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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익산 연동리 돌부처

잃어버린 백제인의 얼굴, 미소 되살리자

익산 연동리 석불좌상은 머리 부분을 제외하면 몸체의 높이는 156cm, 광배의 높이는 448cm로 재질은 화강암이다. (desk@jjan.kr)

우리는 자비로운 사람을 보면 으레 부처님 같다는 표현을 쓴다. 불상을 조각할 때도 항상 미소를 머금은 자비로운 모습으로 조각한다. 그런데 익산에는 웃지 않는 부처님이 계신다. 바로 연동리 돌부처님이다. 이 부처님도 다른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미소를 머금게 해야 한다. 우리 문화를 아끼는 마음이 모이면 언젠가는 1300년 전 백제인의 미소를 되찾을 날이 있을 것이다.

 

▲'석불사'로 검색해야

 

문화재청에 올라 있는 이름은 '보물 제45호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益山 蓮洞里 石造如來坐像)'이다. 그렇지만 길도우미(내비게이션)에서는 '석불사'로 검색해야 한다.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에서 함열읍으로 이어진 722번 지방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삼기면에서 낭산면으로 가는 718번 지방도와 만난다. 이 네거리 서쪽에 '미륵산 석불사'가 있다. 미륵사지석탑은 널리 알려져 많은 관광객들이 찾지만 여기에 모신 불상은 백제시대에 조성된 불상임에도 불구하고 더구나 미륵사지에서 지척인데도 찾는 이가 거의 없다.

 

주소는 삼기면 연동리, 현재 소유는 국유이며, 관리자는 익산시로 되어 있다.

 

▲미륵산 석불사

 

연동리 돌부처님은 석불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다. '미륵산 석불사'란 현판이 걸린 일주문을 지나 경내에 들어서면 종각이 있고, 오른쪽에 대웅전이 나온다. 대웅전 오른쪽에는 삼성각이 있다. 종각에는 범종과 운판이 있고, 언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커다란 쇠솥도 놓여 있다.

 

대웅전 왼쪽에는 '세심대(洗心臺)'란 건물이 있는데 이곳에는 '한국불교화엄종종정사원, 한국불교화엄종석불사' 등 4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요사에는 '호남범음회총본부'라는 현판도 있다.

 

절터 앞마당에는 사적기가 있다.

 

사적기에는, "어느 신도에게 현몽하여 내 머리를 조성 보결(補缺)하여 달라는 부처님의 계시가 있어 본 삼기면민과 신도들의 협력 하에 불상을 지하에서 발굴하여 '불상(佛上)'을 보결 봉안하니, 단월(檀越, 시주라는 의미)들이 소원이 있어 지성으로 기도하면 반드시 소원을 성취하게 되어 인근 불제자들의 신앙 도량으로 널리 알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돌부처의 모습

 

먼저 불상을 대하면 상호 부분과 어울리지 않는 머리의 모습에 당황하게 된다. 몸통과 목이 너무 가까이 붙어 목이 움츠러든 것처럼 보이고, 머리의 가로 길이와 세로 길이가 비슷하여 둥그렇게 보이고 몸통에 비해 비례가 맞지 않아 왜소해 보인다. 돌의 빛깔도 흰빛이 많아 대번에 새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머리는 1963년에 끊긴 광배를 다시 세우고, 보호각을 지으면서 새로 조성해 붙였다고 한다. 대웅전은 1990년에 신축한 것이다.

 

머리 부분을 제외한 몸체의 높이는 156㎝, 광배의 높이는 448㎝인데 재질은 화강암이다.

 

법의(法衣)는 통견(U자 형태)인데 비교적 얇은 편이다. 두 무릎은 넓게 퍼져 안정감이 있으며, 무릎 위에도 법의가 U자 형태로 펼쳐져 있다. U자 형태의 옷 주름은 대좌까지 이어져 있다고 한다. 왼손은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발 위에 얹어 놓은 형태로 예외적인 수인(手印, 손모양)이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과는 약간 다른 손모양이다. 무릎 부분과 오른쪽 팔, 가슴 부분이 훼손되어 있다. 몸에 장식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여래상이다.

 

광배(光背)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 둘레에 불꽃무늬를 새겼다. 여기에는 불꽃무늬와 함께 일곱 분의 화불(化佛)을 새겼다. 윗부분이 잘려나가고, 아랫부분이 부러져 붙였다.

 

만일 돌부처의 머리 부분이 온전하고 훼손되지 않았더라면 국보로서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절터의 옛 모습

 

창건 연대나 절의 이름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없다고 했다. 1989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 절터를 발굴하여, 출토된 기와와 주춧돌 등을 분석해 보았더니, 백제 무왕(600~641) 때인 7세기 전반에 미륵사지를 세우기 앞서서 이루었다는 것이다. 문화재 안내문에는 "600년경의 백제 석불상이다."라고 소개되어 있다.

 

백제의 가람 배치는 중문(中門), 탑, 금당(金堂), 강당, 그리고 주위에 회랑이 있는 게 일반적인데, 이곳에는 금당 터만이 별견되었다고 한다. 폐찰된 시기는 상감청자가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고려시대(12~13세기)로 보았다.

 

한편 휴암 주지 스님 말씀에 따르면 과거에는 '봉림사(鳳林寺)'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세운 비석, 지금은 일주문 밖으로 옮겨놓은 비석 앞면에는 '보물 제10호(?) 익산 석불리 석불 좌상', 뒷면에는 '조선총독부'란 글자가 새겨 있다. 또 사적기에 "1930년에 만선(萬善) 스님과 신녀 진안화주가 공력 도모하여 초가 3칸을 건립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에 석불사로 부른 것 같다.

 

▲왜 얼굴을 잃어버렸나

 

연동리 석조여래좌상은 목이 없다. 이 돌부처가 목이 부러진 것은 정유재란 때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 가토기요마사)이 칼로 내리쳤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가등청정이 군사를 이끌고 이곳으로 쳐들어오는데 안개가 느닷없이 생겨 주위를 살필 수 없게 되자 군사들을 풀어서 무엇이 있는가 알아보라고 했다.

 

잠시 뒤 군사들이 돌아와 돌부처 하나밖에 없다고 보고하자, 이렇게 안개가 자욱하게 낀 것은 분명히 돌부처의 짓일 것이라면서 돌부처가 있는 데로 와서, "대군을 이끌고 왔는데 네가 방자하게 길을 막느냐?" 하면서 칼로 돌부처의 목을 베자 주위를 가렸던 안개가 걷히어 지나갈 수 있었다고 전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유재란 때 이미 절이 소실되고 불상만 남았을 것이다.

 

가등청정은 독실한 불자였다고 한다. 그런 그도 임진, 정유 양란 때 우리 민족에게 못된 짓을 많이 했다. 경상도 민요 '쾌지나칭칭나네'는 악명 높은 가등청정이가 물러가자 "쾌재(快哉)라, 청정이가 가네."라는 말이 변해서 되었다는 학설이 있는데, 그 진위 여부를 떠나서 이 땅에서 못된 짓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가등청정은 구주(九州, 큐슈) 웅본(熊本, 구마모토) 사람이다. 웅본성(구마모토 성) 밖에 동상이 있다. 웅본성에 가서 성만 볼 것이 아니라 임진·정유 양란 때의 만행도 보아야 한다. 덧붙여 일제강점기에 전북에 들어와 수탈에 앞장섰던 세천(細川, 호소카와) 집안의 고택이 웅본성 바로 밖에 있다. 이곳에 가서는 일본 옛집만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수탈도 떠올려 보아야 한다.

 

우리나라를 지켜온 건 사찰이다

 

정병조의 '불교문화사론'에 따르면 사찰은 주요 군사시설이었기 때문에 전쟁 때면 으레 파괴되었다고 한다. 넓은 공간과 많은 전각이 있는 사찰은 전쟁 때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주둔하면서 전쟁을 지휘할 수 있는 요긴한 군사시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을 겪을 때마다 사찰이 큰 피해를 보았다.

 

그 뒤 많은 사찰들이 복원되었지만 아직도 수많은 절터가 방치된 채 그대로 있다. 이 땅에서 전쟁의 상흔은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연동리 돌부처님의 얼굴을 복원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임진·정유 양란의 상처를 치유하는 한 작업일 수 있다.

 

▲미소를 찾게 할 방안은 없는가?

 

진홍섭의 '한국의 불상 200쪽'에는 "원래의 머리는 옆에 보관되어 있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렇지만 현재 머리 부분은 절에 없다. 이 책 외에 머리 부분이 있다는 기록도 없다.

 

그렇다면 불두(佛頭)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원형을 추정할 수 없다면 전북에 있는 백제 불상을 본보기로 하여 복원해야 한다. 연동리 절터 바로 북쪽 1㎞ 지점에 있는 태봉사에는 백제 때 조성된 석조삼존불(전라북도유형문화제 제12호)이 있다. 또 정읍시 소성면에도 백제불인 정읍 보화리 석조이불입상(井邑 普化里 石造二佛立像, 보물 제914호)이 있다. 이들 불상과 직접 비교는 어려울지라도 참고 자료는 될 것이다. 그것도 어렵다면 충청도에 있는 백제불도 살펴보아 석불 전체의 상호(相好)와 조화를 이루도록 해서 복원하면 된다.

 

조각가는 자신과 함께 사는 사람들의 얼굴을 새긴다. 연동리 돌부처님의 얼굴은 그 시대에 가장 자비로웠던 백제인의 얼굴이었을 것이다. 백제인의 얼굴을 되찾자. 그 미소를 복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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