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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머니

▲ * 수필가 이수홍씨는 2007년 '대한문학'으로 등단했다. 수필집'노래하는 산수유꽃''춤추는 산수유''북장구 치는 산수유나무'가 있다.
어머니는 언제 불러도 가슴이 설렌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스물여섯 살 이전의 나이로 돌아간다. 그 뒤부터는 불러도 대답이 없으시다.

 

어머니 택호는 사포(巳浦)댁이다. 구례군 산동면 관산리 사포부락에서 시집을 오셨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딸 아들 다섯 명씩 10명을 낳으셨다.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자식사랑은 다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어머니는 유별나게 딸 아들을 사랑하셨다. 막둥이인 나와 관계되는 이야기는 너무 많아서 그만두고, 57세까지 짧게 살다 간 셋째 형님 이야기다.

 

셋째 형님은 인물이 잘났다. 둘째 형님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동생을 광주사범학교에 보내려고 시험장에 들여보내고, 인물이 제일 잘나고 공부도 잘하니 꼭 합격할 것이라고 했단다. 그런데 낙방을 했다. 둘째 형님은 면사무소에서 병사업무를 담당했다. 동생더러 입학시험에 떨어졌으니 군대나 가라고, 열일곱 살 나이를 열아홉 살로 고쳐서 해군에 지원 입대시켰다. 딴사람을 군에 보내기 전에 자기 동생을 먼저 보내야 떳떳하다고 그랬다. 셋째 형님이 입대할 때 우리 마을 뒷산에 있는 신사당에서 환송행사를 마치고 동네에서 구례읍내로 갈 때였다. 초등학생인 우리는 도로 양쪽에서 일장기를 흔들면서 환송을 했다. 어머니는 길 한복판 자갈밭에서 무릎을 꿇고 큰절을 하셨다. 그 일은 면민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어머니는 입대한 형님이 진해에서 훈련을 받을 때 소고기육포를 만들어 면회를 다녀오셨다. 형님은 교육 성적이 우수하여 일본에 있는 해군공작학교로 갔다. 1944년 초가을, 비가 많이 내린 어느 날이었다. 일본으로 간 형님에게서 편지가 왔다. 어머니는 글을 몰라 그 편지를 큰형님이 읽어 드렸다. 큰형님은 마루에 걸터앉아 편지를 읽고 어머니는 뜰 방 덕석에 앉아서 듣고 계셨다. '전에 어머니가 면회 오실 때 가지고 온 육포는 변소에 숨어서 먹었습니다. 진해에서 교육 성적이 우수한 3명이 일본 해군공작학교로 가게 되어 진해를 떠날 때 행여나 어머니가 또 오셨을까 하고 둘러보았지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라는 대목을 읽을 때 어머니는 앞으로 엎어져서 마당에 벌렁 누워버렸다. 큰형님은 비에 젖은 어머니를 얼른 안고 안방으로 모셨다. 어머니는 계속 우시고 초등학교 1학년인 나는 무명옷을 입으신 어머니 가슴에다 얼굴을 대고 울었다. 어머니는 세계 2차 대전이 한창일 때라 아들이 살아서 돌아올지 못 돌아올지 몰라 우셨지만 나는 그냥 어머니를 따라서 울었다.

 

지금은 두 분이 전쟁도 해군 입대도 없는 천국에 함께 계신다. 어머니는 형님에게 너를 그렇게 사랑했는데 더 오래 행복하게 살지 않고 왜 빨리 왔느냐고 야단을 치셨을까? 아니다 형님은 더 사랑을 받으면서 그때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편안히 살고 있으리라 믿는다.

 

내 나이 지금 일흔일곱 살이다. 어머니를 만날 날도 머지않았지 싶다. 학창시절에는 일주일만 못 봐도 무척 보고 싶었고, 군대생활을 할 때 그렇게도 만나고 싶었던 어머니지만, 지금은 빨리 만나고 싶지 않다. 23년 뒤에나 만나서 옛날 받았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받으면서 영원히 함께 살고 싶다. 만나면 많이 부르겠지만 우선 크게 한 번 불러봐야지.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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