 착실하게 준비하고 추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자치단체들은 현재 태권도원과 지역내 문화관광자원의 연계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펼치고 있다. 무주군은 태권도원과 덕유산리조트, 구천동 관광특구, 머루와인동굴, 적상산 등 지역내 관광자원을 잇는 투어버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고, 지역축제 및 행사 때에는 태권도원과 연계한 프로그램을 확대 운영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전북도도 △지평선축제 등 도내 주요 축제와 연계한 관광상품화 △비빔밥, 한정식, 홍삼 등과 연계한 식도락 관광상품화 △한옥마을, 백제역사유적지구, 군산근대역사 등 역사관광상품화 등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또 내년부터는 전주 한옥마을과 태권도원을 연결하는 셔틀버스를 운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이러한 노력들이 단기적으로는 나름의 성과를 낼 수 있지만, 태권도원의 발전과 지역관광 활성화에 장기적으로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물리적 거리가 멀지 않은 상황에서 연결고리 역할을 할 공통점이 없기 때문이다.전북태권도협회 고봉수 전무는 전주 한옥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을 태권도원으로 유도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태권도에 대해 뭔가 보여주고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며 한옥마을내 태권도 상설 시범공연 등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한옥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단순히 무주에 가면 태권도원이 있다, 셔틀버스를 연결해주겠다는 내용이 아니라 관광객들이 태권도의 우수성과 신비로움을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껴 태권도원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60, 70년대 전국대회를 휩쓸었던 태권도 종주도로서 전북도가 가진 자원을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전북도태권도협회 황영택 고문은 현대의 태권도는 전주의 지도관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 중심에 전일섭 관장이 있다. 해외에 있는 제자들도 거의 대부분이 전일섭 관장의 제자들이다며 전일섭 관장의 역사전수관을 지어 스토리를 개발하고 관광자원화해야 한다고 말했다.태권도 전북지도관 지우회장을 지낸 전북도의회 강영수 의원(환경복지위원장)은 태권도의 본향인 전주 한옥마을 인근 승암산이나 위봉산성 등에 태권도 전수관을 지으면, 무주 태권도원과 연계해 시너지 효과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마룻바닥에 옛날처럼 지붕도 만들고, 단련봉도 만들고, 나무로 평행봉도 만들고, 깡통 역기도 만들어놓고, 추운 겨울에도 맨 마룻바닥에서 운동하도록 하는 등 옛날의 태권도인들이 산과 자연속에서 운동했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각종 프로그램을 운영하자는 주장이다.

  • 태권도
  • 이성원
  • 2014.10.01 23:02

[3부 미래속의 태권도원 - ③ 지역관광자원화] 태권전·명인관 빨리 완공, 수양 프로그램 다양화 관건

태권도원은 우리 민족의 긍지요, 전세계 7000만 태권도인들의 자랑이다. 국적과 인종, 나이를 막론하고 태권도인들이라면 누구나 일평생에 한번쯤은 다녀가는 성지가 되어야 한다. 태권도원을 통해 태권도의 심오성과 탁월성을 몸으로 느끼고 태권도인으로서 무한한 자부심을 갖는 그런 장소가 되어야 한다.그런데 태권도원을 다녀간 국내외 많은 태권도 사범들은 태권도원이 서울에서 너무 먼 곳에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서울에서 가까운 수도권에 있으면 각종 사무처리가 간편한데, 지방에 있다보니 오가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이다.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서울에서 그리 먼 거리가 아닌데도, 많은 태권도인들이 무주 태권도원을 실제 이상으로 오가기 귀찮은 먼 곳으로 인식하는 것은 지극히 수도권 중심적인 사고와 사무처리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국기원이나 대한태권도협회, 국제태권도연맹 등 태권도 유관 기관들이 태권도원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하고 서울을 고집하고 있는 것도 수도권 중심 사고에 얽매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많은 태권도인들이 태권도원을 먼 곳으로 인식하는 또 다른 이유는 태권도원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각종 대회개최 등 행사나 연수 위주로 프로그램이 운영되다보니 꽉 짜여진 시간대로만 움직일 뿐, 사색하고 고뇌하며 정신을 수양할 겨를이 별로 없다.그러나 태권도원은 단순히 태권도 관련 행사나 치르고 사무만을 처리하는 곳이 아니다. 태권도인들의 마음의 고향이 돼야 한다. 마음이 공허하고 복잡할 때면 언제라도 찾아가고 싶은 곳, 그 곳에서 자신의 원초적인 본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 그래서 찾아가면 갈수록 더욱 가보고 싶은 곳, 그런 곳이 돼야 한다. 종교인들이 예루살렘을 대하듯이, 태권도인들의 마음이 항상 태권도원을 향해 있어야 한다.미국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거주하는 이상철 사범은 태권도원은 발차기 등 기술을 배우는 게 아니라 역사와 문화와 정신을 배우고 가슴을 채울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태권도에 대해 신비로움과 경외로움을 느끼고 마음의 공허함을 채움으로써 정신적 성숙을 느끼는 곳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실제로 무주 태권도원은 태권도의 신비와 심오함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심산유곡에 자리잡고 있다. 앞으로는 구천동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줄기가 사시사철 졸졸졸 흐르고, 백운산 줄기에서 내려오는 영기가 항상 태권도원 전체를 감싸고 돈다. 태권도원 위치로는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자리이다.그러나 현재의 태권도원은 가장 중요한 용(龍)의 눈이 빠져있다. 바로 태권전과 명인전이 있는 상징지구다. 태권도의 형체는 있는데 정신은 없는 꼴이다. 태권도인들의 성금으로 완공키로 했지만, 현재의 추세로는 사실상 불가능하고, 정부의 특별법 제정도 차일피일 미뤄지며 터덕거리고 있다.이런 상황에서 태권도원이 태권도인들의 마음의 고향이자, 정신적 안식처가 되기는 어렵다. 하루 빨리 명인전, 태권전이 완공되고, 태권도인들의 정신수양을 위한 다양하고 의미있는 프로그램들이 개발 운영돼야 한다. 그래야 전세계 태권도인들이 태권도원을 더 찾게 되고 태권도원이 무주의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국내외 많은 태권도 사범들도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면서 정신을 수양할 수 있는 그런 프로그램이 만들어져야 하고, 정기적으로 업그레이드돼야 태권도원에 태권도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물론 태권도원은 해외 태권도인들 만을 위한 배타적인 공간은 아니다. 태권도와 상관없는 일반인들도 누구나 쉽고 편안하게 다가가 태권도를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태권도인들뿐만 아니라 일반 관광객들을 유인할 수 있는 다양한 관광, 체험시설들이 마련되고 운영돼야 한다.무주군도 태권도원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각종 행사때마다 참석자들을 대상으로 관광 셔틀버스 등을 이용해 와인동굴, 적상산 등 인근의 관광자원을 소개하고 있다. 또 관광기념품 개발, 태권도 노래, 성지방문의 해 추진 등 올해의 관광도시와 연계한 다양한 사업도 구상하고 있다.그러나 태권도원이 관광거점이 되기 위해서는 전통무예 중심지로서 각종 콘텐츠를 발굴하고, 지역특화발전특구로 만드는 등 보다 확장된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전발연 김형오 연구위원은 지난 2월 무주에서 열린 한국관광학회 전북학술대회에서 기존의 특구제도는 태권도라는 테마를 수용하기 어렵다"며 테마형 사업특구로 지정받아 사업 활성화를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 태권도
  • 이성원
  • 2014.09.24 23:02

3부 미래속의 태권도원 - ② 해외관광객 유치 활성화

문화체육관광부는 올초 교육부와 함께 한 대통령에 대한 업무보고에서 한글과 아리랑, 태권도를 3대 문화 브랜드로 삼아 한류 확산의 첨병으로 삼겠다고 발표했다. 4월의 태권도원 개원과 5월 아리랑 대축제, 10월 국립한글박물관 개관에 맞춰 정부차원의 특별 홍보를 추진하겠다는 내용이다. 예정된 행사일정에 맞춘 것이긴 하지만, 정부가 태권도를 3대 대표 문화 브랜드로 삼았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아그레망 없는 외교대사로 해외 태권도 사범들이 그동안 외국에서 한국을 알리고 한국의 위상을 드높이는데 기여해 온 공로를 인정한 것이다.세월호 비극의 여파로 애초의 행사일정은 상당히 틀어졌다. 무주 태권도원도 애초 예정보다 4개월 여 늦어진 지난 9월 4일 태권도의 날에 맞춰 개원했다. 이날 개원식에는 국무총리와 여야 국회의원, 조정원 세계태권도연맹회장, 그리고 국내외 태권도 사범 등이 함께 했다.외양적으로는 화려한 행사였지만, 사실은 관중없는 무대나 마찬가지였다. 태권도원 개원 행사가 국내외적으로 만족할 만큼의 관심을 끌지 못했기 때문이다. 태권도원 개원이 애초 4월 24일에서 9월로 미뤄지면서 태권도원을 홍보할 시간이 그만큼 늘었지만, 행사에 초청된 인사들 이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언론의 관심도 그다지 끌지 못했고, 축제 분위기를 느끼기에도 미흡했다.태권도원은 우리나라의 대표 브랜드의 하나이자 전세계 8000만명이 즐기는 태권도인들을 위한 성지로 만들어졌다. 전세계의 태권도인들이 국적과 인종, 나이를 초월해서 모두가 찾을 수 있는 정신적인 고향이다. 종교인들의 마음이 예루살렘을 향하듯 전세계 태권도인들의 마음이 향하는 곳이다.이날 개원식을 앞두고 태권도진흥재단과 무주군, 전북도가 태권도원을 알리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해왔다. 해외사범 초청과 각종 대회유치, 그리고 인터넷과 SNS를 활용한 홍보 등이 그 내용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 비해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몇 년 전 분석에서 2016년 이후 태권도원을 방문하는 관광객이 연간 195만 명에 달하고 생산유발효과는 4809억원, 고용유발효과는 2874명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현재의 추세라면 2년 뒤부터 이 같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하기 어렵다. 각종 대규모 대회를 유치해서 관광객 숫자를 채운다고 하더라도 실제적인 경제적 효과를 따지면 무의미한 수치놀음에 그치기 쉽다.물론 이 같은 사정이 단순히 홍보부족 때문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애초 계획했던 3500여억 원 규모의 민자유치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데다 상징지구(명인전, 태권전) 건립도 미뤄져 관광매력성이 크게 떨어졌다. 각종 운영 프로그램이나 관광 기념품 등의 개발도 신통치 않고, 운영방식도 관료주의의 태를 벗지 못하고 있다. 국기원과 세계태권도연맹, 대한태권도협회 등 유관기관의 협조도 그다지 원활하지 않다.태권도원이 해외 관광객들로부터 각광 받으려면 그동안의 잘못을 바로잡고 부족한 부분을 충실하게 채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내외 태권도 관련 인사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미국대학태권도연맹 회장을 지낸 박용진 전 교수(아이오와주립대 체육과)는 몇 년 전에 태권도원에 가봤는데 진입로가 너무 좁고 구불구불 하더라. 겨울에 눈이 오고 길이 얼면 매우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로 확장과 정비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태권도인 출신의 강영수 전북도의회 환경복지위원장은 경기화된 태권도도 중요하지만 태권도의 세계화는 무도의 신비에서 나왔다. 해외에서 태권도의 정착을 위해 노력한 지도자들의 숭고한 노력을 인정해주고 예우해주면서 함께 가야 한다. 경기화만으로 태권도의 인기가 오래 가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콜로라도주 이상철 사범(전 미국태권도협회 회장)은 태권도원은 올림픽에 나가서 메달을 따려고 하는 사람들보다는 태권도를 무도로 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그런데도 진흥재단은 미국태권도협회의 내셔널 매치 행사에 찾아가서 디너 리셉션을 베풀어주면서 태권도원으로 오라고 홍보한다며 엉뚱한 다리를 긁지 말고 제대로 알고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이상철 사범은 또 한국에서 하는 반 공짜 형태의 각종 태권도행사가 태권도를 망치게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 사범들이 돈을 걷어서 아이들을 한국에 데리고 가서는 공짜로 먹여주는 행사로 며칠간의 일정을 때운다. 한국에서는 사람 숫자 채워주니 좋다고 하지만, 결국 욕먹는 것은 전북과 태권도원이다.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지만, 장기적으로는 태권도의 발전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며 결국은 콘텐츠로 승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태권도인들의 정신적 공허함을 채워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개발하고, 이를 계속 업그레이드시켜 나감으로써 한번 온 사람이 다시 찾는 태권도원이 돼야 한다는 지적이다.뉴욕주 박연희 사범은 한번 참가한 사람들이 소문을 내고 다시 가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프로그램도 2~3년마다 바꿔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각 나라마다 홍보대사를 선정해서 인센티브를 줘라. 미국같이 큰 나라는 주별로 홍보대사를 선정하면 된다. 잘 하는 사람에게 더 대접해라고 조언했다.

  • 태권도
  • 이성원
  • 2014.09.17 23:02

3부 미래속의 태권도원 - ① 태권도원 유치과정·의의

2004년 해넘이를 이틀 앞둔 12월 30일 오후 3시, 무주군청 앞에는 3000여명의 군민들이 모여 북과 괭가리를 치고 환호성을 지르며 잔치를 벌였다. 태권도 종주국의 자존심을 세워 줄 전세계 7000만 태권도 수련인들의 성지(聖地)를 무주군 설천면 백운산 일대에 조성하기로 결정됐기 때문이다. 태권도공원추진위원회 이대순 위원장은 이날 (가칭)태권도공원 부지 선정을 위한 심사평가 결과 무주군 설천면 일대가 3개 우수 후보지 중 1위로 평가됐다고 발표했다.그로부터 정확히 10년이 흐른 2014년 9월 4일, 무주 태권도원이 역사적인 개원식을 갖는다. 지난해 개원할 예정이었으나 사업이 늦어져 올 봄으로 연기됐다가 세월호 사건의 여파로 이제서야 열리게 됐다. 9월 4일은 세계 태권도인들의 단결과 태권도 위상강화를 위해 세계태권도연맹(WTF)이 정한 태권도의 날이다. △태권도원의 태동태권도의 성전을 조성해야 한다는 말은 90년 초반기부터 나왔다. 북한이 92년 평양시 청춘거리에 부지면적 6만㎡, 연건평 1만8000㎡ 규모로 태권도 전당을 완공하자, 이에 자극받은 우리나라 국기원과 대한태권도협회 등이 자체적으로 태권도 성전을 세워 추진하려 했다. 태권도의 주도권을 북한에게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던 것이다.97년에 대한체육회의 건의에 따라 문광부가 건설계획을 검토하기 시작하자 무주군 등 자치단체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2000년 4월 문광부가 태권도공원 기본계획을 확정 발표하자 당시 김세웅 무주군수는 곧바로 간부회의 석상에서 후보지 물색을 지시했다.△유치노력과 과정유치 과정은 쉽지 않았다. 전국의 자치단체들이 유치경쟁에 돌입해 점차 열기가 과열됐다. 도내에서도 무주와 진안, 완주, 익산 등 4개 자치단체가 유치신청에 나섰고, 무주군은 승산을 높여야 한다며 전북도에 도내 후보지 단일화를 제안했다. 전북도의 주도로 그해 9월 무주군이 도내 단일후보지로 선정됐으나, 일부 태권도인들이 전북도의 단일화 결정에 반발하며 진안군을 지원하고 나섰다. 이런 가운데 전국적인 유치열풍이 도를 넘어섰다고 판단한 문광부는 11월에 태권도 공원 사업을 원점에서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04년 7월, 문광부는 태권도공원 사업을 재개했다. 공모결과 전국적으로 17개 자치단체가 신청했다. 물론 그중에는 무주군도 포함됐다. 무주군으로서는 기다리던 때가 온 것이었다. 2000년 문광부가 태권도 공원 사업의 전면 재검토를 발표했지만, 무주군은 태권도공원 조성사업만큼은 국가적으로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사업이라고 판단했다. 태권도는 우리나라를 종주국으로 하는 유일한 세계적 스포츠 종목이고, 태권도의 위상이 세계적으로 갈수록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무주군은 정부가 사업의 유보를 발표했을 때에도 내부적으로는 각종 정보를 수집하고 후보지 장소를 물색하는 등 나름의 준비를 충실하게 해왔다.△동계올림픽과 빅딜설이러한 노력 등으로 무주군은 문화관광부 실무위원회 심사에서 1차 관문을 무사히 통과했다. 이제 남은 경쟁자는 경북 경주시와 강원 춘천시 두 곳으로 압축됐다. 피 말리는 경쟁이었다. 1차 심사에서 무주군은 1000점 만점에 1.5점이라는 근소한 차이로 경주시에 이어 2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3위 춘천시와는 다소의 점수차가 있었지만, 문제는 경주시와의 경쟁을 뒤집는 것이었다.일부에서는 동계올림픽 국내 유치후보지와 태권도 공원의 빅딜(Big Deal)설도 흘러 나왔다.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국내 후보지 결정 과정에서 2010년 동계올림픽은 강원도, 2014년 후보지는 전북으로 전북과 강원도가 이미 합의했으나 강원도는 2010년 대회 유치에 실패하자 합의를 깨고 다시 2014년 대회유치 경쟁에 나서고 있는 상황이었다. 빅딜설은 정부가 강원도와 전북도에 각각 동계올림픽 후보지와 태권도 공원 후보지를 나눠줄 수 것이라는 그림이었다. 전북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던 경주지역에서 먼저 제기했으며, 두 개 사업 모두가 문광부 소관이기 때문에 더욱 그럴 듯하게 보였다. 전북도와 무주군은 이를 일축했다. 국제기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빅딜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전북도는 동계올림픽 국내 후보지 선정을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발표했다.△무주 유치 확정이런 상황에서 무주군은 태권도 공원 유치를 위해 마지막까지 힘을 쏟고 있었다. 상대 후보지를 방문해 장단점을 분석하는 등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작업을 계속했고, 무주IC에서부터 후보지 입구까지 도로에는 무주 유치를 염원하는 내용의 프랑카드를 수없이 많이 내걸었다. 특히 코흘리개 꼬마부터 촌로들까지 전 주민이 동참해 무주 유치의 소원을 담은 쪽지 표어를 진입로 양편의 나무에 걸어놓은 모습 등은 평가위원들에게 감동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최종 발표에서 무주군은 831.53점을 얻어 823.87점을 얻은 경주를 7.66점 차이로 누르고 유치성공의 감격을 맛볼 수 있었다. 그로부터 4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2009년 9월 4일, 문광부는 태권도의 날에 맞춰 진흥재단과 세계태권도연맹, 대한태권도협회, 국기원 등 4개 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공식을 가졌다.△의의태권도원의 무주 유치 결정은 단순하게 이뤄진 게 아니다. 종합적인 판단에서 가장 빼어난 곳으로 무주가 선정된 것이다. 실제로 무주군은 최종 심사에서 4개의 평가분야 중 부지의 적합성과 국토의 균형발전, 자치단체지역역량 등 3개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그 어느 곳 보다도 태권도에 대한 경외감과 신비감을 심어줄 수 있는 빼어난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는데다 남한의 배꼽 지점에 위치해 있어서 전국 어느 지역에서도 접근이 쉽다. 또 도내의 실정에서는 상대적으로 낙후된 동부권 발전의 구심축 역할을 할 수 있다.태권도는 단순히 여러가지 스포츠 종목의 하나가 아니다.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린 한류 열풍의 원조이자 우리 민족의 자부심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브랜드로 성장해야 하며, 그 중심에는 당연히 태권도원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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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원
  • 2014.09.03 23:02

2부 세계속의 태권도 - ⑥무주 태권도원, 해외사범들 기대와 열망

다음달 4일이면 무주 태권도원이 공식적인 개원식을 갖는다. 1주일여 남았다. 애초 지난 4월로 예정됐으나 세월호 사건의 여파로 미뤄졌다. 9월 4일은 태권도의 날이다. 1994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103차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날짜다. 세계 태권도인들의 단결과 태권도의 위상 강화를 위해 2006년 7월 25일 베트남 호치민시에서 열린 WTF(세계태권도연맹) 정기총회에서 이날을 태권도의 날로 정했다.태권도의 날을 맞아 무주 태권도원이 개원식을 갖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태권도의 날 제정 취지에 맞게 무주 태권도원이 세계 태권도인들의 단결과 태권도의 위상을 높이는 태권도의 성지가 돼야 한다.그러면 무주 태권도원에 대해 해외 사범들은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있을까? 그동안 문체부나 태권도진흥재단, 전북도 등의 초청으로 적지 않은 해외 사범들이 무주 태권도원을 다녀갔다. 이들은 태권도원이 정부의 많은 예산투자로 좋은 시설을 갖췄다는 데는 대부분 동의한다. 또 무주 태권도원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의 국기 태권도가 세계 속으로 더욱 발전해 나가길 기대하는 마음도 똑같다. 태권도원이 세계 태권도의 심장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그러나 당장 눈앞에 닥친 무주 태권도원의 운영문제에 대해서는 후한 점수를 주기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또 태권도원이 태권도 발전을 위한 구심체로서의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고개를 가로 젖는 사범들이 많다. 외형으로 보이는 하드웨어에 비해 운영체계, 즉 소프트웨어가 너무나 부실하고 준비가 덜 됐다는 것이다.미국 대학태권도연맹 회장을 지낸 박용진씨(전 아이오와 주립대 체육과 교수)는 태권도원이 제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국기원과 대한태권도협회, 세계태권도협회(WTF) 등 태권도 관련 단체들이 태권도원내로 빨리 이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자와 함께 미국 콜로라도 스프링스에는 OTC(Olympic Training Center올림픽훈련센터)를 방문한 그는 OTC에는 미국내 모든 종목의 연합회가 들어와 있어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다. 그런데 한 때 이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지역사회에서 사전에 알고 모금운동을 통해 지켜냈다. 태권도원도 마찬가지로 관련 단체들이 모두 들어와야 한다. 그래야 외국에서도 태권도원을 인정하고 먼 장래의 발전을 내다볼 수 있다. 자기들이 필요하다고 주장해서 태권도원을 만들어놓고 이제와서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생활의 불편에 따른 기득권만을 주장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오클라호마 털사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하는 강동원 사범은 시설은 더 할 나위 없이 잘 지어졌다면서도 태권도원과 해외 사범들이 서로 상생해야 하는데 그런 부분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태권도원을 찾는 학생들이 즐겁고 행복하고 사범들이 기분 좋아야 하는데, 현재는 눈앞에서 손 비비고 명예를 찾는 사람들만 대접해 주고 있다고 꼬집었다. 정부가 태권도원만 만들어놓고 운영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 아니냐는 그는 태권도원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것도 해외 사범들에 대한 보답이라고 말했다.임피 출신의 김삼장 사범(74)도 정부의 태도와 관료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그는 태권도를 전혀 모르는 관료조직이 태권도원을 운용하다보니 상부의 눈치만 살필 뿐, 태권도인들의 요구에 부합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읍 출신의 박연환 사범(62)은 태권도원이 전북에 세워진 것은 전북 도민들에게 큰 흉복이라며 전북 사람들이 주인의식을 갖고 홍보도 하고 아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해외뿐만 아니라 국내 관광객들도 많이 찾을 수 있도록 전북에서 더욱 노력해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그는 또 태권도원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사범들을 잘 대우해 주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유명한 사범들만이 아니라 시골의 한 구석에서 온 작은 도장의 사범들이라도 자신들의 학생들 앞에서 최고로 대접을 해줘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한 가지 사례로 자신의 도장에서 학생들이 연습하는 모습 등을 태권도원에서 영상으로 틀어주며 사범들을 대접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태권도의 성지에서 자신의 도장 영상물을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영광이냐는게 박 사범의 설명이다. 박 사범은 태권도원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의 자세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학생들 앞에서 항상 흐트러지지 않고 경건하고 성스러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만경 출신의 이상철 사범은 대기업의 연수원으로 쓰려고 태권도원을 만든 게 아니다며 천주교인들에게 로마 교황청을 바라보듯이, 태권도인들에게는 태권도원이 그런 의미를 지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태권도원을 갔다오면 뭔가 공허함을 채우고 정신적으로 성숙해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한 번, 두 번, 세 번, 가면 갈수록 뭔가 신비롭고 경외스러운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난과 역경이 있어야 하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아무 도장에서나 할 수 있는 것을 태권도원에 가서 또다시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했다.이상철 사범은 또 문체부와 태권도원이 몇몇 사람의 말만 듣지 말고 해외 사범들의 폭넓은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손님을 초청하면 주인의 입맛에 맞춰 음식을 차리느냐, 손님에 맞추느냐?며 올 사람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미국, 소련, 중국, 일본, 아프리카 등 세계 각국의 사범들의 아이디어를 받아서 제대로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진흥재단 이사진에는 왜 이름내는 사람들만 들어가야 하느냐? 해외 인사들도 들어가야 하고, 태권도원의 발전을 누구보다도 바라는 전북인들도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박용진 전 회장은 손님을 맞으려면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도 제대로 신경을 써야 한다며 몇 년 전 태권도원을 방문했을 때 겪었던 일을 소개했다. 외국인과 한국출신 사범들을 모아놓고 45분 동안 한국어로 설명하고 나서 마지막에 가서 Do you have any question?하고 묻더라는 것이다. 외국 사범들이 당황하고 어이 없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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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원
  • 2014.08.27 23:02

[민족의 얼 태권도, 세계속의 태권도원] 2부 세계속의 태권도-⑤세계인이 즐긴다

태권도는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건강을 가져다줍니다. 상대를 존중하고 이해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좋은 친구(good friends)를 사귀는데도 도움이 됩니다지난 6월 미국 콜로라도 스프링스에서 열린 태권도 한마당에 참가한 에릭 홉스(Eric Hobbs, 55)씨는 부인 및 딸과 함께 온 가족이 8년째 태권도를 즐기는 태권도 가족이다. 온 가족이 함께 이번 대회에 참가했지만 그 목적은 서로 다르다. 그는 격파 부문 선수로 참가해서 금메달을 땄고, 딸 줄리아나(Juliana, 13)는 자원봉사자로 활동했으며, 부인은 가족들을 뒷바라지 했다. 목적은 서로 달랐지만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태권도가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참가한 데이비드 쉐델(David Seidel, 11)은 품새 부문에 참가해 금메달을 따냈다. 태권도를 시작한지 3년 됐으며, 빨강띠를 매고 검은띠와 겨뤄서 이겼다. 그러나 그보다 더 기쁜 것은 태권도를 통해서 아들이 변화한 것이라고 아버지 데이비드(51)는 말한다. 아버지 데이비드는 미육군 소속 장병으로 한국과 중동 등 해외근무를 오래했다. 그러다보니 아들의 학교생활은 엉망이었다. 어려서부터 왕따를 당했고, 집중력이 떨어져 성적도 바닥이었다. 도무지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았는데, 태권도를 가르친 이후 정신력과 집중력이 좋아지면서 태도가 몰라보게 좋아졌다. 호신술을 배우면서 다른 사람을 존중하게 되고, 자신감을 갖고 친구들을 사귀게 됐다는 아들 쉐델은 태권도를 즐기면서 배운다(fun and learning)며 이러한 자신의 모습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노스캐롤라이나에 거주하고 있는 크리스티나 페레카(Christina Feraca, 50, 여)씨는 25세 때부터 25년 동안 태권도를 연마했다. 간호사로 일하면서 일주일에 3~4차례씩 운동을 한다는 그녀는 이번 대회 파워 격파 부문에서 은메달을 땄다. 태권도의 장점은 건강과 자기확신, 긍정적 사고, 리더십 등이라고 말했다.지난 7월 무주 태권도원에서 열린 태권도문화엑스포에 참가한 대학생 댄드리지 도미니크(Dandridge Dominique, 19)씨는 어려서부터 뭔가를 해보고 싶다고 느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것이 태권도였다고 말했다. 다섯 살 때 두 사람이 태권도 동작을 하는 것을 우연히 보고 너무 멋있다고 느꼈었다는 그는 이번 대회에 소아과 의사인 엄마 멜린다이(Dandridge Melindai, 39)와 함께 왔다. 그의 엄마는 원래 다른 운동을 하다가 그가 태권도 유단자가 된 것을 계기로 태권도로 종목을 바꿨다. 태권도의 매력에 푹 빠졌다는 그녀는 진료 과정에서도 행동이 나쁘거나 정신집중이 잘 안되는 아이들이 있으면 태권도를 적극 추천한다고 말했다.호주에서 참가한 쥴리어스 뷰레이(Julius Burai, 76)씨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동안을 지니고 있었다. 애초에 유도를 하다가 태권도의 스피드와 박진감, 스릴에 반해 태권도로 전향한지 37~38년째 됐다는 그는 태권도는 강한 정신과 극기심을 심어준다. 몸과 영혼을 함께 단련시킬 수 있는 운동으로 자기 수양에 정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호주에서도 태권도의 인기가 매우 높다고 소개하며, 5~6만 명 정도의 수련생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맬버른에 있는 5개의 도장에 16~170명의 유단자가 있는데, 그중 70명 정도가 성인이라는 그는 호주에서는 나이든 사람도 태권도를 많이 한다고 말했다.전 세계 200여개 국가에 7000만 명의 수련생을 가졌다는 태권도는 이제 전 세계인이 즐기는 스포츠가 됐다. 오대양 육대주 어느 곳에도 태권도가 발붙이지 않은 곳은 없다. 인종도 나이도 국적도 성별도 가리지 않는다. 그 어느 종목에 비해 인기도 높고, 태권도 사범들에 대한 예우도 깍듯하다. 단순한 기술만이 아닌 정신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의 태권도는 이제 하나의 운동 종목을 넘어 교육제도로 정착되고 있다. 수련생들은 도장을 들어설 때 누가 보든 안보든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고개를 숙인다. 사범이나 관장 등을 만나면 그 자리에 멈춰서 두 다리를 모으고 공손하게 경례를 한다. 미국에 있는 태권도 사범들이 태권도를 하나의 교육체계로 만들어 잘 가르쳤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창 출신의 이현곤 사범은 자신을 사부라고 칭한다. 아버지처럼 가르치는 스승이라는 뜻이다. 정읍 출신의 박연환 사범도 전미국 태권도교육재단 상임이사 겸 고문으로 태권도를 미국 공립학교에 보급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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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원
  • 2014.08.20 23:02

[민족의 얼 태권도, 세계속의 태권도원] 2부 세계속의 태권도-④전북출신이 위상 드높여

알제리, 미국, 벨기에,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 일본, 브라질, 프랑스, 영국, 호주.브라질에서 열린 2014년 월드컵에 출전했던 나라들이 아니다. 지난 7월 무주 태권도원 태권도경기장 천장에 나부꼈던 태권도문화엑스포 참가국들의 국기다. 이들 나라 이외에도 카자흐스탄, 홍콩, 파키스탄, 태국, 말레이시아, 코트디부아르, 필리핀, 캐나다, 중국, 네팔 인도, 뉴칼레도니아, 이집트, 핀란드, 마카오 등 20여개 나라의 국기가 행사장을 장식했다. 태권도는 이제 우리나라를 넘어서 전 세계가 즐기는 운동이 됐다.태권도가 이처럼 전 세계적으로 번창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올림픽 정식 종목화이다. 태권도는 88 서울 올림픽과 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시범종목에 이어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했다. 그러나 이 과정이 쉽진 않았다. IOC 프로그램위원회 위원들이 태권도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데다 북한계 태권도인 국제태권도연맹(ITF)과 일본 가라데의 지속적인 반대공작도 있었다.정식종목 채택을 위해서는 먼저 프로그램위원회를 통과해야 했는데, 프로그램위원회는 전체 21명의 위원중 11명 이상의 동의를 한다. 그런데 태권도는 93년 열린 프로그램위원회에서 찬성 9, 반대 11로 1차 실패를 맞봤다. 따라서 시간이 촉박했다. 올림픽 규정에 의하면 정식종목은 올림픽 개최 6년전까지 결정돼야 한다. 따라서 태권도가 2000년 정식종목이 되기 위해서는 늦어도 94년 파리총회에서는 통과돼야 했다.이런 상황에서 당시 IOC 부위원장이자 세계태권도연맹 총재를 맞고 있던 김운용씨는 미국에 있는 정읍 출신의 박연희박연환 형제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형인 박연희 사범이 경기준비위원장, 동생인 박연환 사범이 부준비위원장을 맡아 93년 9월 미국 뉴욕의 메디슨 스케어가든에서 세계선수권대회를 개최하게 된다.메디슨 스퀘어가든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뉴욕의 대표적인 명소다. 엘비스 프레슬리나 마돈나의 공연이 열린 곳이고, 클린턴과 고어가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선후보 경쟁을 벌인 곳이기도 한다. 경기장 노조가 매우 강력해서 대관때 까다로운 규칙을 모두 따라야 하고, 의자나 시설물 하나라도 옮기려면 돈을 내야 했다. 어지간한 단체들은 이 곳에서 대회를 개최할 엄두도 못내는 곳이다.이런 곳에서 동양무술로는 처음으로 대회가 열리다보니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게다가 ABC 뉴스 스포츠에서도 1시간 동안 태권도 대회를 방영했는데, 시청률이 상상을 초월했다. 사실 이 대회를 개최한 것은 정식종목화에 부정적인 일부 위원들에게 태권도의 본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설득하기 위한 것이었다. 박씨 형제는 정식종목화에 부정적인 모든 위원들을 융숭히 대접하고 이해를 구했다. 국내 일부 기업들의 후원도 있었지만, 형인 박연희 사범이 당시 돈으로 10만 달러, 동생인 박연환 사범이 12만 달러를 충당했다. 대회의 성과는 충분했다. 미국에서 태권도의 열기와 붐을 직접 확인한 위원들은 태권도의 정식종목화를 더 이상 반대하기 어려웠고, 이는 94년 총회때 태권도의 정식 종목화에 큰 기여를 하게 됐다. 사실 전북출신 태권도인과 올림픽의 인연은 깊다. 1988년 서울올림픽 시범종목 때는 김제출신의 이상철 사범이 단장, 박연환 사범 부감독겸 코치를 맡아 미국 여자팀이 세계 1위, 남자팀이 2위를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또 고창출신의 박동근 사범은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미국 태권도 대표팀 코치를 맡았으며, 군산출신의 전영인 사범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미국 대표팀 헤드코치를 맡아 미국팀이 금메달을 따내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박동근 사범은 또 93년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세계 선수권대회 미국 대표팀 헤드코치, 94년 미국과 러시아대항 대회 미 대표팀 수석코치, 99년 독일 스투가르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 헤드 코치 등을 맡아 지도자로서 이름을 날렸으며, 미국 태권도 고단자회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도 했다.종주국인 한국에서의 태권도는 이제 정체기 또는 침체기라고 할 수 있다. 엘리트 선수들은 세계대회에 나가서 그다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도장의 난립과 원생의 감소 등으로 태권도 사범들의 벌이도 예전만 못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와는 달리 세계적으로는 태권도가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고 있다. 세계 태권도대회가 열리지 않는 나라가 거의 없고, 태권도의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는 것은 물론 대부분의 나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인기있는 스포츠로 대접받고 있다. 미국에서는 뉴욕, 뉴저지, 메사츄세츠, 플로리다, 워싱턴 스테이트 등 200여개 공립학교에서 정규 체육과목으로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다. 태권도가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서 교육적으로도 유익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무주에서 열린 세계태권도문화엑스포에 지도자로 참가했던 러시아인 마르킨 세르게이(Markin Sergei, 46)는 자신의 종아리에 태권도라는 글자를 문신으로 새기고 있다. 원래 복싱을 하다가 89년부터 태권도로 전향했다는 그는 러시아인이 좋아하는 스포츠 중에 스키, 바이애슬론 다음이 태권도다. 자기를 보호하고 서로 존중하는 운동이 태권도다며 러시아 정규학교에서 태권도를 가르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 태권도
  • 이성원
  • 2014.08.13 23:02

[민족의 얼 태권도, 세계속의 태권도원] 2부 세계속의 태권도-③ 해외 개척 및 정착

태권도가 언제부터 국제적으로 진출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베트남의 고딘디엠 대통령이 1957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 장병들의 태권도 시범을 보고 매료돼 시범단을 초청했고, 그 뒤 64년에 우리 정부가 의무부대와 태권도 교관단을 베트남에 파견한 것이 태권도 해외진출의 공식적인 시작으로 알려지고 있다.그러나 비공식적으로는 유학이나 이민 등 개인적인 사유로 일찍부터 미국에 거주하던 한인 태권도 수련생들이 공원 등에서 태권도를 연마하고, 이러한 모습이 미국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미국땅에도 태권도가 알려지게 됐다.1960년대 초반부터는 주한미군 장병들이 한국 사범들을 초청해 미군부대에서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우리지역 군산에서도 지도관 김혁래 사범의 지도로 수 천 명의 미공군들이 수 년 동안 태권도를 배울 수 있었다.태권도 사범들의 미국 진출이 활발하게 된 것은 1965년 하트-셀러법(Hart-Celler Act)이 발효돼 이민 문호가 넓혀지면서부터다. 이때에도 일반인들에게는 미국으로 가는 길이 제한적이었지만, 태권도 사범들은 현지에 정착한 선배 사범들의 초청이나 태권도 유관기관의 추천을 받아 미국땅을 밟을 수 있었다. 또 정부 주도의 해외사범 파견 사업으로 미국뿐만 아니라 동남아나 아프리카, 유럽 등 세계 전역으로 태권도 사범들이 진출하게 됐다.전북출신 태권도인들이 미국 등 세계로 진출한 것은 대부분 60년대 중반 이후부터다. 전계배 사범은 미국 정부의 초청으로 1968년 미국에 건너가 태권도를 지도하기 시작했고, 박연희 사범은 일본을 거쳐 73년에 미국에 정착했다. 태권도를 보급하기 위한 미국내 전반적인 분위기는 괜찮았다. 대도시내 높은 범죄율로 인해 호신술의 필요성을 느끼는 시민들이 많았고, 이소룡이 출연하는 액션영화가 미국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동양무술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그러나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돈이 없어 가난한데다 언어소통마저 제대로 안되니 관원모집이 쉽지 않았다. 수련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길거리나 대형마트 앞에서 격파 등의 시범을 보이며 눈길을 끌어야 했다. 술집 등을 찾아다니며 깡패들과 일부러 시비붙어 싸우는 사범들도 있었다. 게다기 일찍부터 미국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던 가라데의 견제도 만만치 않았다.조그마한 덩치의 동양인들을 우습게보고 시비를 걸거나 도전해오는 동네 왈짜들도 적지 않았다. 78년에 아프리카 레소토 공화국에 파견됐다가 형 박연희 사범의 초청으로 80년 미국에 건너와 뉴욕에 정착한 정읍시 감곡면 출신의 박연환 사범(62)의 사례다.헬스를 많이 해서 근육질인 덩치 큰 학부형이 있었는데, 어느 날 주먹대결을 신청해왔다. 3번 만에 주먹으로 자신을 때려눕히면 패배를 인정하겠다는 것이었다. 두 대까지 때려보니 어찌나 근육이 발달했던지 주먹이 튕겨 나올 정도였다. 학생들이 모두 보고 있는데 난감했다. 여기서 지면 창피를 당하고 곧바로 도장 문을 닫아야 할 판이었다. 그래서 꾀를 냈다. 상대가 힘을 주고 있으면 도저히 쓰러뜨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눈속임 동작으로 상대가 힘을 빼는 순간을 노려 한 방을 날렸다. 그대로 쓰러졌고 그는 곧바로 항복했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을 나의 노예(servant)라고 자청하며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도와줬다76년 선배의 초청으로 미국에 건너온 고창군 해리면 출신의 이현곤 사범(66)은 79년 버지니아주 헌돈시에 정착할 당시의 어려움을 이렇게 이야기 했다.거처도 정하지 못하고 친구 부부의 단칸방 아파트에 한달 남짓 얹혀 살았는데 관원이 겨우 15명 정도였다. 모은 돈이 없어 분할상환을 조건으로 도장을 인수했는데, 종일 도장에 나가 있어도 수련에 대한 문의는 한 건도 없었다.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고민 끝에 학생들에게 내가 처한 상황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매일 한 사람이 광고전단지 10~20장씩을 복사해오고, 송판이나 블럭을 가져오도록 했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광고전단을 돌리고,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장소에서 격파시범을 했다. 장소사용 허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 등으로 쫓겨나기도 했다.김제 만경 출신으로 75년 결혼하자마자 부인과 함께 미국에 건너와 박연희 사범 집에서 3개월간 신세를 지기도 했다는 이상철 사범은 영어도 못하고 돈도 없어서 정신병원에서 청소부로 시작했다. 한달 급여가 400달러였는데, 그 자리마저 100달러의 커미션을 주고 들어갔다. 돈을 벌기 위해 토요일과 일요일 초과근무를 자청해서 주7일 청소하면서 600달러씩을 모았고, 빈 시간에는 미국인이 운영하는 도장에서 파트타임으로 태권도를 가르쳤다. 이렇게 마련한 자금으로 2000달러를 주고 뉴욕에서 자동차로 4시간 정도 걸리는 빙햄턴이라는 곳의 도장을 인수했는데, 60~70명이라던 관원은 열 댓 명도 안됐다. 알고 보니 그 동네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가라데 도장이 있었는데, 일본인 관장이 매일 아침 TV에 출연해서 호신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요소 요소에 인맥도 두터워 거물로 대접 받고 있었다.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생각도 해봤지만, 대한민국 태권도 국가대표까지 지낸 사람으로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더욱이 전문가의 눈으로 보니 일본인이 가르치는 호신술이라는게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가라데를 이겨야겠다고 생각하고 바로 옆으로 도장을 옮겼다. 운동화끈을 조여매고(무단 가택침입으로 총 맞을 수도 있었다) 아침 일찍 가라데 도장을 찾아가 다음에 만나자는 약속을 받아냈다. 몇 차례 만남이 이어진 뒤에는 기자들을 한 자리에 초청해서 자선사업을 명분으로 맞장을 뜰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일본인은 눈치를 챘는지,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작전을 바꿔서 그 일본인이 자신만이 할 수 있다는 호신술을 TV에서 선보이면, 빨강띠 대학생을 시켜서 대학 체육관에서 똑같이 시연하는 작전으로 갔다. 가라데 호신술이라는 것이 별 것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고, 결국은 가라데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이상철 사범은 "도장내 창고 비슷한 작은 방에서 한국식으로 밥을 해먹고 1년 정도를 살았다. 된장 끓이는 냄새가 미국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면서 손짓 발짓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회고했다.60년대부터 우리나라 태권도가 미국에 진출했다고 하지만 태권도라는 이름을 쓴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대부분은 가라데 또는 코리안 가라데라는 이름으로 관원을 모집했다. 미국인들의 눈에는 태권도와 가라데, 쿵후의 차이를 느낄 수 없었던데다 가라데가 일찍부터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권도라는 이름을 떳떳하게 내걸고 운동을 시작한 것은 70년대 중반쯤부터며, 전북출신 사범들이 비교적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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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원
  • 2014.08.06 23:02

[민족의 얼 태권도, 세계속의 태권도원] 2부 세계속의 태권도-①US 오픈 태권도 한마당 대회

어린이들,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여성 남성, 흑인 백인 황인, 모두가 함께 어울렸다. 지난 6월 21일과 22일 이틀 동안 미국 콜로라도주 콜로라도 스프링스(colorado springs)시 아레나 경기장에서 열린 US오픈 태권도 한마당 2014대회에는 미국 전역에서 찾아온 1500여명의 선수들이 한데 어우러져 땀 흘리고 웃음을 나누며 우애와 화합을 다졌다.대회는 유년부, 어린이부, 10대 초반, 10대, 성인, 장년, 노년 등 연령층과 급 및 단 등 수준별로 나눠 열렸으며, 품새와 격파를 개인과 단체전으로 나눠 다양하게 실시됐다. 또 격파에서도 주먹으로 내려치기는 물론 높이차기 격파, 돌려차기 격파, 돌아차기 격파 등 다양한 종목을 도입해 각 참가자들이 가진 주특기와 장점을 최대한 드러낼 수 있도록 했다.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실수를 범한 뒤 멋적게 물러서는 선수들도 있었지만, 아무런 흠이 되지 않았다. 모두가 박수로 격려했고, 실수한 선수는 또 다른 종목에 또 참여해서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자신이 그동안 태권도를 즐기면서 쌓아온 실력을 점검하면 그만이지, 굳이 메달에 연연할 필요도 없었다.엘리트 선수가 아닌 아마추어들의 잔치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각 도장별로 참가하면서 아버지와 딸, 어머니와 아들, 할머니와 손자 등 가족단위 참가자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그야말로 아마추어 동호인들의 생활체육 경연의 장이었다.US오픈 한마당 대회는 미국태권도위원회(USTC: US Taekwondo Committe)가 주관하는 행사. 미국태권도연맹(USTU) 회장을 지낸 이상철 총재가 지난 2009년에 위원회를 구성하고 대회를 만들었으며, 올해로 여섯 번째를 맞았다. 태권도가 너무 스포츠화 되면서 진정한 무도의 의미를 잃었다는 반성에서 시작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즉, 태권도 경기가 이기기 위한 경쟁으로 치닫다보니 태권도의 정신은 사라지고 이기는 기술자가 됐다는 것이다. 육체가 정신을 누를 수 없듯이 태권도가 영원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정신을 되찾아야 한다는 게 이상철 회장의 생각이다. 그는 한마당 잔치는 상대가 아닌 자신 스스로와 겨루는 자리다. 그래서 가족 모두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아마추어들의 경연장답게 많은 태권도 가족들이 자원봉사자로 참여해 대회를 도왔다. 자원봉사자의 나이도 어린이부터 칠순까지 다양했다. 모두가 태권도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모인 사람들이었다.또 대부분의 엘리트 대회들이 선수들을 제외한 관중없이 치러지는 것과 달리 가족단위 참가자 등이 대회를 시종 지켜보는 등 항상 관중이 있는 경기를 치를 수 있었다.일리노이즈주에서 출전해 어린이 품새부문 금메달을 딴 제쉬(Jesh L8)는 태권도를 배운지 2년 됐다. 태권도가 매우 좋다. 친구들도 부러워한다. 태권도는 절제와 자기통제를 키워준다고 말했다.● US태권도 한마당 만든 이상철 회장 "경기위주 태권도 발전 한계, 이제는 무도 정신 되찾아야" -태권도한마당을 만들게 된 동기는?태권도가 올림픽 종목이 되고 이제는 세계적으로도 널리 보급됐다. 세계인들의 머리 속에도 태권도는 올림픽 종목으로 각인돼 있다. 그러나 경기 위주로만 태권도를 가르치다보니 50대나 60대, 70대가 따라가기 힘들다. 이래서는 태권도의 발전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무도를 되찾아야 한다. 그런데 한국 이외의 나라에서는 무도에 신경 쓰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태권도한마당을 만들게 됐다. 미국이 앞서 나간 것이고, 다른 나라들도 곧 따라할 것이다.-미국태권도협회 사무총장이던 92년에는 US오픈을 만들지 않았나.US오픈은 엘리트 선수들의 경기다. 태권도가 세계적으로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태권도의 스포츠화도 중요하다. 우리가 미국에 오픈대회를 개최한 이후 이제는 오픈대회가 없는 나라가 거의 없다. US오픈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역할도 있다. 다만 스포츠화만이 태권도의 전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엘리트와 함께 국민들의 생활체육도 중요하다. 완전히 스포츠화만도 아니고, 완전히 무도만도 아니다. 스포츠와 무도, 두 바퀴가 함께 굴러가야 한다.-무도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올림픽은 무도가 아닌 스포츠다. 세계에서 가장 기술이 좋은 사람이 가장 대접받는다. 선배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스승이 중요한 것도 아니다. 오직 이기는 기술만이 우선시된다.그러나 무도는 그렇지 않다. 정신을 중시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도장과 사범에 대한 경의를 중시한다. 스포츠는 유한하고 무도는 무한하다. 스포츠는 육체를 중시하지만 무도는 정신을 중시한다. 육체가 정신을 누를 수는 없으며,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 무도 정신이 없는 스포츠화는 영혼이 없는 것이다. △이상철 회장은 김제 만경 출신으로 70년 대한체육회가 제정한 최우수선수에 뽑혔다. 75년 미국으로 건너가 79년 독일 세계선수권대회부터 88서울올림픽때까지 10년 동안 미국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88년에 미국태권도연맹 사무총장이 됐으며, 93년에는 차기회장으로 선출돼 97년부터 7년여 동안 미국 태권도연맹을 이끌었다. 2002년 세계태권도연맹(WTF) 부총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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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원
  • 2014.07.23 23:02

[민족의 얼 태권도, 세계속의 태권도원] 1부 태권도 종주도 전북-⑦품새·시범경연 활성화

60년대까지 주로 관(館, 도장) 중심으로 이뤄지던 태권도 수련이 70년대 이후부터 학교 등으로 옮아가면서 태권도 수련자들도 바뀌게 됐다. 60년대에는 일반 성인과 중고생들이 도장에서 태권도를 수련하면서 각종 대회에 출전했으나, 요즘에는 학교나 실업팀 등에서 수련하는 선수들이 대회에 출전하고 일반 도장들은 유치원생과 초등생 등만을 주요 대상으로 삼고 있다.전북이 주도했던 태권도의 경기화(스포츠화)가 올림픽 종목 채택 등 태권도의 세계화에는 크게 기여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태권도의 전문화(엘리트화)라는 한계를 초래하기도 한 것이다. 즉, 태권도가 경기화되면서 경기에 참여하는 소수의 전문수련자들만의 스포츠로 변질되고, 일반인들이 즐길 수 있는 생활체육의 역할은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질과 양의 균형이 깨진 이러한 편향적인 발전은 사실 태권도의 경기화가 시도될 때부터 제기됐던 우려이기도 하다. 무술로서의 태권도는 원래 품새(형)와 겨루기, 격파 등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경기화된 태권도는 이 중에서 품새와 격파 등 경연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겨루기만을 채택했다. 게다가 선수의 안전과 운영의 효율 등을 이유로 무술의 일부 요소들이 경기에서는 제한됨으로써 원래의 태권도와는 거리가 있는 경기의 모습을 띠게 된다.태권도를 보다 풍성하고 가치있게 하기 위해서는 무도로써의 태권도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는 반성이 언제부턴가 시작됐다. 전북에서도 이러한 바람은 일고 있었다. 한 때는 전국을 호령했지만, 겨루기에서는 더 이상 수도권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냉혹한 현실도 작용했다.그 결실은 2003년 우석대 총장기 전국 품새대회 형태로 나타났다. 대한태권도협회가 인준한 이 대회는 겨루기가 아닌 품새와 경연을 대상으로 했으며, 대한태권도협회는 이듬해인 2004년에 제1회 대한태권도협회장기 품새대회를 열게 된다. 태권도의 경기화(겨루기)를 이끌었던 지역에서 전국 최초로 품새대회를 열게 됐게 된 것이다. 우석대는 또 2013년 대학연맹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는 태권 체조와 시범에서 1, 2, 3위를 차지했으며, 대통령기국방부장관기, 대한연맹, 여성부장관기 등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매년 품새대회에서 국가대표 선수를 배출하는 등 지금까지 품새와 시범 등에서 전국적으로 우뚝 서게 된다. 우석대는 태권도의 문화콘텐츠화에도 앞서 가고 있다. 2007년 시범단을 창단해 태권도 뮤지컬로는 최초로 서울 국립극장에서 45일동안 상설공연을 했으며, 2009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시범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오는 26일부터 시작되는 우석대 총장기 겨루기대회에서는 전국에서 최초로 5인조 단체전 경기를 도입했다. 1999년 체육학과 선수 3명으로 시작해서 2005년 태권도학과를 창설한 우석대는 올해는 전국의 태권도학과 중에서 처음으로 특성화 사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2006년 태권도 전공으로 시작해서 2010년 학과로 독립한 전주대는 매년 40명의 학생을 모집하고 있으며 현재 각종 대표 시범단에 12명이 활동하고 있다. 대태협 5명, 세계태권도연맹 4명, 국기원 1명, 태권도원 2명 등이다. 올해는 -54㎏급 최현근이 세계대학선수권 대표로 출전하게 됐다. 3년전부터 미국 7개 체육관과 협약을 맺고 미국에서 인턴십 교육을 받고 있다.2003년 창단된 비전대는 도내 전문대에서는 최초로 2008년부터 3~4학년 심화과정 학사인준을 받았다. 심화과정을 거치면 4년제 인정받아 곧바로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다. 품새와 시범단을 위주로 운영하고 있으며, 여수엑스포와 상해엑스포 개막식, 그리고 제8회 세계태권도문화엑스포 폐회식에서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세계대회 7연승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서영애 사범이 품새를 가르치고 있다. 작년 국민생활대제전에서 두드러진 성적을 보였으며, 태권체조에서 우수성을 보이고 있다. 한마당 대회에서는 격파왕을 낳기도 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품새 실업팀을 가지고 있는 곳도 전북이다. 완주군청은 지난해 12월 서영애 8단을 비롯한 5명의 선수로 품새팀을 창단했으며, 이후 각종 대회에서 최고의 성적을 내고 있다.전북일보사는 10년전부터 무주군과 함께 매년 11월말에 웰빙태권댄스 및 시범경연 페스티벌을 열고 있다. 겨루기가 아닌 생활체조의 일부로 태권도를 받아들임으로써 남녀노소 누구가 태권도를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또 세계태권도문화엑스포조직위와 전북태권도협회의 공동 주관으로 매년 7월에 열리고 있는 세계태권도문화엑스포는 태권도인과 일반인이 함께 할 수 있는 문화관광상품으로서의 태권도 축제를 지향하고 있으며 올해 8번째 행사를 치렀다. 이처럼 전북에서는 대학들을 중심으로 언론과 기관 등이 힘으로 합쳐 시범공연과 품새, 체조 등에서 태권도의 새로운 부흥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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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원
  • 2014.07.16 23:02

[민족의 얼 태권도, 세계속의 태권도원] 1부 태권도 종주도 전북-⑥1970년대 침체기

태권도는 1970년대 들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극한 관심 속에 고속도의 발전을 맞는다. 대태협과 국제태권도연맹, 국기원이 잇따라 만들어지고, 해외사범 파견 등 태권도의 세계화 활동도 활발하게 이뤄진다. 태권도를 가르치는 학교가 급속히 늘어나고, 대통령배를 비롯한 각종 국내외 대회도 활발하게 펼쳐졌다.그러나 이 시기 정부의 고도성장 정책이 전북도에게는 상대적인 침체와 낙후를 가져왔듯이, 우리나라 태권도의 전반적인 발전은 반대로 전북 태권도의 침체기의 시작을 의미했다.한 때 전국에서 다섯 번째, 여섯 번째에 들던 전북의 인구가 계속 줄고 경제는 타 지역에 비해 뒷걸음질을 계속하다보니 전북의 태권도, 더 나아가 전북의 체육이 전반적으로 고전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대한태권도협회가 70년대부터 계간지 형태로 발행해온 태권도지를 보면 70년대에 태권도가 얼마나 급속하게 성장했는지 알 수 있다. 매 회마다 각종 대회소식과 함께 세계로 뻗어가는 한국의 태권도, 학교 순례, 나의 수련기 등을 담고 있다.소년체전, 전국체전, 중고연맹회장기 등의 전국대회뿐만 아니라, 서울을 시작으로 각 지역마다 크고 작은 태권도대회가 잇따라 생겨나 담을 소식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전국적으로 각종 대회가 활성화될 수 있었던 것은 일선학교의 태권도 보급이 그만큼 활성화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1966년에 김제 만경고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학교체육 정규시간에 태권도를 가르치기 시작하자 서울, 경기 등 타지역의 학교들도 잇따라 태권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70년대 초반부터는 수도권의 많은 학교들이 태권도를 시작했다.60년대말부터 정부가 활발하게 추진해온 해외사범 파견의 결과도 각종 국제대회의 개최로 이어졌다. 74년 서울에서 제1회 아시아태권도선수권대회가 열린데 이어 76년에는 호주 맬버른에서 제2회 아시아태권도선수권대회와 스페인 바로셀로나에서 제1회 유럽선수권대회가 열렸다.그러나 이처럼 국내외적으로 태권도가 활성화됨에 따라 전북의 태권도는 상대적인 낙후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전북에서 활약했던 많은 선수들이 지도자로 변신해 일자리를 찾아 해외와 국내 타 지역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전북의 지도자가 가르친 학생이나 전북출신 학생들이 다른 지역의 선수로 뛰는 기회가 많아짐에 따라 전국적인 평준화가 이뤄졌다.74년 열린 대통령기 제9회 전국단체대항 경기에 대한 태권도지의 기사에는 경기는 처음부터 결승전까지 우열을 가릴 수 없어 전국적으로 실력의 평준화가 꾀해졌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다. 특히 마지막날 벌어진 결승전 일반부 8체급은 () 묘기의 연속이었는데 연장전 빅승(비김)이 세 게임이나 되었다고 나와있다.이대회에서 고등부 우승은 서울체고, 일반부 우승과 준우승은 경기 B팀과 경기A팀이 각각 차지했는데, 전북에서는 입상팀이 없었다. 태권도도 이제는 서울과 경기 등 수도권으로 주도권이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기할 점은 서울체고가 팀을 만든지 불과 1년만에 이 대회에서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로 고등부 우승을 차지했다는데 있었는데, 서울체고를 이끈 사람이 바로 전북출신 오주열 사범이었다. 오주열 사범은 61년에 전북과 서울팀의 겨루기에도 참가했던 태권도 1세대로 한양대 체육대를 졸업하고 교사로 변신,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체육고둥학교에 태권도부를 만들어 코치겸 감독 역할을 했다. 서울체고가 대통령기 대회에서 센세이셔널을 일으킴에 따라 다른 시도 지역의 체육고등학교에도 잇따라 태권도부가 생겨나게 됐다고 한다. 오 사범은 브라질을 거쳐 87년 미국 마이애미에 정착했다.그러면 1970년대 중반 이후 전북 태권도는 어떠했는가? 71년과 72년 서울에서 열린 전국체전 종합우승으로 정점을 찍은 뒤 73년 6위, 76년 7위, 77년와 79년 9위, 80년과 81년 8위 등으로 내려앉았다. 당시에는 지금과는 달리 전국이 11개 시도로 나뉘었던 시절이었다. 70년대 중반까지 선두권을 거의 놓치지 않았던 전북의 태권도가 7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중위권도 유지하지 못하고 거의 바닥권까지 떨어졌음을 알 수 있다.전북의 태권도는 이후에도 부침을 계속하고 있지만, 예전의 영광을 되찾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상황이다. 한때 270만명에 이르렀던 전북의 인구가 180만명으로 줄고, 전북의 경제력은 최하위권이다. 인구와 경제력이 떨어지면 좋은 선수와 지도자가 나오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도 전북의 태권도가 최하위권까지 추락하지 않고 그나마 버티는 것은 일선 지도자들의 열성적인 노력 덕택이라고 할 수 있다.그렇지만 태권도 종주도로서 태권도원을 유치한 전북으로서는 현재의 위치에 만족할 수 없다. 화려했던 옛날은 아니더라도 자존심을 살릴 수 있는 새로운 발전의 전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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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원
  • 2014.07.09 23:02

[민족의 얼 태권도, 세계속의 태권도원] 1부 태권도 종주도 전북-⑤전북 태권도를 일군 사람들

전북의 태권도가 지역을 넘어 우리나라 태권도의 발전을 이끌게 된 것은 지도자들의 헌신적인 열성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특히 전북에서 절대적인 우세를 보인 지도관은 때로는 타 관들의 불만과 질시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도내 5개관이 협회를 중심으로 움직이게 하는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전북태권도협회를 이끈 사람들전북태권도협회는 1963년 회장 전일섭, 부회장 김혁래설명희, 전무 이병무 체제로 시작했다. 제3대에는 기업인 김재욱씨, 4대는 권용수씨가 회장을 지냈으며, 이때 전일섭오용균설명희 관장이 부회장, 유병룡 사범이 전무를 맡았다. 5대에는 다시 태권도인인 전일섭 관장이 회장을 맡았고 유병룡 사범은 이때까지 20년 가까이 전무이사를 거의 독차지하면서 후진 양성에 많은 힘을 쏟았다. 6대 회장은 기업인인 이진수씨가, 7대 회장은 태권도인 오용균 관장이 맡았으며, 이때 전무이사는 허용 관장이었다. 8대에는 기업인 진홍철씨가 관장, 윤진일 관장이 전무이사를 맡았고, 9대에는 강상원 전주시장이 회장을 맡았으며 이때 수석부회장은 문창균 사범, 전무이사는 장한철 사범이었다. 이후 14대까지 최용복, 강상원, 육종진, 조명근, 이상칠 등 전주시장들이 회장을 맡았으며, 91년에는 기업인 이건수씨가 협회장에 올랐다. 93년에는 다시 태권도인 유기대 사범이 회장을 맡았으며, 이때 전무이사는 강영수, 강동하 사범다. 99년 전북태권도협회가 관리단체로 지정되면서 기업인인 김광호씨가 17대와 18대 회장을 맡았으며, 이때 전무이사로는 김정헌, 강영수, 고봉수씨가 활동했다.2009년 19대와 2013년 20대는 유형환 현 회장이 맡고 있으며, 전무이사는 고봉수씨이다. 유형환 회장은 줄포고 교사로 근무했으며, 77년에 전북체육고에 태권도팀이 창단된 이후 79년부터 체육중고 감독을 맡아 학생들을 지도하다가 퇴직했다.△지도관1954년 시작된 지도관 전북본관은 초기부터 전일섭 관장을 맡고, 유병룡 전임사범 체제를 유지해왔다. 80년에는 문창균, 93년에는 유기대, 98년에는 이영기 사범(완산중고 지도자), 2003년에는 장수의 임재봉 관장, 2006년에는 장한철 관장이 맡았으며, 2012년부터 황영택 관장이 맡고 있다. 2003년부터 지우회장 제도가 생겨 임재봉 관장 때는 최동열 도협회 상임부회장(64)이, 장한철 관장 때는 강영수 현 도의원이 지우회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김찬경 관장(67)이 지우회장을 맡고 있다.지도관은 초기에 각 지역에 사범을 뒀는데, 익산에는 장연준 사범, 정읍에는 장남용, 신재섭 사범, 남원에 박인수 사범, 김제 노영현, 원용현, 노병인 사범 등이었다. 후에는 전주 이병하 사범, 군산 최동렬 사범, 만경 박재석 사범 등이 활동했다.군산지역에서는 전일섭 관장이 전주로 떠난 뒤 김혁래 사범이 계속해서 체육관을 운영하다가 뒤에 임인수 사범, 김혁종 사범 등이 이어받아 후진양성에 힘썼다.장수의 임재봉 관장은 애초에 산서에서 도장을 운영하다가 부인의 고향인 장수읍으로 옮겨 평생 동안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2013년에 타계했다. 사진에 대한 조예가 깊고 취미가 많아 많은 자료를 남겼다. 현재는 아들이 도장을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다.△창무관개성출신의 피난민인 설명희 사범(고인)이 1950년 3월에 개설했으며, 초대 관장은 김삼만(삼남극장 사장), 2대 관장은 박성문 헌병대령이 맡았다. 3대는 설명희 관장이 수석사범을 하면서 겸임했고, 윤석구 사범이 전임 사범을 맡았다. 60년대초부터 70년까지 고창(박동근), 금마(이완승), 여산(오학수), 부안(임동진), 신태인(윤석구), 줄포(김재표), 함열(조현호), 흥덕신림(안길영, 고석원), 이리 송학동(김정환, 이성진), 이리지관(이보인, 윤석구) 등 각 지역에 지관을 두고 사범을 파견했다. 4대 전북본관장은 78년 윤석구 관장이 취임했으며 부관장은 임동진, 송충남, 박홍기, 김종성 관장 등이 맡았다.2000년에는 박종윤씨가 5대 본관장으로 취임했고, 2001년 4월에는 윤석구 관장이 6대 본관장에 올라 오늘에 이르고 있다.△청도관병무청에 근무하는 현역 중사 박청금이 1950년 병무청 동편 창고(현 테니스 코트)에서 운동을 시작했다. 2대 관장은 35사단 현역 대위인 김천태, 3대는 우제림 관장이었으며, 우재림 관장은 후에 익산 오도관으로 옮겨 허용 관장과 함께 했다.4대 본관장은 이병무 관장이 맡았으며 최홍희 장군이 말레이시아 대사로 발령된 뒤 이병무 관장을 초청함으로써 공석이 된 5대는 정역택 사범이 관장으로 임명됐다. 6대는 인경환 관장이 맡았고, 7대는 무주정읍경찰서 사범과 전주상무관 사범, 풍남체육관장을 지낸 정금수 관장이 활동으며, 이어 8대에는 아중리상무체육관장을 맡고 있는 전정술 관장, 9대에는 부안상무체육관장을 운영하고 있는 김창석 관장이 맡고 있다.4대 이병무 관장 당시에 각 지역까지 세력을 확대했으며, 그 지역은 남원 박종수, 김제 박규산, 정읍 서완득, 순창 서정운, 임실 송완섭, 군산 홍한수(오도관에서 전관), 부안 인경환, 고창 김시곤, 무주 정금수, 진안 정삼진 사범 등이었다.△오도관현역 대위인 우종림 관장이 전주에서 오도관을 열었으며, 초창기 사범은 홍한수씨였다. 홍사범은 뒤에 경찰에 투신하면서 청도관으로 전관, 청도관 군산사범을 맡게 됐다. 이후 송용호 관장이 맡았으며 그 뒤 김복남 관장이 맡아오다가 70년대 중반에 한정수 관장이 지금의 코아백화점 뒷편 전주주물공장 자리에서 명맥을 이었다. 그 뒤 정선진, 김동진(현 전북도태권도협회 부회장) 관장에 이어 2013년말부터 강주현 관장(팔복체육관)이 맡고 있다. 오도관은 전주보다는 군산이 빨랐는데, 홍한수-문한종-문승연 사범 등으로 이어졌다. 익산지역은 59년 우재림 사범이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면서 많은 유단자를 배출했고, 곧이어 허용 관장의 활발한 활동에 힘입어 크게 번성했다. 허용 관장은 또 77년에 중앙 본관장을 맡기도 했다. △무덕관무덕관은 철도공무원인 오용균 관장에 의해 익산에서 문을 열었으며, 초창기에는 김수길(사범학교 출신 교장으로 정년퇴직). 최낙환(전 익산진안 교육장), 임순호, 이승수(전북공대 졸), 김응길(총경 퇴직) 사범 등이 오 관장을 도와 가르쳤다. 63년에 이리역 앞에 태권도전용 체육관이 생기면서 정식으로 월급을 주는 사범을 둘 수 있었으며 정철우(미국, 프로태권도 창시자), 이경환, 김부길(철도청 직원) 사범 등이 있었다.60년대부터는 각 지역에 지관을 두었는데, 정읍은 조규수사범, 고산은 김정수 사범, 신태인은 박효준 사범, 대야는 박장규 사범, 익산 정의도장은 이상인 사범 등이 맡았다. 70년대 후반에 세력이 커지기도 했으나 현재는 명맥만 유지하는 정도이다. 오용균 관장이 계속 도 본관장을 맡아오다가 95년께부터 윤진일 관장(73)이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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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원
  • 2014.07.02 23:02

[민족의 얼 태권도, 세계속의 태권도원] 1부 태권도 종주도 전북-④전북을 빛낸 선수들

60년대 학교 체육으로 퍼지기 시작 최권열 5년양동철 등 3년 연속 우승 조현호 4번조점선 최동진 등 3번'金' 70년대 우수 선수지도자 역외유출 90년대 중반부터 여자부도 금메달 2000년대에도 유망주 꾸준히 나와1963년 전주에서 열린 전국체전부터 태권도가 전국체전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이후 태권도가 도장 중심에서 점차 학교체육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물론 초기에는 학교에 전문적인 지도를 두고 가르친 것은 아니며, 체육관의 지도사범이 관원들 중에서 자의적으로 학교별 팀을 만들어 각종 대회에 출전했다. 또 일부학교에서는 태권도에 관심있는 교사들의 주도로 체육관의 사범들이 학교에 파견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특히 김제 만경고는 1966년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학교체육 정규시간에 태권도를 가르쳐 많은 훌륭한 선수들을 배출하게 됐다.전국체전에서 가장 두드러진 성적을 남긴 사람은 전국체전 5년 연속 금메달리스트인 최권열(68)이다.최권열은 만경 출신으로 지도관에서 운동을 했는데, 65년 광주에서 열린 46회 대회에 고교생으로 출전해 라이트급 우승을 차지한데 이어 66년년부터 69년까지는 미들급 우승을 차지했다. 이러한 동일체급 연속 우승은 전국체전 역사에서도 극히 찾아보기 힘든 경우로, 최권열은 69년에 전북도체육회가 선정한 최우수 선수상을 받았다.전일섭 관장의 전북종합체육관 1기생들인 문창균, 조점선, 최동진 등도 전국체전을 빛냈다. 옆차기가 주특기인 문창균은 63년 전주에서 열린 44회 대회에서 전북대팀의 우승을 이끈데 이어 이듬해 45회 인천체전에서 라이트급 우승에 올랐다. 또 양발차기의 달인 조점선은 전주체전 일반부에서 금메달을 따낸데 이어 45회 인천체전과 46회 광주체전에서 미들급 금메달을 추가했다. 미들급인데도 마치 플라이급처럼 날렵했다는게 조점선에 대한 문창균 원로의 회고이다. 경찰에 투신해 30대때까지 각종 대회에 출전했다.최동진은 44회 전국체전에서 전북대 우승에 이어 45회 인천체전과 46회 광주체전, 48회 서울체전에 플라이급으로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47회 체전에서는 플라이급 3위를 했다.63년 전주 체전에서 고산중팀으로 금메달을 목에 건 유형환은 전주공고에 진학한 뒤 46회와 47회 체전에서 고등부 밴텀급으로 우승했으며, 48회와 49회 체전에서는 일반부로 출전해 동메달과 은메달을 추가했다.유형환과 함께 고산중 팀으로 전국체전 금메달리스트인 이형노는 고등부로 출전한 48회와 일반부로 출전한 49회, 50회 체전에서 페더급 금메달을 추가했다.비교적 늦은 나이에 운동을 시작한 장수 출신 미들급 임재봉은 46회 체전 은메달에 이어 48회 체전에서 금메달을 따냈다.익산 창무관 출신의 조현호(70)는 44회 전주체전 일반부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데 이어 45회와 47회, 49회 체전에서 금메달을 따냈고, 48회 체전에서는 은메달을 획득했다.양동철은 68년 서울에서 열린 49회 대회에서 고기부 밴텀금 금메달을 따낸데 이어 50회와 51회 대회에서 플라이급 금메달을 추가했다.무덕관 출신의 안영빈은 50회와 52회 대회에서 페더급 금메달을 따냈고, 김제농고를 졸업한 라종열은 51회 대회 라이트급 은메달에 이어 52회와 56회 대회에서 라이트급 금메달을 따냈다.69년 11월 24일자 경향신문은 69년도 태권도 우수선수 16명을 선발한 기사를 싣고 있는데, 그 이름 중에는 양동철과 이형노, 손주몽 등 전북출신이 포함돼 있다. 손주몽은 73년 부산에서 열린 54회 전국체전 고기부 플라이급 우승자이다. 헤비급 서동현은 71년과 72년(52~53회)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낸데 이어 이듬해에는 동메달을 추가했다.70년대 중반 들어서는 우리지역 우수 선수와 지도자의 역외유출이 가속화되고 있는 가운데 75년 대구에서 열린 56회 전국체전에서 선수 빼돌리기 사건이 발생했다. 일반 중기부 페더급 결승에 진출한 전영인이 결승전을 앞두고 갑자기 잠적해 기권패했는데, 이는 전영인이 소속된 인천체전(인천체육전문대)의 학장이 전영인의 출전을 막았기 때문이었다(당시 전북은 종합 3위를 놓고 경기도와 막판까지 치열한 접전을 펼치고 있었는데, 인천체전이 경기도에 소재하고 있었다). 도민들의 반발이 거세지고 사회문제화되자 백인엽 인천체전 이사장이 전주로 찾아와 사과하고 학장의 사표를 받기에 이르렀지만, 전국체전에서 지역간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건이다.이러한 상황에서 신재근은 78년 인천에서 열린 59회 체전에서 고등부 페더급 은메달을 따내더니 60회와 61회 대회에서는 미들급에서 금메달을 추가했다. 82년 경남에서 열린 63회 대회에서는 일반부 페더급에 출전한 고봉수(현 전북태권도협회 전무이사)만이 유일하게 금메달을 따냈으며, 고봉수는 이듬해 인천체전에서 라이트급에 출전해 금메달을 획득했다. 63회와 64회 고등부에서 은메달을 따냈던 최상진은 69회 웰터급에서 금메달, 72회 대학부에서 은메달, 73회 대회에서 동메달을 따냈다.권기문은 83년 인천에서 열린 64회 대회 대학부 밴텀급 금메달과 67회 대회 페더급 은메달, 69회 대회 밴텀금 은메달을 따냈으며, 김종석(원광대)은 64회와 66회, 68회 대회 금메달과 67회 대회 은메달을 따냈다.64회와 66회 대회에서 고등부 동메달을 딴 함준은 69회와 73회 대회 은메달, 75회 대회 동메달, 76회 대회 금메달을 추가했다.윤철은 69회 대회 금메달, 71회 대회 은메달, 72회 대회 동메달을 땄고, 70회 대회 고등부 페더급에서 동메달을 딴 정을진은 91년 전북에서 열린 72회 체전에서 대학부 페더급 금메달과 74회 대회 금메달, 75회 대회 은메달, 77회 대회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90년대 중반부터는 여자부 태권도에서도 메달이 나오기 시작했다. 김보인(경희대)은 95년 경북에서 열린 75회 대회에서 여자일반부 핀급 금메달, 77회 대회에서 플라이급 금메달을 따냈다. 이지은(경희대)은 78회와 79회 여자 일반부 밴텀급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국현진(고창여고)은 79회 여고부 밴텀급과 80회 여고부 플라이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2000년대 들어서도 유망주들이 꾸준히 나타나고 있다. 이승용은 전북체고 학생때인 2001년 82회 대회에서 남고부 플라이급 우승을 차지한 뒤 경희대에 진학해 85회 체전에서 밴텀금, 그리고 89회 대회에서는 육군체육부대 소속으로 라이트급으로 우승을 차지했다.또 전북체고의 박민우는 84회와 85회 체전에서 미들급 우승을 차지했고, 김진경(전북체고)은 84회와 86회 대회에서 여자부 미들급 우승을 품에 안았다. 또 류근무는 84회와 85회 남자일반부 헤비급 우승에 올랐고, 이리고생인 김배훈은 88회 대회에서 페더급 우승에 이어 경희대에 진학한 뒤 90회와 92회 대회 남자대학부 우승을 차지했다. 완산여고 장희영은 92, 93회 우승을 차지했고, 신동윤은 전북체고 학생으로 92, 93, 94회 전국체전 3관왕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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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원
  • 2014.06.25 23:02

[민족의 얼 태권도, 세계속의 태권도원] 1부 태권도 종주도 전북-③전북을 빛낸 선수들

우리지역에서는 태권도의 겨루기(대타)를 중시함에 따라 일찍부터 여러 가지 종류의 대회가 많았다.특히 지도관에서는 전주와 군산 지역간 교환경기가 활발했다. 김혁래 관장도 직접 대회에 참가했으며, 김 관장은 팔 전체 부위를 단련한 방어 기술이 뛰어나 상대가 공격을 하다가 지칠 정도였다고 한다. 1956년에는 서울 창경원에서 서울과 전북팀이 겨루기를 했는데, 전북팀은 전주역에서 밤 10시에 기차를 타고 10시간 걸려서 서울에 도착한 뒤 경기를 치르고 당일에 내려오는 스케줄이었다. 이처럼 피곤한 상황에서도 전북팀은 오히려 서울팀보다도 우수해 이 대회를 통해 김혁래, 장점동, 최동진, 이승완 등이 중앙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장점동의 주특기는 점프하여 양발차기로 요즘 프로스포츠 K1에서 일부 선수가 사용할 정도의 고난도 기술이었으며 투지가 매우 좋았다고 한다. 최동진은 작은 체구지만 힘과 펀치력에서는 매우 파괴력이 있었고 겨루기 기술도 다양했다고 전해진다. 전주상고와 전북대를 졸업하고 해병대에서 선수생활을 했으며, 안기부 감찰실에 근무했다. 전주고 주장 출신 이승완은 1962년 전북인 최초로 4단을 받았으며, 전북종합체육관 사범을 맡아 63년 전주에서 열린 제44회 전국체전에서 전주고가 우승하는데 기여했다.1961년 5월에는 전주공설운동장에서 도내에서는 처음으로 한일 격투기 경기가 열렸으며, 이는 뒷날 한일전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대회에는 한일 양쪽에서 20명씩 참가했는데, 겨루기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연무시범도 있었다. 이때 문창균은 여러 사람을 나란히 엎드리게 하고 그 위로 뛰어넘어 옆차기 시범을 보여줬는데, 일본인들이 이를 보고 매우 놀랐다고 한다. 문창균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전주상고 3학년때부터 도장에 나갔으며 전북대 법대 58학번이다.이 당시 우리지역의 태권도는 전북을 단일팀으로 하고 전북을 제외한 우리나라 전체를 상대팀으로 하더라도 결코 밀리지 않을 만큼의 우수성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는 63년과 66년에 일본에서 열린 한일전에 파견하는 우리나라 대표선수 선발 결과만을 봐도 분명하게 드러난다.63년에는 일본 동경에서 열린 일본권법회와의 한일전에 참가할 한국 대표팀 10명을 처음으로 뽑았는데, 주장인 이승완(전 국기원 원장)과 이문성, 황대진, 최영렬, 안대섭, 조점선 등 전북출신이 6명을 차지하고 있다. 이중 이문성과 황대진은 대표선수로 선발되긴 했지만 병역문제로 인해 실제로 일본땅을 밟지는 못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병역을 필하지 않은 남성이 해외에 나가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시절이었기 때문이다.당시의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전해지는데, 자신의 아들이 일본에 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황대진 선수의 아버지가 부랴부랴 서울에 찾아왔다. 이승완 주장 등과 함께 다방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처음으로 커피를 마시게 됐다. 한 사발을 쭉 들이킨 황대진 선수의 아버지는 다방 종업원을 부르더니 이봐, 여기 서너 사발씩 더 갖다드려하고 말했다고 한다. 시골에서 마시던 막걸리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66년 제2차 국가대표 선발전은 지금의 선발전처럼 엄격한 체계를 갖춰 진행됐다. 국가대표 1, 2차 선발전을 통과한 선수와 그해 최우수 선발전 우승자가 최종전에서 맞붙어 각 체급별 대표를 선발했다. 모두 14명의 대표를 뽑았는데, 박동근, 최동진, 박연희, 유기대, 유형환, 최동진 등 6명이 전북출신이었다. 박연희는 이 경기에서 일명 따발총으로 불리는 화려한 앞차기 기술로 일본인들을 놀라게 하여 곧바로 일본 코치로 초청을 받았다. 동아일보 66년 12월 28일자 4면에는 한국 원정팀이 일본 관서대팀을 7-5로 이겼다는 소식과 함께 이긴 선수들의 이름이 올라있는데, 이들 7명중 4명이 전북 출신이다(박동근, 박연희, 안대섭, 유형환).이에앞서 1964년에는 전일섭 관장과 유병룡 사범의 제자인 최영렬(전 경희대 학장), 유기대(전 전북태권도협회 회장) 등이 경희대에 진학하여 당시 우리나라 체육의 산실인 한국체육관 태권도부에서 운동했다. 또 66년에는 유형환과 최권열 등이 경희대에 진학하여 선배들과 합류하면서 경희대가 대통령기 단체전에서 3연패라는 금자탑을 쌓게 됐다.김제 만경중학교 출신의 최영렬은 고등학교때 태권도에 입문했으나 열심히 노력해서 빠른 성장을 보였다. 1965년에는 전국체전 스타플레이어로 중앙일보에 소개됐고, 66년부터 70년까지는 대통령배 전승이라는 대기록을 남겼다. 그는 또 1983년에 최초로 경희대학교에 태권도학과를 개설하여 학과장을 맡게 되는 등 후진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오늘날 경희대 태권도의 명성은 이처럼 전북출신들이 그 길을 트고 기반을 다졌다고 할 수 있다.최권열은 김제 진봉 출신으로 키 183㎝의 장신이었다. 긴 다리를 이용해 발바닥과 뒤꿈치로 상대의 가슴 부위를 주로 공격하는 무적의 선수였으며, 서울에서 교장으로 퇴임했다. 경희대 출신의 유기대, 유형환, 최권열, 최동진 등은 그 뒤 해병대에 입대해 대통령배 대회 5연패의 신화를 이루었으며, 이때 해병대의 초대 코치를 맡았던 사람이 바로 전북인 이승완이었다.이처럼 초창기 전북출신 선수들이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게 됨에 따라 후배들인 이상철, 이형노, 양동철, 박연환(박연희의 동생) 등이 서울 소재 우석대(현 고려대)에 진학해 막강 전북태권도의 전통을 빛내게 되었다.이 같은 선배들의 화려한 전통은 그 뒤에도 면면히 이어져 태권도가 시범경기로 치러졌던 88년 서울올림픽에서는 임실 오수 출신 김종석이 헤비급에서 은메달을, 94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12회 아시안게임에서는 진승태(플라이급. 한국체대)와 정광채(웰터급, 한국체대)가 각각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 98년 태국 방콕에서 열린 13회 아시안게임에서는 남자 72kg급의 김병욱과 67kg급의 감남원, 여자 59kg급의 이지은이 각각 금메달을 따냈다. 김종석은 87년 전국체전 미들급에서 금메달을 획득, 전북체육회가 선정한 우수선수에 뽑히기도 했다.

  • 태권도
  • 이성원
  • 2014.06.18 23:02

[민족의 얼 태권도, 세계속의 태권도원] 1부 태권도 종주도 전북- ② 스포츠화 시작

전북의 태권도 역사는 우리나라의 태권도 역사이다. 오늘날과 같은 스포츠화 된 태권도가 전북에서 가장 먼저 시작됐기 때문이다. 전북에서 개발된 태권도 기술이 곧 우리나라의 기술이 됐고, 전북에서 적용된 경기규칙이 우리나라 경기규칙의 한 부분이 됐다.전북의 태권도가 경기화(스포츠화)를 선도하게 된 것은 전일섭 관장이 이끄는 지도관이 전주에 자리를 잡은 뒤 다양한 종류의 대회가 자주 열렸기 때문이다. 한일 교류전 등은 물론 지역내 대회도 적지 않았다. 특히 전주와 군산지역 지도관끼리의 겨루기는 지역의 자존심을 건 치열한 양상을 띠었고, 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전주-군산-익산 간 대회로 발전했다. 군산시태권도협회 김혁종 고문은 군산과 전주의 시합이 있을 때면 일주일 전부터 잠을 못 잤다. 전주에서 대회가 열릴 때 전주가 이기면 뒤탈이 없는데, 군산이 이기기라도 하면 버스터미널까지 쫓아 와서 버스를 못 타게 하고 텃세를 부리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추억거리다고 회고했다.체육관별로도 연 2~3차례씩 대회가 열렸으며, 그해의 왕중왕을 뽑는 대회도 있었다. 지도관의 경우에는 전주 본관에서 분관이 분리돼 나가면서 도장별 경쟁의식을 부추기기도 했다(전북뿐만 아니라 서울, 강원, 부산 등의 지도관에서도 운동을 심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격렬하게 운동했던 곳은 전북이며, 지도관은 전북에서 꽃을 피웠다).전북의 태권도 겨루기는 다른 지역과는 차이가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다른 지역의 태권도에서는 실전 타격이 금지돼 있었다. 때리는 시늉만하고 주먹이나 발이 상대의 몸에 닿기 직전에 멈추는 것(유형환 도태권도협회 회장은 이를 끊어치기라고 표현했다)이 일반적인 겨루기 방식이었다. 그러나 우리지역에서는 실제 타격으로 상대를 쓰러뜨리는 겨루기가 일반적이었으며, 누적된 타격보다는 단 한방으로 상대를 이길수록 인정받는 분위기였다. 생체연구를 바탕으로 한 일발필살기가 개발되기 시작됐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강도 높은 단련이 뒤따랐다. 유단자와 수련생이 마주보고 횡렬로 서서 상대방을 계속해서 바꿔가면서 하는 겨루기도 하나의 훈련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문창균 원로는 당시에는 상대를 바꿔가면서 훈련하는데 하루에 한명씩 KO시켜야만 직성이 풀렸다. 그렇지 않으면 운동을 한 것 같지 않았다고 회고했다.전북태권도협회 황영택 고문은 박연희 선수는 양쪽에 철봉으로 기둥을 만들고 가운데를 스프링으로 연결한 기구를 만들어서 수도를 단련했다. 스프링의 강력한 탄력을 이용한 훈련이었는데, 나중에 TBC 방송에 출연해서 차돌을 깨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 같은 선수가 나오게 된 것은 우리지역의 태권도가 그 만큼 적극적인 운동이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겨루기 대회가 계속되면서 발기술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발을 이용한 공격의 파괴력이 주먹에 비해 4배가량이나 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점선의 돌려차기, 박연희의 양발 앞차기(일명 따발총 공격), 유형환의 앞차기 등이 이때 나왔다.당시까지만 해도 다른 지역의 발기술은 옆차기와 뛰어차기 수준이었다. 그러나 전북의 기술은 이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상대가 옆차기로 공격하면 돌려차기와 뒤차기로 허를 찔렀다. 또 상대가 뛰어차기를 하면 메치기 기술로 발을 걸어서 쓰러뜨렸다(당시에는 이런 기술이 허용됐고 점수도 부여됐으나 다른 지역선수들은 거의 사용하지 못했다). 상대방은 균형을 잃고 바닥에 내팽겨쳐지기 일쑤였으며, 기가 질려서 더 이상 경기를 계속할 의욕을 잃곤 했다는 게 유형환 회장의 회고다.겨루기 대회를 하다보면 일정한 규칙과 제한이 필요하고, 약속된 용어의 사용이 불가피했다. 그렇지 않으면 혼란이 오고 상호간의 불신과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전북의 태권도인들은 일찍부터 수신호와 용어 등을 만들어서 사용했고, 이는 초기 우리나라 태권도 경기규칙의 일부가 됐다.1961년 대한태권도협회가 창설되고 1963년 대한체육회 가맹단체로 가입하면서 그해 10월 전주에서 열린 제44회 전국체전에서 태권도가 처음으로 공식경기로 치러졌다. 이에 앞서 62년 대구 체전에서는 전북과 대구 선수들이 시범경기로 태권도를 겨뤘으며, 이때의 경기규칙 등은 전북의 것을 참고하고 반영했다. 전국체전 정식종목화를 전북이 주도했고, 전북에서 사용하던 수신호와 용어 등을 거의 그대로 사용했다.전국체전은 또한 호구의 개발을 촉진했다. 사실 호구의 필요성은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었다. 워낙 격렬하고 과격한 운동이다 보니 그만큼 부상 등 불상사의 위험이 높았다. 처음 사용된 호구는 일본에서 검도용이었다(유병룡 원로는 우리나라 선수들이 한일친선경기를 위해 일본에 갔다가 가져왔다고 증언했고, 문창균 원로는 59년에 일본팀이 가져왔다고 기억하고 있다) 태권도에는 잘 맞지 않았다. 검도 호구를 차면 움직임이 둔하여 태권도의 빠른 동작을 할 수 없었다. 또 검도 호구는 칼날을 막기 위한 것으로 너무 단단하게 만들어져 자칫하면 손이나 발가락이 부서지기도 했다.그래서 태권도에 알맞은 호구의 개발이 필요했는데, 많은 고민과 연구 끝에 생각해 낸 것이 대나무 호구였다. 전일섭 관장과 유병용 사범 등이 적극적으로 나섰고, 전일섭 관장의 부인이 바느질을 했다. 신문지로 본을 떠서 입어보고 만들었는데 애초에는 뒷부분이 없이 옆구리까지만 가렸다. 대나무를 쪼개서 세로로 배열하고 솜으로 감싼 뒤 베를 대고 누볐다. 이처럼 만들어진 호구는 대한태권도협회의 승인을 받아 62년 대구체전 시범경기 때 처음으로 사용된 뒤, 63년 전주체전부터 본격적으로 활용됐다.애초에는 위-아래 2단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위험성을 깨닫게 됐다. 대나무가 부러지면서 헝겊을 뚫고 삐져나와 손을 다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특히 2단 호구는 중간에 접혀지는 곳이 명치 부근이어서 자칫하면 장기가 다치는 등 큰 불상사의 위험도 있었다. 따라서 나중에는 2단의 호구를 3단으로 개조했고, 그러다보니 활동성도 훨씬 좋아졌다. 호구에는 페인트로 색깔을 칠했는데, 홈팀은 청색, 원정팀은 빨강색이었다. 전북도태권도협회는 우리나라 호구를 처음 개발한 지역답게 전자호구 도입도 빠르다. 2009년 전자호구가 국제대회에 처음 등장하자 지역에서는 드물게 곧바로 이를 마련해 이듬해부터 사용하고 있다.이처럼 전북의 태권도는 우리나라 초창기 스포츠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그 중심에는 전일섭 관장이 있었다. 김혁래 관장이 군산지역 태권도의 대부라고 한다면, 전일섭 관장은 전북도를 넘어 초창기 우리나라 태권도를 이끈 대부라고 할 수 있다.

  • 태권도
  • 이성원
  • 2014.06.11 23:02

[창간 64주년][민족의 얼 태권도, 세계 속의 태권도원] 1부 태권도 종주도 전북 ① 전북 태권도의 시작 - 1950년대 초 군산체육관서 시작…전주 지도관서 꽃 피워

올해는 무주 태권도원이 문을 열었다. 이를 계기로 전북일보는 전북 태권도가 발전해온 역사와 전북 출신 사범들의 해외에서의 활약, 그리고 태권도원의 발전 방안을 모색하는 시리즈를 준비했다.도장 중심으로 수련하는 태권도는 1940년대 말에서 50년대 초 사이에 시작됐다. 서울에서 먼저 문을 연 무도관들이 전북에 도장을 낸 것이 계기가 됐다. 그 이전에 태권도가 어떤 식으로 존재했었는지는 자료로 입증하기 어렵다. 일제 치하 36년 동안 무술단련은 상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무술은 곧바로 독립운동의 전투력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이를 엄격히 금지했다.지도관은 1950년 초에 군산을 통해 들어왔다(서울인천과 같은 해인 1947년에 들어왔다는 주장도 있다). 군산이 도내에서 도장 중심 태권도 수련이 가장 이른 것은 사실인 듯하다. 서울에서 운동을 하던 군산 출신 김혁래 사범이 전일섭 사범(황해도 출생)과 함께 군산시 장미동 군산체육관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관원을 모아 운동을 시작했다. 전일섭 사범이 치안 담당으로 군산 세관에 발령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전일섭 사범은 윤쾌병 박사와 함께 중앙 지도관을 만든 전상섭씨(후에 월북)의 친동생이며, 김혁래 사범의 선배다. 초기에는 전일섭 사범, 김혁래 주장으로 불렸다.군산체육관 건물은 원래 포목점을 하던 가게로, 2층 건물이었다. 1층에서는 역도를 했고, 2층에서는 태권도와 권투, 유도를 했다. 초기 관원은 그리 많지 않았으며, 호구지책으로는 힘겨운 형편이었다. 그래도 태권도에 대한 애정 하나로 무도관을 이끌어 갈 수 있었다. 군산체육관에서는 당시 겨루기를 많이 하면서 격파, 품새(형)를 가르쳤다. 운동 선후배의 관계가 엄격해서 나이가 어리더라도 운동을 먼저 시작한 사람을 대접했다고 한다.김혁래 사범은 태권도의 세계화에 대한 공로자이기도 하다. 전일섭 사범이 전주로 떠난 1950년대 중후반(또는 1952년)부터 군산 미공군기지에서 미군들을 대상으로 15년여 동안 태권도를 가르쳤다. 그러나 김혁래 사범은 젊은 나이(40대 중후반 또는 50대 초반)에 고혈압으로 쓰러져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미군부대 출근을 준비하며 찬물로 세수하다가 발생한 일이었다. 그 뒤 체육관과 미군부대 교육은 동생인 김혁종 관장(73현 군산시태권도협회 고문)이 이어받았다. 김혁종 고문은 형님(김혁래 사범)이 미군 부대에서 가르친 사람만도 수천명이라며 김혁래 사범에게 배운 독일 스포츠계의 한 저명인사가 있었는데, 몇 년 전에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런데 이분이 생전에 가족들에게 군산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했고, 당시의 추억이 담긴 태권도 유품을 잘 간직해왔다. 유족들이 이를 알고 김혁래 사범 가족에게 유품을 전달해온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군산에서 4년여 동안 활동하던 전일섭 사범은 유수복 도의회 의원(전주)의 초빙을 받아 1954년(52년이라는 주장도 있음) 전주시 고사동에 새로운 도장을 차렸다. 당시까지만 해도 겨루기를 하더라도 실제로 사람을 때리지는 않고 때리는 시늉만 하는 게 보통이었지만, 지도관은 달랐다. 발차기, 정권치기 등 대타(겨루기)를 과감하게 했고, 그 해의 왕좌를 놓고 대회도 치렀다. 호신술도 많이 했다.1950년대 후반부터 서울에서는 일본에 거주하던 윤쾌병 박사의 주관으로 한일전 겨루기 시합이 치러졌는데, 전북출신 선수가 한국 대표 선수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서울과 전주에서 격년으로 번갈아가며 대회가 치러지다가, 나중에는 아예 서울과 전주로 분리돼 별도의 대회를 치렀다. 이처럼 겨루기 대회가 잦다보니 기술개발이 활발하게 이뤄졌고, 한 방으로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 죽기살기식으로 운동을 했다.창무관은 개성 출신으로 해병대를 제대한 설명희 사범에 의해 1950년 3월 익산의 이리극장 자리에 문을 열었다. 민간인을 대상으로 했으며, 통학생이 많은 지역의 특성으로 인해 중고생 수련생이 많았다. 지도관과 마찬가지로 실제 대련을 중시했으며, 호신술과 실질적인 기술을 많이 보급했다. 60년대 들어서는 고창과 줄포, 흥덕 신림 등 다른 지역에 지관을 두고 운동을 보급했다.청도관은 병무청에 근무하던 현역 중사 박청금 사범이 1950년 전주병무청 창고에서 시작했다. 그 뒤 1955년에 이병무 사범이 경찰서 사범에 위촉된 뒤에는 남원, 김제, 정읍, 순창, 임실, 군산, 부완, 고창, 무주, 진안, 장수 등 도내 각 경찰서에 사범을 파견해 보급했다.처음에는 군인과 경찰을 주요 대상으로 했으나, 나중에 민간인에게도 개방했다. 직장인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격렬하게 하지는 않았으며, 겨루기보다는 품새와 격파 등을 많이 다뤘다. 경찰의 날이나 도의 주요 행사 때 시범도 많이 했다.오도관은 청도관에서 갈라져 나왔으며, 군부대를 중심으로 보급됐다. 전주에서는 현역 군인인 우종림 관장(현 예비역 소장)이 문을 열었고, 익산에서는 허용 관장이 이끌며 활성화시켰다. 군산은 문한종 관장이 맡았다.무덕관은 철도청 직원인 오용균 관장이 1958년 익산역 내 목욕탕 내 빈공간에서 시작했다. 당시 열차는 석탄을 때는 증기기관차가 끌었기 때문에 역사마다 목욕탕이 있었다. 애초 철도청 직원들을 대상으로 했으나 58년 8월부터 일반인들에게도 개방됐다. 60년대 들어서는 삼례와 신태인, 김제 등의 역사에도 관을 열었고, 63년에는 도내에서 처음으로 익산역 앞에 50평 규모의 전용 체육관을 지었다. 품새와 자기방어식 대련 등을 많이 했다.50~60년대 도장들은 공수도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초기에는 일본에 유학을 가서 공수도를 배워온 사람들이 주로 도장을 열었기 때문이다. 태권도 도장들은 관원을 모집하기 위해 전단지를 만들어 전신주 등에 붙이거나 극장 등을 빌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격파 등의 시범을 보이곤 했다. 그러나 돈이 없어서 전단지도 많이 부착하지는 못했다. 전북태권도계 원로인 문창균 씨(76)는 전일섭 관장이 이끄는 지도관도 100장 넘게 전단지를 만들기는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도장 내 운동기구도 거의 없어서 역기나 단련봉, 샌드백 정도가 거의 전부였다. 역기는 시멘트를 활용해서 직접 제작하거나 철도 레일 등을 구해다 사용하기도 했다. 군산 화력발전소에 가서 쇳덩이를 구해와 아령 등을 만들어쓰기도 했다고 한다.여름철에는 변산 등으로 극기훈련을 겸한 모서훈련을 갔으며, 여기서는 특강과 호신술, 수중훈련 등이 이뤄졌다. 겨울철에는 줄을 맞춰 시내를 달리는 등 모한운동을 하기도 했다.

  • 태권도
  • 이성원
  • 2014.06.0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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