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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보다 나은 삶과 미래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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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하 전북대 인문대 명예교수

우리는 경제의 어려움, 빈부격차의 심화, 학교폭력과 성폭행, 전국적으로 만연된 심각한 부정·부패, 해결되지 않는 젊은이들의 취업난, 끝없어 보이는 여야의 대립 속에 살면서도 새로운 희망과 함께 좀 더 나은 세상을 그리워하게 된다.  

이 같은 고난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필자는 먼저 지상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의 ‘주요 인간관’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토인비가 중시했던 기원전 6세기(토인비는 BC 6~5세기를 정신적 축의 시대라고 명명했음) 중엽에 태어난 그리고 “신을 모독하고 청년을 오도한다”는 죄목으로 사형당한 소크라테스(Socrates)가 최고의 악처로 이름난 아내(크산티페)의 심한 성화에도 불구하고 매일같이 아테네의 광장에 나가 무엇을 외쳤을까? 그 외침은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것이었다. 이 말의 뜻은 인간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이 다름 아닌 도덕적 행위, 진실, 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식(認識)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았고, 그래서 “지식이 곧 덕이다”라고 했으며, 도덕은 지식에 속하기 때문에 가르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그의 제자 플라톤(Platon)도 “도덕적인 행위가 인간의 행복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라고 했다. 이로부터 그는 인간은 선하고 의롭지 못하면 결코 행복할 수 없으며, 도덕적인 행위가 명예와 향락(享樂)을 목표로 하는 생활보다 더 많은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했다. 그리고 육체적 쾌락이란 무상한 것이어서 영혼의 임무 수행에 방해가 될 뿐이라는 것이다.

역시 기원전 5세기 중엽에 태어났고 우리가 잘 알고 있으며 우리의 생활과 직결되어 있는 석가모니(釋迦牟尼)는 ‘인간 존재를 고통’(Alles Leben ist Leiden)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을 페시미즘 속에서만 바라보지 않고 명랑한 기분 속에서 극복하려 했다. 그는 인간의 고통이란 인간이 맹목·무지 그리고 결코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왔다가 사라지는, 그래서 끝없이 흘러가는 삶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기원전 6세기 중엽에 노(魯)나라에서 태어나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어렵게 자란 공자(孔子)는 “앎만이 부패와 혼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했고, 공자는 앎 속에서도 ‘중국의 상고(上古)에 관한 앎’이 중요하다고 했다.

공자는 이론과 형이상학 대신에 인간과 실제 생활에 관심을 두어 인간의 행복을 가장 중요시했으며, 그의 전체 가르침은 이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는 행동원리·도덕규범의 집성이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였다. 즉, 우리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수신은 마음을 바로하는 것이고, 마음을 바로하기 위해서는 생각이 진실해야 하며,  생각이 진실되기 위해서는 배움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초대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철학자·신학자·교회학자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의지(意志)라고 했는데, 아무리 많이 알고 좋은 뜻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이를 실천에 옮길 의자가 없다면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발전은 없고 혼란만 지속될 뿐으로 선진국대열에 들어가기는커녕 그 문전에서 몸부림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이규하 전북대 인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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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하 #더 나은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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