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TV방송에서 독일 역사상 첫 여성 총리로서 16년 동안 독일 정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유럽 평화에 크게 기여한 앙겔라 메르켈(A. Merkel)의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과 관련한 외교의 실패에 대한 보도가 있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앙겔라 총리 시절 과도한 대 러시아 유화정책(양보·타협, 충돌을 피하고 긴장완화를 위한 정책)을 펴 러시아로부터 전체 수요량의 50%의 천연가스를 쉽게 들여올 수 있게 되었으며 때문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입에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었다는 것이다(제1차 세계대전 직전 영·독·불은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히틀러에게 오스트리아·체코의 침략·합병을 묵인하였고, 더 나아가 히틀러가 폴란드를 공격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는데 이제 위 3국은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우크라이나의 동부지역 ‘돈바스’를 러시아에 넘겨줄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함). 그런데 독일과 서구 열강의 ‘외교정책의 실패’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특히 독일은 중부 유럽에 위치한 관계로 전쟁이 많았고 전쟁의 원인·책임에 대한 ‘사가논쟁’(史家論爭)이 잦은 것이 사실이다. 그 한 예로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 청년에 의해 피살되어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는데,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전쟁을 독려하는 전보’를 보냈다는 데서 독일의 전쟁 책임론이 등장했고 그 결과 막대한 피해보상을 해야만 했다. 또 다른 사가논쟁은 홀로코스트(유대인 600만 살해)로 독일의 보수우파들이 유대인 대량 학살을 유대인 책임으로 돌리는가 하면, 유대인들은 이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이어서 한 나라의 외교(外交)가 국가 존립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지를 독일·오스트리아·영국 등의 나라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오스트리아인인 히틀러가 젊은 시절 독일로 들어가 나치즘을 중심으로 정치 역정을 폈는데, 히틀러의 주 정치적 목적은 제1차 세계대전의 평화협정인 베르사유조약의 개정이 아니었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가 약 600년간 주역을 했던 신성로마제국의 재현 즉, 대 게르만국가 건설이었다. 이를 위해 히틀러는 위장전술과 단계적 전략을 편 외에도 영국의 환심을 얻기 위해 영국의 제국주의 정책에 적극 협력하겠다고 했고, 프랑스에는 제1차 세계대전 패배에서 잃은 보석 같은 알자스-로렌을 포기한다고 했으며, 이탈리아에는 한때 오스트리아에 속했던 남 티롤을 양보하겠다고 했지만 마침내는 영국의 반대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무엇보다 서방 국가들이 히틀러에 대해 유화정책을 편 이유는 히틀러가 서방국가들의 기독교와 기독교 문화의 보전을 위해 제1선에서 러시아의 공산주의를 막아내겠다고 약속·선언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유화정책을 택한 또 다른 이유는 서방국가들의 국민들, 특히 영국의 일반 대중들이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에서 “이젠 전쟁이 진절미 난다”라고 했고, 재무장을 적극 반대하고 군비축소를 원했으며, 정부가 지나치게 표를 의식한 때문이었다. 이를 방지하기 위헤 일찍이 플라톤은, “통치자는 탁월한 통찰력을 가져야 하고, 눈앞의 이익과 안일함 대신에 먼 미래를 볼 줄 알아야 하며, 자기가 옳고 대중이 틀리면 자신의 주장을 강력히 실천에 옮길 강력한 의지가 필요하다”라고 했다.
/이규하 전북대 인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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