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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디아스포라, 국력의 외연

디아스포라는 민족분산 또는 집단이주를 뜻하는 말이다. 원래 BC 6세기 유다왕국이 망하면서 바빌론으로 끌려가 포로 생활을 하였던 유태인들을 가리켜 사용되었다. 역사에서 패전국민이 승전국의 노예로 전락한 예가 수없이 많다. 그런데도 유독 2천600년 전 바빌론에서 포로로 지냈던 유태인을 지칭했던 디아스포라가 오늘날 다른 나라로 집단이주하여 사는 사람들 모두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진화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바빌론의 유태인들은 현지에서 동화되어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곳에서 번성을 거듭했다. 그뿐만 아니라 훗날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유태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최근 유엔 인구국의 통계에 따르면 자신이 태어난 곳을 떠나 사는 사람이 2억 명에 달한다. 세계 인구의 3%에 해당하는 수치다. 우리나라의 경우 175개 국가에 720만 명의 해외동포가 있다. 물론 이들은 이주 1세대의 후손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남북한 전체 인구의 10%에 달하는 동포가 전 세계 5대양 6대주에 퍼져 살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우리 민족도 중국인, 유태인 못지않은 세계적인 디아스포라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지역별로 이주한 역사적 배경이 시대별로 다르고 현지 문화와 사정도 같을 수 없기 때문에 재외동포사회를 하나로 묶어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더라도 같은 핏줄의 한민족이기에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되고 있다. 첫째가 한민족 특유의 근면함과 성실함으로 현지 다른 이민족들보다 경제적으로 성공하고 있다. 둘째로 높은 교육열과 우수함으로 현지 주류사회 진출률이 다른 소수민족보다 훨씬 높다. 셋째로 강한 뿌리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새뮤얼 헌팅턴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이념의 대립이 끝나면서 문화, 민족의 개념이 중요시되는 시대조류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1990년대 말까지만 하여도 정부의 재외동포 정책은 현지에서 잘 정착하도록 지원하는 쪽으로 초점이 맞춰졌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재외동포의 존재 가치와 잠재력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고 있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국경이 무너지고 민족 간 연대가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국경을 초월한 민족네트워크가 가능해진 것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중국, 이스라엘, 인도,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많은 나라도 해외거주 및 이주자들을 자국의 경제발전 전략에 포함하고 있다. 특히 중국경제가 급부상한 배경에 4천만 명이 넘는 화교경제권의 역할이 컸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최근 미국과 중국 방문 때 현지 동포들과의 대화에서 "우리 정부는 우수한 해외 인재들이 국가경제에 참여하고 기여해 주길 기대하고 있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산업과 기술 간의 융합이 창조경제의 주요한 요소이듯이 해외에서 교육 받고 우리와 이질적인 문화를 경험한 글로벌 인재들이 우리 경제에 접목된다면 다양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는 한상들이 수출입, 투자, 합작, 청년인력의 해외취업 등 국가의 경제영토 확장에 기여할 수 있는 잠재력은 무한하다. 얼마 전 미국 의회에서 일본 위안부 강제동원 비난 결의안이 통과되는 과정에서도 재미 한인단체의 막후 활동이 있었다. 하지만 핏줄과 민족적 뿌리를 함께한다는 이유만으로 공간적, 문화적으로 떨어져 있는 전 세계 한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을 수 없다. 한민족공동체가 건설되고 발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와 인프라가 구축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 정부는 복수국적 허용 범위를 확대하고 재외국민용 주민등록증 발급 등을 검토하고 있다. 동포 재단 역시 한인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과 재외동포 차세대들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각종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정책적 배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국민 모두가 재외동포들과 함께하는 한민족공동체의식을 갖는 것이다. 고도의 개방성과 포용성을 가져야 할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국력이 뻗어 나가는 바탕에 한민족 디아스포라가 있음을 잊지 말자. △ 조 이사장은 한국외국어대를 졸업했으며 주 멕시코· 브라질 대사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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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7.05 23:02

불쌍한 작가들

한국사회에서 작가들은 이렇게 무관심 속에서 방치되어도 좋은 존재들일까. 수년 전 작가들의 수입을 조사한 결과 한국 작가들은 월 평균 20만 원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은 그때보다 상황이 더 악화되어 있는 만큼 한국 작가들은 한마디로 수입이 전혀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실 다른 직업이 없이 순수하게 창작에만 매달려 있는 전업 작가들은 생활고에 시달리는 극빈계층에 속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조금도 관심을 끌지 못한 채 우리 사회의 한쪽 구석에 있으나마나 한 존재로 방치되어 있다. 작가는 한 국가의 문화를 창조해 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소외되어 있고, 버림받은 처지나 다름없이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다. 문학은 한 국가와 민족의 혼과 얼이 배어 있는 것이고, 작가는 자기 나라의 언어를 통해 작품을 완성하고 그것을 국민들에게 읽힌다. 문학이 없으면 언어가 없어지고, 언어가 없는 국가와 민족은 망하기 마련이다. 오늘날 우리 언어를 이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리고 세련되게 다듬은 사람들은 정치가도 아니고 기업가도 아닌 작가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쓰레기처럼 방치되어있다. 부동산 경기가 침체되면 정부는 법을 뜯어고치고 온갖 편법을 동원해서라도 부동산 경기를 부양하려고 기를 쓴다. 그러나 작가들의 작품이 진열되어있는 책방들이 연달아 문을 닫고 출판사들이 줄줄이 폐업을 하는 데 대해서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한국 정부가 수립되고 지금까지 역대 정부에서 작가들에게 관심을 기울인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군사정권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도 문학에 대해서 관심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해마다 가을이 되면 한국에서는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안 나오는가 하고 두리번거린다. 정부나 국민들이나 염치가 없기는 막상막하다.한국에서 작가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그저 그렇고 그런 존재일지 모르지만 외국에 나가 보면 작가 한 사람 때문에 한 도시가 먹고살고 활기에 차 있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일본의 에치고 유자와에 가면 가와바타가 노벨상 문학상 수상작인 '설국'을 집필했던 여관이 있다. 지금도 그 여관은 영업을 하고 있는데 2층으로 올라가면 가와바타가 작품을 집필했던 방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그 방을 보기 위해 수많은 관광객이 에치고 유자와를 방문하고 있고, 그 마을은 에치고 유자와라는 이름보다 아예 '설국'으로 더 유명해졌다. 작은 섬나라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 번화가에는 제임스 조이스 동상이 서 있고, 그 곁에는 그가 생전에 드나들었던 카페가 지금도 성업 중이다. 해마다 축제 중에는 그의 난해한 작품 '율리시즈'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수백 명씩 몰려와 논문을 발표한다. 오스카 와일드, 버나드 쇼, 베케트, 예이츠 등 세계적 문호들이 그곳 출신이니 그들의 기념관과 문학적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거리는 하루종일 흥청거린다.영국의 자존심, 인도와도 바꾸지 않는다는 셰익스피어는 영국인들의 문학에 대한 사랑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가 태어난 스트랫퍼드 어펀 에이번에는 셰익스피어 생가를 비롯해 셰익스피어 극장 등 그와 관련된 자취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도시 전체가 그를 위해 존재하고 있고, 그가 도시를 먹여 살리고 있다. 문학에 대한 자존심도 없는 우리하고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런던에는 셜록 홈스 박물관이 있다. 홈스는 코난 도일이 창조한 탐정으로 가공인물이다. 그런데도 영국인들은 그를 실제 인물처럼 만들어 박물관까지 만들어 놓았다. 홈스 팬들은 홈스가 가공인물인 줄 뻔히 알면서도 그를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추리의 세계에 빠져 보기 위해 비싼 입장료를 내고 그곳을 방문한다.파리 센 강변에는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라는 한 세기 가까운 연륜을 지닌 조그만 고서점이 있다. 1920년대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제임스 조이스, 헨리 밀러 등 당시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잃어버린 세대의 작가들이 방황하던 시절, 그 책방을 사랑방처럼 드나들면서 그들이 신세를 졌던 곳이다. 그 고서점은 오늘도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다. 작가는 과연 필요 없는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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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6.28 23:02

한국의 대학에 대한 불편한 진실

대학이 없는 한국을 생각할 수 없다. 한국의 눈부신 발전은 대학에서 인재를 육성한 결과다. 자연자원이 없는 나라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노동력과 창의성밖에 없다. 이에 의지하여 오늘의 국가적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미래를 구상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의 대학은 어떠한가. 그 불편한 진실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토로할 용기가 있는 것인가. 쉽지 않은 결단이 요구되는 일이다. 필자가 경험한 한국 대학의 진실에 대하 두 가지 사실을 고백해 두고자 한다.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반값 등록금이다. 학생들의 등록금 부담을 줄여 주기 위한 반값 등록금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정치권에서 처음 공론화된 이후 그들의 생색내기용으로 전락한 느낌이 든다. 실질적인 대책도 없이 선거 전략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젊은 유권자를 유혹하는 데 성공했을지는 모르지만 실제 대학 현실에서 반값 등록금은 여러 가지 부작용을 만들어내고 있다. 수업 시간을 단축한다든가 강의 단위를 대형으로 조정한다든가 아니면 전임 교원에게 수업시수를 더 많이 요구한다든가 하는 일이 여러 대학에서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대학에서는 등록금 인상은 말을 꺼낼 수도 없는 분위기이고 이에 역행하면 여러 제재 수단을 동원하겠다는 교육 당국자의 위협도 무섭다. 다른 한편에선 한국의 대학 경쟁력을 논하는 상반된 요구가 있다. 국내 순위가 정해지고 아시아 순위가 발표되고 세계 순위가 대대적으로 보도된다. 일부에서는 한국의 대학 경쟁력이 아주 부진하다고 질타한다. 또는 많이 향상되기는 했지만 중국의 약진에 비해 너무 지지부진하다고도 한다. 반값 등록금을 시행하겠다는 나라에서 대학의 세계적인 경쟁력 부진을 말할 수 있을까. 한국의 대학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확실한 지원과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최근 정부는 미래창조의 현장이 대학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대학이 미래 창조의 생산 현장이 되기 위해서는 장기적이고 현실적인 대책이 뒤따라야 한다. 그 다음은 대학에서 배출된 인재들을 그대로 현장에 투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얼마 전 유수한 기업의 최고 경영자를 만났다. "대학 평가 왜 그렇게 합니까." 단도직입적인 질문이 날아왔다. 그 평가가 현장에서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현장에서 요구되는 인재를 배출하지 못하는 대학의 현실은 국가 미래 차원에서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신입 사원을 채용해 연봉의 몇 배에 해당하는 교육비를 들여서 훈련시킨 후 3, 4년이 지나면 회사를 떠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해마다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고민이라는 것이다. 겨우 유능한 인재로 훈련시켜 놓으면 직장을 바꾸어 버리는 풍토. 좀 더 편하고 쉬운 직종을 찾아가는 젊은 세대를 바라보면 '한국은 앞으로가 문제'라는 독백이 절로 나온다는 것이다. 화려한 스펙을 쌓는 교육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생산 현장에서 참고 견딜 수 있는 인간교육이 더 절실하다는 것이다. 물론 대학은 당장 현장에 필요한 교육만을 하는 곳은 아니다. 장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인재를 양성하는 곳이다. 당장의 필요는 당장의 쓸모일 뿐이다. 대학교육의 본질은 다양한 인문 교육을 통해 국가의 백년대계를 이끌어 나갈 인재를 교육하는 곳이다. 기술 교육이나 현장 교육과는 다른 점이 있어야 대학의 존재 의미가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생산 현장에서 견디지 못하는 인재라면 그들이 아무리 고상한 교양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국가의 중심 동력은 약화되고 말 것이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한국의 대학교육이 현장 교육도 되지 못하고 제대로 된 인문 교육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국가 발전의 동력이 되고 인류문화에 기여하는 인재를 배출하지 못한다면 한국의 국가적 경쟁력은 순식간에 추락할 것이다. 반값 등록금으로 대학생 유권자를 유혹하고 대학을 압박하는 정치권력이나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졸업생을 양산하고 있는 대학 당국 모두 일대 개혁이 요구되는 중대한 시점이 바로 눈앞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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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6.21 23:02

게으름의 등장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받은 첫인상은 한국인은 매우 열심히 일한다는 것이었다. 열심히 일하지 않고 불과 30, 40년 전에 전쟁과 가난으로 힘들어하던 나라에서 아시아 강국 중 하나로 눈부신 급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겠는가. 한국의 성공은 어떤 고통도 참고 견딜 수 있는 강인함에 근거한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러한가.그동안 피와 땀 그리고 눈물로 한국을 일으켜 세웠던 이전 세대와 달리 앞으로 나라를 이끌어갈 세대는 전과 같지 않다. 젊은이들에게서 전에 없던 게으름을 목격하면서 앞으로 한국의 위상을 지켜갈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특히, 중국의 급부상을 본다면 이런 노파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물론, 학교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해가 진 후에도 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고층 빌딩가의 사무실에선 밤 늦게까지 일하는 사람들로 불이 꺼지지 않는 이 나라에서 어떻게 감히 게으름에 대해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한국에서 '오래 일하는 것'은 종종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고 싶은 내용은 왜 한국인들이 그렇게 변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과거 한국은 성공에 굶주려 있었다. 그러나 한 20년 전부터 등장한 신세대들은 빈곤에서 오는 어려움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지 않은 듯하다. 부모들은 아이의 안녕을 추구하며 결국 응석받이로 키우고 있는 셈이다. 매니저들은 업무 추진에 적합한 새로운 인력을 찾고자 할 때마다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부모가 주는 돈으로 별 경제적 어려움이 없이 생활해 온 젊은이들이 뭐하러 고생해서 돈을 벌겠는가. 대학 졸업생들은 프로젝트 진행자로서 업무의 책임을 지고 일하는 것에는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않는 듯하다.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종종 볼 수 있었던 어처구니없던 광경 중의 하나가 3층밖에 안 되던 건물 승강기 앞에서 학생들이 겹겹이 줄 서 있던 모습이다. 서둘러 계단으로 가면 그나마 지각은 면할 수 있을 텐데도 지각을 하더라도 덜 걷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느 날 함께 등산을 하기로 하고 약속 장소에 나가 보면 학과 학생 대부분이 참석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 전에 점심을 사겠다고 학생들에게 제안을 하면 처음 듣게 되는 질문은 "하이킹 대신 바로 점심 먹으러 가면 안 되나요"라는 것이다. 분명 과거에는 달랐을 것이다. 지금도 산에 오를 때면 한국을 일으켜 세웠던 전 세대의 어르신들이 육체적으로도 얼마나 강한지 바로 확인할 수 있다. 나의 큰 보폭에도 불구하고 가파른 산길을 힘차게 오르고 내려가는 이들을 보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러나 젊은 세대들에게는 주차장이 없는 카페나 식당은 안 될 말이고 어디를 가더라도 십 미터 이내의 주차장은 기본이며 발레 파킹과 같은 대리 주차 서비스를 먼저 찾는다. 이러한 한국인의 구미에 부응하기 위해선지 한국인은 세계 최고의 서비스 문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한국 내에서는 돈만 내면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모든 것을 누릴 수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다. 젊은이들의 결혼은 점점 더 늦어지고, 30살이 넘어서도 경제적 어려움 없이 부모님의 집에서 의지해 살고, 고통과 고난을 이겨 가며 힘들게 모은 부모의 돈과 자산에 의존해 살더라도 이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단순히 부모로부터 받는 모든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고 어쩌면 앞으로도 늘 그렇게 편히 살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일까. 한국은 위험한 교차로에 서 있다. 일이나 돈에 대한 가치나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갖고 있던 돈이 없어지면 지금과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은 곤두박질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경제력을 움직여 왔던 추진력은 타고난 창조 능력과 같은 재능이 아니었다. 어떤 일이라도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태도로 만들어 낸 기적이었다.부모가 더 이상 곁에 있지 않는 상황을 신세대가 직면했을 때는 어떻게 될 것인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부를 축적해 가는 길은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 반대과정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더욱 더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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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6.14 23:02

잊지말자 6·25

해마다 6월이 오면 제일 먼저 6.25전쟁의 기억이 떠오른다. 이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세대는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처럼 아득한 옛날에 일어난 전쟁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6.25전쟁은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현재 진행 중이다. 그 명칭도 6.25사변에서 한국전쟁으로, 그리고 6.25전쟁으로 변화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유난히 화창한 일요일이었다. 콩볶는 소리(따발총 소리)는 요란한데 라디오에서는 "국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목소리만 흘러나왔다. 총소리는 요란한데 대통령은 아무 일 없다고 하니 38선이 지척인 춘천의 시민들은 갈피를 못 잡고 피난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 날 피난민이 물밀듯이 밀려오고 총알이 마당에 떨어지고 나서야 피난을 서둘렀지만 때는 이미 늦었던 것이다. 비상식량으로 미숫가루를 만들고 우리 네 자매들은 꼬까옷으로 단장하였다. 아마도 잠간 나들이 떠나는 것으로 착각하지 않았나 싶다. 대로는 위험하다하여 산길, 들길로 가던 피난길의 산천은 녹음방초 우거지고 뻐꾸기소리, 꾀꼬리소리 등 온갖 새들의 지져 김으로 하여 천국이 따로 없었다. 뒤에서는 전쟁이 쫓아오고 눈앞에는 천국이 펼쳐지는 이율배반의 계절이었다. 처음에는 신나서 달려가던 피난길은 차츰 고행길이 되었다. 맏이인 내가 아홉 살, 그 다음이 여섯 살, 네 살, 두 살이었으니 나는 차라리 어른 취급을 받으며 걸었다. 청평의 솔이 마을에 이르자 서울이 점령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 후 진행된 상황은 필설로 다하기 어렵고 우여곡절 끝에 춘천으로 돌아왔을 때는 엄마와 나 단 둘만 남았다. 인민군 치하의 춘천은 아비규환의 생지옥이었다. 하늘에서는 쉴 새 없이 폭격이 계속되고 어른들은 부역에 끌려가서 집에 홀로 남아 방공호로 달려가는 일을 되풀이하였다. 미쳐 방공호로 피신하지 못했을 때는 두 엄지손가락으로 두 귀를 막고 나머지 네 손가락 두 쌍으로 두 눈을 누르고 솜이불을 뒤집어썼다. 숨이 컥컥 막히는 무더운 여름에 폭탄의 파편을 막을 수 있다는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고역쯤은 죽음의 공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여름이 가자 드디어 국군이 들어왔다. 시민들은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나가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열렬하게 환영하였다. 그러나 전쟁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4후퇴로 매섭게 추운 겨울에 또 피난길에 올라 서울을 거쳐 신갈리 쯤 갔을 때는 중공군과 맞닥뜨렸다. 중공군은 심리전이라 하여 밤이면 구슬픈 피리소리를 흘려보냈다. 꼭 귀신이 곡하는 소리 같아서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다. 중공군은 흰 앞치마 같은 것을 머리에 두르고 다니는 위장전술을 썼으므로 무고한 피난민들이 중공군으로 오인 받고 폭격당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1953년 6월 휴전이 되어 춘천으로 돌아와 학교에 가자 가족이 온전하게 살아남은 아이는 거의 없었다. 우리는 모두 결손가정 출신이 되었다. 그러나 누구도 울지 않았다. 상처는 가슴 깊숙이 담아둔 채 질서를 찾아갔다. 그러나 누군들 그 상처를 잊을 수 있었겠는가? 6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6.25전쟁의 기억은 어제일 같이 생생할 뿐만 아니라 그 상처는 소금을 뿌리 듯 쓰라리다. 올해가 휴전한지 꼭 60년이 되는 환갑 해다. 그 동안 대한민국의 발전과 번영은 눈부신 바 있다. 이에 취해서 지금 우리는 평화기로 착각하고 살고 있는 감이 있다. 북한의 도발에도 면역이 되어 그러려니 귓등으로 듣고 통일에 대한 의지도 흐려져 "우리의 소원은 통일"은 공염불이 되어가고 있다. 6.25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최대의 국제전쟁으로 부상자 빼고도 쌍방의 군인 전사자만 240만 명이었고 민간인 사상자는 헤아리기도 어려웠다. 남북한 모두 폐허로 변했고 동족상잔의 아픔을 겪으면서 상호불신의 골이 깊어지는 등 정신적 피해도 컸다. 이 전쟁은 통일을 이루어야 끝나는 전쟁이다. 6월 보훈의 달을 맞아 6.25전쟁의 아픔을 되새기고 통일의 의지를 다지면서 현재도 진행 중인 전쟁임을 결코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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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6.07 23:02

가짜 세상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무지처럼 무서운 것은 없는 것 같다. 무지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 사고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런데 무지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무지한 사람일수록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속성이 있다. 인정하기는커녕 자신은 유식하고 현명하다고 생각하면서 세상을 휘저으려고 든다. 그 결과 이 사회에 엄청난 피해를 입힌다. 무지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부류가 바로 가짜들이다. 그들은 가짜 물건을 마구잡이로 만들어 낸다. 가짜 인물군과 가짜 물건들은 서로 한통속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만 따로 떼어놓고 말할 수 없다. 그 유기적인 관계로 인한 해악이 견고한 아성을 구축하고 있다.며칠 전 일본의 유력 정치인이 "오사카에 돌아다니는 한국인 여성은 거의가 창녀들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발언, 우리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안겨 주었다. 그런데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가 그렇게 말한 데에는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 일본에는 현재 약 3만 명으로 추산되는 한국인 여성들이 유흥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그들 중 상당수가 위조 여권, 위장 결혼 등으로 밀입국하여 단기간 내에 돈을 벌기 위해 몸을 팔고 있다. 한국 여성들의 해외 원정 성매매는 일본에 그치지 않고 미국, 호주, 캐나다, 중국 등 전 세계에 거쳐 극성을 부리고 있다. 이 모두가 가짜 서류, 가짜 여권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필자가 알고 있는 어떤 이는 수십 년 전부터 석·박사 학위 논문을 대필해 주는 것을 업으로 삼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석사학위 논문은 한 편에 500만 원, 박사학위 논문은 1천만 원, 이런 식으로 제 나름대로 공정가격을 매겨 놓고 가짜 논문을 써 주고 있다. 그렇게 해서 그동안 배출된 석·박사가 줄잡아 수백 명은 된다고 하니 그 수를 전국적으로 확대 계산해 보면 어머어마할 것이다. 그런 가짜들한테서 학문을 배운 대학생들의 실력이 오죽하겠는가. 그런 행태는 해외유학파라고 다르지 않다. 신정아 사건이 말해 주듯 외국에서 가짜 학위를 받아 가지고 와서 교수 행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자격증도 없는 가짜 의사들뿐만 아니라 자격증이 있어도 가짜나 다름없는 엉터리 의사들도 수두룩하다. 해마다 전국에서 엄청나게 많은 의사들이 쏟아져 나오다 보니 실력은 뒷전이고 돈벌이에 급급해서 인간 생명을 상품처럼 주물러 댄다. 얼굴을 망쳐놓은 가짜 성형외과 의사, 관절과 척추를 멋대로 수술해서 완전히 병신으로 만들어 놓은 정형외과 의사, 돈을 받고 가짜 진단서를 마구잡이로 떼 주는, 양심이라고는 털끝만치도 없는 비리 의사. 여대생을 공기총으로 살해하도록 사주해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기업체 사장의 부인이 의사가 떼어 준 가짜 진단서를 이용해서 교도소가 아닌 일반 병원에서 편하게 지내 왔다는 사실은 가짜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보여 주는 사건이다.원전의 부속품들이 가짜라는 사실은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다. 가동을 중단할 정도로 가짜가 많은 것을 보면 원전 사고가 일어나 방사능이 누출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봐야 한다. 열을 이기지 못해 원전이 폭발이라도 할 경우 부산·울산·포항을 포함한 경상도 일대는 죽음의 땅으로 변할 게 자명하다. 그런데도 정부는 그 문제를 철저히 파헤쳐 사고를 예방할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다. 문화 쪽을 들여다봐도 가짜들이 기승을 부리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돈만 주면 무슨무슨 강사 자격증을 남발하고, 돈만 주면 문예지에 시 수필 따위를 실어 주고, 그때부터 당사자는 평생 동안 시인 수필가로 행세한다.외국에 서너 번 갔다와서는 외국여행 전문가로 행세하는 등 가짜 전문가들도 제 세상을 만난듯 기승을 부리고 있다. 가짜가 가장 숨어 있기 좋은 곳은 정치판이다. 당선만 되면 가짜가 덮여 버리니까 그때부터는 가짜 실력을 얼마든지 발휘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없다. 가짜는 양심이 없기 때문에 부패하기 쉽고, 자기가 무지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부끄러운 줄 모르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 권력을 휘두르려고 기를 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가를 자각하는 것이고, 그럴 경우 우리는 적어도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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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5.31 23:02

중국 대학생들과 한국 도깨비

지난주 한국 시인 20여 명과 중국 난카이대학에서 '한중시낭송 및 세미나'를 가졌다. 중국 대학생들이 한국의 시나 문학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의구심을 가지고 강의장에 들어섰다. 첫인상부터 예상과 달랐다. 중국대학생들의 반응은 진지했다, 무겁기까지 했다. 중국 학생 150여 명이 강연장에 참석했다. 강연 후 한국문학에 대해 질의를 하는 학생도 많았다.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 누구인가. 한국에 끼친 프랑스문학의 영향은 어떤 것인가. 시와 음악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는 등등. 본질적인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저녁 시간에 진행된 시낭송회 역시 100여 명의 학생들이 참석했다. 이질적인 언어와 문화가 시를 통해 만나는 순간이었다. 호기심 수준을 넘어선 관심이었다. 소통과 관련한 우려를 단번에 불식시켜 버렸다. 중국학생들에게서 또 다른 순정성이 전해져 왔다. 이튿날 오전 대학원생 60여 명과 한국 현대시에 대한 학술 세미나가 열렸다. 여기서 필자는 '한국현대시와 도깨비'라는 제목으로 짧은 발표를 했다. 한국인들은 모두 도깨비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한국인만의 특성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디지털적인 상황에 가장 잘 맞는 성격 중의 하나다. 한국 사람이 지니고 있는 비약적이고 돌발적이며 진취적인 기질은 21세기 비약적인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도깨비는 인간을 초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어떤 역경이라도 극복하는 힘을 가진 존재가 도깨비라는 것이 내가 발표한 강연의 요지였다. 인간이 되고자 하면서도 인간 세계의 잘못을 징벌하는 것이 한국의 도깨비다. 어린 시절 할머니로부터 수없이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한 것이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기록들 중에도 도깨비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우리는 그동안 서양의 신화나 전설을 훌륭하다고 말하면서 동양의 그것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의문을 제기한 나라가 한국이다. 그 결과 한국은 고구려인들이 축구를 하고 신라인들이 전자산업을 일으키고 백제인들이 자동차를 만드는 힘이 하나로 합쳐져 오늘날 세계 첨단의 스마트폰을 만드는 나라가 되었다. 동양적인 토속문화의 우수성을 입증해 낸 것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눈으로 보자면 정상을 일탈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 바로 한국인들이 지닌 창의적 발상과 사고의 원동력이 되었다. 지금 세계 도처에서 불가사의한 성과를 올리고 있는 한국인들의 모습도 이런 특징의 발동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세계 음악계를 놀라게 한 싸이의 음악은 말도깨비춤이라고 할 수 있으며, 미국의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하는 추신수 선수가 휘두르는 방망이가 도깨비 방망이이고, 세계스케이트 선수권에서 우승을 차지한 김연아 선수가 바로 아름다운 도깨비다. 도깨비란 어떤 존재인가. 현실과 이상 사이에 존재하는 상상 속의 존재다. 가상과 현실을 매개한 중간적 존재들이다. 도깨비는 꿈을 꾸는 존재들이고 현실을 뛰어넘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표출되지 않은 에너지다. 서양인들은 물론 중국인들도 한국인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한다. 중국인이 보기에 한국인들은 마치 춘추전국시대의 고대인들이 과거에서 뛰쳐나와 한국의 드라마에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독성은 매우 강하다. 한 번 한국의 드라마를 보고 나면 다른 드라마가 시시하게 느껴질 것이다. 필자는 강연의 마지막을 요약했다. 한국인의 특성은 한 문장으로 집약된다. "한국인은 도깨비이고 도깨비는 한국인이다."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필자의 강연을 듣고 있던 중국의 학생들 중 한 사람이 일어나 말했다. "이제야 한국인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그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랐지만 최소한 그들과 인간적 소통의 계기는 만들어 졌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시낭독회에서 한국어가 매우 아름답고 음악적으로 들렸다는 학생도 있었다.최근 일어나는 한류의 붐도 이런 기본적인 정서적 이해를 공유할 때 지속 가능한 붐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것은 중국대학생들의 진지한 경청의 자세였다. 중국의 미래가 아주 밝다는 느낌이 전해졌다. 총리가 앞장서서 역사 왜곡 발언을 하는 등 막다른 길을 향하고 있는 일본과는 아주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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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5.24 23:02

잘못된 메시지 보내기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할 수 없지만 분명 90년대 중반의 어느 날 김포 공항에 도착했을 때였다. 당시 삼성의 새로운 광고 문구를 보았는데 광고판 자체가 매우 커서 시선이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큰소리로 소리치는 듯해 보였다. 'Samsung-The best company in the world'(삼성-세계 최고의 회사) 순간 웃음이 나왔고 잠시 후 이 광고문장은 재미로 보는 작품과 같은 것인지 아니면 진짜 광고인지 한 순간 의아하게 생각해 볼 정도였다. 어쨌든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배운 것들은 이곳의 모든 것은 '최고', '최대', '최선'의 것들이라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겸손을 미덕으로 여겨선지 내게는 이런 큰소리치는 듯한 자랑식의 표현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며 최대, 최고 등의 수식어가 붙은 것들에 대해 맞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이유를 찾아보게 만든다. 어떤이가 다가와서는 나는 최고라고 말을 걸어왔다면 순간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순간 이상하다고 말하고 싶은 욕구가 생길 것이다. 그래서 통역가와 컨설턴트로 더 많은 일을 하게 되면서부터 한국 회사들에게 우선적으로 부탁하는 것 중의 한가지가 국외 비즈니스 상대들에게 좀 더 겸손하고 지나치게 과장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난 몇 년을 재빨리 돌려 보았다. 2008년 약 20여 개 국 대사님들로 이루어진 고위 대표단과 함께 여수를 방문했던 적이 있다. 그들이야말로 지구촌 곳곳에 대해 많은 것을 보고 알아온 국제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들이다. 여수박람회의 조직위원회의 공식초청에 따라 2012년에 개최될 엑스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홍보 애니메이션 영상물을 보기 위해 여수엑스포 홍보관에 들어가게 되었고 물론 10분간 상영된 영상물은 내가 짐작한 그대로였다. 멋진 컴퓨터 그래픽과 메시지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기본적으로 영상물은 우리에게 뉴욕 또는 런던이나 파리같은 도시는 잊어버리라는 식으로 2012년 여수는 새로운 중심이 될 것이며 전 세계는 오직 여수를 향해 바라보게 될 것이며 여수 엑스포는 세계 역사를 바꾸게 될 거라는 식이었다.다시 이 글의 처음의 삼성에 관한 얘기로 돌아가 보자. '디 에아츠테'(의사들)라는 독일의 한 유명한 펑그록 밴드가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세계 최고의 밴드'라고 늘 주장한다. 예를 들어 콘서트장 무대에 커다랗게 현수막을 걸거나 밴드이름의 수식어로 자주 사용하곤 한다. 그러나 그들의 음악은 완전히 말도 안 되게 웃기고 늘 기발하고 능청스러운 재미를 만들어낸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 최고라는 선전 구호를 절대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길 원치 않는다. 자신의 언어와 문화로 국경을 넘는 사람들은 인식이나 지각이 자신과는 다르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같은 문화권 안의 사람들에게는 대단하고 동기부여가 될만한 말들이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웃기거나 모욕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다. 이제 삼성은 세계 최고란 선전문구를 지속적으로 내건 지 20여 년이 되었고 그동안 큰 성장을 하며 많은 것을 배웠음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최근 미국 뉴욕에서 있었던 갤럭시 4모바일폰의 론칭 이벤트에서 그들은 브로드웨이식의 쇼를 넣었고 결국 이것은 세계 곳곳에 참으로 큰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안타깝게도 모두 호평이 아니었다. 기술에는 완전 문외한인 행복한 주부, 공부밖에 모르는 아이 등 사회의 고정관념이 담긴 완전히 낡은 성차별적 견해를 묘사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지난 90년대와 비교해 본다면 한국은 지난 20년간 더욱더 국제화되었고 삼성과 같은 한국의 기업들은 세계 시장을 관통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바른 메시지로 한국과 그들의 상품과 행사를 홍보하는데에는 여전히 개선해야할 여지가 남아 있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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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5.17 23:02

가정의 달에 종교를 돌아본다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헌법에 보장된 나라이다. 이 말을 다시 말하면 대한민국에는 국교가 없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국민은 누구나 종교를 선택할 권리가 있고 자신이 선택한 종교를 믿을 자유가 있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헌법에 규정되었다고 하여 종교문제가 쉽고 편안한 일일까? 전통시대에도 새로운 종교가 들어오면 기존의 종교와 부딪치면서 사단이 일어났다. 불교가 신라사회에 들어올 때도 이차돈의 순교가 있었다. 조선후기에도 천주교에 대한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같은 사건을 천주교에서는 박해(迫害)라고 하지만 공식기록에는 사옥(邪獄)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두 개의 용어는 인식의 차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 후에 기독교도 들어와 우리 사회는 불교, 기독교, 천주교 등으로 대분되는 종교지도를 갖게 되었다. 그 외에 대종교나 천도교 등 민족종교도 존재하지만 교세는 미약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상에서 열거한 종교, 그 어디에도 귀속되지 않는 사람은 무교(無敎)라고 하지만 사실은 유교라고 하는 편이 맞다. 왜냐하면 조상을 숭배하는 유교적 제의인 제사를 지내고 유교적 가치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양한 종교지도를 가진 만큼 문제도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가정의례문제이다. 가정에서 행하는 대표적인 의례가 제사이다. 제사는 아득한 옛날부터 있어왔지만 유교적 제의가 확고하게 뿌리 내린 것은 조선후기이다. 신분을 불문하고 제사는 효도의 구현으로 제사 안 지내는 이는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는 사회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래서 여인들이 머리를 잘라 팔아 제사비용을 마련한다거나 무엇에 쪼들리는 상황을 "가난한 집 제삿날 돌아오듯 한다."는 말이 생겨났다. 종교가 다양화된 현재도 제사는 제일 큰 가정의 행사이고 친척간의 화합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우리사회가 도시화하고 핵가족화하고 있다는데 있다. 아파트생활을 하면서 많은 친척들이 모일 공간이 부족하고 직장생활을 하므로 제사시간을 조정하는 일도 만만치 않으며 특히 제물을 준비하는 일을 고역으로 여기게 되었다. 전통시대는 농경사회였고 마을 중심으로 친척들이 모여 사는 경우가 많았다. 공간도 터져 있어서 마당에서라도 자리 깔고 지내면 되었다. 제물준비도 친척들이 모여 다 함께 준비하면서 축제분위기까지 있었다. 제삿날이 맛있는 음식 마음껏 먹고 영양분을 보충할 수 있는 기회였기에 더욱 풍성한 제사를 기획했을 터이다. 그러나 지금은 살 빼는 일이 사람들의 중요관심사가 된 시대다. 자기직전에 제사지내고 음복하는 일은 피하고 싶은 일이 되어버렸다. 제물을 약소하게 차리면 조상님께 죄송하고 많이 차리는 것은 과소비가 되는 이율배반이 되고 말았다. 결국 제사음식을 버리는 일까지 생겨나고 차라리 주문하여 제사지내자는 풍조까지 생겨났다. 헌데 정성이 빠진 제사는 허례가 되어 의미가 없는 것이다. 또 맏아들 우울증이라는 것이 있다. 권리는 따로 없는데 제사, 부모님 모시기 등 의무만 남아서 맏아들은 물론 맏며느리를 옥죄는 사슬이 된 것이다. 이제 제사는 조상님을 정성껏 모시고 추모하는 성스러운 의식이 아니라 후손에게 짐이 되는 허식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문제를 타개하기 위하여 가정의례준칙을 만들어 국가에서 간편화 작업도 했지만 큰 도움이 안 되고 있다. 옛날부터 가가례(家家禮)라고 하여 집집마다 제물이 조금씩 다르고 제사법도 조금씩 차별성이 있었던 법도가 집집마다 전승되고 있으므로 일률적으로 하기 어려운데다 종교생활이 다변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해법은 자신의 종교에 맞는 제의를 행하면 되고 이중제의를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제사도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종교 창시자들은 인류를 구원하려는 원대한 뜻을 품고 뼈를 깎는 아픔을 겪으며 구도의 길을 걸어 마침내 인류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설파하였다. 그분들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족적을 보여준 위대한 스승들이다. 그분들의 경유하는 길은 달랐지만 목적지는 같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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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5.10 23:02

테러리즘

일본 적군파, 독일의 바더 마인호프, 이탈리아의 붉은 여단은 모두 1960~70년대에 악명을 떨쳤던 좌파 테러단체들이다. 그러나 좌파 테러단체들은 70년대를 고비로 공산주의 몰락과 함께 소멸되고 대신 새롭고 강력한 힘을 가진 세력이 등장하는데, 바로 이슬람 무장세력이다. 이슬람 테러의 상대는 처음에는 이스라엘이었지만 그 영역이 점차 확대되어 지금은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방 세계이고, 문명 충돌의 양상까지 띠고 있다. 이슬람 테러의 가장 충격적인 신호탄은 72년 9월 5일에 발생한 뮌헨 올림픽 테러이다. 그날 새벽 팔레스타인 '검은 9월단' 소속의 무장괴한들은 이스라엘 선수촌을 습격, 이스라엘 선수 11명을 살해한다. 골다 메이어 총리는 이스라엘 정보부인 모사드에 전 세계를 뒤져서라도 테러분자들을 색출하여 처단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때부터 모사드는 20년에 걸쳐 보복작전을 수행, 테러분자들을 모두 암살한다.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차이는 무엇보다도 표현의 자유에서 비롯된다. 기독교 문명은 과거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신성 모독과 같은 개념을 상실, 비판에 익숙해지고 너그러워진 반면 이슬람은 신성 모독을 금기시, 편협한 종교관으로 신성을 모독한 자를 단호하게 응징한다. 영국 작가 살만 루슈디가 소설 '악마의 시'에서 마호메트를 풍자하고 코란을 악마의 계시라고 썼다가 호메이니의 명령으로 목에 100만 달러의 현상금이 내걸린 채 이곳저곳으로 도망다닌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네덜란드 영화감독 테오 반 고흐(인상파 화가 반 고흐의 동생 테오의 증손자)는 이슬람의 여성 차별을 비판한 영화 '굴종'을 제작했다가 암스테르담 거리에서 자전거를 탄 채로 총에 맞아 죽었는데 그것도 모자라 범인은 칼로 그의 목을 베고 격문을 가슴에 꽂기까지 했다.갈수록 격렬해지던 이슬람 테러는 급기야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세계무역센터를 공격함으로써 그 정점에 이른다.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9·11테러는 사망자만 3천여 명에 이른 대참극이었는데, 알카에다의 애초 계획은 10대의 비행기를 납치해서 태평양상에서 폭파하는 것이었다. 9·11테러를 감행한 19명의 테러리스트들은 대부분이 함부르크 공대 출신들로 독일에서 나고 자랐다. 그들은 왜 테러리스트가 되었을까? 이슬람 테러와 미국의 관계는 2차 대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군이 침공해 오자 스탈린은 소련연방 내의 중앙아시아 출신 이슬람 청년 수백만 명을 징집, 총알받이로 대독전선에 내보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독일군의 포로가 되고, 이번에는 독일군이 되어 소련군에게 총부리를 겨눈다. 그리고 얼마 후 종전이 되자 그들은 연합군의 포로가 되어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소련은 회교도 포로들을 반역자로 처단할 준비를 해 놓고 당장 돌려보내라고 독촉한다. 오갈 데 없이 국제 미아가 된 포로들이 공포에 떨고 있을 때 그들을 받아준 것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세계였다. 미국은 그 포로들을 냉전에 이용하기 위해 대부분 독일에 정착시킨다. 그들은 러시아어에 정통하고 소련에 관한 많은 정보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현재 독일에는 400만 명의 이슬람교도가 거주하고 있는데, 9·11테러의 범인들은 2차 대전 당시 포로로 붙잡혔다가 독일에 정착한 이슬람교도들의 후손인 셈이다. 미국이 소련과의 냉전에서 이슬람교도들을 십분 이용한 곳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때였다. 베트남 전쟁에서 지칠 대로 지친 미국은 이슬람교도들을 훈련시키고 첨단 무기들을 지원해서 아프가니스탄 전장에 투입했다. CIA가 당시 뉴욕에서 이슬람 용병들을 모집한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CIA가 훈련시키고 지원한 이스람 교도들은 무자헤딘(성스러운 이슬람 전사)으로 단련되어 아프가니스탄 전장에서 소련군과 맞서 싸웠고, 결국 소련은 10년 동안 고전하다가 아프가니스탄에서 패퇴하고 만다. 그리고 10년이 흘러 그 자리에 이번에는 미군이 들어온다. 9·11테러 직후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이 숨어 있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그들을 맞이한 것은 그들이 훈련시키고 지원했던 무자헤딘들이었다. 과거의 동지가 이제는 적이 되어 서로 총부리를 겨누게 된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미국은 이제 전 세계에서 무자헤딘의 테러 공격을 막아 내야 하는 입장이다. 역사의 진실이 무엇인지는 아무래도 신만이 아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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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5.03 23:02

【한국지방신문협회 공동기획】영화'지슬'과 스탈린의 편지

흑백 영화 '지슬'을 인상 깊게 보았다. 음울한 화면에 펼쳐지는 리얼한 장면과 그곳에 등장하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고통이 가슴 저리게 다가왔다. 아름다운 풍광도 아름답지 않고 슬프고도 비극적으로 느껴졌다.누가 죄 없는 이들을 이토록 고통스럽게 하는가. 영화가 끝나고도 관람객들은 한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에서 접근하여 토벌대와 양민의 관계를 사실적으로 보여 주는 데 일정 부분 성공했다는 느낌이 전해 왔다. 가슴 저린 감동으로 관객들이 4·3 사건을 생각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특히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미군과 미군정 당국'이라는 마지막 자막은 영화 전체를 되돌아보게 했다. 그렇다면 과연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의문 속에 '한라산'의 작가 현길언의 증언을 접하게 되었다. 제주 4·3 사건은 항쟁사가 아니라 수난사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현 작가의 주장이다. 현 작가는 4·3 사건 당시 아홉 살의 나이로 제주 남원읍 수당리에 살다가 가족들과 20여 일간 피난살이를 했고 일가친척들이 수난을 당한 당사자다. 그런 그가 4·3 사건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맞선 저항사가 아니라 제주도민의 수난사라고 증언한 것이다. 그가 쓴 장편 '한라산'은 그 과정 속에서 제주도민의 삶을 생생하게 다루고 있다. 이청준은 2003년 간행된 '신화를 삼킨 섬'에서 4·3 사건은 수평적 관계가 수직적 관계로 변할 때 발생하는 지배와 피지배의 역학 구도에서 발생했다고 말했다. 두 작품은 4·3 사건으로 인한 민초들의 희생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한 현실인식을 보여 줬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한 사실이나 진실이 그대로 역사에 기록되는 것은 아니다. 4·3 사건은 뒤이어 일어난 6·25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이는 한반도를 두고 권력 투쟁의 장으로 만든 거대한 정치세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다시 생각해 볼 것이 2005년 러시아 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된 스탈린의 편지이다. 이 문건은 체코의 클레멘트 대통령에게 전하는 구두 명령으로 당시 프라하 주재 소련대사에게 보낸 스탈린의 편지이다. 이 편지에는 6·25 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소련대사 말리크가 왜 참여하지 않았는가를 설명한 부분이 있다. 여태까지는 소련대사가 안전보장이사회에 출석하지 않는 바람에 미국 주도로 유엔군 파병이 결정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었다.하지만 이 문건은 스탈린이 미국을 한반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회의에 불참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결과 미국과 중국의 대결구도가 만들어져 유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 살육전이 진행됐다. 전쟁 기간 300만 명에 가까운 인명이 살상되었는데 이는 1·2차 세계대전에서 입은 피해 규모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소련의 입장에선 중국과 미국을 한반도에 붙잡아 둠으로써 유럽에서의 자신들의 입지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6·25의 배후에는 스탈린의 세계전략이 작동하고 있었고 김일성은 그 전략에 이용당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당한 민초들. 영화 '지슬'이 토벌대를 피해 산에 숨어든 사람들의 갈등과 고통을 박진감 있게 그려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왜 이런 사건이 발생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생략되어 있다. 그 결과 관객들은 사실의 말단만 보고 전체를 해석하고 판단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잘잘못을 놓고 편 가르기를 시작하면 서로가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식자들이 더 깊이 민초들의 체험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이유다. 4·3 사건의 진실이 동굴 속에 갇혀 의문을 증폭시켜 나간 만큼 역사가 왜곡되고 그때 희생당한 민초들은 또다시 정치 권력의 이용물로 전락할 우려가 높다. 4·3 사건 때 투쟁을 해야 할 이유도 몰랐고 힘도 없었던 민초들이 당한 고통과 희생을 잊지 않고 기록하는 것은 후대의 의무이다. 영화 '지슬'은 남북분단으로 인한 정치적 분열과 갈등의 과정을 보여 줌으로서 한국현대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짚어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반도만이 아니라 세계사적 관점에서 그리고 파편적인 인식에서 총체적인 인식으로 시야를 넓혀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는 점에서 영화 '지슬'은 깊이 음미할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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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4.26 23:02

누가 크고 사나운 늑대를 무서워하나?

최근 세계 곳곳에 있는 가족들과 친구들로부터 안부를 묻는 메일이 쏟아져 들어왔다. 김정은의 섬뜩한 협박을 담은 기사들이 온라인 뉴스를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한국에선 K팝과 스포츠를 좀 더 중요하게 다루는 듯하다. 북한으로부터 잠재적 핵공격과 전쟁 도발의 위협을 받고 있는데도 말이다. 1994년부터 한국에서 살고 있는 나 역시 마찬가지다. 전쟁의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나는 여전히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했을 당시의 소요를 기억하고 있다. 김일성의 사망일 하루 전 한국에 막 도착했던 나는 사연을 제대로 모른 채 당시의 야단법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추후 어쨌든 지금보다 더 걱정스럽긴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북한의 암살단이 국경을 넘어 북한산까지 추적당했던 일 또한 기억한다. 지난 20년에 걸쳐 온 오랜 시간 동안 계속되어 왔던 북측의 위협으로 있어 왔던 모든 분쟁과 소규모의 충돌은 공포심을 점차 잃게 만들었던 것같다. 그래서 이번에 받고 있는 안부 메일에 나와 가족은 잘 있으며 피난처를 구하고 있지도 않다고 답하고 있다. 2년 전 쓰나미가 일본을 강타,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가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 당시 서방 측에선 동북아시아에 대재앙이 밀어닥친 것처럼 보도했다. 하지만 이곳 한국에서는 꽤나 느긋한 태도를 보였다. 위험한 지역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 공포는 적게 느끼는 한국의 모습은 그래서 신기하다. 어쩌면 그 오랜 시간 동안 우린 학습하듯이 실제로 어떻게 북한이 움직이는지에 대해 배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에게 완전히 비이성적이며 거의 자폭하는 듯해 보이는 북한의 도발 상황은 한국인들에게는 아마도 그동안 끊임없이 있어 왔던 골칫거리 정도로 보이는 것일까. 심각하게 따지고 보면 북한의 공격에 누가 가장 이익을 얻는가. 누구도 아니다. 결국엔 북한조차 국가로 남지 않게 될 것이다. 아무리 착각을 해도 김정은은 자신을 알 것이다. 그리고 비논리적이며 미친 듯이 행동하는 것도 실제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런 척 행동해서 언론 헤드라인을 장식할 수 있고 심지어는 미국에 겁을 주고 국제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얻는 데 성공한다면 결국에는 말쑥하게 계획된 전략인 셈이다. 다행히 북한에서는 발견된 석유가 없다. 미국이 얻을 것이 없는 북한을 공격하는 것을 내켜 하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확신하건대 김정은도 그걸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상태에서 이대로 유지되는 것이 아닐까. 본격적인 전쟁은 없고 미국과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핵무기 공격 감행으로 서로를 공격하는 제3차 대전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이 얘기는 재앙에 대해 어떤 흥미를 느끼는 이들에게는 실망스러운 얘기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내 소견으로는 어쨌든 이 한반도의 위기가 유로 위기와 그 밖에 모든 문제를 안고 있는 서구 사람들에게 다소 위안감을 줄 가능성도 높다. 그들보다 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 있는 한국인들을 바라보면서 얻는 안도감과 같은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 추측이 맞는다면 서구 미디어들이 왜 이렇게 대대적으로 북핵문제를 선전하고 있는지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문제는 전쟁이냐 아니냐에 있지 않다. 궁극적으로 어떻게 이 교착상태를 풀어낼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김정은의 아들이나 딸이 20년이고 30년이고 계속해서 그 뒤를 잇게 할 것인가, 아니면 과거 독일에서처럼 어떤 해결책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다. 이 같은 숙제는 아마도 전쟁에 의해서나 외교에 의해서만은 결정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그 문제를 풀어내는 길과 방향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명박 정부 때보다 북한에 대응하는 더 좋은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인지는 곧 드러나게 될 것이다. 크고 나쁜 늑대를 죽이는 것이 단기적으로는 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보다 더 나쁜 상황을 초래하게 될 수도 있다면 그건 그 누구도 원치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늑대를 길들인다는 것은 가능하긴 한 걸까. 여성적인 손길로 그 같은 기적이 이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지 모두가 함께 지켜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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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4.19 23:02

전주천의 봄

버스를 타려고 하는데 누가 나를 불렀다. 전주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보라고 했다. 봄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전주천으로 내려서니 물 흐르는 소리가 시원하게 들렸다. 잔잔히 흐르던 물이 징검다리에 부딪혀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 아~ 봄이다, 사랑이 싹트는 봄! 봄비가 많이 내려서 인지 물이 제법 그득하고 세차게 흘렀다. 따스한 햇볕과 맑은 물소리, 봄의 향기가 전주 천에 가득했다. 지난겨울은 혹독하게 추웠다. 얼음장 아래로 흐르던 물도 겨울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고 있다. 징검다리위에 따스한 햇살이 가지런히 내려앉고, 비탈진 언덕에도 새싹이 움트며 새 생명의 기운이 찾아들고 있었다. 물에 잠겨있는 물풀들도 생기가 넘쳤다. 물이 조금 깊은 곳에서는 이끼가 너울너울 춤을 추고, 맑은 물속에선 자갈들이 고개를 쑥쑥 내밀었다. 봄 햇살의 또 다른 축복이 여기에 있다. 햇볕이 뺨을 간질거린다. 자꾸만 친해지자고 한다. 상큼한 봄의 햇살이 온몸을 감싸준다. 잠자던 대지가 꿈틀거리고, 바람조차 무겁게 느껴졌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시원한 생수 한잔을 마신 것 같다. 햇볕을 받으면 피부에서 콜레스테롤이 비타민D로 변환되기 때문에 비타민D를 돈 들이지 않고 먹는 셈이기 때문이다. 어느 계절이나 나는 피부가 망가질까 봐 햇볕은 많이도 두려워했었다. 햇볕은 나처럼 나이 들어가는 사람에게는 더욱 좋고, 각종 암 예방에도 효과가 탁월하다고 한다.이제부터는 맑은 물소리를 들으며 자주 전주 천 산책길을 걸어야겠다. 물이 조용히 흐르다가 다리의 교각에 부딪혀 양쪽으로 갈라져 생동감 있게 흐른다. 갈라진 물길은 좁다랗게 흐르며 소살 거린다. 만나면 침묵하고, 흩어지면 소살 거리는 걸 보았다. 마치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다가 무엇인가 마음이 통할 때, 소통이 이루어질 때, 그 순간과 같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전주천의 상류에서 남천 교 아래를 지나, 전주천과 삼천 천이 만나 여울을 만들어 서로 껴안으며 겸허하게 만경강으로 흘러갈 것이다. 흐르는 물은 거스르지 않는다. 오직 물길을 따라 흐르다가 장애물을 만나면 돌아갈 뿐이다. 전주 천에 발을 디디면서, 봄의 속삭임으로부터 위안을 받는다. 물은 그릇에 따라 그 모양새가 달라진다. 원통에서는 둥글게, 삼각 그릇에는 삼각으로 적응하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사람도 상황에 따라 물처럼 살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물은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이다. 물은 자연의 한 부분으로 인간과 자연은 뗄 수없는 관계이다. 매말르던 나뭇가지에도 물이 오르고 있다. 어디선가 여인의 빨랫방망이 소리가 들리는듯하다. 오래전, 전주천의 맑은 물이 서민의 빨래터일 때도 있었다. 하얗게 빨아 널은 이불홑청이 봄바람에 펄럭이는 것을 보면 마음조차 청결해지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하얀 빨래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거울처럼 투명하게 흐르는 물을 들여다보며 빨래를 하듯, 내 마음도 깨끗이 빨아 찌꺼기는 저 물길 속에 흘려보내고, 깨끗해진 마음 보자기는 청명한 봄 햇살에 펼치고 싶다. 숭고한 사랑이 만물을 정화하듯이, 이 봄이 참 맑고 향기롭다. 참으로 오랜만에 햇빛과 바람과 물소리와 더불어 전주 천에서 봄과 더불어 어우러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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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4.12 23:02

4·19 혁명정신을 계승하자

1960년 4월 내가 다니던 동대문 밖 숭인동의 동덕여고는 온갖 봄꽃이 피어나면서 소녀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그 평온한 일상을 뒤흔든 사건이 18일 고려대학교 대학생들의 함성이었다. 안암동에 있던 고려대 학생들이 시내로 들어가기 위하여 신설동을 거쳐 우리 학교가 있던 숭인동을 경유하여 동대문 쪽으로 향했던 것이다. 이 후 전개된 상황은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하는 느낌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정권연장을 위한 3.15 부정선거에 대한 젊은이들의 항거는 시민은 물론, 교수사회까지 합세하게 만들었다. 경무대로 향하던 학생들에게 발포명령까지 떨어지고 결국 피를 보고나서야 이승만 대통령은 26일 하야성명을 발표하였다. 4.19는 그야말로 학생들의 순수한 의거였다. 정권을 탈취하려는 목적이 없는 자연발생적인 혁명이었다. 정치권은 외무부장관 허정을 수반으로 과도정부를 구성하여 정권을 야당이던 민주당에 넘겼다. 야당은 파벌싸움에 얼룩지고 수권능력이 부족하였다. 더구나 직전에 조병옥 신익희 같은 거물 지도자들을 잃은 상태여서 구심점이 약했고 사회전반에 팽배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추슬러 국가동력으로 묶기엔 역량이 미약하였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컸으나 아직 훈련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 후 개혁 열풍은 국가전체, 사회전반으로 확산되었다. 그 열풍을 비껴간 분야는 거의 없었던 듯싶다. 나는 공교롭게도 학생회장이 되어 있었다. 나는 고려대 학생회장의 부름을 받고 고등학교-대학교 학생회장 모임에 참석하였지만 여고생도 참여한다는 명분과 머릿수를 채우는 역할에 불과하였다. 정작 문제는 학교 안에서 일어났다. 학생회에는 학생들의 개혁 요구가 물밀듯이 터져 나왔다. 나는 그 중에서 감정이 보이는 것은 회의를 통해 걸러내고 학교에 보고하고 건의하는 방식을 취했다. 개교한지 50년이나 된 학교라 오래된 문제점들이 누적되어 있었지만 학교당국은 미온적으로 대처하였고 한번 터진 봇물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그 와중에서 나는 갈피를 잡으려고,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사태는 악화되어 결국 동맹휴학으로 치달았다. 사태를 악화시킨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협박편지였다. 학생들의 사상이 불온하다느니 빨갱이들의 사주를 받고 있다느니 하는 황당한 내용이었다. 10월 어느 날 교장선생님을 비롯하여 모든 선생님들, 그리고 전교생이 도열한 가운데 그 동안의 경과를 보고하고 학교의 조치를 받아들이는 일종의 의식을 치르고 나서야 데모는 끝났다. 내가 시작한 일도 아니고 학생회의 요구사항을 공식적으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시작된 일인데 모두 내 개인의 책임으로 돌아왔다. 대학입시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학생회 간부들은 하나 둘 중도 하차하고 나 홀로 남았다. 나의 문제는 남들이 물러설 때 슬그머니 물러서지 못하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강박증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개인의 영역에서 맴돌던 나의 의식을 확대시켜 사회정의에 대한 최초의 각성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20년도 훨씬 지나서 서울대 교수시절 군부독재타도를 외치던 제자들을 이해하게 된 열쇠가 되었다. 4.19혁명은 민족자존에 대한 깨달음을 몰고 왔다. 또한 우리 사회가 나아갈 이정표를 제시하였다. 학생과 지식인이 주도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인 4.19혁명은 그 후 지속적으로 전개된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3.15 부정선거에서 촉발되었지만 자유, 민주, 정의에 대한 열망이었으며 통일, 자주, 변혁 등으로 그 지향점은 계속 확대되면서 민주화운동의 초석이 되었다. 미완의 혁명인 4.19혁명은 지금도 진행형이고 앞으로도 그 완성도를 높여나가야 할 우리의 과제이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갈망, 정의에 대한 높은 관심, 타성에 젖은 기성의 질서나 기득권세력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식, 민족자존의식, 통일에 대한 열망 등 그 정신만은 오늘날에도 맥맥히 살아있어서 우리를 지켜주는 구심점이 되고 있으니 4.19혁명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혼을 지키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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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4.12 23:02

한국의 지식인 -그 부끄러운 자화상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구한말 시인 문장가로, 1855년 전남 광양에서 태어나 구례에서 칩거하며 살다가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며칠 후 통분을 이기지 못해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음독자결했다. 그때 나이 56세. 절명시 한 수가 가슴을 저민다.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온세상이 이젠 망해버렸어라.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식자 노릇하기 어렵기만 하구나.' 그는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기기도 했다. '내가 죽어 의를 지켜야 할 까닭은 없다. 다만 나라가 선비를 기른지 5백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도 책임을 지고 죽는 사람이 없다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반면 같은 시인이면서도 미당 서정주는 나라와 민족을 배신하는 행적을 보여준다. 가미가제 특공대원으로 죽은 일본군 오장에게 바친 헌시는 읽을수록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대는 우리의 오장 우리의 자랑.(중략)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온 원수 英美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리쳐서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 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미당의 비열한 행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수십 년 후까지 이어진다. 1987년에 발표된 전두환 56세 생일 축시를 보자.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 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 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중략)---' 한 번은 고은이 미당의 친일 행각을 비판한 적이 있었다. 옳은 지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미당의 제자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고은을 공격했다. 이런 얼빠진 지식인들 덕분에 미당은 죽을 때까지 한국 최고의 시인으로 대접을 받았고, 고창에는 그를 기리는 문학관까지 국비로 운영되고 있다. 미당은 시성이 아니라 시를 더럽힌 시인이었다. 그에게는 지식인으로서의 정의나 양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단지 시적 감각과 감성만이 존재했을뿐이다. 시적 기교와 감성적 문체는 부도덕한 사람도 얼마든지 그럴듯하게 꾸밀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람이 바로 미당이다. 서구의 경우 지식인 그룹 가운데서 작가나 시인들은 단연 시대를 리드하는 행동하는 지성으로 손색이 없다. 1936년 스페인에 프랑코를 중심으로 한 파시즘 세력이 내란을 일으키자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세계의 작가들이 국경을 초월하여 전쟁에 뛰어들었다. 대표적인 작가로 헤밍웨이, 말로, 조지 오웰, 케스틀러, 도스파소스, 네루다 등이 있는데, 그 경험을 바탕으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희망''카탈루니아 찬가''한낮의 어둠'등 걸작들이 탄생했다. 2차 대전시에는 사르트르, 카뮈, 말로, 레마르크, 앙드레 모로아, 지드, 아라공, 베르코르 등 많은 작가들이 나치에 저항하여 레지스탕스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인들은 부끄럽게도 일제에 충성을 맹세하고, 군부 독재시절에는 권력에 아부하기를 서슴지 않았는데, 그중 가장 악랄한 것은 언론인 출신이 군부 세력에 빌붙어 언론 통폐합에 앞장서고 같은 동료들을 학살한 점이다. 꽃의 시인으로 알려진 유명한 노시인은 군사정권 하에서 전국구 국회의원 자리를 주자 감읍하여 기꺼이 여당의 거수기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입을 꾹 다문채 내 한 몸만 지키면서 편하게 지내는 지식인도 있다. 시대의 아픔을 철저히 외면한채 국민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언급한 적이 없고, 수많은 저서를 통해 구름 잡는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았다. 그런데도 오늘날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시인 김지하는 과거의 고통스러운 영광을 재현하고 싶어서인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발언들을 여과없이 쏟아내 우리를 당혹케하고 있다. 진보적인 지식인으로 지식인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는 백낙청을 느닷없이 비난하는 글을 신문에 발표하더니 얼마 후에는 문재인에게 투표한 48%의 국민들을 공산당을 쫓는 국가 전복세력으로 몰아부쳤다. 무지하고 안하무인격인 그의 발언은 정상적인 지적 수준을 지닌 사람의 입에서는 나올 수 없는, 착란상태에서나 가능한 것이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지식인들이 이 모양 이 꼴인 것을 보면 매천의 말마따나 정말 지식인 노릇하기가 어렵긴 어려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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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4.05 23:02

김연아와 한국인의 미소

캐나다 세계 빙상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김연아의 미소를 보며 많은 생각을 해 보았다. 완벽한 경기를 마치고 난 다음의 무념무상한 미소, 시상대 위에서의 당당한 미소, 귀국 후 보여 준 충만했던 미소 등은 각기 다른 것이지만 그의 독특한 미소가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일촉즉발의 남북 긴장이나 국내 정치정세의 복잡다단함을 일거에 해소하는 것이었다.한국인에게 과연 미소란 무엇일까. 역사적으로 돌이켜 보면 대개 세 가지 정도의 미소를 떠올려 볼 수 있다. 우선 신라의 수막새에 새겨진 신라여성의 미소가 있다. 소박하고 진솔하다. 마음씨 좋은 시골 아낙네 같다. 사심이 없어 보이는 그 미소를 다시 눈여겨 살펴보니 입꼬리가 약간 올라간 것이 김연아와 비슷하다.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는 수막새 그 미소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한국인의 미소일 것이다. 그 다음이 서산 마애삼존불의 미소이다. 여기에는 백제인의 미소가 담겨 있다. 소박한 충청도 남성을 연상시킨다. 느긋하고 여유가 있어 보인다. 서민적이고 친근한 느낌도 불러일으킨다. 위압적인 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삼존불로 미루어 보아 당시 부처와 대중의 관계가 매우 친밀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마지막이 반가사유상의 미소이다. 그 자세나 형태미에서 반가사유상은 한국적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불상이다. 잔잔하면서도 장엄하다. 크기가 아니라 사유의 장엄함이다. 눈을 감은 것 같기도 하고 뜬 것 같기도 한 경계지점에서 고통 받는 중생의 아픔을 넉넉하게 포용하는 미소다. 반가사유상은 삼국통일 당시에 겪어야 했던 중생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생사의 경계에서 영원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한국의 여러 문화유산 중에서 서양인이 가장 감탄하는 것이 반가사유상이라고 한다. 그 평화로운 미소는 서양의 조각에서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에게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일 것이다. 지옥문 앞에 턱을 괴고 앉아 '신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고뇌다. '생각하는 사람'에게 고통은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평화는 없다. 아무리 평화를 갈망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는 투쟁과 갈등으로 심판받는 인간의 숙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조물주인 신과 인간의 경계가 분명하고 원죄를 먼저 설정하지 않고서는 그 신앙적 체계를 세울 수 없는 서양인들은 반가사유상의 미소와 같은 조각을 만들어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형상이나 지옥문 앞에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의 모습이 그들의 영혼에 새겨진 인간의 얼굴인 것이다. 김연아가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보여 준 미소가 앳된 소녀의 것이었다면 이번에 보여준 미소는 한층 성숙한 여성의 것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완벽한 연기가 만들어낸 무념무상의 미소이다. 부드러우면서도 겸손하고 겸손하면서도 당당하다. 그 부드러움 뒤에는 강렬함이 있고 겸손함 속에는 고난도의 훈련을 이겨낸 극기의 정신이 배어 있다. 김연아의 미소를 논하는 것은 그의 미소에서 한국인이 지닌 시련 극복의 의지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이다. 그의 미소에서 새로운 앞날을 이끌어나갈 한국인의 역동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급한 사람들은 김연아의 브랜드 가치가 6조 원에 달할 것이라고도 하고 단군 이래 최대의 것이라 과장하기도 한다. 한때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로 후진적 열등감을 위로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시상식장에서 캐나다 합창단이 애국가를 부를 때 느낀 감동은 세계 속의 한국을 실감하게 한 순간이었다. 김연아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김연아 정말 대단하잖아." 그 다음 날 지하철에서 한 나이 든 어른이 젊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되풀이한 말이다. 아무도 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른의 마음속에는 무언가 젊은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싶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 김연아의 미소가 다시 생각나는 것은 그때 그 장면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김연아가 전 세계인 앞에서 보여준 부드럽고 겸손한 미소. 그 미소가 더 크게 세계를 향해 떨쳐나가 우리 모두가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될 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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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3.29 23:02

증오의 관계?

국제행사에 관련된 일을 하다 보니 행사 개최 준비를 위해 한 해 중 꽤 많은 시간을 국내 여러 도시에서 보내게 되는데 이것은 언제나 내게 큰 행운이었다. 가장 자주 가는 곳은 아무래도 서울이지만 올해 들어선 대구에 갈 일이 잦아지고 있다. 최근에 대구와 왕래가 잦아지다 보니 광주와 대구를 연결하는 88고속도로에서 대해 한 번 생각해 볼 만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 도로의 제한 속도가 시속 80㎞인 데다 약 30㎞ 내의 구간에선 차로 변경이 불가능한 이 특별한 '고속도로' 위에서 커다란 트럭 사이로 샌드위치가 되어 달리다 보면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88고속도로는 그야말로 한국의 역사를 반영한다. 거의 바뀌지 않은 오늘날의 광주와 대구 간의 좋지 않은 관계의 상징물로 이어오는 듯하다. 부산, 대구, 울산 그리고 포항 등이 위치한 영남 지역은 서울과 경기지역 다음으로 국내에서 가장 개발이 잘된 지역이다. 반면에 호남 지역은 경제적 기적을 만들어 낸 지난 40년 동안 다른 지역들에 비해 발전이 뒤따르지 않았다. 정치적으로도 더 앞서 나갈 수가 없었다. 경상도 지역을 기반으로 한 보수 세력들이 힘을 갖고 있는 동안 전라도는 늘 혁명적인 좌익의 기지였었다. 최근의 대통령선거는 이러한 두 지역의 정치적 균열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현 박근혜 대통령이 경상 지역에서 80% 이상의 지지를 받은 반면, 전라 지역에선 5% 미만의 지지율을 획득했다. 그래서 88고속도로 역시 두 지역이 서로 친해지는 데엔 무관심한 것으로 여겨진다. 상하행선이 일차로인 데다 시속 80㎞가 제한속도인 이 고속도로는 한국의 빠른 현대 사회 생활상에 비해 터무니없이 부족하단 느낌이다. 원래 이 도로는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직후 전두환 전 대통령이 화해의 제스처로 내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대구와 광주를 연결하게 된 도로의 모습을 살펴보면 꽤 흥미롭다. 1984년 개통된 이후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예전과 거의 다를 바가 없다. 온 나라가 공사 현장임에도 돈이 부족하다는 이유 등으로 한국의 대표적인 대도시들인 대구와 광주 사이에 제대로 된 고속도로 (심지어 철도 등 다른 교통편도 없이)하나 만들지 못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아마도 그 이유는 훨씬 더 깊은 곳에 있지 않나 싶다. 사실 요즘엔 88고속도로에서 공사가 한창이라 가까운 미래에 두 도시 간의 원활한 교류와 소통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공사 진행이 더디어서 완공이 2015년으로 미뤄졌다. 그나마 약속이 지켜질지는 두고 봐야 하겠다. 외국인인 나로서도 지역감정은 한반도를 자르는 마치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받아들이기 힘들다. 향후 5년간 영남지역은 박근혜 정부로부터 밝은 미래를 보장 받은 듯하다. 그리고 박 대통령이 선거기간 동안 호남 사람들에게 내세웠던 많은 선거공약이 계획대로 실현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나라에서는 대통령으로 재선하기 위해선 누구도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적으로 재선이 불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관심마저 없어서인지, 오랜 오해와 균열을 극복하고 진정한 화해의 손길을 뻗어 균형과 조화가 있는 나라로 만들어가는 엄청난 위업에 누구도 손에 담그려 하지 않는다. 며칠 전 박 대통령이 발표한 장차관 임명 명단은 전체적인 균형보다는 위상 강화에 중점을 둔 듯하다. 그 결과 새로운 도로가 개통된다고 해도 두 지역 간의 관계가 개선될지는 의문이다. 사실 올 가을에 개최될 국제 행사 준비를 위해 최근 대구를 방문하면서 두 도시 간의 불신을 개인적으로도 느낄 만한 계기가 있었다. 행사 준비를 위해 대구시 관계자들과 토론을 하던 중 모두들 나를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갑다며 앞으로 있을 다른 국제 행사들에도 도움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 후 그중 한 사람이 나의 명함을 다시 보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 이제서야 봤네요. 회사가 광주에 있으시네요. 음, 그럼 아마도 함께 일하기는 힘들 것 같네요…." 거리가 문제라는 것일까. 거리로 보자면 대구에서 광주가 서울보다 더 가깝다. 그게 아니라면 두 도시 간에 결코 메울 수 없는 엄청난 틈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새롭게 고쳐질 88고속도로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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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3.22 23:02

대한민국에 문장가가 없다?

2008년 3월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 된 직후였다. 청와대 비서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문장을 좀 다듬을 일이 있는데 아무리 알아봐도 우리나라에 문장가가 없는 것 같다. 문장 잘 하는 사람 좀 추천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나 역시 아무리 생각해 봐도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다시 "왜 이렇게 문장가가 없는지 궁금하다. 옛날에도 그랬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 시대에는 문·사·철을 함께 하지 않아서 문장가가 나올 수 있는 토양이 안 되어 있다. 옛날에는 문·사·철을 겸수하는 학문체계였기 때문에 문장가가 많았다."고 대답하였다. 문장이란 화려한 수사만 나열해서도 안 되고 알맹이가 있어야 한다. 메시지가 없는 문장은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그 알맹이, 다시 말하면 메시지는 철학과 역사를 공부해야 생긴다. 그런데 철학만 공부하면 공허해지고 역사만 공부하면 사건의 나열이나 현상만을 제시하고 만다. 그래서 철학과 역사는 상호보완해서 연구해야 한다. 그 방법을 전통시대에는 경경위사(經經緯史)로 표현했다. 경경의 앞의 경(經)자는 날줄을 말하고 뒤의 경(經)자는 경전을 공부하는 경학을 말한다. 경학을 날줄로 한다는 뜻이다. 뒤의 위사에서 위(緯)자는 씨줄을 말하고 사(史)자는 역사를 말한다. 역사를 씨줄로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경경위사란 경학을 날줄로 삼고 역사를 씨줄로 삼아 입체적으로 진리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학에서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또 인간답게 사는 길은 무엇인가를 말한다. 예컨대 사람은 참되고 착하고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는 진선미(眞善美)라던가, 사람은 효도를 해야 한다던가, 사람은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등등 삶의 지표는 시간이 경과해도 변함없는 동서고금의 진리임에 틀림없다. 역사는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제반 양상을 밝히는 학문이다. 그래서 역사에서 시간개념을 빼면 역사로 성립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인간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시간에 따라 추적하는 하는 학문이 역사다. 역사는 인간 군상들이 살아가는 하나하나의 예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경학과 역사를 날줄과 씨줄로 삼아 직조하듯이 입체적으로 세상의 진리인 도(道)를 파악해도 좋은 문장이 없으면 표현력에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바로 그 도를 담는 좋은 문장이라는 그릇이 필요하다. 이를 도기론(道器論)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리하여 경경위사와 도기론은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기초이자 인문학의 방법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문·사·철에 대입해 보면 경학은 바로 오늘날의 철학이다. 역사는 물론 오늘날도 역사이다. 문(文)은 오늘날의 문학이라기보다 문장학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은 문·사·철이 문학과 역사와 철학의 약칭으로 해석되고 세 학문분야는 각기 전공이라는 이름으로 따로따로 놀고 있지만 전통시대 세 분야는 경학과 역사와 문장으로서 경경위사의 학문방법과 도기론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상호보완의 틀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학문이 전문성으로 무장한 각론에 치우쳐 나무는 보지만 숲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늪에 빠져 시너지 효과를 상실하고 학제 간에 소통이 안 되는 이유는 통합성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효율성은 인문학에서 가장 문제가 되어 인문학 발전의 저해요인이 되고 있다. 결국 인문학의 문제가 문장가의 배출을 막고 있다는 결론이다. 문장은 소통의 중요한 수단이면서 예술적 향기가 중요하다. 아름다운 문장을 쓰되 확실한 메시지가 있어야 하니 예술성과 실용성을 두루 갖춰야 제대로 된 문장이 되고 문장가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옛 선현들은 만권의 책을 읽어야 그 책에서 나오는 기운이 흘러넘치고 문자의 향기 그윽한 좋은 문장을 쓸 수 있다고 하였다. 결국 훌륭한 문장가는 독서가 생활화되고 문·사·철이 통합된 인문학이 융성하고 나서야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인문학의 발전이 좋은 문장가를 배출할 수 있는 토대이다. 하루 빨리 대한민국에 문운(文運)이 열려 좋은 문장가가 줄줄이 배출되는 성세(盛世)가 오기를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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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3.15 23:02

거대한 부패, 그리고 약탈

한국은 과연 선진국이 될 수 있을까. 이같은 물음에 어떤 사람은 한국은 지금 선진국 문턱에 들어섰기 때문에 선진국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일본의 장기 경기 침체와 유럽의 경제 불안 같은 것도 없는 한국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라고 열변을 토하기도 한다. 자기 도취에 빠진 착각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착각이야말로 무지에서 비롯된 것임은 말할 나위없다. 단언컨대 한국은 결코 선진국이 될 수 없다. 선진국은 경제 발전 하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산유국으로 부를 누리는 사우디아라비아나 부르나이 같은 나라를 보고 선진국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선진국은 경제 발전 뿐만아니라 넘쳐흐르는 문화가 있고, 빈부 격차가 없는 복지 사회와 함께 흔들림이 없는 윤리의식이 사회 저변을 받치고 있고, 상류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살아있고, 거기다 부패가 없는 깨끗한 사회여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한테는 그 어느 것 하나 가진 것이 없다.현재 한국이 선진국이 되는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사회 전반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부패 현상이다. 오늘날 한국의 부패는 그물망처럼 촘촘이 짜여져있는데다 합법적으로 진행되고 있어 감히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권력을 휘두를 수 있고 서민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고액의 수입이 보장되는 높은 자리는 서로 끼리끼리 나누어 갖는다. 법조인들의 전관예우라는 행태, 정부 요직에 있던 자들이 퇴임 후 대기업의 사외이사로 들어가 중요 정보를 흘려주고 위험을 막아주는 댓가로 받는 억대 연봉, 막강한 권한을 지니고 있는 지방자치단체장의 정당 공천권을 움켜쥔채 내놓지 않으려는 국회의원들의 질긴 탐욕, 선거 때마다 주거니받거니 하는 상류층들만의 공천 파티, 시민을 위한 답시고 벌여놓은 수백 수천 억의 공공사업이 휴지처럼 쓸모가 없어져 결국 세금 잡아먹는 하마가 되어 하수구로 줄줄 흘러내리는 혈세, 정경 유착으로 인한 대기업 위주의 경제 구조, 두껑을 열면 터져나오는 상류층의 비리 백태.교육계라고 예외는 아니다. 비싼 등록금 때문에 대학생들은 울상인데 고액 연봉을 받는 교직원들은 나몰라라하고 자기 안전만을 꾀하고 있다.연전에 일본 외상 마에하라 세이지가 식당을 운영하는 재일교포 할머니한테서 4년에 걸쳐 25만엔(약 270만원)을 정치 헌금으로 받은 것이 말썽이 되어 사임한 일이 있다. 거기에 비해 한국인들의 비리 액수는 도저히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천문학적인 액수이다. 역대 대통령들과 그 처자식들, 또 그 형제가 종횡으로 해먹은 횡령액은 수천수백 억에 이르고 정치인들과 고위 공직자들이 사과 상자로 옮긴 현찰만도 입이 벌어질 정도로 엄청나다. 상류층의 끊임없는 탐욕은 결과적으로 서민에 대한 약탈이나 다름없다. 저축은행 사태 하나만 봐도 그 실상이 어떠한지 알 수가 있다. 정상적인 은행 대출길마저 막인 불쌍한 서민들은 제2금융권에 손을 내밀지만 간교한 금융권은 고액의 이자로 약탈적 대출을 일삼는다. 그 마저 막히면 결국 사채업자를 찾아갈 수 밖에 없는데 그 이자가 가히 살인적이다. 우리 사회 구조는 상류층에는 항상 관대하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면서 서민들에게는 가혹하고 잔인하기 이를데없다. 이처럼 비리 탐욕 낭비 부도덕 약탈 등 모든 악덕은 다 가지고 있는 마당에 무슨 수로 선진국 국민이 되겠다는 것인가.이 상황에서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상류층이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발휘하는 일이다. 최근 스위스는 날로 커져가는 빈부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비상조치로 고액 연봉자들의 보수를 삭감하는 제도를 만들기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한 결과 70% 정도가 지지 의사를 밝혔고, 이 같은 방침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광대한 국토와 풍부한 자원을 가진 중국은 이번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절약과 검소를 실천할 것을 강조했다. 자원 하나 없는 조그만 나라 한국에서는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 지금까지 절약과 검소를 국정의 기반으로 삼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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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3.08 23:02

미래창조와 판타지 산업

박근혜 정부의 이대 중심축은 복지와 미래이다. 미래창조부에 대한 무게 비중이 다른 어떤 정부 조직보다 더 크고 무겁다. 과학에서도 IT산업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 또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이다. 일단 과학이 미래 국부 창출의 핵심적 역할을 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미래 창조의 근원을 논하는 것은 무언가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거나 우둔함의 소치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과학에 우선하는 것이 인문학이요 문화예술이라는 사실 또한 변함이 없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더라도 그 과학을 발전시키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거나 이를 향유하는 문화예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과학은 무용한 것이 될 것이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이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면서 시적 영감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는 자연의 법칙을 창안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래를 창조한다는 것은 인간의 꿈을 실현한다는 것이며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것도 인간의 상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달나라에 가고 싶다는 인간의 꿈이 없었더라면 이태백의 시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며 우주선을 타고 달에 착륙하는 과학적 성취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과학을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그 과학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이 없다면 그 과학은 무용한 것이다. 과학을 발전시키는 것도 인간이요 그것을 향유하는 것도 인간이다. 다시 말하면 미래 창조가 진정한 의미에서 풍요로워지기 위해서는 인문학에 대한 배려와 예술적 창조를 중요한 가치 개념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정부가 구상하고 있는 과학에 대한 집중적인 지원에 대한 인문학자의 억지 하소연이 아니다. 인문학적 측면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판타지 산업이다. 판타지 문화라고 할 수도 있는 이는 물론 디지털 코드의 시대에 탄생한 새로운 문화산업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산업에서 우선 거론할 수 있는 것이 영화산업이다. 최근 한국 영화는 관객 천 만 명 시대에 돌입했다. 다시 말하면 판타지 산업이야말로 새로운 국부창출의 중요한 영역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 시작한 해리포터 시리즈는 처음 소설로 출판되고 다시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전 세계 독자와 관객의 호응을 얻었다. 해리 포터의 저자 로안 롤링은 일 년에 전 세계에서 거두어들이는 인세 수입만 1조 7천억이라고 한다. 그것을 순수익으로 본다면 한국의 한 자동차회사와 맞먹는 순수익을 창출하는 셈이다. 영화 '쥬라기 공원' 또한 이와 유사한 경제적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공장 없는 산업이 바로 판타지 산업이며 그 미래는 무궁하다. '다빈치 코드'로 정통 기독교에 도전하여 세계적인 흥행작을 만든 댄 브라운은 현재 '단테 코드'를 집필 중이며 이 또한 세계적인 히트작이 되리라고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의 새로운 소설을 집필하기 위해 수많은 전문가들이 동원되고 있으며 각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은 자료와 지식을 동원하여 최고의 작품을 생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두 사람의 천재에 의해 창조되던 소설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공동으로 창작하여 소설이 문화산업의 형태를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문화산업은 국부창출에 있어서나 미래 성장 산업에 있어서나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으며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한국인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미래 창조에 있어서의 과학의 강조가 미래를 선도하는 산업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 중의 하나로 판타지 산업도 심도 있게 거론되어야 할 것이다. 대중예술 분야에서 세계적 성과를 이룬 케이 팝이나 싸이의 성공이 결코 우연의 결과가 아니다. 그들 나름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전 세계인이 호응한 것이다. 미래 창조의 키포인트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문화예술에 대한 확실한 투자와 그 바탕이 되는 인문학에 대한 관심도 제고 되어야 할 시점이다. 세계를 무대로 삼아 세계인에 통하는 판타지 문학과 예술이 한국인에 의해 문화산업으로 창출될 때 한국은 확실한 문화적 선진국이 될 것이며 그 성과 또한 지속적으로 국부창출에 기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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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3.01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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