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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반성하며 사는 삶

정곤 지난 일들을 생각해 보면 후회스러울 때가 많다. 그땐 왜 그랬을까? 그게 뭐 대단한 것이라고. 남보다 먼저 가면 어떻고 뒤에 가면 무엇이 돋보이고 달랐을까? 괜한 욕심을 부리며 왜 그렇게 뛰어 다녔을까? 가슴이 터질 것 같이 항상 바쁘게 살며 왜 그렇게 답답해했을까? 지난날을 생각해보면서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을 그냥 끄집어 내놓고 이야기 하고 싶다. 그래도 늘 가까이에서 내 마음을 잡아준 든든한 친구들, 목소리만 들어도 따뜻했던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 그들과 만나면 언제라도 다정히 손잡고 강변을 걷고 싶고, 허름한 목로주점을 차아서 밤이 새도록 실컷 술 한 잔 마시고 싶다. 인도 중부 마하라슈트라(maharashtra)주에 가면 아잔타(ajanta)라고 하는 석굴이 있다. 이 석굴은 산에 있는 바위를 깎아서 만든 굴이다. 석굴은 시원하여 더운 여름에도 기거하기 편리하고, 조용히 앉아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마시며 수양을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 석굴의 용도는 승려들이 기거하고 공양할 때 사용하는 발우와 승려의 법의를 넣어두기 위해 만들었다. 그래서 석굴을 파고 들어갈 때 필요한 것은 도구뿐이었다. 다만 석굴은 인력으로 바위를 파서 들어가면 넙적한 사원이 있고 파면 팔수록 더 깊어만 갔다. 우리 인간의 삶도 그렇다. 삶이 깊어감에 따라 나의 새로운 모습을 거기에서 발견하게 된다. 외부에서 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내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설령, 우리들의 마음을 가로 막고 있는 거친 바위가 존재한다면 이를 제거하고 다듬으면 그곳에 내가 있다. 멕시코 만류에는 혼자서 조그만 돛단배로 고기를 잡으며 사는 산티아고라는 노인이 있었다. 그런데 노인은 84일 동안 고기를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러다가 85일째 되던 날 먼 바다에서 청새치 한 마리를 잡게 된다. 하지만 그의 조각배보다 크고 힘센 청새치를 잡기 위해 3일 동안 사투를 벌이다가 상어의 공격을 받아 노인은 결국 뼈만 남은 고기를 가지고 소년이 기다리는 항구로 돌아온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이야기이다. 비록 눈에 보이는 성과나 결과물을 얻지 못했더라도 노인이 보여준 도전과 사투는 그 자체만으로 가치 있고 아름답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여러 조건이 있어야겠지만 거친 파도를 헤치고 나를 이기는 묵직한 극기 때문에 이 소설을 애독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소설에서 가난하고 끈질긴 집념이 가슴을 뜨겁게 억누르는 것을 느낀다. 그리하여 참되게 살기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실수와 실패를 밥 먹듯 반복한다할지라도 결코 포기 하지 않는다. 가던 길을 묵묵히 걷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이 가는 길이다. 기득권과 가진 자에게 짓눌린다고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가던 길을 묵묵히 가다보면 비로소 참된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 인간이 최선을 다하면 실패하지 않는다. 만일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실패한다하더라도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어떤 때는 만족하지 못하여 나를 아프게도 한다. 하지만 산티아고 노인은 매일이 새로운 날이고 그 날 갑자기 찾아오는 운을 잡기 위해서는 늘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내 마음을 활짝 열고 세상 밖으로 나와 잘못된 삶을 씻어 내고 새로운 참모습을 보이며 반성하는 자세로 새로운 날을 살고 싶다. * 정곤 씨는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하여 작촌예술문학상을 수상했다. 덕진문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국제펜 전북지부회원. 전북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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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26 16:43

[금요수필] 숲길의 무인 판매대

박광안 마음이 어수선 할 때면 나는 어수선한 마음을 내려놓기 위해 뒷동산을 오른다. 숲길을 따라 가다보면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에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복숭아꽃이 활짝 웃으며 반기는 봄에는 따스한 봄볕에 희망의 속삭임을 들으며 걷는데 오늘은 벌써 복숭아 수확이 한창이다. 오송제를 한 바퀴 돌다 보면 길가 언덕 밑으로 20여 평쯤 되는 황무지를 개간하여 철따라 여러 농작물이 재배되는 것을 보면 만물상을 보는 듯하다. 어찌나 알뜰하고 탐스럽게 가꾸는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재배하는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이는 얼마쯤인지 한 번도 보지는 못했지만 보고 싶은 얼굴이다. 농작물 재배뿐만 아니라 PET병으로 여러 모양의 바람개비를 만들어 세워 오가는 사람들의 눈요기도 해준다. 병해충들을 막기 위해 터널을 만들고, 잡초가 자라지 못하게 비닐도 씌우는 손재주도 대단하다. 농작물들은 땀 흘려 일한 보람으로 심은 대로 보기 좋게 잘 자라 튼실한 열매를 맺고 있었다. 이곳을 지날 때마다 나는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새삼 음미해 본다. 몸은 피곤할지라도 성취감을 느낄 때 몸도 마음도 건강해 진다. 오늘은 탐스런 애호박과 가지, 풋고추 등이 밭 길가에 진열되어 있었다. 써 붙인 가격표를 보고 판매되는 무인판매점이다. 수확한 농작물들을 시장에 내다 팔기에는 양이 적고 혼자 먹기는 조금 많아서 필요한 사람에게 파는 것이었다. 돈 벌자는 것이 아니며 취미생활인 것이다. 그런데 돈은 보이지 않았다. 양심적으로 돈을 놓고 물건을 가져간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물건만 가져간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곳을 지나면서 물건이 하나도 팔리지 않았는지, 돈만 가져갔는지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서 이것이 바로 선진 일등국민으로 가는 교육현장이 아닌가도 생각해 보았다. 견물생심에 사람의 눈치를 살피면서 그냥 가져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호젓한 산길에 농작물을 내놓은 주인은 서로 믿으며 사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가끔 농촌에서 일 년 동안 피땀 흘려 지은 농산물들을 차를 대놓고 가져갔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몹시 한탄스러웠다. 어려운 농촌 사람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1년을 어떻게 살라고 가져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는 국토는 아주 좁은데 아직도 인구가 많다. 그러나 이 농작물 주인같이 국토를 활용한다면 아직도 많은 땅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나라 농촌을 보면 젊은 사람이 없어 어린이들도 볼 수 없고 적막함마저 들게 한다. 다행히 요즈음 귀농 귀촌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전 교육이 부족하여 적응하지 못하고 중도포기를 해 성공하는 사람은 적다고 한다. 성공한 사람들은 새로운 영농기술을 개발하여 과학적이고 현대화 하면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사례를 텔레비전에서 보았다.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끊임없는 도전으로 사과와인을 개발하여 연간 20억 원 이상의 매출을 하고 있는 현장을 보면서 남들이 생각하지 않은 새로운 아이디어가 성공으로 가는 열쇠가 된 것이었다. 뜨거운 7월의 햇볕으로 무성한 소나무들이 반기는 숲길을 걸으며 생각하고 궁리해 보았다. 사람들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하는 일들이 조화를 이루어 사회를 구성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세월을 끌고 온 길을 뒤돌아보았다. 나는 농작물이 아닌 어린 새싹들의 푸른 꿈이 피어나도록 조력자 역할을 하며 반세기를 보냈다. 가끔 제자들을 만나면 나를 만났던 제자들의 머릿속에 나는 어떤 얼굴로 떠오를까?를 생각해 본다. * 박광안 수필가는 교직에서 정년퇴임했으며 인간과문학에서 신인상을 받아 수필가로 활동하고 있다. 덕진문학 사무국장을 역임했으며 수필집 연못가 새 노래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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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19 17:35

[금요수필] 눈 내리던 날

황복숙 아버지! 아버지를 떠 올릴 때마다 나는 함박눈 펑펑 내리던 날이 생각난다. 지난밤부터 아침까지 내린 하얀 눈길을 혼자 걸어가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여 마음이 아프다. 나이를 먹으면 눈물이 메말라진다는 것을 알았다. 세월에 녹은 그리움은 빛바랜 사진이 되고, 가슴속 아픔도 저절로 굳은살이 되는 것도 알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어언 30년이 넘었건만 아직도 친정동네 성황당을 지나노라면 아려오는 옛 생각에 눈물이 난다. 경찰관이셨던 아버지가 떠나간 이 길을 그대로 따라가면 만날 수 있을까?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지 못한 것이 끝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었다. 헤어짐의 아픔을 겪어보지 않아서였다. 어릴 때 기억으로 아버지는 무서운 호랑이셨다. 집이 쩡쩡 울리도록 불호령이 떨어지면 자다가도 일어나 이불을 개고 무릎을 꿇고 앉아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었다. 아버지 말씀이 떨어지면 누구하나 말대꾸 하는 법이 없이 그대로 했었다. 그래서 어느 때는 우리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하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항상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아버지, 그래서 내 유년은 무섭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했던 추운 겨울로 남아있다. 어느 해 여름 이었다. 도둑질을 하다 교도소에 다녀왔다는 아저씨가 아버지 없는 날만 알고 찾아와 안방까지 신을 신은 채 들어와 물건을 부수며 괴롭히고 협박을 했다. 내가 왜 2년이나 감옥살이를 혔는디? 아무데나 가래침을 뱉으면 우리는 무서워 벌벌 떨었다. 지금도 그때의 일들이 뚜렷하게 떠오른다. 이 아저씨는 동네의 닭, 개, 곡식을 훔쳐가고 폭행을 일삼으며 특히 혼자 사는 과부들을 괴롭혀 수없이 파출소에 신고가 들어왔단다. 그래서 수차례 타이르고 경고를 했지만 덩치가 크고 인상이 무섭게 생겨 바라보기만 해도 사지가 떨렸다. 보다 못한 아버지는 붙잡아 경찰서에 끌고 가 전주 교도소에 수감되어 2년형을 살고 출소했다. 그 뒤부터 거의 매일 우리 집을 찾아와 협박과 갈취를 일삼았다. 여름이라 마루에서 식사를 하는 우리에게 밥 맛있냐? 하며 밥상에 흙을 뿌리고 나뭇가지로 얼굴을 훑어대면 어머니와 우리 5남매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소리도 못하고 행패가 멈출 때까지 기다려다. 주변의 누구도 무서워서 나서지 못했다. 때로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버지를 보면 태도가 돌변하여 내가 형님이 보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 왔지라고 핑계를 대다가 슬슬 사라졌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쯤 종적을 감추었는데 다시 찾아오면 어쩌지? 길에서 만나면 어쩌지? 하고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세월이가고 어른이 되었을 때 그 사람이 매일 술 마시고 폭력을 일삼다가 술독에 빠져 이름 모를 병으로 죽었다는 소문을 들렀다. 지금도 아중호수 산책길을 걸을 때 아중산장 있는 마을 산 밑에 살았다는 무서운 그 아저씨가 왜 생각이 나는 걸까? 지난밤부터 아침까지 내리던 날이었다. 아버지는 그날도 출근을 하셨다. 텅 빈 새벽거리에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길에 아버지 발자국만 쭉 이어졌다. 가난한 시대를 살아가는 어깨의 무거운 무게를 보았다. 아버지는 더 이상 호랑이가 아니셨고, 흔들림 없이 살고자 했던 엄격함 뒤에 숨겨져 있던 아버지의 사랑을, 나는 지금도 아버지가 걸어가던 눈길을 생각하면 사박사박 내리던 눈길을 혼자 걷던 그 뒷모습은 두고두고 내게 뜨거움과 연민을 준다. * 황복숙은 성심여고 시절부터 꾸준히 수필을 써왔으며 온글문학 회원이다. 현재전북교육문화회관 시 수필반 총무를 맡고 있으며 수필가의 꿈을 안고 습작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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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12 17:52

[금요수필] 실고추

최상섭 우리 속담에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이 있다. 맛있는 음식은 어머니의 손끝에서 만들어진다는 말도 있지만, 맛있는 음식을 요리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여성의 자랑거리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교육목표는 결국 올바른 인간형성에 있다. 전통 가정에서 교육목표는 입신행도(立身行道, 훌륭한 사람이 되어 바른 길을 행함)라고 보았으며, 현대 가정에서의 교육목표는 자아실현(自我實現, 자기 자신의 능력과 개성을 충실하게 발전시켜 완벽하게 이루는 것)으로 분석했다. 그 가정교육 중 우리나라에서는 여성의 음식요리 전통을 으뜸으로 여겼다. 특별히 전주음식이 유명한 것도 이런 가정교육의 전통이 빚어낸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음식을 맛있게 잘 요리하는 것은 그 여성의 품격을 나타내는 지름길이다. 요즈음처럼 식도락을 즐기는 세상에 음식문화는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국가에서도 기간산업으로 장려하여 김치가 세계인의 밥상에 올라 한국의 음식문화가 세계적임은 우리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돈만 벌면 된다는 중국산 김치며 일본산 기무치가 세계인의 밥상에 오르는 게 현실이다. 새삼 김치가 뛰어난 발효음식임을 말해서 무엇하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 욕망 중에서 다섯 가지의 욕망을 오욕(五慾)이라 한다. 그 오욕(五慾)이라 함은 첫째가 식욕이요, 둘째는 성욕이며, 셋째가 물욕이다. 넷째는 수면욕이고, 다섯째는 명예욕이다. 그중 식욕과 성욕은 인간의 근원적 욕심이라 하여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욕망으로 여겼다. 사람은 반드시 먹어야 살고, 자손을 낳아야 후대를 이을 것이기 때문이다. 광활한 아프리카에서 뛰어노는 동물들을 보면 하루 종일 하는 일이 먹이를 구하는 일과 종족을 번식시키는 일에 집중되어 있다. 다행히 인간에게는 동물들과 달리 지식과 문화를 창출하여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려는 본능이 있다. 그 중에서 음식문화는 우리생활의 중요한 한 영역이 되었다. 예전부터 우리나라 여성들은 정성들여 음식을 만들어 그릇에 담고 그 위에 꼭 실고추를 뿌려 두었다. 이는 시각적 효과를 노리기 위한 음식 조리과정의 마지막 수단이다. 실고추는 붉은 고추를 잘 드는 갈로 실처럼 가늘게 썬 것을 말한다. 조리된 음식 위에 참깨와 몇 가닥 실고추를 뿌리면 훨씬 조화롭고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요즈음 참깨와 검정깨를 혼합하여 뿌리는 모습과 같다. 그러나 지금은 요리에서 실고추가 사라진지 오래다. 인스턴트 문화가 범람하는 세태가 가져다 준 영향이 아닐까 싶다. 반찬의 직접적인 맛 보다는 품격과 멋을 내는 일종의 소품이었던 빨간 실고추는 어머니가 밥상의 주도권을 놓지 않고 있을 때까지는 존재했다. 도마 위에 놓인 빨간 태양초를 부엌칼로 정성스럽게 실만한 두께로 썰어서 찌개나 반찬 위에 살짝 뿌려놓아야 음식이든 요리든 완성품이 되었던 것이다. 실고추를 많이 뿌리는 것은 멋도 맛도 아니다. 음식의 중심 부분에 빨간 실고추 서너 줄 뿌리면 시각적 효과에서부터 식감을 불러 오기에 충분하다. 어머니가 도마 위에서 써는 실고추에서 우리 전통음식의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있다. 그 시절 음식이 더 먹고 싶은 심정은 무엇 때문일까? * 최상섭은 수필가이자 시인이다. 김제 출생으로 한국시와 에세이스트로 등단했으며 한국문인협회, 전북문인협회, 행촌수필문학회 등의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까치는 징검다리에 수(繡)를 놓고〉 등 7권의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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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05 17:17

[금요수필] 연말의 단상(斷想)

곽창선 기해년 출발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캐롤송을 들으니 마음이 바빠진다. 책상머리 카렌다도 이제 달랑 한 장 남았다. 다사다난했던 이제 며칠이 지나면 2019년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한해의 끝자락에 서 되면 괜스레 마음이 초조해지는 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한해의 시작이 씨앗이었다면 한해의 마지막은 결실로 보아야 할 것인가? 그것이 자연의 순리겠지만 인생이란 대개 그 반대다. 한해의 시작은 마냥 부푼 마음으로 오색찬란한 꿈과 소망 속에 멋진 미래를 설계해 보지만 정작 한해의 끝자락에 서게 되면 대개는 이상과 현실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의 벽에 부딪혀 낙담하게 되는 것이 다반사다. 한해를 잘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이 울컥거려 년 초에 세웠던 다짐들을 더듬어 보았다. 틈틈이 빛바랜 추억들을 정리하며 주기적으로 체력도 기르고 싶은 작은 소망들 이었다. 실패한 경험이 떠올라 두려웠지만 꾸준히 일기도 써가며, 걷고 뛰며 다짐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차츰 익숙해지며 평소 사물을 쉽게만 보아 오던 습관이, 조금은 깊이 숙고하는 버릇이 생겨, 내 자신의 철학과 그리고 과거와 현재, 미래의 행적을 엮어 보려는 욕심에,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노력한 보람으로 등단의 기쁨을 맛보았으며 건강도 한결 좋아 졌다. 그동안 써온 한편 한 편의 글들은, 미숙하지만 겪어 온 사연들을 압축한 내 속 마음들이다. 따라서 평정심 잃지 않고 쓴 생활 속의 이야기들이 독자의 마음에 바로 전달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과 글 속에서 잉태한 사연들이 서로 공감할 수 있다면 하는 기대도 품어 보았다. 어찌 보면 나에 내면은 교만과 이기심이 가득 찬, 속물에 불과 한지도 모른다. 인간은 서로 개성과 사고가 다르기에 조금은 고개 숙일 줄 아는 아량에서 인간적 캐미 도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반성도 해본다. 조금 무른 듯 양보하며 살지 하는 생각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여기까지 왔는가? 후회스럽다. 눈물과 슬픔이 있고 미움이 있는 게 세상이다. 또한 웃음도 있고 기쁨도 있고 사랑도 있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이를 악물고 세상을 이기려 말고 세상사와 상관없이 행복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진정 삶을 즐기는 방법이 아닌가 싶다. 그러기에 아직 우리에게 웃을 수 있는 기회는 언제든지 있기 마련이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고행이라지만, 서로 어우렁더우렁 뒤엉켜지면 인간의 깊은 정을 느낄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물위에 떠 있는 나뭇잎에서, 해탈의 지혜도 배우고, 산길에 누군가 달아 놓은 길안내 리본과, 등대가 반짝여 주는 의미도 삭여 가며, 노후의 삶을 재충전하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이렇게 써 나 온 글들을 반추 해보니 횡설 수설 늘어놓기에 급급했지만, 모처럼 결실을 맺은 소중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써 나온 결과지만, 나에게는 값진 기록이기에 뿌듯하다. 끝까지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겠다는 각오가 남다른 이유다. 나만이 옳다는 가치가 더 이상 진실이 아니고 반대가 될 수 있음을 자각하고, 독선적 주장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세계를 섭렵할 수 있는 혜안을 품어도 보며 경자 신년을 맞이하고 싶다. 새해를 맞으면 매년 그랬듯이 무의미하게 보낸 지난해의 못 다한 마음을 새롭게 다짐을 한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에게 신선함과 기대감을 안겨 준다. 2020년에는 둥근 해가 떠오를 때마다 희망이 샘솟고 행복의 꽃이 곱게 곱게 피어나기를 소망한다. * 곽창선은 국민건강보험공단 지사장을 역임했으며 <표현 문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와 현재 표현문학회, 신아 작가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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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1.28 17:19

[금요수필] 금평저수지 수변로

정석곤 오늘은 결혼기념일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결혼식은 거의 휴일에 했다. 하지만 우리는 목요일에 결혼을 했었다. 그런데 결혼식 날과 요일이 몇 년마다 일치하는지는 모르지만, 올해는 마침 목요일이다. 그래서 산으로 갈까 바다로 갈까 망설이다가,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란 고사성어가 생각나서 오늘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 물을 택했다. 정오가 넘어서야 금평저수지로 향했다. 가다가 중간에 맛집 청원골을 들러 검은콩과 검은깨로 만든 수제비를 겸상으로 받으니 오붓했던 옛 추억이 새롭다. 평소 저수지 곁을 차로 몇 번 지나가며 둘러보았으나 그냥 금산사 아래 저수지로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요즘에야 TV 뉴스에서 금평저수지란 이름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이 김제시에서 시민을 비롯한 탐방객들의 여가문화와 휴식공간을 제공해 주기 위해 지정한 수변(水邊) 산책로라는 것도 알았다. 저수지에 도착하자마자 수변산책로에 새롭게 눈길이 멈춰졌다. 탐방객은 적었으나 그래도 가족, 친구, 연인, 신혼부터 나이 지긋한 부부 들이 저수지 수변산책로를 걷는 모습들이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보기 좋았다. 길섶에는 민들레가 즐비하게 피어 있었다. 노란, 하얀 꽃들이 오므라들고 꽃대는 둥그런 은빛 털모자를 쓰고 있는 게 아닌가? 모자의 털이 바람 따라 흔들리며 강소천의 동요 종소리에 나온 가사처럼 꽃씨는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타고 멀리 흩날릴 채비를 하고 있었다.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인생이라는 바람 따라 결혼 45돌을 맞은 우리의 삶을 표현한 것 같아 보고 또 보았다. 목재 데크 수변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연분홍 웃음을 띤 꽃 잔디가 돌 축대 틈 예서제서 얼굴을 내밀었다. 이웃 개나리도 활짝 웃었다. 철쭉도 잎을 단 빨간 꽃봉오리를 머금고 있었다. 줄서있는 벚나무는 바람에 꽃비를 실어 맞은 편 버드나무에게로 보내고 있었다. 꽃비는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게 하염없이 축복을 내려주었다. 산자락 산책길에 들어서니 노란 갈대가 물 가운데서 인사를 했다. 키와 몸집이 큰 나무들이 물에 담긴 채 연녹색 가지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쭉쭉 자란 산죽들도 두 손을 흔들었다. 모진 세월을 지내온 소나무 숲 사이 산책길은 햇볕도 머물러 있어 장관이라 사진을 여러 번 찍었다. 이름 모를 새 한 쌍이 숨어 결혼기념 축하 노래를 불러준 것 같아 더 신이 났다. 조금 경사진 계단을 올라가 멈췄다 내려가니 저수지의 둑과 취수문(取水門)이 나왔다. 산으로 둘러싸인 저수지는 신평마을을 바라보며 긴 둑을 자랑하고 있었다. 둑에는 튼튼한 난간을 만들어서 누구나 마음 놓고 산책하며 사방에 펼쳐진 정경을 감상하기 좋은 관람석이었다. 봄바람을 타고 일렁이는 파란 물결은 저수지라기보다는 호수라 불러야 할 성싶었다. 멀리 연녹색으로 뒤덮인 크고 작은 산은 하얀 벚꽃으로 수를 놓고 있었다. 마치 하얀 양떼들이 산 능선으로 흩어져 기어 올라가고 있는 것 같았다. 수변산책로를 갈 때 우리는 우측 산자락 쉼터까지만 다녀오려 했다. 그러나 젊은 부부가 싱글벙글하며 오는 모습을 보고 저수지를 한 바퀴 돌았다. 결혼기념일의 세월이 많이도 쌓였다. 그럴수록 매사에 거기까지만 하자.고 선을 긋는 것도 많아진다. 저수지 수변산책로를 일주한 것도 그랬다. 사계절 각기 다른 모습으로 찾는 이들에게 쉼터를 제공하는 금평저수지, 그 근교에 살고 있는 우리는 매력에 흠뻑 젖곤 한다. 낭만과 추억을 선물하고 꽃과 향기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금평저수지 그곳에 하나의 꽃으로 머물다 가면 어떨까. * 정석곤은 관촌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 하여 <대한문학>수필 등단했다. 안골은빛수필문학회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전북문인협회, 교원문학회 회원으로 <풋밤송이의 기지개>외 1권의 수필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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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1.21 17:43

[금요수필] 꽃잎에 데다

이정숙 허겁지겁 병원을 찾았다. 의사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잠시 주춤거리다 작년에 매실을 딴 뒤 시커멓게 기미처럼 티끌이 생겨서요. 사위질빵 꽃잎이 특효가 있다 해서 붙였더니 이렇게. 자초지종 장황설을 듣더니 그 꽃이 뭔데 팔에 붙여 화상을 입어요. 알 만한 사람이 그렇게 무모한 짓을 했느냐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측은하게 상처를 바라본다. 그 뒤에도 상처를 보고 묻는 사람마다 똑같은 설명을 해야 하는 일이 곤혹스러워 나중에는 그냥 데었어요. 하고 대답해 버렸다. 대부분의 사람은 알지도 못하는 꽃으로 인하여 나는 생뚱맞게 폭염에 생고생 중이다. 작년 가을 K시인으로부터 기미나 검버섯 빼는 데는 사위질빵만한 것이 없다는 말을 들은 데서부터 소동이 연유한다. 봄이 되자 집 옆 건지산을 오 가며 사위질빵이 있는 두 곳을 알아냈다. 대지마을을 지나 오송지 쪽으로 동산처럼 쌓아 놓은 거름더미에 환삼덩쿨과 얼키설키?뒤엉켜 있고, 또 한 곳은 단풍산 진입로에 탱자나무 우듬지까지 타고 올라 바람에 그네를 타는 듯 머리를 늘어뜨리며 넌출져 있다. 어느 쪽이 먼저 피든 아무 데서나 빨리 꽃잎을 따려고 내내 눈독을 들였다. 7월 초순이 되자 하얀 성냥골 같은 꽃술을 보이더니 중순경에 이르자 이내 꽃망울을 터트렸다. 잎겨드랑이에서 나오는 취산꽃차례로 옅은 상앗빛 꽃이 무리 지어 핀다. 이때다 싶어 꽃이 피자마자 댓바람에 한 움큼 따왔다. 그리고 양념용 절구통에 넣고 쾅쾅 찧었다. 손톱에 봉숭아 꽃물들이듯 팔의 꺼뭇한 자리에 두둑하게 얹어 비닐로 야무지게 덮고 추호의 의심도 없이 묶었다. 처음부터 화끈거렸지만 적어도 한 시간은 싸두어야 한다기에 참고 버텼다. 그런데 풀어보니 꽃을 얹은 곳은 물론 물기가 번진 곳 10센티가량이 뜨거운 물에 덴 듯 발갛게 달아오른 게 아닌가. 임시방편으로 찬물에 담그고 바셀린거즈를 붙여보았지만, 통증은 밤을 지새웠다. 아침에 보니 상처 부위가 퉁퉁 붓고 수포가 생기기 시작한다. 주사, 연고 등 할 수 있는 처방은 총동원했지만 물집은 성난 파도처럼 번져나갔다. 가뭄에 땅 갈라지듯 수포의 면적이 넓어지고 있는데 의사는 감염의 우려가 있으니 터트리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촛불에 바늘을 소독하고 마술사처럼 콧김을 쐬어 넓은 부위 몇 개를 터트렸다. 수포가 터진 자리에 진물이 계속 흐른다. 그러면서 피부가 밀리어 속살이 드러나고 통증에 가려움증까지 겹치니 신경이 곤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꽃들은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간밤에 내린 비로 더욱 생기를 발하며 곳곳에서 키득댔다. 그러고 보니 탱자가시도 두려워하지 않고 제 영역을 확보한 사위질빵 녀석의 악착을 너무 만만히 본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꽃이란 생김보다 그 마음씨가 더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던가. 사위질빵 꽃은 모양새나 색깔이 화려하거나 요란스럽지 않고 시골 아낙처럼 소박하다. 은근히 정이 가고 측은지심마저 드는 꽃이다. 그런데 겉보기와는 달리 무서운 독기를 품고 있다니? 순하게 생긴 사람에게 마음을 주었다가 된통 당한 느낌이다. 얕은 앎을 가지고 함부로 행동했다가 볼썽사나운 흉터에, 쭈글쭈글한 주름에, 거무튀튀한 곰팡이까지 핀 훈장을 팔에 새겼다. 괜스레 이르집어서 혹 떼려다가 혹을 붙이고 만 격이다. 여름내내 피부과를 서너 군데나 전전했다. 고생 실컷 하고 옷 몇 벌 값을 날려버렸다. 찬찬하지 못하고 덤벙대며 사는 나를 다시 한 번 본다. * 이정숙 수필가는 수필과비평을 통해 등단했다. 전북펜 부회장, 수필과비평작가회 회장을 역임 했으며 온글문학상과 작촌예술상 한글날 도지사 공로상을 수상했고 꽃잎에 데다 등 수필집 다수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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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1.14 17:39

[금요수필] 거리의 유감

이광정 하루도 빠짐없이 정해진 시간이 되면 아파트 단지의 복잡한 네거리에 나와서 아이들 교통 지도를 하는 여자 교장 선생님이 계신다. 교통 지도뿐만 아니라, 손들고 달려오는 아이들을 품에 꼭 안아 주고, 손잡고 한쪽 길로 잘 인도해 준다. 꽃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어깨띠를 매고 호루라기를 손에 든 그분의 모습이 더 아름답다. 나도 그 교장 선생님 맞은편에서 가끔 교통 지도를 하고 있었지만 교장이라는 권위를 버린 인격의 최상의 가치인 겸손한 태도가 존경스럽기도 하다. 아침 출근 시간이라 바빠서 그런지는 몰라도 정지 신호를 무시하고 그냥 달리는 차들이 많다. 그런데 그 여교장 선생님은 횡단보도를 건널 때 반드시 양쪽을 보고 차들이 완전히 정지한 다음에 건너도록 지도하며 아이들의 안전을 지켜준다. 어린이들은 아직도 조심성이 부족함으로 지켜 서서 잘 보살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송이 꽃도 대자연의 질서 속에서 피고 지는 것처럼 우리의 교통 문화도 꼭 질서를 지켜야 한다. 아울러 교통질서 뿐만 길거리 공중도덕도 중요하다, 차창 밖으로 담배꽁초도 버리면 안 된다. 정말 보기 싫다. 혹시라도 외국 관광객이 그런 모습을 본다면 우리 한국인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제발 부끄러움을 아는 상식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요즈음은 일기예보에서 미세먼지 까지도 예보가 된다. 온갖 굴뚝과 자동차가 내뱉는 가스와 자동차가 달릴 때 타이어가 마모되어 흩어지는 해로운 분진 때문에 마스크를 써야 한다. 독약은 사람의 생명을 바로 앗아 가지만 미세 먼지는 서서히 생명을 앗아가기 때문에 미리서 예방을 해야 한다. 앞으로 공기가 더 심하게 오염된다면 산소 호흡기를 달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길거리에는 함부로 버려진 쓰레기나 오염의 원인이 되는 유해 물질들이 많다. 피티병이 그렇고 일회용 컵 또는 담배꽁초 플라스틱 용기 등이 많이 버려진다. 이런 속에서 유해 폐기물을 준는 노인들을 보면서 치솟는 연민으로 발걸음이 무겁다. 편히 쉬어야 할 노인들이 얼마나 살기가 힘들면 국가와 사회와 이웃들로부터 외면당한 채 폐기물을 주워야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길거리 문화와 오염 방지의 주범인 폐품들을 주우면서 복지 사회의 실현일꾼으로 이바지 하고 있다. 나는 오늘도 노란 조끼를 입고 기를 들고 거리에 나가서 교통 지도를 했다. 그저 만감이 교차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내가 초등학교에 몸담고 있을 때도 주번 교사가 되면 어깨띠를 두르고 교문 밖에 나가서 아이들 교통 지도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또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만나게 되어 행복하고 더 젊어진 것 같다. 길가에 무심히 떨어진 은행잎을 보면서 가을 시인이 되기도 했다. 오늘날 노인들이 많아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데, 친절과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노인들에게 일자리도 찾아주고 마치 부모님처럼 섬기고 챙겨주는 곳이 있다. 바로 이곳이 전주 효자 시니어 클럽이다. 그 많은 사람에게 가끔 음식도 대접해주고, 모임이 있을 때마다 이것저것 넣은 선물 봉다리도 나누어 주기까지 한다. 이처럼 우리 시니어들을 위해서 항상 수고하시는 관장님과 직원들 모두에게 감사를 드린다. 특별히 전주 금암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께도 감사드린다. 인간은 누구나 나이가 들면 늙기 마련이지만 늙어가는 사람만큼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하루하루를 무료하게 살아가기 보다는 좀 더 계획하고 준비하기에 따라서 아름다운 노년을 보낼수 있다, * 이광정 씨는 초등학교 교사 재직시절인 1980년대 <전북문학>을 통해 수필 활동을 했다. 현재 전주 효자시니어클럽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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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1.07 17:41

별 향기 - 박동수

박동수 수필가 법성포 갯벌에 저녁노을이 황홀하게 내려앉는다. 조금 전까지 갯벌은 저녁노을로 황홀하게 물들고 있었다. 그런데 밀물이 밀려들어 파란 바닷물로 덮이고 밤이 시작된다. 밤이 시작되면서 별들이 밤하늘에서 선명하게 빛난다. 저 별 중 하나는 분명 마라난타의 별일 것이다. 성인이 불법을 전한 곳이라고 해서 법성포(法聖浦)라 부르는데 법성포 밤하늘에 마라난타의 별이 빛나지 않을 리 없다. 소년 마라난타는 별을 좋아했다. 밤마다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날이 밝으면 별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는 늘 그것이 아쉬웠다. 마라난타는 사라진 별들을 항상 찾아 나서고 싶었다. 마라난타는 인도 간다라 지방에서 브라만 계급으로 태어나 모든 것 부족함 없이 풍족하게 자랐다. 차별받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천민 계급이 노예로 팔려가고 차별을 심하게 받는 것을 보면서 그들을 어떻게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출가를 한다.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별을 찾아 나선 것이다. 부처님 불법을 배워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출가한 마라난타는 불법을 열심히 터득한다.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중생의 번뇌를 도멸(道滅)해 주고, 깊은 경륜을 쌓고, 학식과 덕행을 쌓아 존자가 된다. 마라난타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별을 보며 사색했고, 별을 보며 깨달았다. 산사에 머물 때는 온갖 자연의 소리와 염불 소리까지 다 빨아들이는 별을 보며 깊은 밤 사색에 젖었고, 고비사막을 건널 때는 적막하기까지 한 사막에서 에메랄드빛 하늘에서 선명하게 빛나는 별들을 보면서 형언할 수 없는 경외에 젖어 숨 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그 경외의 순간 인간은 모든 슬픔과 괴로움을 잊어버릴 것이다. 별은 우리에게 한없는 마음의 정화를 가져다준다. 마라난타는 별이 되고 싶었다. 별이 되어 많은 사람의 마음에 별을 심어주어 희로애락, 생로병사의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마라난타는 더 많은 사람의 마음에 별을 심어주기 위해서 길을 떠난다. 백제 침류왕 원년 동진에서 배를 타고 서해를 건넌다. 몇 날을 풍랑에 시달리면서 항해를 계속한다. 그는 밤하늘에서 빛나는 별을 보며 길을 잃지 않는다. 가슴에 별을 간직한 사람은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다(별-신형주). 마라난타는 별을 가슴에 간직하고 살았다. 그랬기 때문에 길을 잃지 않았다. 마라난타는 부처님 닮은 별이 되어서 불경과 아미타불 불상을 가지고 거친 바다를 무사히 건너 법성포에 닿는다. 법성포는 그래서 백제불교의 최초의 도래지가 된다. 백제불교가 퍼져나가기 시작한 곳이 법성포다. 마라난타는 대승불교 중에서도 아미타불이 머무는 서방정토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정토 신앙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는 모두가 대승 보살이 되도록 모든 사람의 가슴에 별을 심어 주었다. 별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안해진다. 모든 마음의 찌꺼기가 다 사라지는 것 같다. 나는 오늘 마라난타가 들어온 법성포 밤하늘에서 빛나는 별을 바라본다. 그러면서 한없는 마음의 정화를 느낀다. 법성포에 마라난타의 별 향기가 내려앉는 것을 느낀다. △박동수 수필가는 전주대 부총장과 전북수필문학회장을 역임했으며,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해 <수염을 깎지 않아서 좋은 날> 등 6권의 수필집을 냈다. 전북문화상 등을 수상 했으며, 한국문협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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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0.31 15:18

[금요수필] 호박꽃은 아름답다

김학철 예로부터 얼굴이 예쁘지 않거나 뚱뚱한 체격의 여인을 일컬어 흔히 호박꽃도 꽃이냐라고 비아냥댔다. 그래서 이 말을 들은 당사자들은 매우 서운해 했고 성깔 있는 여자들은 버럭 화를 냈다. 여인만 기분이 나쁜 것이 아니고 만약 호박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기분이 나쁠까? 결국 호박꽃은 예쁘지 않아 꽃 축에도 못 낀다는 말이다. 나 역시 호박꽃은 어딘가 모르게 천박스럽게 여겨왔다. 그런데 그동안의 이런 고정관념을 일순간 바꿔놓는 계기가 있었다. 1년 전 어느 갤러리에서 유명화가의 <꽃>을 소재로 한 개인전을 관람한 일이 있었다. 호박꽃, 가지 꽃, 참외 꽃, 도라지꽃, 들국화꽃 등 주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들을 그린 6호~10호정도의 비교적 작은 작품들이었다. 평소 하찮은 것으로만 여겨왔던 꽃들을 그림으로 그려 놓으니 예전엔 미처 몰랐던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며 어느 한 작품도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유독 내 눈에 확 들어오는 그림이 있었다. 잎사귀와 줄기, 그리고 활짝 만개한 꽃, 피어나려는 꽃, 이미 만개했다가 지려고 축 늘어진 꽃잎 등이 어우러진 호박꽃 그림이었다. 한참 보고 있노라니 새빨간 장미가 화장을 짙게 한 서양여인상이라면, 호박꽃은 마치 노란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온아우미(溫雅優美)한 기품(氣品)이 서린 전형적인 한국여인상이었다. 호박꽃이 이처럼 예쁘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보면 볼수록 내 마음을 사로잡는 이것이 예술의 힘이려니 싶었다. 평소 그림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진정한 아름다움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다는 것도 배웠다. 호박하면 생각나는 것이 많다. 해마다 4월초 커다란 구덩이를 판 다음 잘 숙성된 퇴비를 넣고 흙을 덮은 뒤 씨앗 또는 모종을 심는다. 그러면 초여름부터 애호박이 열린다. 겉이 녹색의 윤기가 잘잘 흐르며 촉촉하고도 예쁘장한 애호박은 내가 가장 즐겨 찾는 채소류의 하나다. 애호박을 썰어 넣고 뚝배기에서 팔팔 끓는 토종된장찌개는 생각만으로도 구미가 당긴다. 애호박나물무침도 빼놓을 수 없다. 또 여름이 되면 연한 호박잎을 쪄서 강된장과 함께 쌈을 싸먹는데 이때 보리밥과 함께 먹으면 단연 여름철 별미다. 여름철 보양식이 따로 없다. 추석 때는 애호박을 썰어 전을 부치기도 한다. 늦가을 서리가 내리기 전 연한 호박잎과 까칠까칠한 껍질을 벗겨낸 줄기, 그리고 호박순 끝부분과 엄지손가락만하거나 조금 더 큰 애호박을 으깨어 된장국을 끓이면 맛이 그만이다. 애호박을 썰어 말린 호박고지로 만든 정월보름날 아침의 나물무침은 취, 고사리와 더불어 우리 고유의 반찬이 아니던가! 어디 이것뿐이랴. 늙은 호박은 눈이라도 오는 겨울날, 호박죽 또는 호박떡을 만들어 먹으면 간식으로는 최고다. 호박엿과 호박 차를 만드는데도 요긴하게 쓰인다. 호박의 주성분은 당질이지만 카로틴의 형태로 들어있는 풍부한 비타민, 칼슘, 철분, 인 등 미네랄이 균형 있게 들어있고, 특히 감기저항력과 몸을 따뜻하게 하는 성분, 위장강화 등으로 회복기에 있는 환자나 산후부기를 빼는데도 좋다. 전국 어디를 가나 지천으로 널려있는 것이 호박밭이다. 밭 가장자리나 울타리, 담장, 언덕배기 등 장소나 토질을 가리지 않는 덕성도 지녔다. 6월초부터 여기저기서 웃음을 짓는 노란 호박꽃들이 우리를 반긴다. 호박꽃은 더 이상 미운 꽃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니 이젠 호박꽃도 꽃이냐는 말은 빈말이라도 삼가야 할 일이다. △수필가 김학철 씨는 <대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전북문인협회 이사영호남수필문학회, 한국미술협회 회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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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0.24 16:52

[금요수필] 사촌 누나

송일섭 사촌 누나는 살림이 녹록치 못하여 중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무작정 서울로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떠나기 전날 살던 집을 돌아보던 누나는 눈이 붉어지도록 엉엉 울었다. 마당 앞 빨랫줄에서 참새들도 따라 울었지만 대문 밖에서는 누구 하나 손을 흔들어 주는 사람도 없었다. 유난히도 포근한 봄날 누나가 서울로 떠나는 길에는 어린 동생이 동구 밖까지 배웅하였다. 누나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다시는 고향에 오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무작정 낯선 서울로 떠나는 누나의 손에는 작은 보따리 하나만 달랑 들려있었다. 서러운 길이었다. 아버지는 동경유학까지 하였으나 불행하게도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어려운 가정을 꾸리던 어머니마저도 일찍 돌아가시자 고아 가장이 된 것이다. 유일한 남동생을 친척 집에 맡겨두고 작별하는 길이니 차마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누나의 표정은 달궈진 용광로의 무쇠보다 강렬했다. 아직 철부지인 어린 동생은 누나를 어떻게 위로할 줄을 몰랐다. 심포에서 하루에 고작 한두 번 왕래하는 버스에 몸들 싣고 홀로 김제역으로 갔다. 이것이 누나와 마지막이다. 누나는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고립무원의 서울로 떠났다. 얼마나 막막하고 무서웠을까? 서울에 도착하여 얼마나 길을 헤매었을까? 밥은 제대로 먹었을까? 그러나 떠나는 누나를 보고 누구 하나 붙잡아 주지 않았다. 이렇게 서울로 떠난 누나는 한동안 소식이 없었다. 전화도 귀한 시절이니 더욱 그랬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어떻게 공부를 했는지 간호장교가 되었다는 기쁜 소식이 들렸다. 그 소식을 듣고는 예쁘장한 얼굴에 영리한 누나가 장교복을 입고 서있을 모습을 상상하며 기어코 성공했구나!하고 뛸 듯이 기뻤다. 그동안 서울 생활의 자세한 사연은 듣지 못했지만 누나의 굳은 의지로 보아 간호장교 생활도 충실히 하였을 것이다. 누나는 장교 시절 약대를 졸업한 군인과 만나 몇 년의 열애 끝에 혼인하는 데 성공을 했다. 결혼식은 친척에게 알리지 않아 아무도 참석하지 못했다. 청년 매형은 부유한 집안이었으며 결혼 후 서울에서 약국을 개업했다. 당시 약국이 별로 없던 시절이어서 날로 번창했다. 그러자 누나는 장교를 그만두고 약국에서 함께 일을 하며 아기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누나의 유일한 남동생이 물어물어 매형을 찾았는데 그때 누나는 머리가 아프다는 말을 하였단다. 이후 또 다시 오랫동안 소식이 두절 되었다가 다시 찾았을 때 누나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누나는 그렇게도 그리운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했다. 떠날 때 다시 오지 않겠다는 말이 현실이 된 것이다. 그 후 동생은 조카를 보고 싶어 찾았으나 먼발치에서만 바라보았다고 했다. 재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매형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은 게다. 동생도 중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서울로 떠났다. 산꼭대기 허름한 방에서 살며 기술을 익혀 모진 고난을 극복하고 돈을 모았다. 지금은 강남에 터를 잡고 남부럽지 않게 잘살며 노후를 보내고 있다. 이제 수십 년이 흘러 조카들도 중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생은 조카에게 어머니의 불행했던 과거를 상기시켜주지 않으려고 한 번도 찾지 않았단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면서 누나의 유일한 피붙이를 그리기만 하는 심정, 이것이 드라마일까? 나에게는 사촌이지만 누나의 과거를 찾아 그가 살던 옛집을 찾으니 눈시울이 붉어진다. △송일섭 씨는 전주평화초등학교에서 퇴직했다. <대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현재 전북수필문학회와 전북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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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0.17 17:40

지켜보고 판단하고 선택해야 - 추인환

추인환 자신을 바꾸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한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자신을 바꾸는 것은 더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나이든 사람들을 가리켜 꼰대라고 한다. 요즘 우리 사회가 그렇다. 바꾸자고 해도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속내가 뻔 한 데도 이들은 그 속내를 드러내놓고 노골적으로 본인들의 속내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 도대체 이들은 무엇을 위함인가? 국가를 위함인가? 국민을 위함인가? 아니면 정당을 위함인가? 아리송할 뿐이다. 대한민국의 개국 이래 모순된 정치권력과 제도에 대하여 많은 민초들이 피와 땀을 흘려 민주화를 했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다만 방식에 있어 민초들이 했던 민주화를 정부가 한다고 나서고 있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지난 정권에서 그저 공염불에 끝난 일들이 많다. 그 공염불을 실현하고자 현 정부가 팔을 걷어붙였다. 그저 민초들은 고마운 일이다. 무엇이든 정부가 민초들을 위해 바꾸자고 한다면 환영할 일이다. 그 동안 못해본 일을 해보자는 것이다. 입법, 행정, 사법, 교육 등과 부동산, 통일 정책 등 현 정부가 출범해 하고자 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우리는 지켜봐야 한다. 현 정부가 단행하는 것들 모두 잘 한다는 것은 아니다. 국민의 다수가 뽑아놓은 국민의 대표가 국민을 위해 그 뜻을 다하려 한다면 지켜봐야 한다. 지금 정부는 최선을 다 한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그 결과물도 나오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춧가루를 뿌려가면서 훼방을 놓는다면 나중에 훼방꾼들이 책임을 짓겠다는 것인지 묻고 싶다. 결과도 나오지 않은 과정 중에서 훼방꾼들 때문에 아무 일 못했다고 한다면 그 들은 무엇이라 답을 할 것인가? 그 피해는 오로지 민초들의 몫이다. 실컷 훼방 해놓고 아니면 그만이라는 것인가? 아니면 말고는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고 그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으려고 할 때 쓰는 말이다. 무슨 노림수를 던져 놓고 문제가 꼬이면 아니면 말고라며 고개를 더 쳐든다. 좀 비열하다. 한번 지켜봐야 한다. 우리는 일단 잘하는지 못하는지 지켜보고 그 다음에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선택해야 한다. 지금까지 이러한 과정들을 많이 지켜보지 않았는가? 차분히 지켜보면서 현 정부의 의지가 우리에게 어떤 삶의 질을 얼마나 향상시켜 주는지 봐야 한다. 요즘 혼란스러운 정국을 보면서 답답한 마음이 많다. 그 동안 과거의 집권당들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얼마나 일했는지? 나는 현 정부에 대하여 기대하고 싶다. 그리고 기다리고 싶다. 우리의 염원인 통일에 한 발자국 더 가는 것과 모든 권력과 제도가 새롭게 조금이라도 민초들을 위해 바뀌어 가는 것을 지켜보고 싶다. 우리의 후손과 그들을 위해 만들어 가자는데 동의하고 싶다. 우리는 꼰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주장을 악용해서는 더욱 안 된다. 우리는 지켜보고 그리고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내가 선택해야 하는 경우에는 내가 신중을 기해 선택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선택으로 나의 상황이 바뀌는 경우도 많이 있다. 특히 국가나 사회의 지도자들의 선택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선 그들의 선택을 부화뇌동하지 말고 잘 지켜보고 판단하자는 말이다. * 추인환은 <개불알풀꽃>과 <섬> 2권의 시집을 통해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들추고 민주주의를 주창했다. 현재 전주 한옥마을에서 숙박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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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0.10 15:15

[금요수필] 나의 골동품

구연식 나는 대학시절 고학생이었다. 하숙집 주인댁 자녀들 가정교사를 하면서 숙식을 해결했고, 가끔 주는 용돈은 금 쪽같이 아끼며 모았다. 아무리 모아도 학비는 턱없고 겨우 교재 사는데 조금 보탤 정도의 병아리 눈물만 한 돈이었다. 이렇게 적은 돈이었지만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사용처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고향 집에 갈 때 아버지의 담배를 사다 드리는 일이다. 봉초 담배만 피우시다가 궐련을 받고 웃으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기쁨과 뿌듯함을 어찌 글로 표현할 수가 있으랴. 한번은 집에 갔다가 집에 시계가 없던 탓으로 기차를 놓쳐 낭패 본 일이 있었다. 부모님은 대략 배꼽시계로 때를 맞췄다. 그래서 차라도 한번 타려면 너무 일찍 서둘러 오기 때문에 아주 오래 기다리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지금의 황사나 미세먼지보다 더 독한 길 먼지를 온통 뒤집어쓰시면서 오던 어느 날 익산역 부근에 있는 시계포를 지나다가 괘종시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얼마 동안이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꽤 오래 모은 용돈으로 그 시계를 사다가 부모님께 안방에 선물로 걸어드렸다. 그간 눈에 띄게 줄거나 건너뛰기 일쑤인 담배 선물에 아닌척하면서도 많이 서운하셨던 아버지가 우리도 부자가 되었다며 아주 좋아하셨다. 그런데 괘종시계는 한 달에 두세 번 태엽을 감아주어야 한다. 그 시계 밥 주는 일은 아버지 몫이었다. 어쩌다 밥 주는 때를 놓치면 시계는 허기져서 추의 진자 움직임을 멈췄다. 아버지는 시계 밥줄 때가 넘었다 싶으면 무슨 큰일이나 난 것처럼 하시던 농사일도 멈추고 집으로 달렸다. 그렇게 밥을 얻어먹은 시계는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났다. 그동안 괘종시계는 죽다 살기를 반복하면서 나 대신 안방에서 50년 이상 부모님을 모시고 담배 연기와 된장찌개 냄새에 찌들며 세월을 보냈다. 어느 때는 텅 빈 집을 혼자서, 어느 때는 동짓달 기나긴 밤을 옷가지 하나 걸치지 않고 추위에 떨면서도 집과 부모님을 지켰던 효자(?)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 시골집은 비어 있어 어쩌다 한 번씩 가서 부모님이 생전에 쓰시던 작은 농기구나 가구를 볼 때마다 마음이 울컥했다. 어머니 아버지가 쓰시던 살림 도구들은 나의 콧날을 시큰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중에 몇 가지는 아파트로 옮겨 놓고 가끔 먼지를 닦아주며 부모님 생각에 한참동안 멍청하게 앉아있기도 하며 애지중지 관리한다. 괘종시계는 대학 시절 반드시 성공하고 말겠다는 나의 다짐이며 초심이었다. 부모님께는 멀리 객지에서 공부 중인 큰아들 대신 지키는 초병이며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그 시계가 시골집 안방에서 내 아파트 거실로 옮겨졌다. 신기하게도 시계는 지금도 잘 움직인다. 몇 백 년 세월 값을 하며 보관 가치가 큰 유물만 골동품은 아니지만 나와 직접적인 관계와 역사성이 있고 나름의 상징성이 깃들어있는 물건이 더 귀한 골동품이 아닐까. 나는 손자가 할아버지 할머니 손때가 묻은 물건을 잘 관리하고 보존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집에 올 때마다 은근히 세뇌 시킨다. 율아. 네가 다 커서 어른이 되면 할아버지 것 모두 너 줄 거야. 이 괘종시계도 네 것이니까 잘 보존해야 해. 그 덕인지 괘종시계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밥도 제가 준다며 아직 다 풀어지지도 않은 태엽을 감아준다. 저 괘종시계가 나의 골동품이 아니라 손자의 골동품으로, 손자의 손자에 이르기까지 보존됐으면 좋겠다. 먼 훗날 진품명품 프로에 밥만 주면 살아서 열심히 움직이는 괘종시계가 출품되는 꿈을 꿔본다. * 구연식은 무궁화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교육자로 <수필시대>를 통해 등단했으며 현재 신아문예와 전북수필문학회 이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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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0.03 16:43

[금요수필] 곁을 주지 않는 독도

윤철 북위 37도 14분 22초, 동경 131도 52분 08초. 울릉도에서 동남쪽으로 87.4㎞ 떨어져 있는 외로운 섬,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아침을 맞이하는 섬, 삼국시대부터 우리 땅이었던 독도는 그곳에 있다. 마침내 독도가 눈에 보이더니 점점 또렷이 다가왔다. 출발할 때부터 흐렸던 날씨가 기어코 비를 뿌렸다. 다행이 세찬 비는 아니라 다행이었지만 바람은 갈수록 심해졌다. 뱃길이 얼마나 험한지 매끄러운 물길이 아니라 돌 튀는 소리가 요란한 자갈길이었다. 평소 같으면 울릉도에서 한 시간 반의 뱃길을 무려 세 시간에 걸쳐왔다. 승객 여러 명이 바닥에 드러누워 멀미를 하고 있었다. 구토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도 누구 하나 탓하는 사람이 없다. 일행 중 K는 계단 벽에 기대앉아 만사가 귀찮은 모습으로 연신 식은땀만 훔쳐내고 있었다. 나는 다음에야 어찌 됐건 멀미는 피하고 보자는 마음으로 멀미약을 두 병이나 마신 덕분인지 신기하게도 배 멀미를 하지 않았다. 선장이 선내 방송을 했다. 최대한 접안을 해보겠지만 만약 안 되면 독도 주변만 한 바퀴 돌 아 오는 관광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어떻게 온 길인데. 이렇게 허무한 일이 또 있을까? 접안을 시도 중인지 배가 좌우로 더 심하게 흔들렸다. 독도는 눈앞에서 흔들거리고, 하늘을 찌르던 기대는 실망에서 포기로 이어질 무렵 선장이 접안을 했다 다시 안내방송을 했다. 독도는 187,554㎡ 면적에 불과한 작은 돌섬으로 사람이 살기 어려운 환경이다. 그런데 왜 일본은 이렇게 작은 섬에 집착할까? 독도는 해양 자원과 미래의 해저 자원이 풍부한 보물창고 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욕심나서 1905년에 시마네현 고시로 대나무 한그루 없는 돌섬에 다께시마竹島라는 이름을 붙여서 자기네 국토에 편입시켰다. 처음엔 해저 자원에 대한 욕심뿐이었겠지만 이제는 군국주의 식민통치시대의 야욕을 재현해보고 싶어 자기네 땅이라 우기고 있다. 나는 국정농단사태 때 가을부터 겨우내 벌였던 촛불집회에 어깨가 아프다는 핑계로 한 번도 참석하지 못한 부끄러움이 지금도 남아있다. 그런데 이번 일본의 경제침략에 맞서 일본산 불매운동에는 모든 것을 작파하고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그러면서 잠시 돌아보니 정연한 논리도 없이 단지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큰소리만 치고 있는 내가 보였다. 그래서 무조건 독도를 다녀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참여한 것이다. 드디어 독도에 첫발을 내디뎠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독도가 막상 눈앞에서 나를 기다리며 두 팔을 벌리고 품을 열어주니 가슴이 쿵쿵거리며 콧날이 찡해졌다. 온몸이 고압 전류가 흐르듯 짜르르하며 나도 모르게 눈물을 훔쳤다. 바다까지 잿빛 하늘이 온통 회색으로 물들인 탓인지 하늘도, 바다도, 섬도 모두 재색이다. 저물녘의 독도는 잿빛이라서 더 독도다웠다. 독도는 아무에게나 곁을 주지 않는 위엄이 있다. 우리 국민이라도 독도를 사랑하고 아끼며 지키려는 사람에게만 품을 내어준다. 하물며 독도를 사랑해서가 아니고 이용만 하려는 욕심쟁이 일본인에게 곁을 내주겠는가. 일본사람은 여권 없어서 올 수 없는 곳에 나는 달랑 배표 한 장 들고 얼마든지 올 수 있으니 독도는 우리가 실제 지배하고 있는 우리 땅이 분명하다. 비에 젖은 독도에서 따스한 입김이 피어오른다. 독도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독도에 뿌려진 의용수비대의 뜨거운 피가 골마다 스며들어 아직도 식지 않고 흐르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 땅을 한 치라도 내어주기 보다는 차라리 죽자.고 죽음으로 사수한 그들의 절규가 오늘도 살아서 심장을 쿵쿵거리는 소리를 듣고 돌아오는 길은 뱃길도 편안했다. * 윤철 수필가는 김제 출생으로 진안군 부군수를 역임하는 등 36년의 공무원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수필전문지 에세이스트로 등단하여 현재 수필가로서 전북수필문학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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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9.26 16:52

[금요수필] 대중가요는 시대의 거울

안도 대중가요는 그 시대의 거울이다. 일제강점기 대중가요는 민족의 애환을 담았으며, 식민지와 근대화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던 국민들에게 위로의 역할과 욕망을 분출했다. 1950년대는 어지러운 시대현실을 잊으려 했기에 대중들은 미지의 세계와 대중문화를 동경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제 대중가요가 그 시대의 거울이라는 말은 상식이 됐다. 노래들을 통해 시대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과거에는 학문의 대상으로 거론조차 꺼렸던 대중음악이 이제는 학문의 대상이 되어 연구 성과도 꽤 쌓였다. 그만큼 대중가요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지고 있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젖는 뱃사공...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듯 아픔에 겨워를 부르며 가슴을 쓸어내리던 우리는 갑자기 한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를 부르며 흥겨움을 알았고 음악의 즐거움을 알았다. 비틀즈가 서양 팝 역사의 분기점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전 세계 음악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우리 한국에도 신중현과 같은 싱어송 라이터가 있었다. 신중현은 기타 한 대 들고 음악무대를 누볐다. 6.25로 전쟁터가 된 한반도에 살며 불행한 청춘을 보내야 했던 한국 젊은이들이 서양의 대중문화를 좀 더 가까이서 접할 수 있는 계기를 주었다. 너무도 직설적인, 민망할 정도로 주관적이고 원초적인 단순한 가사와 그 가사만큼이나 쉽고 단순한 멜로디였다. 그러면서도 강렬한 연주와 악곡에 실려 한 귀에 들려왔다. 복잡하지 않아 속임의 여지란 전혀 없이 담백하고 간결했다. 그렇기에 더욱 폭발적인 존재감을 통해서 한국 락(rock)음악 사상 최초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며 널리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군사정권은 대마초 가수라는 죄목을 씌어 무더기로 구속시켰다. 그래서 그 사단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통기타, 청바지 문화로 상징되는 청년문화가 발아기에 정치적 탄압으로 신중현 음악은 발이 묶이고 손이 잘려서 한국대중음악의 발전은 후퇴와 함께 사라졌다. 그러다가 20C 말 10대들의 우상 서태지와 아이들이 돌연히 나타난다. 지금까지 사회가 젊은이를 대하는 방식은 엄격한 규율과 체벌, 무조건적 강요 등 물리적 폭력이 주를 이루었다. 또한 사회는 이를 당연시 하고 용인이 되었다. 한국사회도 후기산업사회로 진입함과 동시에 비정규직, 저임금과 노동력 착취가 만연 되었다. 또 대학을 가려면 내신 등급이 옭아맸다. <난 알아요 이밤이/흐르고 흐르면/누군가가 나를 떠나/버려야 한다는 그 사실을 그 이유를/이제는 나도 알 수가/알 수가 있어요> 이런 시기의 아이들이 서태지 노래를 들으면 마냥 흥겹고 신이 났고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싹 씻기는 것 같았다. 그런데 우리는 단순히 서태지 노래가 흥겹고 신나서라는 도식적인 수준을 넘어 기성세대들에게 거부감을 주었기에 청소년들이 열광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서태지는 당시 국내에선 몹시 생소하던 힙합이란 장르를 자신의 코드에 맞게 변형시킴과 동시에 랩을 접목시키는 파격행위를 공연무대에 끌어올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내가왔어 슈퍼스타! 난 뜰 거야. 모두들 날 부러워 할 거야! 난 뜰 거야. 슈퍼스타 ...> <니 멋대로 살어. 어차피 니 꺼야. 애 쓰지 말어 져도 괜찮아> 앞의 노래는 요즘 홍대거리 인디밴드에서 실의에 빠진 젊은이들을 위한 노래 가사다. 그리고 뒤의 노래는 요즘 잘나가는 빙탄소년단의 불타오르네다. 10대들이 느끼는 삶, 사랑, 사회의 강요와 부조리들을 꽤 치열하게 살아온 그들의 시각과 에너지로 표현하고 있다. 현대의 문화는 관(官)이 주도할 수 없다. 건전가요를 위해 건강한 대중 사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 안도 시인은 1984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해 전북문인협회 회장과, 전북예총 수석부회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전라북도국어진흥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으며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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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9.19 16:36

[금요수필] 몽골 나담축제

백봉기 10일간의 일정으로 몽골여행을 떠났다. 고비사막과 주변을 둘러보는 일정은 오지체험이라고 할 정도로 힘든 여행이었다. 승합차로 5~6시간 비포장도로를 달려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으니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도정(道程)이었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영토 세상에 이런 땅이 있다니! 말문이 닫치지 않을 정도로 감탄사가 나왔다. 가끔씩 만날 수 있는 것은 양과 염소와 낙타, 소떼들뿐, 나무 한 그루 없는 척박한 땅에서 오직 가축만 바라보고 사는 유목민들의 삶이 기이했다. 여행 6일째, 뜻밖에 여행 일정에도 없는 나담축제를 보게 되었다. 이 축제는 몽골독립기념일인 7월 11일을 전후해서 2~3일간 열리는 행사로,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국가적인 축제가 성대하게 열린다고 한다. 그리고 지방에서도 중앙정부와 마찬가지로 활쏘기, 말달리기, 씨름경기 등으로 온 국민이 즐기는 행사였다. 우리가 참관하게 된 나담은 고비사막 최대의 도시 달란자드가드라는 지방에서 열린 축제였다. 종합운동장에서 열린 개막식에는 1만 5천여 명의 인구가운데 적게 잡아도 절반 이상은 모인 듯했다. 초등학생과 중고등학생들의 마스게임과 성인들의 민속공연, 특유의 복장을 한 무당들 그리고 말과 낙타를 탄 유목민들의 행렬까지 이어져 볼거리가 많았다. 운동장 스탠드에는 전통옷을 입은 주민들이 가족단위로 나와 객석을 가득 메웠다. 운동장 밖에서도 먹거리와 특산품 판매, 민속놀이 등 장터가 열려 눈길을 끌었다. 우리일행은 어느 광산기업에서 운영하는 몽골의 전통가옥 게르에 초청되어 몽골 전통음식으로 후한 대접을 받고 다른 일정 때문에 아쉬움을 남긴 채 축제장을 나오면서 생각했다. 우리나라 축제는 지방자치단체의 실적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전락한지 오래다. 그런데 다남 축제는 지역민이 주인이 되어 직접 참여하는 행사로 할머니도 화장을 하고, 할아버지도 부축을 받으며 주민 모두가 장롱 속에 깊이 간직했던 옷을 챙겨 입고 나와서 같이 즐기며 서로 화합하는 축제의 장이었다. 거기에다 어린이들도 말달리기에 참여하고, 여인들이 활쏘기에 출전하고, 남자라면 꼭 한번 도전하고 싶은 씨름경기 등의 전통을 이어가는 축제였다. 그래서 외국인들도 이 기간에 맞춰 민속여행을 즐기는 축제였다. 우리나라도 축제의 계절이 왔다. 전북만 하더라도 50여개의 축제가 있는데 대표적인 전주세계소리축제를 비롯하여 완주와일드푸드, 김제지평선, 고창모양성제 등 다양한 축제들이 열린다. 특히 본격적인 지방자치단체가 시작되면서 지역축제는 우후죽순처럼 번지기 시작해 현재 1,000개가 넘는 축제가 열리고 있다. 그런데 축제란 어떤 공동체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사건이나 시기를 기념하여 의식을 행하는 행위를 말한다. 거기에는 반드시 결속력이 필요하고, 지역민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발생하여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계승하고, 지역민의 단결과 자긍심, 지역 경제의 활성화에 이바지해야 한다. 하지만 요즘 축제는 자생적인 부분보다 정치적이고 지역 이기적인 측면에서 기획되고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지역 특산물의 판로를 찾기 위한 행사로 오히려 예산만 낭비하는 경우가 있어서 비슷한 축제는 통합시켜야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축제는 명분보다 질이 중요한 문제다. 어디를 가도 똑같고 매년 변함이 없는 식상한 축제는 과감히 도태시켜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콘텐츠개발로 차별화된 축제를 하자는 말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올해는 몽골 나담축제 같은 축제를 꼭 한 번 만나고 싶다. * 백봉기 수필가는 2010년 <한국산문>으로 등단하여 수필집 여자가 밥을 살 때까지 탁류의 혼을 불러 팔짱녀 해도 되나요를 발간했다. 현재는 온글문학회장과 전북예총 사무처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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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9.05 17:18

[금요수필] 낙서(落書)는 최고의 예술

윤춘흥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은 삼척동자도 잘 안다. 유년시절의 버릇이 노년까지 간다는 말이다. 유년시절은 어린이가 성장 발달하는 과정의 하나로 유치원과 초등학교 저학년쯤의 시기다. 이러한 유년기의 보고 들은 것을 시작으로 아동, 청소년기에 삶의 습관과 인격의 초석을 놓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버릇이든 나쁜 버릇이든 유년시절 부터 자기 나름의 특유한 행동을 하기 마련인데 성공한 사람들의 상당수는 이시기에 자기가 좋아하는 기능을 습득하거나 관심을 갖고 노력한 결과 화려한 인생을 누리는 경우가 많다. 그 예화로 미국 링컨 대통령은 어린 시절 위인들의 필체를 그대로 옮겨 쓰는 연습을 한 덕분에 역대 대통령 중 가장 훌륭한 필체였다고 한다. 나 역시 초등학교 시절 버릇 중 하나가 종이에 마구 글씨를 쓰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했는지 몰랐으나 차차 쓰던 글씨에 호기심을 갖게 되고 재밋거리가 되었다. 글자를 예쁘게 쓰고 나만의 글씨를 잘 써보려고 애타기도 하고 글자의 자형을 여러모로 만들어 보았다. 그리고 다양화를 위해 한밤중까지 열성을 부렸던 날이 수다히 많았던 추억이 있다. 내가 좋아했던 낙서란 연필을 가지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니고 바른 글씨 모양을 만들기 위해 종이나 노트에 닥치는 대로 자유분방하게 글씨를 썼던 일을 말한다. 연필 잡는 집필법은 사람에 따라 다르며 쓰는 방법도 차별성이 있다. 그러나 대체로 연필의 위치가 약 45도 각도에서 남동쪽으로 기울어져 쓰는 것이 일반적 상식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르게 나만의 방법을 궁리해서 색다른 모색을 해보았다. 연필을 세우는 각도와 위치가 방향에 따라 글씨체가 달라지는 것을 발견하고 나름대로 고심해 보았던 과정이다. 이런 과정 때문에 글씨는 용필과 운필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유년시절 낙서를 통해서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도 계속 여러 글씨 자형을 구사하고 있는 것은 어릴 적 낙서 습관에서 온 선물이다. 하지만 이는 나의 낙서 방법과 집필법을 소개했을 따름이지 표준화된 것이 아님을 전제하고 싶다. 그러다 나는 어느 날 문득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위대한 낙서 (The Great Graffiti)>전을 통해서 전통적 서예, 동, 서양의 서예와 회화, 글자와 그림의 경계를 넘어 세계로 나아갈 길을 제시하며 낙서는 최고의 예술이다는 격언이 가슴에 와 닿게 되었다. 이 한마디 격언은 내 인생의 좌우명이 되었고 낙서에 더욱 열중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지금은 연필대신 만연필로 서예의 골서 방법을 연구하며 성경 필사(筆寫)에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만년필 서예도 연필과 마찬가지로 예술적인 글씨를 제대로 쓰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있는 실정이다. 종심(從心)의 나이가 되기까지 서예를 하게 된 것도 유년시절의 낙서 습관에서 동기유발이 되었고 삶의 목표의식과 자신감도 갖게 하였다. 그동안 서예를 한지도 수십 년이 되어 습관처럼 붓과 만년필을 잡고 있지만 아직도 심층 연습해야 할 것은 이들의 용도 활용과 집필법이다. 하지만 더욱 난해하고 무한한 연구가 요구되는 학문이다. 그러나 어릴 적 습관이 서예에 관심과 흥미를 갖게 하고 삶의 평생 동반자가 된 것에 감사하며 유년시절 즐겨 쓴 글귀, 낙서는 최고의 예술이다. 밤잠 설치던 그때를 불현듯 회상하는 것도 은혜라는 말을 되새기며 여생을 즐기려한다. * 윤춘흥은 오랜 교직생활 후 퇴직했지만 꾸준한 서예 작품을 통해 전라북도 미술대전 운영위원, 심사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전라북도 미술대전 서예분과 초대작가회 회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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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8.29 17:23

[금요수필] 만경강 풍경화

최정호 어쩌다 강둑을 거닐 때나 버스를 타고 지나칠 때 만경강을 쳐다본다. 나 어릴 때만 하더라도 요즈음 같은 복더위 때는 물 반, 사람 반일 정도로 만경강은 더위를 씻어주는 요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물놀이를 하는 사람을 구경할 수가 없다. 강물이 깊어 위험한 것도 아닌데 아예 사람조차 접근 할 수 없는 환경이 되어 강으로서 매력을 잃은 것이다. 무성한 잡초와 한 길이 넘는 갈대밭과 억새풀이 올망졸망 고여 있는 물웅덩이를 감싸고 있어서 강이라고 부르기엔 부끄럽고 늪이라 부르기엔 어색하다. 어쩌다 불법 낚시꾼이 여러 개의 낚싯대를 늘어뜨리고 강태공이나 된 것처럼 세월을 낚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크고 작은 물오리 몇 마리가 물웅덩이 주인이 되었고 가끔씩 해오라기가 큰 날개를 펴고 순찰을 돌아주는 게 고작이다. 그나마 곳곳에 낮은 물막이 보들을 조성하여 흐르는 물을 가두어 놓아서 강이라는 체면을 살려주는데 강바닥 높은 곳이나 둔치는 무성한 풀들이 점령하고 있다. 그래도 가끔은 야생오리나 들새들이 마음 놓고 보금자리를 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으로 지나다 보면 운 좋게 고라니나 꿩을 볼 수도 있어 눈이 번쩍 띄며 마음이 포근해진다. 다리가 없던 예전엔 강한 빗줄기가 반나절만 내려도 강물이 범람하여 강 건너 사람들은 서둘러서 얕은 여울목으로 건너야 했다. 그리고 초등학교 시절 발이 묶일까 봐 서둘러 귀가를 시켜주면 나는 집에는 가지 않고 물 구경을 했다. 그러다가 강물이 불어나면 수영에 자신이 있던 나는 겁내지 않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면 물이 배꼽위에 오르고 두 발이 강바닥에서 뜨게 되면서 몸이 떠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래도 당황하지 않고 물살의 흐름에 몸을 맡기며 조금씩 둔치 쪽으로 방향을 바꾸며 헤엄을 쳐서 어렵지 않게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이렇게 여름철엔 여러 차례 홍수가 강변을 휩쓸어 갔고 일 년 내내 푸른 물이 굽이쳐 흐르고 있어서 잡초가 강바닥에 자랄 수 없었다. 하지만 홍수가 자갈과 모래를 실어오니 드넓은 보석 같은 자갈밭, 설원 같은 모래밭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렇게 옛 모습이 사라졌을까? 생각해 보니 홍수를 예방하고 토지를 이용하려고 제방을 쌓은 탓이고 아파트와 도로를 건설하려고 모래와 자갈을 마음 놓고 쓸어갔기 때문이었다. 예전 같은 민둥산이 아니라 나무가 울창한 산과 우거진 숲의 들녘이 감질나게 내리는 비는 모두 흡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수 십 년 동안 장마다운 장마, 비다운 비, 눈다운 눈이 제대로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전국에 큰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어도 웬일인지 우리 고장은 일기 예보와는 무관하게 해맑은 날들이다. 그러니 평소에 만수 된 대아저수지를 본 적이 없고 밑바닥을 드러내고 있으니 웬만한 비쯤이야 메마른 산과 들이 갈증 풀기도 아쉬웠다. 초여름부터 이른 가을까지 뛰어들어 물장구치고 헤엄치던 만경강. 나도 모르게 목구멍으로 물이 넘어가도 컥컥댔지만 샘물처럼 생각했고, 다슬기나 새우를 잡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만경강이지만, 희미하게 사하라가 생각난다. * 최정호 수필가는 완주 출생으로 <수필문학>으로 등단했으며, 같은 해 월간 <문학세계> 시 부문에 등단했다. 시집 <노을 꽃>, <언덕에 오르면>과 수필집 <외딴 오두막>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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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8.22 16:55

커피 한 잔의 행복 - 김경희

▲ 김경희 수필가 한 잔의 커피를 맛있게 얻어 마셨다. 커피를 가져다준 임 화백은 얼굴 가득 웃음꽃을 피우며 종이컵 안 커피를 내게 내밀었다. 아침 시간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던 나는 일어서서 그 잔 커피를 두 손으로 받았다. 이어서 한 모금 가볍게 마시고 말했다. 절집에서 새우젓을 맛보고, 용궁 가서 토끼 간을 먹어보는 격이라고. 왜냐 하면 아침 일찍 나와서 하루 몸을 운행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자동차 예열받게 하듯 하고, 연료 점검하듯 자기 몸을 습관대로 움직여 보는 곳이 체육관이다. 그것도 남녀가 함께. 나는 평소 낯가림이 있어 수인사를 트기 전, 먼저 다가가는 친교성이 부족하다. 그럼으로 곱지 않은 시선으로 나를 보는 사람은 낙태한 고양이 상이라고 한다 해도 따질 것이 못된다. 그런데 오늘 운동하면서 가벼운 눈길로 보니 임 화백께서 자기 보온병에 온수를 채워 문 밖 복도로 걸어 나간다. 곧바로 여자 손님이 뒤따른다. 이어 몇 분이 더 나간다. 슬며시 다가가 보니 그분들은 가끔 그곳에서 커피타임을 즐겨온 것 같았다. 커피를 마시고 돌아오는 임 화백께 모른 체 하고 혼자만 드시고 오시느냐고 농담 같은 말을 했다. 화백께서는 말없이 돌아가서 서둘러 제조해 가져다 준 것이 내가 마신 커피였다. 내가 마신 그 커피가 내 목 안 위장으로 잠입하기까지에는 컵을 준비한 분, 봉지커피를 잘라서 적당량을 따르고 물 붓고 저었을 손길과 눈길 그리고 함께 묵언으로 동의한 마음의 이웃이 있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조금 보태서 그렇듯 유머로 새우젓과 토끼 간을 들먹여 웃고자 하였다. 커피는 세계 시장에서 원유 다음으로 가장 큰 교역량을 차지하고 있다. 쌀과 밀보다 더 큰 산업이 바로 커피산업이다. 커피의 대중화에 기여한 것은 바로 인스턴트커피라고 한다. 인스턴트커피는 1초에 1만 컵 이상이 소비된다고 추산할 정도이며, 20세기 음식분야에서 가장 혁신적인 발명이라고 한다. 커피 맛에 길들여져 있는 미군들은 따뜻한 물만 있으면 진하게 농축된 커피를 언제 어디서든지 마실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인스턴트커피를 환영한다고 한다. 나 개인적으로는 속이 불편해 향기와 맛과 색깔이 있어 정신을 다스리는 차(茶)를 선호한 편이다. 커피며 짜고 매운 음식은 피해왔다. 차나 술이나 기호 식품이다. 그리하여 누구와 어디서 무슨 마음으로 먹고 마시는가에 의미를 두며 겸손한 지출도 염두에 둔다. 고인이 된 이병철 씨는 그가 젊디젊은 시절부터 원두커피를 즐겨 마시고 항시 정장차림이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그는 나 같은 시골 태생보다는 50-60년 전부터 모닝커피가 주는 행복을 누렸다고 볼 수 있다. 임 화백께서 가져다준 체육관 커피를 마시고 보니 와인을 한 잔 마신 듯 행복한 취기가 가슴 위로 오르는 것 같았다. 그 기분으로 운동을 마치고 자동차로 덕진연못과 대학로 길을 달리니 비 갠 뒤, 숲 속 아스팔트길은 유난히 정갈하고 개운해 보였다. 차 안 라디오에서는 나훈아의 머나 먼 고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김경희 수필가는 1985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수필집으로는 <도공과 작가> <사람과 수필이야기>외 몇 권이 있으며, 국제펜클럽 전북위원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덕진복지관에서 수필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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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8.15 15:45

[금요수필] 가슴 철렁한 단어 ‘헬조선’

이종희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처음에는 돕다는 뜻의 help와 우리나라를 뜻하는 조선의 합성어인 줄 알았다. 그런데 께름칙해서 검색을 해보니 젊은이들이 한국을 자조自嘲하며 일컫는 말이었다. 즉 헬조선이란 삼포세대, N포세대 등으로 대변되는 청년층이 지옥(Hell)과 조선(朝鮮)을 합성한 신조어로 말 그대로 지옥 같은 대한민국이란 뜻이다. 삼천리금수강산 한국이 어느새 지옥 같은 한국이 되었으니 말만 들어도 청년층들의 현실에 대한 불안과 절망, 분노가 드러나 기성세대로써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60년대 국가경제가 어려웠던 시절,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경지정리 현장에 삽자루를 들고 나갔고, 건설현장에 나가 막일이라도 하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또, 모내기를 끝낸 후 일거리가 적은 시기에는 건어물 상회에서 미역, 다시마 등을 떼어 한 짐 어깨에 메고 집집마다 팔러 다니기도 했다. 하루 고생해서 얻은 돈은 고작 몇 푼이었지만 배고픔에 허덕이는 가족을 생각하며 보람을 찾았다. 피 끓는 젊음을 일자리에서 끼니도 거르며 정열을 쏟았다. 그러면서 푼돈을 모아 목돈이 되면 셋방을 면할 수도 있었다. 삼포세대는 경제적 여건상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를 뜻하는 말이며, N포 세대도 주거, 결혼, 인간관계 등 인생의 많은 부분을 포기한 20~30대 청년 세대를 일컫는 신조어다. 보수가 열악한 비정규직이나 옥탑방, 고시원 같은 빈곤층을 가리키는 민달팽이 세대라는 말도 있다. 이 모두가 경제적, 사회적 압박으로 인해 불안정한 청년 세대를 총칭하는 말들이다. 얼마 전 지인의 자녀 결혼식장에 갔다. 혼주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고 신랑에게 부모님께 효자라는 격려와 함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랬더니 뜬금없다는 듯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잠시 후에 내 말을 이해했는지 허리를 굽혀 다시 웃으며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살기가 어렵다고 헬조선이라니, 언짢아진다. 일자리가 없다는 젊은이들이 곳곳에 펼쳐진 건설현장에 나가는 보았는가? 기껏 일자리를 찾는다는 것이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 정도였지, 땀 흘리는 일자리는 외국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 않던가. 근무하기 좋은 환경에서 보수는 많이 받고 싶지만, 그런 일자리가 아무나 받아줄 만큼 너그러운가. 처음 시작할 때는 어렵고 힘든 일을 하며 배우지만, 경력이 붙이고 실력을 키워 대우를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사회가 자동화 시스템으로 전환되는 추세여서 인력 수요가 점차 줄고 있는 건 사실이다. 기업에서도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면 좋겠지만, 이윤을 저울질 할 수밖에 없다. 국가에서도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장기적인 정책을 펴야 하는데 명쾌하지 못하니 청년들이 아우성이다. 생태계가 보존되려면, 생산자와 소비자의 균형이 이루어져야 하듯이, 일자리도 마찬가지다. 국가와 기업은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계획을 세워 젊은이들이 학교교육을 충실히 마치면 취직 걱정 없는 사회가 되도록 정책적인 연구와 실행이 필요한 시점이다. 나라의 기둥인 청년들에게 상실감을 회복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대한민국이 지옥 같다는 생각을 국민으로써 할 말은 아닌 듯싶다. 작지만 세계 여러 나라 중 상위그룹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여주는 산업이 한둘이던가. 전자, 자동차, 조선 등 첨단산업과 k-pop을 비롯한 한류산업, 그리고 스포츠에서도 세계인들을 놀라게 하지 않는가. 내가 살고 있는 나라가 지옥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우선일 것 같다. 한국이 지옥이라면 다른 나라는 천국이란 말인가? 천국과 지옥은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나를 위해 노력하는 자만이 천국을 얻을 수 있다. △이종희 수필가는 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직하고 대한문학에서 수필로 등단했다. 안골은빛수필 회장을 역임했으며 수필집 <임도 보고 뽕도 따고>, <초원을 찾은 나그네>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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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8.08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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