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서(覺書)란 어떤 일에 대한 의견이나 약속을 상대편에 전달하거나, 서로 확인하고 기억하기 위하여 적어 두는 문서를 말한다. 구태여 각서란 표현을 쓰지 않고 노트나 메모 형식으로 만든것도 흔히 각서라고 부른다. 사람의 한마디는 천금의 무게를 갖는 것이기에 서로 신뢰한다면 말로 하는 약속으로 충분하지만, 훗날 사정이 바뀌면 얼마든 이를 뒤집을 수 있기에 사람들은 문서 형식을 갖춰 분쟁의 소지를 없게 하는가 보다. 국내 정치사에서 굵직한 각서 파동을 몇가지 들어보자. 먼저 1962년 말 작성된 그 유명한 ‘김・오히라 메모’. 이는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일본 외상이 한・일협정 체결을 앞두고 대일 청구권 규모를 ‘무상 3억달러, 유상차관 3억달러, 민간차관 1억달러 이상’으로 타결한 것이다. 징용이나 위안부 문제에서 알 수 있듯 반세기 이상이 지난 지금도 한일 문제가 불거질때마다 등장하는게 바로 이 메모다. 시간이 한참 흐른뒤 1971년 대선을 앞두고 치러진 신민당 전당대회때 인동초 DJ는 소석에게 각서 하나를 써준다. 2차 결선 투표 직전 ‘다음 당수 선거 때 이철승을 민다’는 각서를 써주고 이철승계 표를 흡수했다. 결론은 김대중 458표, 김영삼 410표로 YS 대세론을 무너뜨린 대역전극이었다. 하지만 훗날 DJ는 중도통합론을 주창한 이철승 대신, 선명야당의 기치를 내세운 YS를 지원, 결과적으로 소석은 당권장악에 실패한다.
노태우·김영삼·김종필 세 사람은 3당 합당 과정에서 1년 이내(91년 5월) 내각제로 개헌하는 데 합의하는 각서를 만들고 극비에 부쳤다. 하지만 정계 실력자 몇명만 아는 극비 각서는 합당 4개월만에 언론에 등장했고 결국 내각제는 없던 일이 됐다. 지역 정치권에서도 각서는 종종 등장한다. 유력 후보들간에 “차기 공천은 당신에게 양보한다”는 각서를 공유했는데 다음에 이를 근거로 양보를 요구하자 “공개된 각서는 그 순간 효력을 상실한다”는 해괴한 논리로 백지화 한 것은 매우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2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전주상공회의소 회장 선거를 앞두고 요즘 지역사회에 각서를 둘러싼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윤방섭 전주상의 회장은 법원의 결정으로 ‘회장선출 및 의원선거결의 무효확인’ 본안판결이 나올 때까지 모든 업무에서 배제돼 한동안 직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결국 최종 판결까지 갈 경우 전주상의는 장기간 파행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는데 이 소송을 취하하는 조건으로 윤방섭 회장과 김정태 수석부회장을 중심으로 합의문을 작성한 바 있다. 최대 핵심은 윤방섭 회장의 직무복귀와 김정태 수석부회장이 차기 전주상의 회장에 출마할 경우 윤방섭 현 회장이 협조한다는 거다. 그런데 최근들어 윤 회장의 연임설이 확산되면서 각서 백지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한다. 지역 상공인들사이에 회자되는 각서가 향후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초미의 관심사다. 위병기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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