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찾는다는 핑계로 날마다 술집을 돌아다니면서 생판 모르는 아저씨들한테 술을 얻어먹고 취하는 고아원 아이. 최인호의 단편소설 <술꾼>의 주인공이다. ‘술꾼’은 ‘술’에 ‘꾼’을 붙인 말로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주량 또한 만만치 않은 사람을 가리킨다. 진정한 술꾼은 주종(酒種)을 가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모름지기 술꾼은 술시가 되면 술이 고플 줄 알아야 한다. 계절 따라 조금 다르지만 ‘술[酒]시’이기도 한 술시(戌時)는 저녁 7시부터 9시까지다. 그런데 한자어 ‘술(戌)’은 ‘개(犬)’하고 뜻이 크게 다르지 않다. ‘술 취한 개’도 거기서 나온 말일까.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찰떡궁합이 따로 없다.
어설픈 흉내의 뜻을 가진 말로 ‘풋’이 있다. ‘풋마늘’이나 ‘풋사랑’의 그 ‘풋’이다. 잔 것 같지 않은 잠도 ‘풋잠’이다. 누군들 양손에 술병을 움켜쥐고 태어났으랴. 다들 처음에는 남들 따라서 어설프게 마시기 시작했으니, 그 또한 ‘풋술’이다. 풋술의 대부분은 맛도 제대로 모르면서 따라주는 대로 들이붓는다. 그걸 ‘뻘술’이라고도 부른다.
평소에는 입에 대지도 않던 술을 어떤 일로 ‘회가 동해서’ 갑자기 퍼마시는 사람들이 있다. 한바탕 소나기처럼 퍼마신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 ‘소나기술’이다. 술에는 장사 없다고 했다. 소나기술에 엉망으로 취한 이는 제 몸과 마음을 가누지 못해 곱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 일쑤다.
아, ‘홧술’도 있다. ‘홧병’을 다스리려고 마시는 술이다. 이 또한 뒤끝이 좋기 어렵다. 술이 나를 마시기 때문이다. 홧술이나 소나기술을 마시고 나면 ‘술망나니’ 소리나 듣기 십상이다. 크고 작은 사고를 치기 일쑤다. 끊어진 필름은 무슨 수로 이어붙일 수 있을까. 술을 ‘도깨비 뜨물’이라고 불렀던 것도 그런 까닭에서였으리.
논에 물을 대려면 삽이나 괭이로 물꼬를 터주어야 한다. 술도 물이다. 그래서 술이 들어가는 목을 ‘술꼬’라고 한다. 술을 잘 못하던 사람이 주량이 크게 늘어서 술을 잘 마시게 된 것을 두고 옛날에는 ‘술꼬가 터졌다’고 했다. 그런 이들이야말로 앞서 언급한 술꾼들 아니고 무엇이랴.
‘타오르는 물’이 술이다. 술시부터 자시(子時) 끝까지 퍼마신 술은 다음날 아침에도 코나 입을 통해 알코올 기운을 활활 풍겨낸다. ‘소줏불’이다. 빈속에 안주 없이 마시는 술을 최고로 치는 술꾼들이 적지 않다. 그걸 ‘강술’이라고 한다. ‘깡소주’를 마신다고 하지만 그건 군대식 용어를 빌려다 악으로 깡으로 마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다.
프로기사가 되면 초단을 받는다. 다른 이름으로는 ‘수졸(守拙)’이다. 졸렬하나마 스스로는 지켜낼 줄 안다는 뜻이다. 바둑의 최고 단수는 9단이다. 그걸 ‘입신(入神)이라고 한다. 신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뜻이다. 술도 바둑의 입신하고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지가 있다. ‘열반주(涅槃酒)’다. 한평생 술과 더불어 살다가 결국 술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그야말로 ‘술독에 빠져 죽는’ 경지 아니고 무엇일까.
풋술이든 뻘술이든 상관없다. 가끔 퍼마시는 소나기술이 대수랴. 굳이 술꾼 아니라도 살다 보면 때로는 홧술도 필요하리. 출근해서까지 소줏불 좀 풀풀 날린다고 세상이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가끔 깡소주 퍼마신다고 누가 잡아갈 턱 있을까. 그래도 딱 하나, 열반주만은 멀리할 일이다. 입원실 병상에 며칠간 누워 지내면서 그런 생각을 잠깐 했었다.
/송준호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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