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라가 어려운 때요. 여러분도 힘을 합하고, 특히 언론이 앞장서야 합니다." 자유수호국민운동 장경순(張坰淳·90) 총재는 인터뷰 요청을 하자 "어디냐"고 물어본 후 대뜸 나라 걱정부터 했다.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목소리가 쩌렁저렁했다. 한사코 "바쁘다"면서도 "좋소"하며 흔쾌히 응락했다. 인터뷰 내내 5·16 군사혁명의 주역으로서의 자부심이 묻어났다. 나라를 이만큼 성장시켰다는 자긍심과 보수 우익의 원로답게 국가의 안보에 대한 염려가 컸다. 장 총재는 평생 세가지 목표에 가치를 부여하고 살아왔다고 했다. 강력한 조국, 잘 사는 농촌, 유도 최고봉이 그것이다. 인터뷰는 서울시 중구 롯데호텔 건너편에 있는 나전빌딩 자유수호국민운동 총재실에서 진행했다.
- 안녕하십니까. 요즘 굉장히 바쁘시다면서요?
"그래요. 요즘 안보 정세 강연회, 현대사 바로세우기 등 각종 행사에 참석하고, 언론 인터뷰 하느라 바쁩니다. 대학 강연도 자주 다닙니다. 5일에는 고향 김제노인대학과 군장대학에 가서 '우리나라의 미래는 밝다'는 내용으로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 2007년에 회고록 '나는 아직도 멈출 수 없다'를 펴낸 후 책 제목대로 멈추지 않고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자유수호국민운동은 주로 어떤 활동을 합니까?
"2002년 4월에 시작했습니다. 당시 나는 딸들이 살고 있는 미국 LA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미교포인 안교명 예비역 대령이 나를 찾아와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망하는 것 아닙니까?'며 몹시 걱정을 해요. '그게 무슨 말이요?'하자 한 월간지 기고문을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나라가 베트남 전쟁 당시 적화통일 직전의 자유베트남 보다 더한 국기안보 위기에 처해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안되겠다 싶어 닷새만에 귀국해서 이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정래혁 전 국회의장과 김성은 전 국방부장관 등 7인 호국위원회를 결성하고 각계인사 100인이 참여한 발기인 대회를 가졌습니다. '좌익정권 몰아내야 국가가 산다'는 기치를 내건 것입니다."
- 벌써 10년이 되어갑니다. 운영에 어려움은 없습니까?
"출범하고 미국 상원 인권위원회와 해리티지 재단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 곳에서 한국정부의 친북 용공태도와 국가안보 해이에 대해 알렸습니다. 고맙게도 제 말에 동감하는 교민들로 부터 재정적인 도움도 받았습니다. 지금은 회원이 3000여 명으로, 경제적인 도움을 주는 분도 있고, 자원봉사를 해 주시는 분도 계십니다."
- 예전으로 돌아가 질문 드리겠습니다. 해방 후에 잠시 전북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던데.
"일본에서 귀국 후 고향에서 농촌 부흥운동을 해야겠다며 당시로는 첨단농업인 토마토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같은 학도병 출신인 친구가 불쑥 집으로 찾아 왔습니다. 다짜고짜 학교에 가자는 것입니다. 당시는 해방정국으로 좌우익 정파간 싸움이 치열했습니다. 학교도 동맹휴학이다, 관공서 습격이다 하는 소동으로 조용할 날이 없었던 거죠. 그 때 존경받던 김가전 교장(나중에 도지사가 됨)도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교사인 친구의 말을 듣고 저를 데려다 학교를 조용히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지만 국가동량이 될 청소년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 학교 훈육주임과 유도교사를 맡았죠."
- 6·25 전쟁 얘기는 건너 뛰겠습니다. 총재님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5·16 쿠데타를 함께 하셨는데, 어떻게 알게되었습니까?
"내가 박 대통령과 처음 만난 것은 1948년 육사 제7기특별반으로 막 군복을 입은 때입니다. 당시 박 대통령이 우리의 중대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만난 것은 한국전쟁이 치열하던 1950년 겨울이었습니다. 대구에서 CIC특무 차장으로 있을 때 내 직속상관이 한웅진 중령이었는데 그가 박 대통령과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2기 동기생이었습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여순반란 사건 연루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한국전쟁 발발로 전격적으로 군인신분에 복귀한 상태였습니다. 우리 셋은 애주가로 의기가 투합해 형님 아우하며 거의 날마다 저녁이면 대구의 술집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그 후 나는 경북 영천의 육군정보학교 교장을 하다 1960년 7월 육군본부 교육처장으로 갔는데 얼마 후 박정희 소장이 직속상관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 1961년 5·18 거사 전야(前夜)는 긴박했을 텐데요.
"5월 15일 오후 3시 무렵, 박 장군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좀 만날 수 없느냐?'는 것입니다. 이유도 묻지 않고 '어디로 가면 되느냐?'니까'우리집으로 오시오'했습니다. 퇴근하고 신당동 박 장군 댁으로 갔더니 '장 장군, 오늘 밤이 거사요'하는 겁니다."
- 깜짝 놀라셨겠군요?
"청천벽력 같은 일이지만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습니다. 이미 충분히 예견한 일이니까요. 당시 4·19 민주혁명과 그 이후의 국내 사정은 혼란의 절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당이 집권했으나 밥그릇 싸움에 여념이 없고 학생들은 남북통일을 외치며 북한 젊은이들과 대화하겠다며 판문점으로 달려가는 판이었습니다. 이 위기 국면을 슬기롭게 수습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도덕적 힘이 필요한데, 그 힘을 갖춘 집단은 오로지 군부밖에 없었으니까요."
- 당시 어떤 역할을 맡으셨습니까?
 
    
"박 장군은 장도영 참모총장을 설득하고 낙하산 부대를 동원해 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마음이 무겁고 착잡해, 일단 집에 들렸습니다. 아내와 장모님께 이승에서 마지막이 될지 모를 작별인사를 하고 박 장군 집으로 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박 장군이 침통한 표정으로 거사가 폭로돼 끝났다는 겁니다. 나는 피가 정수리에 확 솟구치는 기분이었습니다. '갑시다. 기왕지사 한번 해 보고 죽든지 살든지 해야 할 것 아닙니까?'하고 내가 소리치자 박 장군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5·16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 농림부 장관 시절, 산림녹화 일화가 꽤 유명하던데요?
"요즘도 어쩌다 시골길을 달리다 울창한 산림을 보면 뿌듯한 긍지를 느낍니다. '저 산림녹화는 내 작품이다'하는 자부심 때문입니다. 당시 우리나라 산은 민둥산이었습니다. 장관이 돼자마자 당시 심종섭 산림국장(전 전북대 총장)과 시도 산림과장을 모두 불렀습니다. 그리고 내가 고심 끝에 고안한 방법을 추진토록 했습니다. 사방(砂防)사업할 땅에 무조건 20×20×20㎝ 깊이로 구덩이를 파서 거기에 논흙을 채우고 풀씨 싸리씨 등을 파종토록 한 겁니다. 그러면 비가 와도 흘러내리지 않고 빨리 안정화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토양을 키운 다음에 식목을 하니 나무가 잘 자랐습니다. 당시 USOM(주한미군 원조사절단)이 처음에는 무모하다고 말리다 대성공인 것을 보고 미국 행정부와 의회에까지 알렸습니다."
- 김제에서 내리 5선을 하시고 국회 부의장을 10년간 하셨는데, 에피소드 한 가지만 들려주시겠습니까?
"호남야산개발프로젝트와 광주에 아시아자동차(현재의 기아자동차)를 설립토록 한 것이 기억납니다. 또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여야가 첨예하게 맞서 합의를 도출하지 못한 안건이 있었습니다. 여야 원내총무를 불러 조정을 하려 했으나 안되길래 '몇 시간이 걸리든 합의를 하지 않으면 못 나옵니다'하고 문을 잠가 버렸습니다. 결국 합의를 보고서야 풀려났죠.(웃음)"
- 1970년에 미군을 감축하려는 것을 저지했다고 들었는데요.
"닉슨 대통령이 취임 직후 소위 '닉슨 독트린'이란 정책을 발표했습니다. 약소 우방국에 경제적 군사 원조를 제공하는 대신 해외주둔 미군을 감축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내가 보니까 주한미군도 조금씩 빠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미군부대에서 이삿짐 반출입 업무를 담당하는 강홍모 대령에게 은밀히 체크해 보라고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당시 주한미군이 3만5000명인데 7000명이 빠져 나갔어요. 박 대통령에게 긴급히 보고했더니 깜짝 놀라는 거예요. 그래서 비밀리에 정일형 박준규 백두진 이동원 나 이렇게 사절단을 편성했는데 다음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버렸어요. 할 수 없이 혼자 미국에 갔죠. 그때 야당 부의장인 윤제술 의원에게 상의를 했습니다. 결국 미국의회 지도자들을 설득해, 어렵게 막았습니다."
- 윤 부의장과 상의한 것을 보니 야당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가 보죠.
"윤 부의장과는 여야로 당이 다를망정 단순한 관계 이상이었습니다. 더구나 개인적으로 고향의'선생님'이기도 했습니다. 자초지종을 설명드렸더니 '이준 열사가 헤이그 가는 마음이겠군'하면서 공항까지 나와 '국가안보에는 여야가 따로 없다. 꼭 성사시키고 돌아 오라'고 격려해주셔서 콧날이 시큰했습니다."
- 정치를 하면서 김대중(DJ) 김영삼(YS) 김종필(JP) 등 3김(金)씨를 지켜 보셨을텐데요. 이 분들에 대해 한 마디씩 평가해 주신다면?
"DJ는 우리나라에서 노벨평화상을 받은 유일한 사람이고 호남정권을 세웠지만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이 나라를 좌경화하고 국가 정체성을 훼손시킨 장본인입니다. YS는 미국이 북한핵을 치려 하니까 반대했고 IMF를 초래하지 않았습니까. JP는 DJ를 도와 대통령을 만들었는데 5·16 혁명을 같이 한 사람으로서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민주화를 하려면 국력이 배양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토대를 나는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이 만들었다고 봅니다."
- 그럼 이승만·박정희 두 대통령에 대해서는?
"두 분도 공과가 있습니다만 이 대통령은 건국과 건군(建軍)을 했고 문맹퇴치에 앞장섰습니다. 또 토지개혁을 해서 6·25 전쟁이 났어도 공산화를 막았습니다. 한·미 동맹을 체결해서 박 대통령이 산업화를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우리나라 산업화를 30년만에 해 냈습니다. 영국은 200년, 미국은 180년, 일본은 100년이 걸린 것 아닙니까. 새마을 운동과 산림녹화, 그리고 1978년 한미연합사 창설은 우리나라를 지탱해 준 것입니다."
- 내년에는 총선과 대선이 치러집니다. 오랜 정치경륜에 비추어 나라를 이끌어갈 지도자, 특히 대통령의 덕목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나는 대통령이 될 사람은 우선 철저한 애국심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또 안보에 대한 신념과 의지, 부정부패 척결 의지, 통치전략 전문가, 파벌의식이 없는 포용력을 갖춘 선비형 대통령이 바람직합니다. 국제정치, 특히 미국과 중국에 영향력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병역기피자와 탈세자는 뽑아선 안됩니다."
- 이명박 대통령의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방향을 제대로 잡았지만, 지금은 큰 일입니다. 국가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안보, 경제, 사회가치의 고양, 이 세가지가 필요합니다. 그 중 제일 중요한 게 안보입니다. 안보가 무너지면 모든 것을 잃게됩니다. 나는 공산주의와의 싸움에서 '중도'란 결국 좌편(左便)일 뿐이라는 것을 경험상 확신합니다. 이념적 중심이 없는 중도는 종북(從北)주의자들이 활개치고 국론을 분열시킨다는 것을 명심했으면 합니다."
- 전북 정치권은 정부수립 당시와 비교해 활동이 크게 위축되고 도세(道勢) 또한 후퇴했습니다.
"호남에서는 민주당 아니면 당선되지 않는데 이래서 되겠습니까. 전라북도부터 문을 열어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 일할 인재를 뽑아야 합니다. 전라북도가 도세가 약하다고 하지만 새만금사업이 성공하면 전국에서 제일가는 도가 될 수 있습니다."
- 젊은 시절부터 유도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유도에 입문하신 동기와 유도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유도와 유도로 부터 함양된 정신은 나를 평생 지탱해준 모든 정신활동과 가치개념의 근간입니다. 유도는 나에게 삶 그 자체요, 종교나 다름없는 절대가치입니다. 배재중 3학년 때 입문했는데 당시 조선연무관에는 국내 유도계의 1인자인 이범석 사범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사람은 문무를 겸비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또한 유도의 요체는 자기의 체력과 정신력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감격스러웠습니다. 그 전까지 싸움질을 많이 했는데 이 때부터 열심히 공부도 하고 유도를 했습니다. 일본에 가선 강도관에서 일본 유도계의 쌍벽인 도쿠 산보와 미후네 규조 두 사범으로 부터 배웠습니다."
- 아직도 젊은이 못지않게 건강하신데 비결은 무엇입니까?
"열심히 활동하는 게 비결인 것 같습니다.(웃음) 지금은 아침 5시에 일어나 6시까지 집 근처인 독립공원을 1시간 가량 걷습니다."
(장 총재는 2시간 30분 동안의 인터뷰를 끝내고 자리를 옮겨 점심을 같이했다. 점심 내내 국가 안보, 특히 한미연합사가 해체되어선 안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리고 노산 이은상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 술에 얽힌 일화 등을 흥미진진하게 들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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