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년균(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중국의 돈황(敦煌)에 다녀왔다. 서역 남도(南道)로 가는 실크로드의 관문인 '양관(陽關)'이 있고, 서기 3세기부터 14세기까지 승려를 비롯하여 조각가, 화가, 도공, 석공들이 만들었다는 1천여 개에 이르는 굴과 불상과 벽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보관되었던 '막고굴(莫高窟)'이 있고, 서진시대(西晉時代, 265-317) 귀족들의 진기한 무덤이 있고, 모래들이 날아다니며 운다는 '명사산(鳴沙山)'이 있고, 세계에서 네번째로 큰 '고비사막'이 있는 그곳. 북경에서 비행기로 4시간 이상 걸리는 먼 곳이다.
한국문인협회가 '우리문학의 세계화'를 위해서 해마다 벌이는 '해외문학 심포지엄'과 모국어로 해외에서 창작활동을 하는 우수 문인을 뽑아 격려하는 '해외한국문학상'의 시상식 등을 갖기 위해, 많은 문인들과 함께 중국으로 해외나들이를 한 것이다.
돈황은 소문처럼 좋은 곳만은 아니었다. 며칠간 구경거리로는 괜찮을지 몰라도, 눌러앉아 살기엔 불편한 곳이었다. 그럴 것이, 1년에 강우량이 39밀리밖에 안되어 물이 금보다 귀하고, 밤낮의 일교차가 심하여 여름에도 감기 들기 십상이었다. 바람만 불면 모래들이 몰려서 날아다녀, 안경과 마스크를 써야 했다.
물론, 그곳에도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집과 마을과 도시가 있다. 길가에 나무와 꽃을 심어 경관을 아름답게 꾸미고, 논밭을 일구어 목화, 옥수수, 무, 배추 등 농작물을 기른다. 관광객을 맞기 위한 측면도 있겠지만 어쨌든 물건을 사고 파는 시장도 있어, 겉으론 우리들의 생활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살기 좋다고 하겠는가. 땅이 각박하고, 기후가 변화무쌍하고, 교통이 불편한데, 좋아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곳에서 살자고 각오한 사람이 아니고는 감당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그곳에 이주해 온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신기한 것은,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거의가 돈 많고 유명한 객지 사람들이라고 한다. 물론 원주민들도 있겠지만, 객지의 사람들이 도시를 주도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어느 한 곳에만 머물지 못하는 버릇이 있다. 어딘가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고, 새로운 것을 갖고 싶어한다. 심지어 술자리에서도 자리를 바꿔가며 술을 마셔야 속이 후련하다. 한해에 이사를 두세번 다니는 사람도 있다. 어째서일까. 천성적으로 타고난 방랑벽 때문일까. 가슴 가득한 야망과 성취욕 때문일까.
객지에 살며 많은 것을 배운다. 객지란 본디 '타향'을 말하고, 타향살이는 외롭고 서럽다고 하지만, 그건 기우일 따름이다. 세상에 어디, 객지에서 살지 않은 사람 있는가. 속담에 "말(馬)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고 했다. 우물안 개구리처럼 어느 한 곳에만 머물지 말고, 밖에 나가 꿈과 이상을 펼치라는 뜻일 터이다. 생각이 없는 새나 짐승도 알에서 깨어나면 둥지를 떠나, 더 큰 세상을 향해 날아가지 않던가.
물론 객지 생활은 외롭고 힘들다. '토지'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박경리 선생은 '객지'라는 시에서 "원주는 추운 곳이다/겨울이 아닌 때도/춥다/ 어깨 부빌 거리도 없고/기대어볼 만한 언덕도 없었다//원고지 이만장 십일만원/안다는 사람한테 사고/다음날 문방구에서/원고지 이만장/육만원에 샀을 때/진정 나는 추워서 떨었다/(...)"고 했다. 원주는 선생의 객지이고, 이 시는 객지에서의 작가 생활이 얼마나 힘든가를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선생은 그곳에서 '토지'라는 불후의 명작을 썼다.
객지는 모험과 희망이 담긴 곳이다. 객지생활은 스스로 자생할 수 있는 끈기와 어떤 절망에서도 일어설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김년균(한국문인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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