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하는 일마다 척척 잘도 해낸다. 눈썰미도 좋고 기억력이나 생각하는 머리 자체가 뛰어나다 보니 우리 집에서 컨트롤타워 같은 존재다. 그러니 지금 까지도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지않는가? 그런데 요즈음은 몸이 피곤하고 예전 같지 않다는 소리를 자주 한다. 젊은 시절에는 억력이 좋아 척척 외기도 잘했는데 머리가 잘 안 따라 준다는 푸념이 귓전에 스친다.
얼마 전 일에는 미장원을 다녀온 뒤 어떤 남자를 칭찬했다. 그 사람은 집안일에 관심이 많아서 고쳐야 할 것이 보이면 곧 바로 수리를 한다며 부러워 했다. 그리고 우리 집은 수리할 것이 많은데도 밖으로만 돌아다니느라 관심이 없다며 은근히 나에게 핀잔을 주곤 했다. 내 스스로 생각해봐도 고칠 것이 보였지만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으니 오죽했을까?
직장을 다니는 아내는 토요일이면 TV 앞에서 고단했던 몸과 마음을 내려놓고 원망과 상처들을 삭이며 가벼운 안식을 취한다. 그런데 오늘은 리모콘을 만지작거리며 뭔가 불만이다. 본인이 좋아하는 프로가 있는데 TV가 안 켜진다는 것이다. TV에 관해서 문외한인 나는 어찌할지 몰라서 서비스를 받아야 하나 고민하며 리모컨을 달라고 했다.
아무리 작동을 해도 끔쩍을 안 했다. 모니터 앞뒤를 보았지만 열지도 못해서 여기저기 눈에 보이는 곳만 깨끗이 닦아내고 리모컨을 켜보니 켜지지 않는가? 아내는 어떻게 고쳤냐고 눈이 휘둥그레지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속으로 먼지만 제거했는데 하면서도 나름 자부심을 가졌다.
인생의 마라톤에서 반환점을 돌고 있는 나는 지금 제2의 인생을 체험하고 있다. 그동안 나는 직장에 다니면서 급여만 통장에 꼬박꼬박 넣어주면 최고의 남편인 줄로 착각했다. 그런데 아내는 일인다역으로 살며 직장까지 다니고 있었으니 이제야 알 것만 같다. 그런데 퇴직 뒤에는 내가 집에 머문 날이 많아져서 아내와 역할이 바뀌었다.
아내의 하던 일을 도맡아 한다. 세탁기 활용법을 몰라 아내에게 배웠고, 세탁 뒤에는 저녁이면 빨래를 걷어서 개었다. 그리고 어설펐지만 설거지도 했다. 기름진 그릇들은 주방 세제를 사용하지 않고 밀가루를 활용하여 제거하는 것도 배웠다.
군대 생활 시절 1년쯤 되었을까? 초년병들이 6개월 동안 식기 당번을 했다. 그때는 플라스틱 그릇으로 기름기 있는 식사 뒤에는 찬물에 그냥 씻으면 절대 닦이지 않아 반드시 물을 데워 씻었다. 엄동설한 겨울철에 야외에서 그릇을 세척하여 관리를 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며칠 전에는 싱크대 밑으로 물이 샌다고 해서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를 쳤다. 싱크대 아랫부분을 교체하려고 막상 부딪쳐보니 나름 애로가 많았다. 관련 업자를 부르면 출장비까지 주어야 한다는 말에 해당 부품만 구입하여 교체했다.
요즈음 아내가 나를 대하는 눈이 달라졌다. 그동안에는 부정적으로 여기며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남편이었으리라. 그런데 아내의 눈썰미 닮아 나도 가정생활의 세세한 일들을 척척 해결하니 남편이란 존재에 고마움을 느끼는 것 같다. 말 한마디만 해도 척척 알아서 서로를 토닥이며 살아가니 아제 내일을 기대해도 좋을 듯 하나 보다.
△ 하광호 수필가는 진안 출생으로 진안군청에서 퇴직했으며 「표현」에서 등단을 했다. 전주시민문학제에 수상을 하였으며 현재 진안문인협회 회장, 신아문예대학 작가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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