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nd news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전형적인 농산촌이자 3개의 고속도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중심지인 장수군은 한우와 사과, 오미자, 토마토, 쌈채소, 표고 등 지역특산물을 육성해왔다. 장수군은 특히 지역순환농업과 53프로젝트사업의 성공적인 수행으로 농업하기 가장 좋은 곳 가운데 한곳으로 손꼽히며, 제2의 인생을 설계하는 귀농귀촌인들에게 인기가 많다. 지난해까지 장수군에 정착한 귀농귀촌인들은 320가구 640여명이다. 귀농귀촌인들의 지속적인 증가는 장수군이 지난 2007년 귀농인지원조례를 제정하고, 귀농귀촌지원센터를 운영하며, 귀농귀촌인들의 유치와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체계적으로 노력해온 결과로 풀이된다. 올해는 귀농인농업창업 및 주택구입비 융자지원사업, 농가주택수리비지원, 귀농인현장실습교육, 귀농귀촌정착교육, 귀농인소득모델개발사업 등의 귀농지원사업을 통해 귀농이주준비부터 정착까지 체계적으로 지원할 계획이다. 군은 또 귀농인들의 안정적인 정주공간 마련을 위해 송학골에 농어촌뉴타운을 조성하고 있으며, 소득사업과 연계해 입주자의 조기정착을 돕는다. 군은 이와 함께 도시민유치지원사업으로 빈집농지 정보제공, 귀농학교 운영, 귀농인소모임지원사업, 멘토링, 인턴사업, 귀농인의 집 등을 운영 및 지원할 계획이다 군은 특히 53프로젝트사업(5000만원이상 소득 3000농가 육성사업)을 통해 축사신축, 비가림하우스, 과원조성, 첨단연동하우스, 양액시설, 유리온실 등 농가소득기반사업 신규조성때는 40%를 보조해 생산기반을 잡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한편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장수군 평균 농가소득은 3467만4000원으로, 전국 농가소득 3014만8000원, 전북 농가소득 2963만9000원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철도청이라는 직장을 과감히 접고 피폐해진 고향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20년째 귀농생활을 펼치고 있는 애향인 박외진씨.△도시생활 청산초등과 중학교를 고향에서 졸업한 박씨는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고교와 대학을 경기도 성남시에서 마쳤다.자식만큼은 절대로 농사꾼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부친(2003년 작고)의 뜻에 따라 그는 고교와 전문대에서 기계학을 전공했다.군대를 제대하고 83년께 취업준비에 몰두한 그가 그가 처음 정착한 곳은 대우정밀이라는 제법 큰 회사였다. 하지만 3년을 버티지 못하고 대한석탄공사로 이직, 근무에 열중했으나 이마저도 박씨의 열망에는 부족했던 모양이다.당시 석탄공사에 들어가기 위해 학원에서 시험공부에 열중하던 중 지금의 부인인 동갑내기 심미정씨도 이때 만났다.88년도에 가정을 꾸린 박씨는 석탄공사를 그만두고 철도청 시험을 준비, 합격하면서 고향인 임실역 근무를 희망했다. 그가 임실역 근무를 희망한 것은 평소 동경해 왔던 고향을 잊지 못해 가까운 곳으로 오기 위함이다.고향 인근에 정착하면서 딸 지은(25)이와 아들 병율(20)이도 이즈음에 태어났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농사에 대한 그의 열망은 직장을 뿌리쳤고 94년 들어 부모의 눈치를 불구하고 고향집으로 들어갔다.△퇴직금과 대출 등 2500만원으로 임실군 최초 시설하우스이미 무엇을 할 것인가에 마음을 굳힌 그는 자신이 모은 퇴직금과 은행 대출 등을 통해 2500만원의 농업자금을 마련했다.또 마을 가까운 곳에 1500㎡의 농지를 임대, 임실지역 최초로 시설하우스를 설치하고 젊은 농업인들과 뭉쳐 오이와 토마토재배에 들어갔다.이를 위해 그는 임실군에서 실시하는 각종 교육에 참여했고 시설하우스 선진지로 알려진 전남 구례 등 전국 각지를 여러차례 방문했다.1년여의 교육과 선진지 방문 등에 힘입은 그는 94년 첫해들어 오이를 재배, 20㎏ 1상자에 3만원씩 1000상자를 생산했다.더불어 오이재배가 끝나면 토마토를 심었고 제철이 아닌 탓에 당시에는 비교적 높은 가격을 받아 연간 1500만원이라는 순수익을 올렸다.물론 당시에는 연료비와 인건비 등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아 박씨의 귀농전략은 순풍에 돛을 달았다. 해가 가면서 농사일에 재미를 붙인 그의 첫 시련은 태풍과 전 세계적으로 시련을 안겨준 98년 IMF 사태였다.당시에는 은행대출에 따른 농업인끼리의 연대보증이 필수였기에 빚 보증으로 1억원이라는 거금을 날렸다.다행히 정부의 정책자금과 자치단체의 지원에 힘입어 위기를 탈출했고 이를 계기로 그는 새로운 농법에 뛰어드는 전환점이 됐다.시설하우스가 우후죽순격으로 확대됨에 따라 고소득으로부터 멀어지자, 2003년에 들어 그는 친환경농법에 눈을 돌렸다. 임실군농업기술센터의 권장과 미래농업에 대한 동경이 그를 첨단농업으로 이끌어 준 동기였다.재배면적을 1만㎡의 연동하우스로 대폭 확대한 그는 화학비료와 농약 등을 이용한 종전의 재배시스템을 무농약 유기농법으로 바꿨다.또 오이를 배제하고 큰토마토 위주의 단일품목 생산에 전념했고 정부나 지자체가 공인하는 인증 획득에도 주력했다.이같은 박씨의 노력은 날로 치솟는 연료비와 인건비를 충분히 감당했고 생산된 농산물은 철저한 인터넷상거래로 고객을 늘렸다.특히 종전의 관행농법에 반해 친환경농업은 다소 재배와 관리에 어려움이 뒤따랐으나 판매가는 2~5배의 고수익이 보장됐다는 점이다.△마이웨이농원 설립으로 새농촌 건설지난 2006년 친환경농업에 자신을 얻은 박씨는 찬환경농법에 따른 자신만의 노하우를 접목한'마이웨이 농원'을 설립했다.설립 목적은 후배 귀농자를 중심으로 친환경농업에 따른 다양한 기술 등 노하우를 전수키 위함이다. 이를 위해 그는 각종 유기농법에 따른 이론과 실기 중심의 지식을 쌓았고 그에 필요한 다양한 기능과 기사 자격증도 취득했다.요즘에는'농업마이스터'자격을 취득키 위해 주력한다는 그는 정부와 지자체가 주도하는'마을만들기'사업에도 앞장서고 있다.이를 바탕으로 현재 마을주민과 친환경농업에 참여하는 농민을 대상으로 협동조합 설립도 구상중에 있다. 마이웨이농원을 임실군의 친환경 농업의 중심지로 부각하고 각종 체험과 농업교육 등 새농촌 건설의 희망지로 키워 나간다는 생각에서다. 현재 마이웨이농원에는 친환경농업을 배우기 위해 전국 각지의 40대 귀농 희망자 6명이 실습을 벌이고 있다.박씨는"무조건 귀농한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며"귀농을 결정키 이전에 충분한 지식과 계획, 철저한 사전준비가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임실군이 지원하는 귀농귀촌인 정책은 주택신축과 수리지원, 소득사업지원 및 현장실습비 등 다각적으로 펼쳐지고 있다.특히 원예농업의 귀농인에는 시설하우스 소득사업보조를 통해 초기 정착과 소득안정 등에 배려를 아끼지 않고 있다.이와 함께 귀농인을 대상으로 다양한 작목별 교육을 연중에 걸쳐 실시하고 있으며 농업에 종사하는 현지인의 노하우를 전수하는 기회도 제공하고 있다.지난 2002년부터 귀농귀촌인에 대한 준비작업에 들어간 임실군은 그해 4가구의 귀농인을 필두로 지난해까지 모두 383가구가 정착했다.특히 최근 3년간에 걸쳐 이같은 현상은 더욱 증가세에 놓여 있으며 전체적으로 700여명의 인구 증가율도 보여주고 있다.이들에 대한 전북도와 임실군의 지원도 주택수리비를 비롯 활성화 사업 및 정착지원 등 다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더불어 올해에는 4억원의 사업비를 투입, 20개 농가에 소득사업 및 생산기반시설을 지원하고 15개 농가에는 7500만원을 들여 주택구입과 수리 등을 지원할 계획이다.이밖에 농업교육에 따른 현장실습비와 귀농귀촌 훈련교육 등에 따른 사업비 1억1000만원을 투입, 안정적인 정착에 도움을 주기로 했다.
훈훈한 인정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지는 시골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고향이고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다."20여 년 동안 폐교로 방치되어 있었죠, 수많은 사람들의 꿈을 키우던 학교를 바라보면서 아쉬움이 컷답니다. 매입 절차도 어려웠지만 금액도 만만치가 않았죠. 하지만 주민들과 함께 꿈을 꾸었습니다. 주민들은 설명회에 적극적으로 참석하셔서 의견을 집약시키셨고, 매입비용은 추진위원들의 신용보증으로 매입을 했습니다. 정말 감사한 일이였죠"리모델링은 농촌 지원 사업인 산촌생태마을 사업을 유치해서 지금은 호롱불 수련원으로 거듭나고 있다고 자랑이다. 왜 호롱불 마을이냐는 물음에 "적지만 소중하고 부족하지만 나누기에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호롱불이 생각나서 함께 나누고 어우러지자는 의미로 호롱불 마을이라고 했습니다"어떤 꿈을 꾸었기에 현실이 되었냐는 질문에는 "우리 호롱불 마을은 삼성전자와의 자매결연을 통해 매주 농촌 봉사활동을 오시는 삼성전자 임직원들 덕분에 조용한 시골 마을에 가족이 엄청 늘었죠, 또한 체험마을을 통해서 뗏목체험과 남대천 체험에 많은 사람들이 오셔서 마을은 이제 젊고 희망찬 마을이 되었습니다. 호롱불 마을 분들은 이제 잘 아셔요, 함께하면 안 돼는 일이 없다는 것을요"라고 답한다.그럼 상담카페를 통한 수입도 없고 경제적으로 힘들지 않느냐는 물음에 "물론 힘듭니다. 부인한테 업혀 살죠! 하하 그렇지만 발전하는 호롱불 마을을 바라보면 부인의 질책도 별게 아닙니다. 제가 제일 젊죠, 누군가를 도와드릴 수 있고, 뜻을 같이 한다는 게 참으로 행복합니다. 이장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지금 제가 배우고 있는 이런 경험들은 언젠가는 제게 너무나 소중한 자산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라며 뿌듯한 웃음을 함께 보낸다.호롱불 마을은 2009년 시작한 녹색농촌 체험마을이지만 지금은 무주군은 물론 전국적으로도 꽤나 유명한 마을이 되었다. 어떻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마을을 바꾸고 뜻을 모을 수 있었는지, 어려움은 없었는지를 물었다."갈등이 심한 마을이었습니다. 또한 관심들도 없었고요, 하지만 꿈을 팔았습니다. 이 좋은 환경을 마을 주민만 보기에 아까웠습니다. 너무 조용하기에 젊은 가족들도 필요했습니다. 먼저 이해를 구했죠. 먼저 인정해 드리고 마음을 비웠습니다. 그리고 주민 개개인의 장점을 찾아서 역할 분담을 했습니다. 인정받고 한 분야의 최고가 되시게 했습니다. 또한 하고자 하는 뜻만 있으면 찾아와서 도와주는 무주군청의 행정적인 도움도 매우 컷습니다."이제 호롱불 마을도 안정적으로 발전하고 있는데 어떻게 살겠냐는 질문에 "상담카페를 통한 사람들과의 소통을 해보고 싶습니다. '나만이 나를 힘들게 한다' 는 말처럼 마음을 바꾸면 행복이 있는데 다들 바쁘게 사시는게 안타까워서 해보고 싶습니다."박희축 이장의 말처럼 삶의 수단인 귀농보다는 삶을 즐기고 타인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습 또한 진정한 귀농인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지난 해 말까지 무주군에 정착한 귀농귀촌인들은 모두 169가구 408명으로, 무주군은 이들의 조기정착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분야별로 농가주택수리비, 창업자금, 주택마련자금, 이사비용, 교육훈련비, 농업인 복지(영유아양육비, 가사도우미, 자녀 학자금 등), 그리고 출산장려금(첫째 50만, 둘째 120만, 셋째 360만, 넷째 480만, 다섯째 600만 등) 등을 지원하고 있다.특히, 농업분야 관련 지원내용은 「도시은퇴자 및 귀농자 유치지원 조례」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귀농학교 교육 훈련비로 실비가 지원되는 것을 비롯해 농가주택수리비로는 500만원이 지원되며, 기타 귀농상담과 군에서 운영하는 자체 교육 등은 무료로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한 농어촌소득지원기금과 융자금, 학자금, 업무상 재해 및 의료지원을 비롯해 국민건강보험료와 국민연금보험료, 영유아보육비 등의 혜택도 준다.2007년 26가구 77명에서 출발한 무주군의 귀농귀촌인구가('08년도 25농가 67명, '09년도 30농가 69명, '10년도 16농가 43명, '11년도 28가구 55명) '12년말 기준 44가구 97명으로 안정화되면서 정주인구 증가에 대한 기대도 키우고 있다. 군 관계자는 "해마다 귀농상담이 꾸준히 늘고 있다"며 "무주군에서는 체계적인 사업계획과 시행규칙 등을 마련하는 한편, 농어촌 뉴타운 조성사업과의 연계성 여부도 검토해 귀농귀촌자들의 조기정착을 도와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무주군은 올해 농업분야에서만 총 1억 2백여 만원 사업비를 귀농귀촌사업에 투입한다는 계획으로, 귀농귀촌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도시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한편, 지난 해 5월에는 무주군 귀농귀촌인들 100여 명이 "반딧불이 농촌사랑회"를 결성했으며, 무주군 농촌관광 전반의 경쟁력 강화와 소득증대를 위한 지원사업 추진, 도농교류 활성화, 아름다운 마을 만들기 등 지역사회에 기여하며 자신들의 삶의 질을 높여 나가자는데 마음을 모았다.
순창군 유등면 유촌마을에는 한결같이 부지런한 농부가 있다.서씨는 유등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학업을 마치고 서울로 상경해 유명가구회사에서 10여년을 근무했다.하지만 1997년 IMF로 불어닥친 구조조정 대상에 올라 결국 서씨는 귀농(귀향)을 결정했다.그 무렵 결혼해 신혼시절이던 서씨는 부인과 함께 태어난지 100일째 된 아이를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처음에는 농사일이 힘에 부쳤지만 아버지가 일구던 토지와 농기계 등 기반이 준비되어 있어 정착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또 어렸을때부터 자란 친구와 선배들이 고향에 있어 많은 도움이 됐다. 유촌마을은 100여가구에 달하는 비교적 큰 마을이었는데 젊은 사람이 귀향해 농사를 열심히 짓는 것을 보고 마을사람들이 하나같이 이장을 추천했다.서씨는 마을이장을 하면서 동네 사람들과 유대관계를 돈독히 했으며, 농가 소득을 올리기 위한 각종 모임과 교육에도 빠지지 않는 부지런한 농군이었다.논과 밭을 이용한 수도작 농사는 서씨가 귀농한 초기 1990년대 말까지는 수입이 그런대로 좋았다. 하지만 IMF를 겪은 이후 쌀값하락과 인건비 상승 등 잇단 악재들 탓에 점점 경쟁력을 잃어갔다.이에 서씨는 사계절 수입원을 만들 방안을 연구한 끝에 하우스를 이용한 딸기와 고추재배에 투자하기 시작했다.겨울, 봄에는 딸기를, 여름에는 고추, 가을에는 수도작으로 연결한 계절별 수익원을 고려한 작목선택이었다.1990년대 말 자신의 고향인 유등면에 들어와 논 1.6ha를 경작하며 귀농 첫해부터 딸기하우스재배 0.3ha, 이듬해 고추하우스재배 0.2와 노지재배 등 일년내내 농업에 종사했다.그 결과 그는 하우스 시작 첫해부터 고추와 딸기재배로 3000만원의 고수익을 올렸다. 이후 그는 고추 재배규모를 늘려 2000만원의 추가수익도 달성했다. 현재는 수도작 농지도 11.3ha에 이른다. 계절에 구애받지 않는 사계절 수입구조를 마련한 서상철씨의 연간 수입은 무려 1억5000여만원에 달한다.특히 그는 딸기 작목반을 구성해 작목반 출하를 통해 판로를 개척, 유통시켰다. 고추는 청정순창에서 생산된 제품임을 알리며 적극적 홍보전략을 펼친 결과, 대도시학교와 급식계약을 따내 판로를 확보했다. 이와함께 서씨는 생산뿐 아니라 유통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농업인들이 어떻게 하면 잘 살 것인가 연구하는 것에 지금도 골몰하고 있다.그는 현재 농사일로 바쁜 가운데도 이장직을 성실히 수행하며 마을의 농업발전에 힘을 쏟고 있다.특히 젊은 사람들이 많은 마을이어 '버들청년회'라는 마을 조직을 구성해 친목 도모와 농업연구에도 앞장서고 있다.서씨는"고향에 내려와서 15년동안 정말 쉬지 않고 일했고 농사짓는 사람은 부자로 살기 힘들다는 현실을 이겨내고 싶었다"고 귀농 당시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특히 서씨는"열심히 하면 길이 보인다고 생각했고 지금껏 그렇게 열심히 일한 결과 이제는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다"며 "가족 모두 건강하고 여유롭고 풍요로운 농촌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저에겐 행복이다"고 말했다.서씨는 "저희 마을을 잘 사는 마을로 만드는 것이 작은 소망이다"며"성실함과 노력이 있다면 안될 것이 없다"고 강조했다.이어 서씨는 "하우스가 힘들긴 하지만 소득에는 아주 좋다"며"뭔가 하려고 노력할때만이 농업소득도 올릴 수 있어 어렵게 사는 도시민들이 농촌으로 귀농해 열심히 일만 한다면 도시민들 부럽지 않게 살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조언했다.
순창군의 귀농귀촌 인구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지난 2001년 13명을 시작으로 꾸준한 증가세를 이어오다 2010년 215명, 2011년 209명으로 잠시 주춤했으나, 지난해 406명이 이주 정착하면서 지난해 대비 200% 증가하는 실적을 이뤄냈다.이같은 성과는 도시민 유치가 농촌인구증가 대책 및 침체된 농촌에 활력을 주는 새로운 성장동력이라고 판단한 순창군이 귀농귀촌 전담 TF팀을 구성해 체계적이고 집중적인 귀농귀촌 정책을 펼친 결과로 풀이된다.또 도내 최초로 2007년 10월 귀농인 지원조례를 제정, 행재정적 지원 근거를 마련함으로써 귀농인들이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순창군은 올해 250가구 500명의 귀농귀촌인 유치를 목표로 삼고, 도시민 농촌 유치 지원사업을 통해 다양한 사업을 펼친다. 귀농귀촌 지원센터 운영과 데이터 구축, 귀농귀촌 전문교육 지원을 비롯, 예비 귀농인 임시거주지 조성, 귀농귀촌 페스티벌, 대도시 홍보 등을 통해 '행복한 귀농귀촌, 귀농일번지 순창' 이미지를 굳혀 나갈 계획이다.군은 도시민 농촌 유치 지원사업 외에도 빈집수리비 지원, 이사비 지원, 소득사업비 지원과 같은 귀농귀촌 정착지원 예산으로 9억원을 편성했으며, 풍산면 구면사무소를 리모델링하여 오는 4월 귀농귀촌 지원센터를 개소, 귀농전문상담과 귀농전문교육 등을 실시할 예정이다.
완주군 운주면 원금당마을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박용민씨(41). 쌍용자동차에서 16년을 근무했던 박씨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구조조정의 칼바람 때문이었다. 15명의 부하를 둔 '직장'의 지위에 있던 박씨는 어느 날 휘하의 직원 8명이 구조조정이란 찬바람에 해고되면서 도의적인 책임감에 휩싸였다.결국 자신의 손으로 사표를 던지고 나선 회사의 문. 회사원 시절 주도적으로 만들었던 봉사단체의 경험을 살려 경기도 평택시에서 민생복지심부름센터 센터장으로 1년여 일했지만 이것도 자신과 가족의 일생을 맡길 만한 길은 아니었다.귀농을 결심하고 완주군 운주면을 찾아 현지 답사에 나서길 여러 차례. 귀농을 권유하는 후배의 성원까지 덧붙여져 이삿짐을 싸들고 운주면 원금당마을로 나섰다.박씨는 귀농자의 두 가지 금기사항을 첫 걸음부터 깨뜨렸다고 웃음과 함께 설명한다. 금기사항은 '땅을 사지 말라' '집을 사지 말라'이다. 자신의 생각과 현실이 맞지 않을 경우 이후 행동을 제약하는 최대의 짐이 부동산이란 말이다.귀농과 함께 마을에 집을 짓고, 음식점이 딸린 산골 펜션을 덜컥 매입해 버렸다. 세상사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귀농 첫해의 총수입금은 1500만원 정도. 투입 원가를 빼고 나면 입에 풀칠도 어려운 돈벌이였다.음식점과 펜션은 계절적 진폭이 너무 심했다. 원금당을 가로지르는 냇가에 자리잡은 음식점은 한여름엔 손님들로 빼곡하지만 기온이 내려가면 발길이 뚝 끊겨 버렸다.사업 다각화가 현안이었던 박씨는 완주의 대표적인 특산품인 곶감에 손을 댔다. 곶감은 가을에 감을 수확해 가공한 다음, 겨울부터 설맞이 수요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여름엔 '음식점과 펜션' 가을 겨울엔 '곶감'이란 사이클을 구축한 박씨의 연간 총수입액은 3000만원으로 어느 정도 늘었다.특히 박씨는 운주에서 생산되는 감을 농민들한테 매입하고 직접 가공해 원가를 낮춰, 고품질 곶감을 낮은 가격에 공급할 수 있었다. 50개 기준으로 크기에 따라 2만8000원부터 6만5000원으로 가격 경쟁력을 충분히 확보한 셈이다. 이 같은 소문이 알음알음으로 이어져 해마다 판매량이 상승세를 타고 있다.도회지 생활에서 맺은 인연의 끈으로 유통되던 곶감의 판로도 온라인으로 확대되었다. 박씨는 지인들의 성원에 힘입어 인터넷 다음에 '운주숲속농장'이란 카페를 만들어 판로를 개척했다.부인 이현주씨와 함께 갓 돌을 넘긴 아들을 안고 귀농한 일가족은 완주군 운주산 딸까지 더해져 이제 네식구로 늘었다.성공 귀농을 좌우하는 최대 조건은 부부의 일심동체. 서울 토박이인 부인은 귀농의 평생 동반자이자 최대 지원자였다. 이씨는 대뜸 "농촌에 정말 잘 내려왔다"는 말과 함께 농촌생활을 설명한다. 생활공간을 둘러싼 쾌적한 자연환경과 시골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을 나누는 삶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단다."물론 불편한 점도 많지요. 문화생활도 어렵고, 아이들이 놀만한 공간도 부족하고, 아이들 교육도 쉽지 않고, 생필품을 살 가게조차 없어 소재지까지 나가야 하고, 아이들이 아플 땐 병원도 멀리 있습니다." 이씨는 푸념을 내뱉지만, 이는 감내할만하다는 대전제에서의 불편일 뿐이다.귀농으로 쪼그라든 수입으로도 삶을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모두 이씨의 근면과 절약이다. "농촌에선 생활비가 도시보다 훨씬 적게 들잖아요" 이씨는 활짝 웃는다.박용민-이현주 부부는 또 다른 방향 전환을 궁리하고 있다. '농산물 가공산업에 한번 뛰어들어 볼까''완주군 로컬푸드 사업에 동참해 볼까'조만간 귀농 속에서의 작은 변신이 기대된다.박씨는 마을 주민들의 신임과 지원으로 원금당 마을 이장직까지 맡으며 '마을 속으로, 주민 속으로' 걸어가고 있다.
이제 귀농 4년차인 박용민씨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공 귀농을 위한 조건을 몇 가지로 정리했다.그 첫 번째가 '너무 성급하게 접근하지 말라'는 것이다. 한 때의 기분에, 또 막연한 전원생활의 꿈에 젖어 귀농 귀촌하면 십중팔구는 실패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귀농은 꿈이 아닌 생활로 이어지는 현실이라는 설명이다.둘째, 귀농을 원하는 지역의 문화와 자연환경을 철저히 점검하라는 것이다. 농촌지역의 경우 마을마다 분위기가 조금씩 다르고 정서도 제각각이어서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어우러지기 힘들다. 또 귀농 후 본인이 설계한 영농과 자연환경이 잘 맞아 떨어지는지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생산비가 훨씬 많이 들어가고, 결국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셋째, 막연한 계획보다 현실을 하나씩 대비하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준비된 귀농'만이 성공할 수 있다. 대개의 귀농자들은 머릿속에서만 구상한 비현실적 아이디어로만 채워진 사례가 많다. 자기 자신에 대한 냉철한 판단과 비판이 가감없이 전제되어야 행복한 귀농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험론이다.
완주지역에는 귀농귀촌자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 2008년 51세대 72명이던 귀농귀촌자들이 2009년 79세대 114명, 2010년 85세대 132명, 2011년 106세대 182명, 지난해에는 141세대 251명으로 가속도를 더하고 있다.귀농귀촌자들의 지속적인 증가는 완주군이 역점사업으로 추진하는 농촌공동체사업과 로컬푸드사업 등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둔 결과이다.완주군은 2008년 6월 '완주군귀농자지원조례'를 제정하고 귀농귀촌자들에게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우선 귀농귀촌자 지원사업의 지원대상자는 만 61세 이하이다. 세부 지원내역은 주택매입(신축수리)비 지원, 농지 매입과 임차비 지원, 출산장려금 및 대학생 자녀 학자금 지원, 이사비와 교육훈련비 지원 등이다.올해부터 2015년까지 3개년간 이어지는 도시민 유치지원사업은 2008년 1월 이후 귀농귀촌인이나 단체가 수혜 대상이다. 세부지원 사업은 귀농귀촌인 재능기부 활동 지원, 귀농귀촌인 투잡 지원사업, 지역주민과 함께 하는 공동사업, 귀농귀촌 팸투어 프로그램 지원, 귀농귀촌인 창업 지원사업 등이다. 해마다 2곳씩 신규 조성되는 두레농장 조성사업도 이용할 수 있다.
올해로 귀촌 4년차인 곽무영씨(71). 농촌생활이 생각만큼 녹록치 않았다는 곽씨. "처음엔 이웃과의 관계도 어색했고, 도시에서 태어나 자라온 탓에 처음 접해보는 것들이 얼마나 많던지 하루하루가 진땀나는 생활이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마을 일이 있으면 앞장서 나섰다. 그러면서 조금씩 융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대성마을이 그린빌리지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사업 계획단계부터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벽화를 그려보자는 사업계획을 주민들과 함께 세웠다. 평소 뛰어난 예술적 감각이 있던 그는 마을 담벼락 15곳에 벽화를 그렸다. 비록 큰 변화는 아니지만, 마을주민들과 함께 힘을 합쳐 소박하지만 따뜻한 변화를 이뤄냈다. 그는 "아직도 완전하게 정착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제 진안을 떠날 생각이 없을 정도로 현재 생활에 만족한다"며 "벽화를 그리고 나서 마을주민들과의 관계도 많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진안읍 대성마을은 전주에서 차를 타고 30여분 전주-진안간 국도 26호선을 타고 오면 만날 수 있는 작은 마을이다. 이 마을에 사는 할아버지 한 분은 "벽에 그려진 이 꽃이 우리 마을 복덩어리"라며 "꽃을 보러 사람들이 찾아오고 주민들의 마음을 모으고 힘을 모을 수 있도록 돕는 역할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마을 앞 농가주택 담벼락에 핀 장미와 해바라기는 4계절 찾는 이의 발길을 반겨준다. 계절이 바뀌어도 지지 않기 때문이다. 마을 입구에서 정면으로 바라다보이는 담벼락을 주시하며 더 깊이 들어가 보니, 측면 담벼락에는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글씨가 파란색으로 써 있다. 곽 씨와 마을 주민들이 함께 힘을 모아 벽화를 그리고 한번 해보자는 의지를 담아 글씨도 적었다. 대성마을 안길 담장엔 정겨운 민속벽화도 그려져 있다. 소박하지만 뭔가 따사로움이 배어 있다. 왠지 모를 안도감과 친근함에 젖는다. 마주치는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친근하다. 자연스럽게 고개가 숙여진다. 인사를 받은 한 할머니도 한마디만 물어보면 몇 마디는 풀어줄 것 같은 관심 가득한 표정이다. 골목을 지나 7분쯤 걷자 듬직한 느티나무 수십여 그루가 서 있다. 마을숲이다. 그 아래엔 모정과 주민들이 만든 옹달샘이 자리하고 있다. 바로 옆으로 마을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박물관도 있다. 기와지붕에 벽은 흙으로 올렸다. 옛 생활관을 가운데 두고 왼쪽에 디딜방앗간, 오른쪽에 정지가 있다. 정지는 부엌을 가리키는 방언이다. 옛 시골 할아버지댁에 한번쯤 가본 사람이라면 봤을 절구, 도리깨, 키, 맷돌, 지게 등 사라져가는 농기구를 구경할 수도 있다. 묘하게 눈이 쌓인 주변풍경과 조화를 이룬다. 대성마을은 전체 주민이 총 105명이다. 이중 70%에 가까운 72명이 65세 이상 노인이다. 이들이 모여 아이디어를 내고 진안군 '그린빌리지사업' 공모에 참여해 재료비 정도의 사업비를 지원받았다. 나머지는 모두 곽 씨와 주민들 몫이었다. 주민들이 모여 세부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하면서 관리까지 하고 있다. 큰 변화는 아니지만, 함께 힘을 합쳐 소박하지만 따뜻한 변화를 이뤄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대성마을 한 주민은 "점점 활기를 잃어가는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한 첫걸음은 마을에 방치된 쓰레기를 치우고 마을 경관을 해치는 시설물들을 치우는 일이 그 시작이었다"며 "마을의 얼굴인 진입로에는 화단을 만들고 낡고 지저분했던 담장에는 아기자기한 벽화가 들어 앉아 정감 있고 매력 넘치는 마을로 바뀌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함께 땀흘려 나무를 심고 벽화를 그리고 마을박물관을 만들면서 우리 힘으로도 충분히 마을을 변화시킬 수 있고, 희망을 꿈꿀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협동'한다는 의미에서 대성마을의 변화는 어찌 보면 1970년대 우리 농촌과 비슷한 모습니다. '근면, 자조, 협동'의 과거 새마을운동 기본 정신과 유사하다. 한 가지 다른 점은 관에서 개입을 자제하고 마을 주민들의 생각을 사업의 성과로 고스란히 담아낸다는 것이다.
2008년 그린빌리지사업을 시작하면서 진안군 전체 마을을 '색깔있는 마을'로 만들겠다는 목표로 2008년에 시작됐다. 진안군은 마을에서 공모한 사업의 타당성을 검토해 지원 대상 마을을 선정하고, 재료비 200만 원씩을 지원한다. 계획수립 및 시행은 모두 주민들이 맡는다. 재료비만 지원 받고 노동력과 장비 등 부대비용은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한다. 이 사업이 완료되면 환경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외부전문가 평가단이 마을을 방문해 주민참여도와 친환경 생활실태 등을 점검해 우수마을로 선정하고, 주민숙원사업비(400~800만원)를 지원하거나 2단계 참살기 좋은마을 가꾸기(1000만원 수준), 3단계 으뜸마을 가꾸기(사업비 4000만원), 4단계 녹색농촌체험마을 등 소규모 국비지원사업(사업비 2억~10억원), 5단계 마을종합개발사업(사업비 70억원 이상) 등 진안군 마을만들기 단계별 사업대상지 지정에 우선권을 준다. 각 마을의 고유한 문화, 자연, 풍습을 활용하면서 주민들의 생활환경 개선 및 마을 공동체 의식을 높여 주민들이 스스로 마을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단계별로 길러주기 위한 것이다. 군은 2015년까지 진안군 300개 모든 마을의 환경을 이 같은 방식으로 개선하면서 이 사업을 통해 쌓은 역량을 바탕으로 이후 특색 있는 소득 사업들을 펼쳐가게 한다는 전략이다. 색깔있는 마을 육성을 통해 농촌을 국민의 삶터와 휴식공간으로 조성하고, 지역에는 도농 교류 활성화, 경제활동 다각화 등으로 고용기회와 소득원을 다원화하겠다는 계산이다. 군 관계자는 "국무총리실에서 제2의 새마을운동으로 눈 여겨 보고 있을 정도로 인정받았고, 신안군 증도에서 녹색성장 대표 성공사례로 소개되기도 했다"며 "그린빌리지 프로젝트는 앞으로 농촌 마을의 삶의 질을 높이는 중장기 사업들을 주민들이 자신 있게 수행케 하는 동력원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혈연지연학연이 전혀 없는 남남이 귀농하여 오로지 부농을 일궈보자는 목표아래 의기투합, 파프리카 및 포도농장을 꾸린 의자매가 꿈을 실현해 가면서 연일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김연기(50)양명희(55) 대표에게 남편들에 대해 묻자 "우리 남편들은 농장의 일꾼으로, 말없이 우리를 도와주는 상머슴이다"면서 "아픈 과거를 갖고 있는 만큼 더 이상 묻지 말아달라"고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이쯤되면 기자는 더 궁금하기 마련, 끝까지 남편들에게 물었다. "왜 남편들이 나서지 않고 여성들을 대표로 내세웠냐고?"대답은 간단했다. 김 씨의 남편 정 모씨와 양 씨의 남편 이 모씨 모두 귀농하기 전 잘나가는 사업가였으나 부도 등으로 끼니 걱정을 할 정도로 생활형편이 어려웠다. 이후 모든 자리(?)는 부인들에게 양보했다는 것.물론 정이 씨 역시 귀농하기 전에는 전혀 알던 사이가 아니었다. 서울에서 자영업을 하며 김정 씨 부부는 하루아침에 부도를 맞고 시름에 잠겼다. 귀농을 결심하고 고심끝에 무작정 택한 곳이 전북 김제땅. 김정 씨 부부가 알기로 김제는 쌀의 고장이요, 인심이 풍부한 곳으로 알고 있었기에 무작정 김제를 택했다.김제로 내려온 김정 부부는 재기를 위해 발버둥을 쳤다. 김제로 내려온 지 얼마 후, 김제시청에서 실시하는 귀농자 교육을 알게 되고 귀농 교육에 참여 하게 된다.여기에서 운명의 양이 씨 부부를 알게 되면서 두 부부는 서로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되고, 급기야 서로 힘을 합치기로 의견을 모아 각각 귀농자금 2억씩을 보태 4억원을 마련, 900평의 파프리카 및 1200평의 포도 농장을 인수했다.지난해 6월 기존 파프리카 농장을 인수한 김양 씨 의자매는 한번 실패를 맛본 쓰라린 경험자들 이기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팔을 걷어 부치고 파프리카 재배에 올인 했다.그 결과, 지난해 11월2일 꿈에 그리던 첫 출하를 시작했다. 약 8톤에 가까운 파프리카를 서울 가락동에 팔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포도 역시 농장 옆 도로변에서 전량 판매 하는데 성공했다. 그야말로 눈물의 성과물을 거둔 셈이다. "한 번 실패를 맛봤기에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하다"는 김 씨는 "오늘이 있기까지 언니(양 씨)가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거다"며 공을 양 씨에게 돌렸다.김 씨는 "우리는 이제 형제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가 됐다"면서 "밥먹고 잠자는 일까지 같이하면서 똑같이 고민하고 노력하고 있는 만큼 세상이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양 씨 역시 "나이는 내가 더 많지만 동생이 오히려 언니 같다"면서 "동생 부부와 하나의 목표를 갖고 열심히 살고 있다보니 제2의 인생을 사는 것 같다"고 김정 씨 부부를 치켜 세웠다.김양 씨는 "아직 시기적으로 성공했다고 하기에는 이르지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서 "자신들의 오늘이 있기까지 김제시청 귀농 담당자의 헌신적인 봉사와 협조가 있었다"고 귀띔했다.김양 씨는 "김제시청 귀농 담당자는 자신들이 어려움에 처해 힘들어 할 때 용기와 희망을 복돋아 주고, 자기일 처럼 뛰어다니며 귀농을 도와줬다"면서 "그러한 공무원이 있을 때 자신들과 같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용기와 희망을 갖고 재기를 위해 최선을 다 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김양 씨는 꿈이 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여 대형 유리온실을 짓고 싶다"면서 "귀농자로서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귀농자들이 자금신청을 하게 되면 행정기관 및 금융기관은 기준에만 의존하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여 자금이 지원될 수 있도록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임해줬음 하는 바람이다"고 털어놨다.파프리카 농장을 운영하게 된 이유에 대해 김양 대표는 "솔직히 다른 이유가 없다. 순전히 경제논리로, 파프리카는 아직 생산량보다 소비량이 많다. 파프리카가 어려움을 겪게 되면 다른 작목(토마토, 딸기 등)으로 전환이 유리하다. 그래서 선택했고, 최선을 다해 파프리카 생산에 올인할 생각이다"고 말했다.귀농을 꿈꾸는 후배 귀농 희망자들에게 한마디를 부탁하자 김양 씨는 "일부 귀농 희망자들은 귀농을 잘못 이해 하고 있는 것 같더라"면서 "사전에 철저히 귀농에 대해 공부하고, 특히 각 지자체나 기타 다른 곳에서의 귀농교육이 있을 때 열심히 교육을 받는것도 나중에 큰 도움이 된다"고 귀띔했다.
고향마을에 귀향하여 웰빙농산물을 생산하는 농업인으로 자리잡으며 부농의 꿈을 일궈가고 있는 귀농인 부부가 화제가 되고 있다.정읍시 농소동 신덕마을에 위치한 '오복야 시골가자♬(정읍농원)' 농부 CEO 문응주(49)조오순(41)씨 부부가 주인공이다. 문씨는 또 정읍시 귀농귀촌협회 회장과 전라북도 협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며 귀농귀촌을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주고 있다. 특히 문응주씨는 특화작물을 생산해 가공과 유통까지 직접 실현하며 주민들로부터 인정을 받아 고향마을'통장'으로 활동하면서 이제는 마을주민 전체가 참여하는 마을만들기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문응주씨가 고향에 귀향한 것은 8년전으로 서울에서 유통업계 직장생활과 개인사업을 하던중 고향마을에 거주하는 노부모의 건강이 악화되자 남은 여생을 모시기 위해 내려온 것.당시 양호교사로 재직하던 부인을 설득하는게 쉽지 않아 1년간 먼저 내려왔지만 이후 부인 조씨도 남편의 귀향에 동참해 지금껏 함께 농원을 키워가고 있다."조금씩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시골일은 끝이 없는것 같다"는 문씨는 "농사는 계속 투자를 해야하기 때문에 스스로 매일 매일이 시작이다 생각하며 끊임 없는 노력과 연구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문씨는 처음부터 웰빙 농산물을 목표로 특화작물인 복분자, 오디, 야콘, 둥근마를 주로 생산했지만 지금은 오디와 둥근마를 주력생산하고 있다. 이에따라 농장명칭도 처음에는 정읍농원이라고만 했지만 오디와 복분자, 야콘의 첫글자를 합친'오복야'에 둥근마 캐러 '시골가자♬'를 붙여 만들었다. 두승산이 인접한 오복야 시골가자♬(정읍농원)은 1만5000여평 토지에서 생산한 특화작물을 가공해 오디즙, 복분자즙, 야콘즙, 둥근마즙과 블랙베리 원액, 복분자원액, 둥근마 가루 등을 다양하게 판매하고 있다.특히 주력 생산 품목인 둥근마는 장아찌와 발효즙 특허를 각각 출원해 둥근마즙과 야콘첨가발효즙, 복분자첨가발효즙등을 생산해 도심 소비자들의 큰 인기를 얻고있다.올해 5회째 개최된 '정읍 둥근마 축제'는 매년 10월중 ~11월초에 정읍농원 둥근마 농장에서 열리는데 도시민들에게 수확체험의 장을 제공하며 호평을 받고있다. 또 둥근마축제에는 귀향귀농귀촌인들과 이곳 신덕마을 청장년회및 지역주민들이 함께 하며 의미를 더하고 있다. 문씨의 부단한 연구노력은 다양하게 결실을 맺고 있다.농촌진흥청 성규병박사와 함께 4년여에 걸쳐 오디중에서 품종개량한 하얀뽕(일명 오복야 뽕)은 국립종자원에서 새로운 품종으로 등록됐다. 또 농촌진흥청 신품종선정위원회 외부전문위원으로 위촉되어 1년간 활동했고 2012년에 전북도 고소득벤처 농업인으로 선정되며 농업기술원 2013년도 사업의 일환으로 농장에 체험장 등을 조성할수 있게 되었다. 문씨는 "귀농귀촌보다는 귀향이 중요한것 같다"고 강조한다. 단지 시골에 내려와 농사짓겠다는 귀농인과 전원생활을 하겠다는 귀촌인들은 마을 어르신들과 생각의 차이점이 커서 괴리감을 이겨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기존에 자리잡고 있는 지역주민과 화합이 중요한데 서로간 대화 단절 등 이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고향마을로 귀향하면 청장년층과 교감이 빠르고 이를통해 마을 발전을 위해 일할수 있는 조직 구축도 쉽기 때문이다"고 덧붙였다. 마을 통장으로 활동하는 문씨가 나서서 조직한 신덕마을 청장년회는 정읍시가 지난해 10월 개최한 '2012 정읍시민 창안대회 마을만들기 부문'에서 귀향귀농귀촌 어울림 한마당(신덕마을 100년을 준비하다)으로 참여해 우수상을 이끌어냈다.신덕마을 청장년회원들은 선진지 견학과 워크샵을 주기적으로 마련하며 주민간 화합, 특화작물 재배를 통한 소득증대, 농가공창업을 통한 자생력확보, 농촌체험 ,축제 및 레저가 있는 마을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실현해가고 있다.문씨는 "생산한 농산물을 가공 판매하고 이를 직접 체험하며 믿음을 줘야한다"며 "이는 혼자만이 아닌 마을주민들과 함께 체험마을을 조성해 외지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것이 장기적으로 농촌발전과 마을 소득증대로 이어질것이다"고 강조했다. '오복야 시골가자♬(정읍농원)'063-533-4441, 홈페이지 www.obokya.com
다시 농업이다.도시의 기계적인 생활을 벗어나 농촌에서 자연의 삶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귀농귀촌이 일반적인 현상을 넘어 소망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귀농귀촌의 인기는 삶의 질 향상 때문. 슬로 라이프가 건강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 지면서 귀농귀촌은 삶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스스로 주도하는 자율의 인생을 도와준다고 평가된다.도내의 귀농귀촌과 관련, 사람들모임의 얘기를 듣고 마을을 탐방하는 지면을 마련했다. 귀농귀촌인에 희망을 다지게 하고 준비중인 사람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편집자주# 농가들은 '유통'이라는 거대한 벽에 막혀 자신들의 상품을 소비자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여섯 농가가 함께 모여 지난해'남원에서 왔어요(대표이사 조용섭)'라는 영농조합법인을 탄생시켰다. 길게는 20여년, 짧게는 4년 가량의 남원에서의 귀농귀촌 생활. 남원시 농업기술센터에서 '블로그 등을 활용한 마케팅교육'을 받으면서 시작된 이들의 '상생'은 농촌의 새로운 공동체로 성장했다. '2012년 농어촌산업박람회 대한민국 향토제품대전 우수상품 전국 1위'라는 성과도 국내산 농산물을 이용한 가공식품을 만들자, 몸과 마음에 약이 되는 농산물을 만들자, 농부도 프로페셔널한 비즈니스를 하자는 이들의 기업이념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한 농가가 바쁜 영농업무로 탈퇴해, 현재 다섯 농부가 법인에 속해 있다. △지리산두류실(생청국장, 청국장환, 허브청국장) 조용섭 씨 △하늘모퉁이(된장, 효소, 수제차) 고광자 씨 △시골농장(유기농 쌀과 채소, 전통미꾸리) 현은숙 씨 △지리산처럼(들기름, 참기름, 고랭지채소) 정정은 씨 △천년송바라기(고로쇠, 지리산산나물, 약초차) 공상훈 씨가 법인의 주인공이다.# 이들은 지난해 8월부터 공동 홍보활동을 시작했다.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은 함께 나누고, 그 과실로 상생하자는 '더불어 삶'이 판매전략이다. 하지만 같은 뜻을 가졌다하더라도 여러 농가가 함께하다보니 시행착오가 많았다. 공동의 목표설정은 시급한 과제였다. 농사 일이 끝나면 저녁시간에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거듭했다. 그 결과 향후 3년간 남원의 농산물 및 먹거리를 홍보하는데 중점을 두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현재의 판매실적에 연연하지 않고 '남원의 착한 농부들이 만든 착한 농산물'이라는 이미지 홍보에 집중하기로 한 것. 한 달에 2회씩 서울 아파트단지, 인사동거리, 고속도로 휴게소 등지에서 공동판매 행사도 기획됐다. 이들은 "당당한 농부로서 자신이 생산하는 농산품에 대해 떳떳하게 제값을 받자는 마음, 소비자들에게 우리 농산품의 진정성을 담아 전달해야겠다는 사명감을 중시했다"고 말했다.공동 이름으로 된 포장박스 없이 첫걸음을 내디딘 공동마케팅, 2011년 추석명절 선물세트가 그 출발이었다.# 이후 '남원에서 왔어요'라는 리플릿(전단)과 제법 고급스런 포장박스가 마련됐다. 하지만 초기 반응은 여전히 냉담. 또 날마다 회의가 이어졌다. "기본과 초심에 충실하자. 돈을 벌기 보다는 진정성을 알리는데 초점을 맞추자." 이 노력은 소비자들의 좋은 반응을 이끌어 값진 결실로 이어졌다. 법인은 이제 '건강하고 맛있는 밥상을 꿈꾸는 지리산 농부들'에 주력하고 있다. 개인과 지역을 넘어 시골과 도시를 잇는 '이음'의 역할, 상생과 공동의 행복을 추구하는 진정성 있는 공동체가 '남원에서 왔어요'의 미래 전략인 셈이다.
[팔팔 청춘] 여든 앞둔 '봉사왕' 이영자 할머니 이야기
[핫플레이스] 순창 강천산 힐링여행⋯사계절 자연이 선사하는 치유의 시간
[팔팔 청춘] "신체 나이는 60대"⋯80대 건강 비결은 '탁구'?
[전북의 기후천사] 불완전해도 괜찮아…기후 위기 맞닥뜨린 지구를 위한 실천 ‘비건’
[우리 땅에 새겨 있는 역사의 흔적]화암사에 피어난 꽃
[작지만 강한 우리 마을] ⑥천왕봉 품은 정겨움과 치유의 마을 '솔바람'
[팔팔 청춘] "할아버지, 안녕하세요!"⋯학교에 가는 할아버지들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교남수록
[전북의 기후천사] 기후 위기와 생태 이슈에 다가서는 예술적 실험들
창립 40주년 맞은 사선문화제전위원회 지방 축제 활성화 선두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