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없다.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숨 막히며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간다. 여기서부터 역사이다. -고은시인의 '길'중에서-"
사무실 문을 열자 왼쪽 안내판에 붙어 있는 많은 인쇄물 사이에 직접 쓴 필기체 시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길이 없다'는 것은 암울한 현실이다. 그런데 이 암울한 현실로부터 희망을 읽는다니. 가슴에 차오르는, 그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사무실을 막 열었을 때인데 이 시가 떠올랐어요. 제 심경과 똑같았거든요.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간다 여기서부터 역사다' 마음에 이 구절을 새겼습니다."
한국사회에 새로운 혁신의 바람이 불고 있다. 정치지형의 변화를 꿈꾸는 시민들의 절박한 소망이 지펴내는 희망의 불씨다.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둔 2011년 가을, 시민사회는 이 새로운 바람으로 다시 출렁이고 있다.
전북 지역 또한 새바람이 인다. 온오프라인에서 이루어지는 이 바람의 진원은'우리'라는 이름으로 함께 가고자하는 시민사회단체와 재야, 진보노선의 활동가들과 시민들이다. 지난 10월 5일, 물밑에서 움직이던 그들이 모여 전북@'혁신과통합'을 출범시켰다. 야권단일정당 만들기의 선언이자 본격적인 시작이다. 마침 서울시장 야권후보단일화 경선을 통해 정치혁신의 열망을 담은 시민사회의 힘을 제대로 보여준 직후였다. 이러한 새로운 정치혁신의 바람을 불어오는 대로 그냥 마주하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재규 '희망과대안전북포럼 공동대표(48)를 만난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이 대표는 학생운동부터 시민사회운동까지 줄곧 재야를 지켜온 시민운동가다.'혁신과통합'을 출범시키기까지 그 중심에서 일해온 그는 정치혁신위원장이란 직함을 새로 얻었지만 그 또한 내년 총선에 출마의 뜻을 두고 있다. 그래서 인터뷰는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그를 만나고 난 뒤 혁신을 갈망하며 기꺼이 정치의 길을 가고자 하는 젊은 정치인들의 진정성을 다시 보게 됐다.
도전은 늘 모험이 따른다. 성공을 향해 가지만 그 대척점에는 반드시 실패가 기다리고 있다. 그는 야권통합단일정당 출범이 꼭 성공하리라는 믿음과 확신이 있지만 만약 실패한다 해도 그 '실패의 경험' 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혁신과통합'이 출범했으니 이제 더 바빠지겠습니다. 그런데 웬 대표가 그렇게 많습니까. 많은 분들이 모두 공동대표인 것을 보고 이런 직책부터 혁신시켜야하는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대표성만 가진 분들만 많아서 일이 잘 되겠습니까.
"그렇게 보였을 수 있겠군요. 그 분들이 원했던 것은 아닙니다. 같이 좀 거들자는 뜻이죠. 일종의 시민단체 총동원령 같은 그런 취지입니다. 일은 오히려 잘 될 겁니다."(웃음)
-서울시장 국민참여 야권단일후보 경선 결과에 좀 더 희망을 갖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안철수에서 발원해서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로 매듭지어진 새로운 일련의 변화를 보면서 기존 정당정치가 단순히 낡았다는 것 뿐 아니라 그 방식으로는 이제 국민의 마음을 모아내기 어렵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 결과입니다. 한 언론매체에서 '새로운 20대 30대 젊은이를 두려워하는 늙어버린 민주당'이란 제목을 뽑았더군요. 오후부터 밀려나온 젊은 세대들에 의해 이루어진 그 반전의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 대표께서는 반전의 의미를 어떻게 읽으셨습니까.
"저는 기존 정당이 포함하지 못한 젊은 변화의 동력들이 정치결정에 다시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고 보았습니다. 어쩌면 '박원순'은 그들에게 희망의 도구인지도 모릅니다. 개인에 대한 열광보다 변화에 대한 불씨를 꺼트리면 안 된다는 어떤 조바심 같은 것이 더 컸지 않았을까요. 그만큼 새로운 변화에 대한 갈망이 절실하다는 것이죠. 물론 사람과 정책을 온전히 평가하는데는 그 사람이 살아온 이력이 그대로 반영되는 것 인만큼 박변호사의 궤적이 무엇보다 우선 작동했겠지만요."
-삶의 궤적을 말씀하셨는데 이 대표의 정치 입문 동기가 궁금합니다. 이 대표의 출마의지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의외로 받아들이는 분들도 적지 않던데요.
"그동안 사회운동을 해오면서 이것이 곧 정치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언젠가는 진출하겠다는 의식이 내면에 있었는데 이제 나서서 감당해야겠다는 강력한 의지랄까 열정이 생긴 것은 이 정부 들어와서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입니다. 특히 제가 살고 있는 덕진구의 정치적 상황을 보면서 그런 의지가 더 단호해졌습니다."
-그래도 시민사회운동의 한 중심에 서온 입장에서 정치권 진출이 자유롭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사회운동은 현실권력의 문제를 늘 제기하는 것입니다. 시민운동도 권력에 직접적으로 개입해서 정책을 비판하거나 돕거나 하는데, 그것 역시 따지고 보면 다 정치 행위입니다. 입장을 정리하는 일이 쉬웠다고는 이야기할 수 없지만 장외에서 오랫동안 정치과정을 지켜보아왔기 때문인지 저 스스로 낯설지는 않았습니다."
-어제 '혁신과통합' 출범 기사를 보니 민주당이 구태하고 낡고 독선적이고 모든 것을 독점한 정당으로, 모든 비판이 모아지더군요.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의 지역 구도를 고착화시킨데 대해 민주당이 자유로울 수 없고 또 그런 구도를 이용해서 기득권을 굳힌 것은 사실이지만 정당정치사에서 과연 그렇게 비난 받을 일만 한 것인가 하는.
"사실 민주당의 전통은 한국의 야당사나 민주화의 역사와 거의 일치합니다. 물론 민주당 밖에서 만들어진 힘이 컸기 때문에 민주당만이 독점할 수 없는 것이지만 민주당 역사는 그런 변화를 끌어온 시민들의 역사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자랑스러운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민주당의 역사를 존중하고 민주당을 정통으로 표현하는 것에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지방자치 20년 동안의 정치적 독점입니다. 특히 전북지역의 상황은 얼마나 심각합니까."
-'혁신과통합'이 야권단일정당을 내세웠는데, 오랫동안 민주당이 독식해온 전북의 정치 환경 속에서 그 작업이 가능할까요.
"서울시장 야권단일후보 경선 결과가 '희망의 도구'로 읽혀지기도 하지만 박원순변호사나 안철수교수는 평생을 쌓아온 자기 세계가 있습니다. 그것이 국민들에게 어필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구요. 결국 아무리 시대변화가 있다 해도 그것을 온전하게 담아내는 것은 그런 그릇, 이를테면 인물과 정당이 필요한 것입니다. 언론에서는 시민정치가 정당정치를 이겼다는 표현도 썼던데, 이 둘이 계속 대립항으로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정당정치가 담아내지 못한 부분을 시민들의 정치적 참여를 통해서 보완해내면서 결국 정당정치의 혁신을 제대로 이루는 것으로 완결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회적 요구가 거세게 몰려오는데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면 도태될 수밖에 없겠죠."
-혁신과통합이 보는 전북정치의 현실은 어떤 것인가요.
"민주당이 걸어온 과정을 보면 비난의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방자치단체에 다양한 주민서비스가 시도되고 새로운 모색들이 이루어지면서 주민들의 생활여건 또 자치의 여건들은 많이 진전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그러나 민주당의 전통과 역사, 도전과 모색에 비추어볼 때 전북지역의 정체가 도드라져 보인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야당 집권 10년을 포함해 그렇게 힘을 몰아주었지만 주민들의 생활에 큰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무엇보다도 새로운 패러다임에 맞는 발전 모델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 다가온 총선으로만 보자면 결국 '혁신과통합'이 기대하는 것은 민주당을 포함한 야권단일후보겠지요.
"그렇습니다. 민주당을 포함하되 민주당을 넘어서는. 민주당의 현재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민주당을 혁신시키고 기존의 정치문화를 바꾸어서 민주당의 주요한 동력을 참여시키면서 이루어내는 통합정당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민주당의 행태가 많은 문제를 안고 있고, 정당민주주의가 심각하게 왜곡된 현실이 있긴 하지만, 이 부분들을 다 털고 통합수권정당을 말한다는 것은 사실 비현실적이거든요."
-이 작업이 만약 12월 13일 예비후보 등록 전까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어떻게 됩니까.
"무엇이든 과정이 진행 중이라면 상관없겠죠. 그런데 민주당은 자기를 지키려고 하고 진보정당은 꿈쩍도 하지 않을때가 가장 곤혹스러운 국면일겁니다. 그럴 경우에도 야권연합정당을 제기했던 문제의식을 유지하면서 마지막까지 그런 결과를 만들어내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겠지요. 전북의 정치현실을 혁신과통합의 비중으로 볼 때 전북은 혁신이 80%정도 힘이 실려야 한다고들 합니다. 호남에서는 민주당을 혁신시키는 문제, 민주당의 현재 기득권 주류들을 때로는 청산하기도 하고 때로는 변화시키기도 하는 것, 결국 전북정치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이것이 가장 절박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민주당의 역사는 존중하되 민주당의 현실을 넘어서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현실을 넘어서는 그 자체가 가장 큰 과제 아니겠습니까.
"민주당은 역사적 고비마다 국민경선을 만들어내고 그런 흐름 속에서 기존 당원을 넘어서는 어떤 에너지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그것은 민주당원만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죠. 시민들이 대대적으로 참여한 덕분입니다. 국민참여경선이란 말 자체가 이미 이 정당의 당원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예요.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은 국민경선 안합니다. 당원들 상향식으로 뽑죠. 거꾸로 민주당과 같은 큰 정당들은 상시적으로 명부로 관리하는 당원이 있긴 한데 그 당원이 진보정당만큼 충성심이 강한, 완전히 이념적으로 또 조직적으로 결속력이 강한 사람은 적습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정당의 특장점을 잘 살리면 저는 통합정당이 대중정당으로 급비약할 수 있다고 봅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피해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대표께서는 이미 전주의 덕진구 출마를 밝히셨던데 현실적으로 어려운 결정이 아닌가요.
"이번 총선 출마를 결심한데는 두 가지 계기가 있습니다. 2005년부터 남북관계 일에 참여하면서 총체적인 우리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나서고 싶다는 자아의식이 싹텄습니다. 또 하나 더 중요한 계기는 전북에 살아온 사람으로서 지역구 의원의 비상식적인 복귀과정을 지켜보면서 주민들 중 한사람이자 전북 정치 현실을 바꿔보겠다는 생각을 해온 사람으로서 자괴감 같은 것, 분노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이런 잘못된 질서를 바꾸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오래된 잉어가 우물을 휘젓고 있는데 다른 힘 있는 잉어를 옮겨오는 것 또한 잘못된 것이지요. 결국은 송사리들의 합창이랄까. 함께 그 연못에서 살아오고 누구보다도 그 연못의 문제를 잘 알고 있는 그런 송사리들의 합창이 지금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지금껏 그런 도전이 여러번 있었지만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그동안의 정치가 수직적으로 어떤 슈퍼영웅이 나타나 한꺼번에 해결하는 영웅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집단지성, 시민의 참여, 누구나 다 정치적 판단력과 실천력을 가지면서 현실에 개입하는 SNS(소셜네트워크)시대의 정치행위가 이루어지는 시대입니다. 시대의 패러다임이 바뀌어가듯이 이제 시민사회운동속에서 시민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지역문제를 함께 해결해가는 이웃으로서, 경청하는 자로서의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송사리들의 합창으로 보일지라도, 그래서 횡포를 부리는 오래된 잉어를 내쫒을 수 있다면 새로운 잉어를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자치 네크워크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새로운 변화를 위한 도전은 가치 있지만 궁극적인 지점에는 성공과 실패의 경험이 공존합니다. 성공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까.
"많은 분들이 지역구 선택을 말렸습니다. 실현가능성 때문이겠지요. 겨레말큰사전 작업에 참여할 때 지켜봐주신 고은선생님이 제일 먼저 말리셨습니다. 그때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죽으러 간다'구요. 지금 80년대 학생 운동 때 가졌던 열정이 샘솟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때 아무것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변화를 시켜야한다는 그런 열정입니다. 단지 개인적인 성취를 넘어서서 뭔가 자기 삶의 기둥처럼 너는 무엇을 위해 살았느냐고 할 때 학생운동 시민운동 하면서 살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자기가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는 문제의식을 갖고 정면에서 도전하고 깨지더라도 실천해보고 그런 열정을 담아내며 살았다고 답하고 싶습니다. 성공에 대한 확신도 있지만 실패의 경험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가 지금 저에게는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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