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태야! 할머니랑 씨앗에 물 주러 가자." 점심을 먹고 말을 꺼내자 녀석은 발을 동동 구르며 제 어미에게 옷을 입혀 달라고 보챘다. "엄마! 빨리 옷 입혀줘. 할머니랑 씨앗에 물 주러 갈 거야."
작은 컵에 물을 담아 고사리 손을 맞잡고 씨앗에 물을 주었다. 물을 다 주고 나자마자 녀석은 스치로폼으로 엉성하게 만든 화분을 살피며 또 물었다. "할머니! 싹 언제 나와? 빨리 꽃 보고 싶어."
새싹을 기다리는 손자의 마음만큼이나 온 가족들도 싹을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하기만 하다.
25년 동안 살았던 아파트를 떠나 주택으로 이사한지 4개월이 지났다. 건강이 좋지 않은 몸으로 주택에서 어떻게 살 거냐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많았다. 불편한 몸을 움직이기에 아파트는 요새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앞동과 뒷동 사이 간격이 좁고, 게다가 1층인 아파트에서 25년을 살며 나는 햇빛과 바람에 너무도 굶주렸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죽어가는 집안의 식물을 보며, 사람도 그렇게 죽어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햇빛과 바람이 잘 드는 마당이 넓은 집을 노래하고 있었다.
간절히 바라면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우연한 기회에 이사한 주택은 넓은 마당과 화단에 창고까지 있는 집이다. 단독주택의 단점인 외풍을 차단하기 위해 도배 전에 2중으로 단열재를 댔고 창문에도 단열처리를 했다. 이웃들의 우려처럼 주택의 삶이 내게 건강악화의 화근이 되는 것은 아닐지 은근히 겁이 나기도 했다.
이사를 한 첫날 내게 다가 온 것은 밤의 고요와 어둠이었다. 아파트에선 집 앞뒤로 있는 가로등 불빛 때문에 밤이 늘 낮처럼 환했다. 이웃집의 불빛이 너무도 쉽게 그 빛이 감지되고, 암막 커튼을 치지 않으면 눈이 부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자동차소리는 물론 지나는 사람의 발소리, 말소리, 물 내리는 소리, 소리, 소음…. 그런데 잠을 위해 누운 주택의 첫 밤에 맞았던 완벽한 어둠과 고요는 마치 어느 유배지에 내가 있는 건 아닌지 싶을 정도였다.
저물 때까지 한겨울 해의 흔적은 길고 깊어 오후엔 해를 피해 달아날 정도였다. 연일 기록적인 한파라는 뉴스가 오르내려도 햇살이 길게 머무는 주택 안에서, 하나씩 장만한 작은 화초들은 겨울을 모르는 듯 생기가 넘쳤다. 층간소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주택은, 주말마다 아이의 운동장으로 변한다. 아이는 걷는 법이 없이 거실과 방에서 무조건 달리고 뛴다. 마당에서 비눗방울 놀이를 하고, 창고에 놓은 탁구대에 올라앉아 제 아비와 탁구라켓을 잡는다. 집안 가득 머무는 햇살과 바람과 더불어 뛰놀며 우리의 예쁜 희망새싹은 쑥쑥 잘도 자란다.
봄의 문턱에서 씨앗을 구입했다. 해바라기 씨앗은 햇빛이 잘 드는 화단 구석구석에 심었다. 빈 화분에는 케모마일과 꽃양귀비, 기생초, 쑥근천인국을 뿌렸다. 상치와 방울토마토씨앗을 손자의 고사리 손위에 얹어주며 스치로폼 박스로 만든 화분에 뿌리게 했다.
주말, 집엘 들어서며 손자는 제일 먼저 씨앗의 안부를 물었다. 아이는 씨앗을 뿌리며 기다림과 희망을 가슴에 담았을 것이다. 혹 보름을 기다려도 방울토마토 씨앗에서 싹이 나지 않는다면 모종을 사다 심을 예정이다. 마당 넓은 집에서 손자가 품은 희망에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한 선한 거짓말을 준비 중이랄까?
우리 집의 가장 귀한 희망새싹이, 씨앗을 뿌려놓고 그 싹을 기다린다. 녀석의 탄생과 성장을 지켜보는 우리들의 마음만큼 간절함을 담은 아이의 기다림이다. 아이는 이 기다림을 통해 인내를 배우고 자연에 대한 신뢰와 수고의 대가도 알게 될 것이다.
햇빛과 바람과 별이 머무는 마당 넓은 집은, 지금 새싹을 향한 희망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 수필가 유영희씨는 2005년 '수필과비평'으로 등단. 수필집 '남편의 외박을 준비하는 여자''자장면과 짬뽕사이''발칙한 행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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