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마지막까지 피와 가죽과 뼈까지도 다 주고가는 우직한 소
먼 옛날부터 소는 인간의 생활에 풍족함을 가져다주는 동물이었다. 알타미라동굴이나 퐁드곰동굴암벽화에는 소가 그려져 있어 수렵생활부터 인간은 소에게서 생활의 윤택함을 기원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목축생활로 접어들면서 야생동물 중에서 소를 가축으로 길들인 것이나, 신석기시대 유물로 돌보습이 남아있는 것을 볼 때 인간은 이미 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지증왕 때 소를 이용한 농업으로 생산량이 증가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한다. 좁은 논길과 산길, 소규모의 농토를 가지고 경작을 해야 하는 우리의 생활에서 소는 꼭 필요한 가축이었다. ‘소는 농가의 조상이다’ 라는 말은 소는 살림에 매우 중하므로 조상같이 귀한 존재라는 뜻일 것이다. 이렇게 사람과 같이 살면서 사람의 손으로 길들여진 소는 언제 보아도 어린아이 같은 유순함과 어른 같은 넉넉함을 지닌 짐승이었다.
소는 우직함으로 인하여 멸시와 사랑을 함께 받아온 짐승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멸시보다는 그 우직함을 더 사랑하였다. 이광수의 ‘우덕송’을 보면 소는 동물 중의 인도주의자라 하였고, 만물이 점점 고등하게 진화되어 가다가 소가 된 것이라고 칭송하였다. 그리고 소가 늙어 힘이 없어 인간을 돕지 못하게 될 때는 도살장으로 끌려가 내리치는 쇠메를 맞고 마지막 우는 울음을 ’이제 다 이루었도다 ‘ 라는 만족의 울음이라고 하였다. 인간에게 마지막까지 피와 가죽과 뼈까지도 다 주고 가는 것도 소가 인간에게 베푸는 귀한 희생이라 할 수 있다.
소는 그리움의 상징이다. 정지용 ‘향수’는 국민노래처럼 사랑을 받는다. 시인은 고향을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이라고 읊고 있다. 1920년대 그림과 같은 그의 시를 생각하면 이북으로 간 시인의 삶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중섭의 그림에는 잃어버린 행복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는 아내와 자식을 만나고 싶은 그리움의 감정을 ‘소’에 실어 나타냈다. 소는 바다 건너에 있는 가족을 향하여 달려가고 싶은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이 두 차례나 소떼를 싣고 판문점을 넘어 북으로 갔다. 그때 많은 국민들은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왜 일까? 한 마리 소를 훔친 돈으로 거부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에 대한 경이감, 아니면 천여 마리라는 거창한 소의 숫자, 통일에 대한 기대감,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소’라는 짐승 때문이었다. 소 대신에 천 대의 자동차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간다 한들 그것은 물질과 돈에 불과 할 뿐, 고향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실어 가는 그 소만은 못 할 것이다.
사람과 함께 살아오며 애환을 같이해온 짐승 -고향의 전설을 전해 줄 것 같은, 해설피 울음을 우는 어느 실향민의 모습 같은, 문명도 모르고 빈부도 모르는 알타미라동굴의 암벽화에 나오는 소- 그 소가 새해에 큰일을 저질렀다. 김영란 법을 바꾼 것이다.
김영란법이 제정되면서 농민들의 원성이 높았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소였다. 농축산물 선물비용이 5만원으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소고기 소비가 위축되었다. 어쩔 수없이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기 위하여 김영란법이 개정되었고, 농축산물 선물금액이 5만원에서 10만원으로 상향 조정되었다. 우직한 소가 칼날 같은 김영란법을 바꾸어놓은 것이다. ‘소는 김영란법도 바꾼다’는 소에 관한 또 하나의 말이 생겼다. 올 설에도 소가 설음식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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