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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내장산 용굴암

이대영
이대영

초여름 은빛 햇살 쏟아지는 싱그러운 연초록 잎 사이로 도열한 신록 터널이 나를 반긴다. 이 터널 끝에는 내장사가 있고 왼편으로 올라가는 길이 용굴암으로 가는 길이다. 여름의 전령사 매미들의 합주소리가 예서제서 넘쳐흐르고 절간에서는 둔한 목탁소리가 들려온다. 어디선가 ‘안의’와 ‘손홍록’ 두 선비의 절박한 외침이 들려올 것만 같다.

용굴암 자락에서 시원한 산바람을 맞으며 계곡을 따라 험한 절벽의 도랑 길을 구불구불 올라가다보니 벌써 숨이 차고 온몸이 땀범벅이 되었다. 그래도 지금은 평탄한 도로라 여유 있게 올라가는 나를 보면서 400여 년 전 두 분의 모습을 반해 보려고 애를 썼다.

내장사에서 용굴암까지 평탄한 계곡사이를 걷고 돌다리를 몇 번 건너다보면 용이 하늘로 승천하였다는 전설을 지닌 용굴암에 이르게 된다. 내장산의 비경에 취하여 굽이굽이 금선계곡을 걸어본 사람이라면 용이 승천했다는 용굴암을 보고 저절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용굴암은 거의 수직으로 된 바위에 부엉이 집처럼 자리하고 있어 철제 사다리를 수십여 계단 올라가야 다다를 수 있다.

헐떡이며 겨우 올라 한숨 내쉬고 바라보는 순간 “내가 바로 임진왜란 때 우리조상 태조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낸 용굴이다. 알겠느냐?”하는 소리가 폐부 깊숙이 울려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고개를 숙였다.

1592년 부산에 침입한 왜적들이 서울을 향해 돌진하며 전 국토가 함락의 위기에 처해 사람마다 자기 살길을 찾아 동분서주 하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나라는 온통 아수라장이 되었다. 바로 이때 혼란스런 속에서도 의연히 일어난 두 선비가 있었다. 두 선비는 자기 집 가솔들과 우마차 20여대를 끌고 ‘태조 어진’과 ‘왕조실록’이 있는 전주 경기전 향해 정읍에서 출발하여 도착하니 경기전 참봉 ‘오희길’은 마침 전라감사 ‘이광’과 정읍 내장산을 적합한 피신 장소로 협의 하여 확정하고 있던 차였다.

이들의 도움을 받아 태조어진과 바로 옆 사고에 있는 실록들을 우마차에 실으니 62궤짝이나 되었다고 한다. 타인의 눈을 피하여 밤낮없이 무거운 우마차를 밀고 끌며 용굴암의 험악한 계곡을 올라갔을 모습을 생각하니 두 분의 거룩하고 숭고한 나라사랑에 고개가 숙여졌다.

맨몸으로도 오르기 힘든 바위절벽위에 이렇게 끌어 올려 진 어진과 실록을 두 분이 번갈아가며 숙직을 서면서 애를 태웠겠구나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장산’이란 지명의 내장(內藏)이란 말은 안쪽에 깊이 감춘다는 의미가 있으니 아마도 이런 연유에서 지어진 이름이 아닌가 싶다.

7년간의 긴 전쟁이 끝난 뒤 다른 곳에 모셔있던 어진과 실록은 모두 화마에 소실되어 버리고 없었다. 그런데 1년 여 이곳에 머물던 어진과 실록은 아산객사로 이안했다가 강화도를 거쳐 묘향산보현사 별전에 봉안하여 화를 면하고 다시 전주에 모셔져 지금의 태조어진과 실록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 역사의 한도막인 태조부터 명종까지 열세분의 역사를 이어갈 수 있게 되었으니 안의, 손홍록 두 선비의 숭고한 나라 사랑의 정신에 참으로 고개가 숙여진다. 어진은 국보317호 지정되었으며 조선왕조실록은 국보로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오늘도 많은 관광객을 맞이하며 유유히 우리와 함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 이대영 씨는 전주 서신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했으며 현재 어진박물관 문화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 잊혀가는 옛말 모음집 <그게 시방 무신 말이디아> 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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