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8일 우석대학교를 찾은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는 북한과 한국을 두루 경험한 ‘한반도통’ 다운 정견을 드러냈다. 그는 ㄱ 발음이 종종 빠지는 것을 제외하고는 유창한 우리말로 강연과 문답을 주고 받았는데, 참석한 다수가 중국유학생인데도 한국임을 고려한 외교적 감각이 돋보였다. ‘한중관계의 발전’이 주제였지만 중국의 현 상황과 대외노선에 대한 총괄을 짧은 시간에 담아냈다.
올봄에 진행된 중국 양회(전국인민대표대회,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의 성과를 자찬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덕담으로 마무리하는 그의 말은 전형적인 ’중국풍‘이었다. 중국 공산당의 간부들을 만나면 다 그렇게 모든 사안에 대해 당의 노선에 따라 말이 정돈되어 있다. 제스처까지도 물려받은 듯 익숙하다. 강연 마지막에 예상했던 질문이 나왔다. “한반도 문제에 대해 중국의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싱 대사는 먼저 우리는 “이사 갈 수 없는 이웃”의 처지라고 명쾌하게 정리했다. 그러니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발전을 거드는 사이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노사연의 노랫말까지 인용하며 웃음을 끌어냈다.
한중관계에 최근 장애가 생겼다면 그건 외부간섭에 의해 이렇게 된 것 아닐까 생각한다며 미국에 견제구를 날린 그는 “3자회담, 4자회담, 6자회담, 9.19합의 누가 만들었습니까(뒷받침했습니까). 미국입니까? 중국입니다.” “그러나 한반도 문제 해결의 키는 중국에 없습니다. 북한이 바라는 것을 줄 수 있는 상대는 미국입니다. 그러니 미국의 책임있는 행동을 더 요구해야죠.”
논리적 귀결로만 따지면 전혀 빈틈이 없는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2004년 중국 베이징에서의 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잠시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근무하던 나는 중국공산당 국제교류협회의 초청으로 여야 정당의 젊은 정치인들과 북경, 상해, 중경 등을 돌아보았다.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던 중국의 변화상에 한번 놀라고 정치적 중심을 유지하며 개혁개방 노선을 관철하면서 ‘화평굴기’라는 비전으로 국가전략을 정식화하는 저들의 현실적 정치전략에 거듭 놀랐던 시간이었다.
마지막 일정으로 남북문제를 담당하는 중국 대외연구기관들의 간부와 토론하는 자리에서 내가 한반도 문제에 대한 중국의 역할을 물었다. 한중 통역이 오고가는 것을 무심코 듣고 있는 듯 하던 내 또래의 중국 인사가 말꼬리를 높이며 일갈했다. “왜 형제의 일을, 이웃에게 묻습니까?” 조선을 오가며 우리말에 능통한 것이 틀림없을 그 친구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반도 문제의 핵심들을 쭈욱 짚어나가는데… 난 얼굴이 후끈거려 그 다음 말들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 자리로부터 1년 후인 2005년 이후부터 수년 동안 남북 민간교류의 한 축을 맡아 북측을 수십 차례 드나들게 된 후로도 나는 그때의 부끄러움을 잊지 않고자 했다. 오랜 친분으로 속을 어느 정도 나누게 된 북측 인사 몇몇에게는 그 일화를 들려주기도 했다. 그때 중국 사람 앞에서 참으로 부끄러웠노라고, 우리 일을 남에게 묻다니…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하자고.
화해의 시간이 먼 기억으로 멀어져 가다보니 다시 이웃에게 형제의 일을 묻게 된다. 그래도 이런 마음을 아는 누군가가 저 먼 북쪽 어디엔가 있어, 나처럼 자기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안타까워 할 거라는 것을…, 겨울을 끝낸 봄바람에 기대 믿어본다.
/이재규 우석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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