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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석류꽃

박성숙
박성숙

첫 수필집 <풀꽃이고 싶다> 가 출간되어 책이 도착한 날이었다, 나는 이 책을 안고 맨 먼저 관음선원으로 달려갔다. 첫 번째 서명한 수필집을 부처님께 올리고 기쁨으로 일렁이는 마음을 다독이며 깊은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절에 당도한 때는 소나기가 한 둘금 지나간 뒤여서 무성한 나뭇잎에서는 그때까지 톰방톰방 물방울이 듣고 있었다. 사나운 빗줄기에 후벼 파인 마당 한편에서 꾸부정하게 허리를 굽히고 스님은 무엇인지 열심히 줍고 계셨다. 가까이 가 보니 스님께서는 비에 떨어진 흙 묻은 석류꽃을 줍고 계셨다. 스님의 하는 양을 바라보고 섰던 나도 어느새 슬그머니 따라 앉아 산 모래알이 튀어 배긴 빨간 석류꽃을 주워 모았다.

스님하고 나는 깨알처럼 튀어 박힌 흰 모래알을 말끔히 털어내고 새악시처럼 고운 얼굴을 드러낸 석류꽃을 미륵님 앞의 돌상 위에 놓아 드리고 예배했다. 펄펄 살아 있는 생명을 끊어 헌화한 때보다 지면에 나뒹구는 흙 묻은 꽃을 주워 헌화한 일을 더욱 여법(如法)하게 여기시는 듯, 미륵님은 투박한 얼굴에 자애 넘치는 미소를 날리며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셨다.

그 정겨운 미소는 길고 긴 방황에 종지부를 찍고 대문 안에 들어선, 돌아온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웃음 같은 편하고 푸근한 안도의 미소였다. 스님께서는 큰 비가 내린 뒤의 축축한 누기는 건강에 해롭다시며 차를 권하시었다. 분청사기의 작은 찻잔에 따끈한 작설차를 따라 주시며 “귀하고 예쁜 막내 따님을 보시어 기쁨이 크겠습니다.” 하시며 자그맣고 예쁘게 장정된 수필집의 출간을 축하해 주셨다.

그렇지, 3형제 내 아들이 배가 아파 출산한 육신의 아들이라면, 내 수필집 「풀꽃이고 싶다」는 영혼이 진통하여 가슴으로 출산한 정한의 딸이겠지, 스님께서는 작가들도 생각하기 힘든 표현을 너무나도 쉽게 말씀하셨다.

법당을 내려서서 돌아올 무렵에는 축축하던 누기도 어지간히 가시고 뜨락이 뽀얗게 말라 가고 있었다. 그리고 반질대는 이파리 사이에 종처럼 매달린 빨간 석류꽃에는 서편으로 기우는 저녁 햇살이 찰찰 넘치도록 고여 있었다. 뜨락은 고요하고 백화는 만발한데 석류 앞에 멈춰선 내 발길은 차마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려야만 했다.

아무도 보아 주지 않는 후미진 곳에 피어 있는 꽃. 나마저 보아 주지 않는다면 석류꽃은 조르르 눈물을 흘리며 더운 한숨을 토해낼 듯, 그렇게 애잔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장미처럼 화려하지도, 봉숭아처럼 애처롭지도 않으면서 그저 여염의 여인처럼 수더분한 꽃. 초롱한 깎지 속에 숨어서 빨갛게 빨갛게 달아오른 꽃.

장미가 부조하는 현대인의 사랑을 대변하는 꽃이라면, 석류는 여인의 조여 맨 가슴속 깊이 숙성된 생명의 엑기스와 같은 꽃이 아닐는지. 뜨거운 열정을 알알이 뭉치고 수줍은 숨결로 곱게 물들인 후. 견딜 수 없이 꽉 찬 순간 ‘툭’ 하고 터져서 가슴을 열어 보이는 꽃.

석류꽃은 어쩌면 늦깎이로 등단하여 알알이 뭉치었던 평생의 정한을 이제서야 한 권의 수필집으로 툭 터져 내보인 내 가슴속 같은 그런 꽃이 아닐는지.

 

△ 박성숙은 한국문인협회 전북지부에서 시 부문으로 ‘문예사조’에서 수필부문으로 등단했다. 시집 ‘규화목 사랑’, ‘붉은 꽃 지고’ 수필집 ‘풀꽃이고 싶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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