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대 문호 도스토옙스키가 쓴 불후의 명작 소설 <죄와 벌>을 읽고 아인슈타인은 고백했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어떤 과학자보다도 많은 것을 나에게 준 과학자다”라고. 무엇 때문이었을까? 경제적인 이유로 전당포 여주인을 살해한 죄인, 그리고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스스로 몸을 내 맡겼던 소냐, 그들이 시베리아 유형생활을 통해 쏟아 부었던 사랑의 여정에서 아인슈타인은 인간적인 깊은 감명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죄와 벌을 보통의 개념으로 보지 않았던 도스토옙스키의 독특한 관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할 뿐 아니라 우리의 전통 가치체계에서도 신상필벌(信賞必罰)은 너무나 당연한 정의의 개념이고 공정의 가치였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로마법은 가혹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죄와 벌의 한계를 명확히 구분 짓는 법 정신을 주장하는 근거이기도 했다.
예수님 시절, 여인이 죄를 저지르면 그것도 간음죄를 저지른 여인은 거리에 세워진 채 군중이 던진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는 무서운 형벌이 시행되던 때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와 벌을 보통의 관점과 다르게 가르치셨다. 간음죄를 저지른 여인을 군중 앞에 세우고 “죄 없는 사람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고 명령하셨다.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여인에게 돌을 던진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여인의 주변에는 예수님 말고는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 가거라 나도 너를 용서하였다.” 죄와 용서에 대한 개념을 가르쳐주신 불후의 가르침으로 두고두고 인용하고 있는 명구이다. “죄 없는 자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스도의 진리이고 가르침인 ‘용서’는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류 모두의 구원사업이고 더 없는 기회이기도 했다.
문명과 미개의 기준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까? 단순히 문명을 이해하고 못하느냐에 판단의 기준을 둔다면 세계는 적잖이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경우를 바벰바족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바벰바족은 남아프리카 깊은 산골에서 사는 이른바 소수 흑인 미개민족이다. 우리가 말하는 문명국민은 아니다. 소득과 생활은 보통의 개념으로는 형편이 아니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의 행복지수는 상위였다. 바벰바족은 그러나 세계의 어느 민족도 어느 문명국가도 할 수 없는 위대한 전통을 만들어 이어나가고 있다. 지구촌의 어느 한구석에 천국을 만들어 사는 셈이다. 얘기는 이렇다. 구성원의 누군가가 죄를 저지른 일이 생기면 추장은 마을 사람들을 동네 가운데 공터에 모이게 하고 한가운데를 비워 놓은 채 둥그렇게 않도록 정리를 한다. 죄인을 가운데 세우고 어린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빠짐없이 그 죄인이 평소에 했던 미담을 이야기하도록 한다. 미담, 감사, 선행, 장점 등의 말을 한마디씩 하도록 한다. 비록 보잘것없는 미담이라도 빠지지 않도록 한다. 칭찬릴레이는 때에 따라 밤을 새우고 며칠씩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참석한 사람들의 칭찬 릴레이가 끝나면 음식을 먹고 춤을 추고 죄지었던 자를 에워싸고 즐거움의 축제를 벌인다. 마치도 많은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꼴로 돌아온 둘째 아들을 환영하는 성경의 ‘돌아온 탕아’ 얘기처럼. 저녁밥을 먹고 시작한 바벰바족의 칭찬 릴레이는 밤을 지새우고 아침이 되어서도 끝이 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 이름도 아름다운 바벰바족 칭찬축제다. 아름다운 전통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가슴 뭉클한 미덕이고 미풍이 아닐까 싶다. 바벰바족이 사는 이 마을에는 본래 천사들이 내려와 살았었고 그 후예들이 굳이 문명을 거부하며 살았던 천사 마을이라고 하면 지어낸 거짓말이라고 할 만큼 아름다운 마을 이야기다. 바벰바족 칭찬축제를 단순히 미풍양속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평가라고 말하고 싶어질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오늘날 바벰바족 마을에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거의 없어 축제를 벌이는 일이 극히 드물어졌다는 것이다. 판사도 없고 검사도 없고 다만 한 사람을 위한 수백 명의 변호사만이 있는 바벰바족 마을이야말로 지상의 낙원, 아니 천국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원죄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한평생 절대로 죄짓지 않고 살 수는 없다. 문제는 회개와 용서다. 가톨릭의 중심 교리요 사상이 바로 회개와 용서인 것도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자세히 따지고 보면 의식주를 비롯한 모든 인간 활동이 모두 죄와 연관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회개라는 말도, 뉘우친다는 말도, 용서라는 말은 더욱 인간이 쓰는 사전에 올라오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지구촌에는 상식을 뒤엎는 미담과 조화가 수없이 많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바벰바족의 미화가 그 대표적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바벰바족의 이 미풍은 인간이 만물의 영장임을 증거 해 주는 예화로서도 충분하다. 또한, 지구는 수많은 별 가운데 으뜸일 수밖에 없는 별 중의별임이 입증되고 있는 셈이다. 당장 우리 사회에 적용해 나갔으면 좋겠지만 그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고 가족끼리라도 시도해 보면 어떨까 싶다.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면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도 했으니. 유일하게 ‘애향운동’을 도민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우리 전라북도가 실험적으로라도 시도해 보면 어떨까.
/안홍엽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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