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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테러리스트의 진실

▲ 백봉기

인터넷에서 ‘슬픈 테러리스트의 진실’이라는 영상물을 보았다. 지난해 3월 28일, 안중근 의사 사망일에 즈음하여 일본 朝日TV방송이 제작한 45분짜리 안중근 관련 프로그램이었다. 갑자기 이 프로그램이 인터넷 유튜브를 타고 들불처럼 번지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중국이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하얼빈역에 ‘안중근의사기념관’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일본은 안중근은 테러리스트에 불과하다며 연일 역사를 왜곡하는 언행을 일삼고 있다. 이에 분노한 누리꾼들이 역사의식을 바로 세우자는 충정에서 이 영상을 띄운 듯싶다. 프로그램은 안중근의 어린 시절과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된 배경, 그리고 중국 하얼빈역에서 일본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하고, 뤼순감옥에서 최후를 맞는 이야기를 토크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구성했다. 거기에 안중근의 인간미를 조명하고자 형무소장과 감방을 지키던 간수와의 따뜻한 인간관계를 감성적으로 터치한 인간다큐 프로그램이었다.

 

가슴이 휑했다. 한참 동안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방송프로그램을 보고 이렇게 감동해보기는 처음이었다. 더구나 안중근 의사가 그토록 미워하고, 죽음을 당한 일본인들이 만든 프로그램을 보고 블랙홀에 빠진 것처럼 홀린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우리들의 작은 영웅 안중근의 삶이 너무나 애처로웠기 때문이다. 30살이라는 나이에 일본 총리대신의 가슴에 총탄을 날리고, 의연하게 대한독립만세를 부를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에게는 아내와 두 아들이 있었다. 양반집 가문의 귀한 아들이었다. 그런데 왜, 무엇 때문에 낯선 광야에 몸을 던졌을까.

 

동영상을 보는 내내 가슴이 저려왔다. 아니 그의 삶에 온통 매료되어 푹 빠지고 말았다. 참으로 인간적이고, 평화주의자였던 안중근, 봄바람처럼 온화했던 그가 일본 침략자들의 죄목 15가지를 조목조목 지적할 때의 당당함과 재판에 임할 때의 그의 의연함에 전율을 느꼈다. 그래서였는지, 뤼순감옥의 일본인 형무소장마저도 안중근에 매료되어 그가 집필하고 있던 〈동양평화론〉을 완성하도록 경보국에 사형집행을 15일간만 연장해 달라는 서찰을 보냈었다. 또한 마지막 형장에 입고 갈 한복을 만들도록 아내에게 부탁했었다. 나를 감동시킨 것은 또 있다. 자신을 감시하던 일본군 간수 치바 형사와의 관계다. 안중근의 삶과 인간성에 깊은 감명을 받아 “안중근 씨,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당신에게 사과하고 싶습니다. 죄송합니다.”라 말하고, 그가 죽은 뒤에 일본으로 돌아가 안중근이 써준 유묵 ‘爲國獻身 軍人本分’을 새긴 비석을 세우고, 그의 부인과 함께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의 명복을 비는 합장을 했다니 얼마나 감동적인 이야기인가.

 

청년 안중근은 끝내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차디찬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31살. 지금까지 한 사람을 이토록 사랑하고, 그의 삶에 감동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세상을 향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대한독립과 세계평화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짧은 생애, 그의 삶 절반을 독립운동에 쓰고 간 사람, 청년 안중근의 삶이 이 아침에 왜 나를 슬프게 하는지 모르겠다.

 

△수필가 백봉기씨는 2010년 〈한국산문〉 〈현대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여자가 밥을 살 때까지〉 〈탁류의 혼을 불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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