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승 서울평화상문화재단이사장
부친께서는 또 “사내대장부란 나물 뿌리를 씹어봐야 세상 물정을 안다 (咬得採根 百事可做)” “가난하고 천대받고 근심하고 슬퍼봐야 옥처럼 다듬어진다 (貧賤憂戚 玉余人)”라고 하시면서 “앞으로 이 민족의 장래는 너희들의 어깨에 달려있다. 이 민족을 이끌어갈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건강이 중요하며 건강을 유지하는 데에는 禁酒禁煙을 해야 한다”시며 몸소 금주금연을 하셨다.
그리고 가사를 맡고 있는 중부(仲父)에게는 미안했던지 “자네는 제갈의 동생이 되어 주게”라고 거듭 당부하셨다. 이 말은 제갈공명이 유비의 삼고초려를 받고 대륙의 통일을 위하여 고향을 떠날 때 뽕나무 3천그루의 상전을 바탕으로 농사와 잠업을 해서 가사를 이어가라고 한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이렇게 유가의 가풍 가득한 전주 고향집에서 의리와 지조, 민족애를 몸으로 익히며 자란 나는 지금까지도 부친의 말씀을 새겨 금주, 금연은 물론 XDR(X:Exercise D:Diet R:Rest)로 건강을 유지해오고 있다. 그 덕분에 지난 2002년 4월 14일 2002전주·군산국제마라톤대회에서 딸 이양희 교수(성균관대)는 풀코스를 완주했고, 80세인 나는 5Km를 완주했다.
전주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으나 일제는 황민화(皇民化) 정책을 통해 교명을 일본식인 전주북중학교로 바뀌었고, 조선어를 못 쓰게 하며 일본어 사용을 강요했다. 그러나 나는 일본어를 쓰지 않고 조선어만 사용함으로써 1937년 ‘가정근신’ 처벌을 받고 품행이‘丙’으로 평가되어 불온한 요시찰 학생으로 학교 당국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이후 민족적 우월감을 표출하며 조선인 학생들을 괴롭히는 일본인 학생들을 응징하였고, 특히 일본인 학교인 전주남중의 학생 거두를 자처하는 마쓰오다이사(松尾大佐)라는 학생을 목검으로 두들겨 패 정학처분을 당하면서 품행이 ‘丁’이 된 나는 ‘낙제’를 하고 말았다.
1935년부터 강요해온 신사참배도 불참하고, 1940년 창씨개명도 거부했다. 1942년 5학년 때에는‘조선인은 야만족이며 한글은 야만인의 부호 같다’며 우리 민족을 멸시하던 일본군 상이군인 출신인 저질 일본인 교사 노다(野田)가, 한 급우를 목검으로 내리치려 할 때 내가 뛰어나가 목검을 빼앗고 그를 바닥에 내동댕이 쳐버려 퇴학 직전까지 갔었다. 그러나 집단 자퇴를 결의하며 나를 지지해준 급우들과 담임 야마다 다이고로(山田 大五郞)선생과 정학모 선생의 도움으로 무기정학 처분을 받는데 그쳤다. 이는 졸업 직전에야 해제되었다.
이러한 사건 등등으로 나는 사상이 불온한 학생으로 낙인찍혀 일본 유학이나 관공립전문대학의 진학이 불가능했다. 부친과 仲父(李錫柱 제헌국회의원)는 “일본 유학이나 관공립학교에 진학하게 되면 사상이 나쁜 너는 평생 형무소 생활을 거듭하거나 불량배로 전락하기 쉽다. 그러니 우리 민족의 지도자, 우리 힘으로 세운 민족학교에 진학하라”고 권유하여 민족학교인 보성전문(고려대학교의 전신)에 입학하게 되었다.
내가 입학했던 1942년 普專에는, 민족진영의 金性洙 교장선생, 張德秀 학생감, 安浩相, 兪鎭午, 陳承綠, 孫晋泰 선생 등과 사회주의 진영의 尹行重, 朴克彩, 崔容達 선생 등이 계셨다. 이들은 항일운동에서는 대립이 없이 서로 합작하면서 후진 양성과 자주독립을 위해 애썼으나, 해방 후에는 각각 좌우익 진영의 지도자가 되어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 곳 普專은 ‘민족의 향기’가 풍기는 ‘젊은이의 고향’ 같은 곳이어서 나는 김성수 교장선생을 비롯한 민족진영의 훌륭한 애국지도자들로부터 교육을 받아 오늘날의 李哲承이 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고 생각한다.
<訂正> 1회 ‘선대의 가르침’편의 “선친이신 가석 李錫柱”는 “선친이신 가석 李錫圭”로 바로잡습니다. 訂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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