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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서 생활공동체 꾸린 임동창 국악피아니스트

"모든 사람이 천재인데 교육이 문제…걸어야 할 큰 길"

남원에서 제자들을 가르키며 생활공동체를 꾸린 임동창씨가 소나기가 지나간 후 맑게 개인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안봉주(bjahn@jjan.kr)

이런 풍경을 상상했다. 한옥의 몇 개 방마다 피아노나 국악기가 놓여있고, 그 어느 방에서는 피아노 소리가, 또 그 어느 방에서는 스승의 무서운 호통소리가 새어나오는. 혹은 여러명이 함께 신명나게 국악기를 배우며 무더운 여름 더위와 대결하는 그런 치열한 현장을.

 

그런데 예상은 빗나갔다. 대책 세우지 말고 그냥 마음 가는대로 '하고 싶은 것'해보라고 가르치는 이상한 스승과 다니던 회사며 학교며 전공까지 작파하고'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선 용감한 제자들은'그냥' 놀면서 쉬면서 사는 것 처럼 보였다. 하기야 반나절도 채 안되는 시간동안의 엿보기로 이 특별한 스승과 제자들의 궁극적 삶의 지향을 어찌 알 수 있을 것인가마는 그래도 짐작 할 수 있었다면 그들이 꾸리는 생활공동체 안의 충만한 사랑과 행복, 그래서 즐겁게만 보이는 일상이었다.

 

남원시 송동면 영동리 영촌마을. 피아니스트 임동창씨(56)가 그 제자들과 남원에서 함께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2년 전 쯤이었다.

 

궁금했다. 그가 누구인가. 90년대 중반, 피아노를 치며 꽹과리와 징을 동시에 연주하고, 무대 위를 펄쩍 펄쩍 뛰어다니며 신들린 듯한 열정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던 사람이 아니던가. 우리 음악의 모든 것을 섭렵하고 거의 모든 장르의 국악을 피아노로 풀어내는, 그래서 전통과 현대의 경계를 없애고, 관습과 혁신의 만남을 새로운 형식으로 창조해낸 많은 작품들로 우리 음악계를 들썩이게 했던 그는 2000년대 초, 방송진행자로도 인기가 절정에 이르렀던 바로 그 때, 대중들로부터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언론에서는 칩거라고 했다. 가끔씩 춤이나 연극무대로 그의 작업이 드러날 때면 여지없이 매체들이 주목했지만 본격적인 활동을 중단하고 들어앉아 작업한 시간은 10년. 의외로 길었다. 지난해 여름, 비로소 그가 세상에 나왔다. 〈허튼가락〉이라는 작품집이 그 앞에 놓여있었다. 그의 근황이 더 궁금해진 즈음, 이번에는 완주군의 할머니 다듬이연주단 프로젝트를 이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두시간을 넘긴 인터뷰 시간동안 그는 넘치지 않게, 진지하면서도 나분나분하게 우리 음악의 뿌리찾기에 바쳐온 시간들을, 그리고 새로운 인생이 된 '가르치는 삶'의 철학을 들려주었다. 그의 화두는 자유로움. 음악에서도 그랬지만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도 예외가 없었다. 그냥 내버려 둘 것. 어떤 틀로도 구속하지 말 것. 옳고 그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내가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는가'를 알게 하는 것. 그것이 그가 가르치는 모든 것이었다.

 

-남원에서 무엇을 하시는지 궁금했습니다. 남원에는 언제 들어오셨습니까.

 

"2008년 봄이니 3년이 넘었네요. 뭐가 그렇게 궁금했어요? 그냥 나 이렇게 살아요. 아이들하고 재미있게."(웃음)

 

-생각했던 것과는 생활이 많이 다르군요. 짧은 생각으로 피아노나 국악을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일종의 영재학교가 아닐까 했거든요.

 

"저는 영재 교육 같은 것 안좋아합니다. 아이들은 누구나 천재예요. 그것을 못깨우거나 안깨우고 있을 뿐이지요."

 

-함께 생활하고 있는 제자들은 몇명이나 되나요. 무엇을 공부하는지도 알고 싶습니다.

 

"지금은 열명입니다. 전공은 모두 달라요. 들어올 때는 피아노를 더 잘 치려고 나한테 왔는데, 공부하다가 내가 길을 잘못 선택했구나 해서 때려치우고 노래로 바꾸기도 하고, 연극을 하기도 하고. 그러고보니 정작 피아노를 공부하는 아이는 한명도 없네요."

 

-뜻밖입니다. 그것을 다 가르치십니까.

 

"다 가르치죠. 일일이 구구절절 옛날처럼 콩이야 팥이야 하는 가르침은 이제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고. 아이들이 가고자 하는 궁극적인 지점을 보기 때문에 뭐든지 가르칠 수 있어요. 과정이 중요하니까요."(자수에 글쓰는 일, 농사에, 돈 버는 일까지 다 가르친다니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래서 다시 에둘러 물었다.)

 

-제자들은 선생님께 무엇을 배우러 왔을까요.

 

"그것은 애들한테 물어봐야죠. 그런데 애들이 무엇을 배우러 왔든 나는 사실 관심이 없어요. 어차피 그런 선택은 잘못된 것이 많으니까. 무엇을 가르치냐 그러면 답할 수 있죠. 그래서 저는 잘 사는 것을 가르쳐요.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사람이 없으면 못삽니다. 그런데도 사람을 미워하고 함부로 대하죠. 세상을 살면서 가장 대하기 어렵고 힘든 것이 사람이지 않습니까. 사람을 좋아하면서 사람을 싫어한다는 이 문제, 이것이 핵심이에요. 사람을 대하는 태도, 이것을 위해 사랑으로, 다시 말하자면 본성으로 돌려놓는 겁니다."

 

-2001년쯤 일체의 활동을 중단하셨는데, 그때야말로 잘나가던 시절 아니었습니까.

 

"화두가 있었어요. 어떻게 하면 피아노를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는가, 내 음악은 무엇일까. 나는 누구고 사랑은 무엇일까. 피아노를 자유롭게 연주하는 것은 스무살에 해결되었는데, 나머지 세 개의 화두는 해결하지 못했지요. 그때가 내 나이 40대 중반인데, 이 문제를 풀지 못하고 나이가 더 들면 불행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들어앉아 안성 집과 금산에 있는 보광사, 속리산 상환암, 안동 예술촌을 다니면서 작업에 전념했어요."

 

-열정적으로 연주활동을 하다가 작곡에만 몰두하는 일이 쉽지 않으셨을텐데요.

 

"그렇진 않았어요.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한 3년동안은 작곡에만 몰입했는데 2년만에 허튼가락을 만났어요. 2003년에 그 작업을 마무리했고, 그 다음부터 정악에 몰입했어요. 그리고 민속악을 했죠. 거창 합천 여주 제주도 이런 곳 다니면서 자료 조사도 하고 채보도 하고. 민요, 산조 장단, 진도 씻김굿이나 동해안 무속 장단까지. 다 해결했어요." (그가 '해결했다'는 것은 비로소 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왜 이런 어려운 작업을 하십니까.

 

"내 뿌리니까요. 사실 우리 음악은 내가 전공한 피아노와 어울리지 않아요. 피아노는 뻣뻣한 악기인데 우리 음악은 낭창 낭창 하잖아요. 그래도 달리 방법이 없어요. 내가 공부한 것이 피아노니까. 그러니 우리음악을 피아노로 연주하고 그것을 위해서 새로운 곡을 만드는 일을 안할 수가 없어요."

 

-남원에 오시기 전에 그런 작업만 하셨습니까.

 

"서천에 있었어요. 자치단체 지원으로 1년 동안 애들 음악 가르치는 프로그램을 운영했었죠. 동강중학교라고. 일종의 방과후 학교였어요."

 

-그래서 한때 '임동창이 중학교 음악선생님이 됐다'는 소문이 있었군요.

 

"배우는 학생들은 중학생 뿐 아니라 대학생, 대학을 졸업한 직장인까지 다양했어요. 내가 지금 행복한가. 내가 무엇을 해야 잘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아이들이 다 찾아 왔어요."

 

-그런 작업을 하시면서 지난해 새 작품집을 내셨군요. '임동창의 풍류, 허튼가락'이란 이름이 붙었던데요.

 

"어떻게 해야 오롯한 내 음악을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화두를 풀어낸 것이 허튼가락입니다. 영산회상, 경풍년/염양춘/수룡음, 수제천을 골라 피아노로 연주했어요. 그동안에는 전통음악을 그냥 그대로 제식으로 쳤어요. 내가 만든 음악이 많이 있었지만(우리 전통음악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라이브 공연에서는 할 수가 없지요. 대중들에게 어울리지 않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음악을 원치 않기 때문이죠. 그런데 음반으로 만들어내면 관심 있는 사람들은 들을 수 있잖아요. 특히 외국 사람들에게 기회가 된다면 우리 전통음악을 좀 더 가깝게 접할 수 있게 하고 싶었구요."

 

-'허튼가락'은 무엇입니까. 저는 산조가 떠오릅니다만.

 

"산조와 다르죠. 산조는 흩어진 가락이고.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가락을 다 모아서 연주를 한 것이 산조거든요. 허튼가락은 장르가 아니예요. 하나의 삶의 철학이랄까. 단순한 음악의 장르를 넘어서죠.

 

-아이들과의 이야기를 좀더 듣고 싶습니다. 하루 일과가 어떻습니까. 몇시부터 시작하나요 하루를.

 

"지들 하고 싶은대로 합니다. 애들은 대개 7시 넘어서 일어날 거예요. 아침은 안 먹어요. 자유롭게 먹거나 말거나. 점심은 12시, 저녁은 6시, 두끼 먹죠. 식사 당번은 돌아가면서 하고. 누군가가 자기 공부에 몰입하느라 시간이 없다면 그런 사람은 죄다 빼줘요. 한번 미친듯이 해보라는 배려죠."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갈 길을 찾아가게 하는 방식인가요. 자기 스스로 자기 공부를 하게 하는.

 

"그런 면이 있지만 애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철저하게 체크합니다. 그냥 놔두고 지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림 그리는 아이라면 어떻게 무엇을 그릴것인가를 이야기합니다. 스스로 길을 잡지 못할 때는 제가 제시를 하죠. 이렇게 한번 해봐라하고."

 

-가르침과 배움이 있는 공간이니 일종의 학교랄 수 있는데 함께 생활도 하니 생활공동체인 셈인데요. 먹고 사는 비용은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애들이 생활비를 냅니다. 형편이 안되면 그냥도 살고. 모자라는 부분은 제가 충당하지요. 수업료는 없어요. 그것 아니어도 먹고 살수는 있을 만큼 제가 버니까요."

 

-오래전부터 선생님께서는 우리 음악으로 피아노를 재해석하는 작업을 비롯해 우리음악에 대한 대중화를 이끌어내셨는데, 요즈음 음악을 보면 어떻십니까.

 

"어떤 장르나 제도나 장단점이 있지요. 중요한 것은 음악을 어떤 마음으로 하는가예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시류에 편승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음악을 하거든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죠. 나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다만 내가 기대하는 것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려 하지 않고 정말 음악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실력을 갖춘 음악가가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음악은 도제식 교육 중심인데, 이것은 어떻게 보십니까.

 

"장단점이 있어요. 장점은 바른 정신을 몸으로 붙이는 과정, 그래서 근본을 만든다는 것이고, 단점은 그런 과정에 매달려 너무 많은 세월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선생님이 가르치는 이 방식은 계속 유효한가요.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에게 올해까지만 이렇게 한다고 일러두었어요. 내가 가르치는 것을 몸에 붙여서 제 것으로 만들고, 사상이나 철학을 세워 올해까지 자리 잡히지 않으면 교육방식을 바꿀 수 밖에 없다고."

 

-앞으로 가고자 하시는 길은 어떤 길입니까.

 

"20대부터 교육이 갖는 의미와 가치를 생각했습니다. 스무살에 저 스스로 피아노 연주가 툭 터지면서 모든 사람이 천재인데 교육이 문제라는 생각을 가졌어요. 그래서 교육을 가장 큰 길로 세웠죠. 그것도 물론 인연이 되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말거예요."

 

-이효재씨와는 부부연을 갖고도 오랫동안 떨어져 계시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합니다.

 

"내가 워낙 비가정적이고 비가족적이거든요. 우리가 젊은 나이에 만난 것이 아니잖아요. 그때 저는 사십대 중반이었는데 한 삼년 정말 알콩 달콩 기막히게 살았어요. 다들 모르시겠지만.(웃음) 효재는 꿈이 살림이었고, 내 뒷바라지 하면서 살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 사람을 가만 보니까 그것이 아닌거예요. 공적인 사람이다 싶었죠. 그래서 제가 이렇게 자유롭게 살자고 했어요. 나한테 묶어두기에는 너무 할 일이 많은 사람이죠. 지금은 가끔식 다녀가는 것만으로도 서로 편하고 좋습니다." (한복디자이너인 부인 이효재씨와 그는 최근 국립공원 홍보대사로 위촉됐다)

 

-완주에서 추진중인 할머니 다듬이연주단과 관련한 계획은 언제부터 실행하십니까.

 

"구체적인 것은 아직 문서로 주고 받지 않았지만 곧 시작할 겁니다. 자치단체장이 큰 관심을 갖고 추진하는 일이니 잘 되겠지요. 두가지 제시했어요. 지금 할머니들의 연주는 그 취지를 살려 그대로 다음 세대에게 전승하는 것이 하나고, 또 하나는 다듬이를 중심으로 한 타악 앙상블이 주가 되는 세계 공연단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지금 많은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우리의 진정한 뿌리 깊은 전통의 멋을 제대로 보여주면서 성공한 것은 사물놀이 밖에 없거든요. 그런점에서 저는 우리것의 진정성을 온고이지신으로 발현시킬 이 작업이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일에 열정과 의지가 각별하신 것 같습니다.

 

"인생을 정리하는 시점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일인만큼 조심스럽고 설레고 떨리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교육이 함께 가야 성공할 수 있는데, 그것이 과제입니다. 사실 모든 일은 사람에 달려 있잖아요. 그래서 교육이 필요한 겁니다. 좋은 사람을 선택해서 좋은 교육을 하는. 그것은 결국 제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풍류학교인데, 풍류는 건강하고 행복하고 아름답고 신명나게 사는 것이거든요."

 

그는 풍류를 우리 삶의 중심에 들여놓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풍류를 우리 몸과 마음에 붙이는 일이 쉬울까. 그는 몸짓 마음짓 흥짓을 통한 교육으로 가능하다고 했다. 흥짓은 몸짓과 마음짓이 합해진 것인데, 이것은 또한 사람의 삶을 아름답고 신명나게 하는 예술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 어디론가 숨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었던 그의 에너지가 이제 무엇으로 발휘될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계적인 타악연주단과 가장 한국적인 풍류학교. 이 귀한 선물을 우리 지역에서 만나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다.

김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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