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하나로 연결돼 있고 그렇게 우린 한 몸이라고 사회 역학은 얘기해준다
1840년대, 독일에 루돌프 피르호라는 의사가 있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혈전증에 대해 과학적 학설을 제시하는 등 학문적 능력이 탁월하였을 뿐 아니라, 당대 독일 의학계에 관찰과 실험으로 검증된 의학을 기초로 한 의료를 요구하는 소신도 겸비한 의사였다. 1848년 독일의 북부 실레지아 지방에 발진티푸스 전염병이 창궐하자 독일 정부는 잘나가던 피르호를 그곳으로 파견하여 조사하게 했다. 그 지역은 극빈층의 폴란드 소수민족이 살던 곳이었고 피르호는 영양결핍과 가난, 전염병에 신음하는 비참한 현장을 보게 된다. 파견 3주 뒤 피르호가 작성한 발진티푸스 창궐에 대한 보고서에는 놀라운 처방이 실린다. 그가 내린 처방은 환자 개개인에 대한 투약이나 식품, 주거 공급이 아니었다. 그는 정치적 자유, 교육체제의 개혁, 가난한 이들에게 물리던 세금을 부자 지주에게 전환할 것 등 ‘사회적 처방’을 지시하였다. 질병의 원인은 사회적 불평등과 부정의한 제도에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종일 작은 방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 통증의학을 전공한 터라 이곳저곳 아픈 증상을 호소하는 분을 자주 만나고 있다. 그렇게 만났던 분 중 오래전 만났던 한 환자를 잊을 수 없다. 건장한 체격의 그는 심한 우측 팔꿈치 통증으로 병원에 찾아왔고 초음파 검사상 힘줄과 인대의 손상이 매우 심한 상태였다. 그는 공장에서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옮기는 일을 오랫동안 해왔고 이미 수년 전부터 아플 때마다 팔꿈치에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아 왔다고 했다. 나는 현 상태에서 스테로이드 주사를 또 맞는 것은 손상을 악화시킬 우려가 있으니 당장 통증을 완화하지 못하더라도 일을 좀 쉬면서 증식치료를 해보기를 권하였지만 그는 내 제안을 거부하고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길 원했다. 하루라도 빨리 통증을 줄여 일하러 가야한다고 했다. 그 치료가 장기적으로 손해라는 것을 알아도 업무에 서둘러 복귀해야 하므로 달리 선택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환자 앞에서 나는 의사로서 무기력했다. ‘치료받기 위해 잠시 쉬면 계속 쉬어야 한다’는 그의 말이 머릿속에 한동안 머물렀다. 그에게 무엇을 해줘야 했을까 고민해도 답은 없었고 끝내 나는 작은 방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 앞에 서게 되었다.
수당시대에 쓰여진 천금요방 권1의 논진후제사에 ‘상의의국, 중의의인, 하의의병’ 이란 문장이 있다. 상의는 나라를 치료하고, 중의는 사람을 치료하고, 하의는 병을 치료한다는 뜻이다. 얼마 전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읽으면서 계속 떠올린 문장이었다. 이 책의 저자인 사회역학자 김승섭 교수는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냉철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설명하고 있다. 일터가 안전할수록 노동자의 금연율이 증가한 이야기, 동유럽에서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이행하면서 결핵 환자들이 증가한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가 치료해야 할 것은 환자 개인뿐 아니라 사회와 공동체라는 것에 더 강한 확신을 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아프다. 어떤 이는 가난해서 아프고 어떤 이는 부유해서 아프다. 여기저기서 신음이 들린다. 그때 사회역학은 얘기해준다. 나와 너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나와 사회도 분리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그렇게 우리는 한 몸이라고.
우리가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피르호의 말을 옮겨본다.
“의학은 사회과학이며 정치는 큰 규모의 의학일 뿐이다. 의학은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지적하고 그에 대한 이론적 해결책을 찾아내야 하며, 정치가와 실천적 인간학자는 실천적 해결책을 제시할 의무를 진다. 의사는 가난한 자의 대리인이며 사회적 문제도 크게 보면 의학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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