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땅에서 싹튼 민족종교 '부침' 거듭
증산교는 1902년 고부 출신인 강일순(1871~1909)이 창시한 종교다. 그는 자신이 세운 종교를 '만고(萬古)에 없는 무극대도(無極大道)'라고만 했는데, 증산교라는 명칭은 훗날 그의 호를 따서 만들어진 것이다.
증산교는 1894년 정읍에서 시작된 동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억압과 소외로 힘겨워하던 농민들이 주축인 동학은 결국 이념과 목표를 이루지 못했지만, 혁명에 참여한 사람들은 사회를 개혁할 새로운 방법을 찾았고, 증산교는 이 때 태동했다. 강일순은 1902년부터 1909년까지 7년 동안 포교활동을 했는데, 그의 포교지역은 자신이 '광제국'이라는 한약방을 열었던 모악산이 중심이었으며, 그 일대인 전주·태인·정읍·고부·부안·순창·함열 등 동학혁명이 가장 활발했던 동진강 어귀였다.
김제 금평저수지 옆 증산법종교본부(등록문화재 제185호)는 1949년 증산도 교주 강일순 부부의 무덤을 봉안하면서 형성된 종교 성지다. 주변에는 묘각인 영대와 증산미륵불을 봉안한 삼청전 등 1950년대 지어진 건물들이 있다.
교리를 인의(仁義)에 기초한 보천교는 1911년 강일순의 제자인 차경석(1880~1936)이 정읍 입암면 대흥리에서 창시한 증산교 계통의 종교다. 1920년대 백두산에서 목재를 운반해 사용할 만큼 교세가 확장되었는데, 600만 명의 신도가 있었다고 전한다. 일제의 종교탄압이 강화되자 친일활동을 했는데, 이는 교단의 분열을 초래했고, 태을교·동화교·수산교·삼성교·무을교·인천교·원군교 등 새로운 교단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1936년 차경석이 죽고 일제의 유사종교 해산령으로 보천교는 해체되었으며, 해방 후 다시 교단이 조직되었다. 정읍 입암면에 보천교중앙본소가 있다.
동진강을 중심으로 발현한 일부 종교들은 민족종교와 유사종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이들이 담당했던 역할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에 앞서 일제가 식민통치와 민족정신 말살을 위해 덧씌웠던 허울들이 먼저 전해진 탓이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윤이흠 명예교수는 한 방송매체의 인터뷰에서 "민족종교는 우리 국민이 가진 전통·민속·감정을 그대로 안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에 의한 민족종교의 탄압은 한민족 의식과 문화의 부활을 막는 길"이었다고 말한다. 일제가 그토록 강력하게 이 종교들을 말살하려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다시 생각할 일이다.
/ 최기우(극작가·최명희문학관 기획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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