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40여 년간 목사로서 목회를 하는 가운데 각양각종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한지 1년도 다 못되어 세례 받으려고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10년 넘어도 세례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뿐만 아니라 전혀 변화가 없어 애 먹이는 신자도 있었다.
아주 오래 전 일이다. 전북대학교를 다니다가 폐결핵에 걸려 거의 죽게 된 젊은 사람이 교회에 왔다. 결혼하여 아이까지 있었지만, 교회 나온 후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40년 전 당시 약과 의술이 지금처럼 좋은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숱한 고생을 겪었고,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그는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물이 스펀지에 흡수 되듯이 진리를 곧장 받아들였다. 완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대로 믿었고, 구원의 확신 속에서 하늘의 소망을 품고 소천 되었다.
평소에는 복음을 비웃다가 진찰 결과 암 선고를 받고 생명의 절박성을 느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고 신앙을 가지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사람은 다급하지 않으면 해이해지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생명이 사활에 걸렸을 때에야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고 살길을 찾는 것을 보았다. 신앙은 곧 생명인 것이다.
또 하나의 경우도 있다. 기독교 신앙을 자기의 종교관 위에서 신앙생활 하려는 사람과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의 기초 위에서 기독교적인 믿음으로 굳게 선 사람들이 있다. 전자의 사람들은 초등학교 때 종교의 비전문가인 선생님의 종교 정의를 고정화시키는 경우이다. 모든 종교는 도달점이 산에 오르는 것 같아서 동에서 오르든, 서에서 혹은 남에서 오르든 정상에 오르는 것은 같은 지점이다. ‘나약한 인간이 신을 의지하고 도움을 받고자 정성을 드리는 것이다’ 라든가의 자기 종교사관에 묶여진 사람들은 기독교인이면서도 진리를 외면하고 사는 경우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구주” 라는 기독교 공식을 외면하고 인격적인 위대한 성현으로서의 예수, 수양의 대상으로 혹은 혁명가적인 예수로만 믿으려고 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신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이성적으로 납득되는 것만 믿으려고 한다. 신앙의 진수를 잃고 방황하는 이들의 결과는 좋지 않음을 많이 보아왔다. 정말로 안타까웠다.
나는 성경에 나오는 베드로를 좋아하는 편이다. 예수님의 진리를 그대로 받아 들였고 예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을 가장 정확하게 말한 분이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그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란(마태복음 16:16) 고백을 남겼다. 기독교 경전인 성경 기록 목적도 단 한가지이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20:31)
내 설교의 중심은 오직 이 진리를 핵심으로 두고 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의 신비도, 죽은 자를 살린 기적도, 예수님의 승천도, 예수님의 재림도, 천국의 존재까지도 이 공식을 적용하면 다 풀린다.
기독교 신앙의 진수와 핵심을 깨달아 구원을 얻고, 영생을 모두 선물로 받았으면 하는 간절함을 설교에 담으려고 노력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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