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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엔 컬처 그룹 김광수 명예회장

"나는 미래 내다보는 전북 사람…고향 얘기만 나오면 눈물"

미래엔 컬처그룹 김광수 명예회장이 추진하고 있는 문화사업 중 적자이지만 애착을 갖고 발행하고 있는 '현대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안봉주(bjahn@jjan.kr)

서울시 서초구 미래엔 컬처그룹 김광수 명예회장(87)의 집무실엔 문기(文氣)가 어렸다. 방 입구 사각 유리창 안에는 보물 398호 월인천강지곡 영인본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집무실엔 추사 김정희의 원본 편액과 강암 송성용의 목각글씨가 고아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또 책장엔 현대문학 창간호 영인본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아, 역시 우리나라 최고의 출판사구나!"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젊은 시절 영화배우 뺨치던 수려한 용모가 그대로 남아있는 김 회장은 출판인으로의 삶부터 정치 역정, 미래에너지 산업 등에 대한 생각을 2시간 30분 동안 차분히 풀어냈다. 인터뷰 도중 장손이자 미래엔 대표인 김영진 사장이 들어와 거들었다.

 

- 안녕하십니까.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매일 아침 8시 30분에 집에서 나와서 9시 30분이면 회사에 도착합니다. 신문을 정독하고 회사 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아요. 결재는 안하지만 직접 의논하고 상의하죠. 정오에 친구들하고 점심을 하고, 같이 목욕하는 게 즐거움입니다. 지금도 책은 매일 읽어요. 매달 일본 종합잡지 하나 읽고…. 책밖에 읽는 게 없어요."

 

- 대한교과서는 우리나라 교과서 출판역사의 대명사인데 언제'미래엔(Mirae N)'이라 바꿨습니까?

 

"지난 2008년이 대한교과서 창립 60주년이었습니다. 60년 동안 할아버지에서 너희들까지 3대에 걸쳐 했으니, 이제 모든 것을 일신한다는 뜻에서 이름을 한번 지어봐라 했어요. 그래서 미래엔이라 지었는데, 교육이라는 게 항상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회장님은 대한교과서와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요?

 

"나는 원래 무주 구천동 무지랭이였어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강의록'을 들으며 독학으로 중학과정을 준비했어요. 부모님한테 강의록 교재비 3원을 받아 돗자리 밑에다 숨겨 놨었어요. 그걸 가지고 경성(서울)으로 올라갔지. 일자리를 알아 보다가 결국 집안 아저씨(愚石 김기오 선생으로 김 회장의 양아버지)댁으로 찾아갔어요. 문화당이라고 출판인쇄공장을 했는데 거기서 급사 일부터 시작했죠. 1948년 아버님이 대한교과서주식회사를 창립했고 나도 창립회사의 일원이 됐어요."

 

- 직접 경영하시면서 보람도 있고 어려움고 있었을 것 같은데요?

 

"내가 육군본부 조달청 예산담당관으로 임명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님이 느닷없이 임종을 하셨어요. 예편해서 주주의결을 거쳐 상무취체역으로 선임되었어요. 당시 우리 회사는 교과서 도서 전문출판사업체로서 꽤나 유명세를 탔어요. 보람있었던 것은 그 때만해도 '가로짜기'활자체가 생소했는데'대교체'라는 것을 개발했고 영한사전에 쓰일 전용체도 개발한 일입니다. 황소처럼 밀어 붙여 조판기술에 일대 혁신을 일으켰죠. 그런데 의욕만 앞서다가 산업은행으로 부터 4년간 법정관리에 묶이고 말았습니다. 그 때 여성 채권자에게 머리채를 잡히기도 하고 잠깐이지만 자살 충동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 제가 어렸을 때 '새소년'잡지를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김광수 회장(왼쪽)이 조상진 선임기자에게 목정문화상을 제정하게 된 계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안봉주(bjahn@jjan.kr)

"그것은 순전히 내 창안이예요. 잡지가 나오자 인기가 대단했어요. 당시 순수 어린이 교양지로는 새소년이 유일했으니까. 그런데 어깨동무라는 잡지가 모 여사(육영수)의 힘을 빌어 회사를 냈어요. 그 사람들이 힘이 있어서 판로가 어려워져 문을 닫았죠."

 

- 1965년 전주에 새한제지회사를 만드셨는데 그것이 오늘날 전주제지의 모태입니까?

 

"5·16군사혁명 이후 물자가 모자랐어요. 우리 회사도 사세는 점점 커져 가는데 용지수급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어요. 매년 용지난을 겪느니 차라리 제지회사를 설립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습니다. 마침 전주지역에서 제지공장을 유치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외자도입 승인을 정부에 요청했는데 정부가 승인을 안해줘요. 아마 그 때 내가 정치를 알았더라면 재벌이 되었을 겁니다. 당시 장기영 경제기획원장관이 정치자금 4천 몇백만 원을 가져오라고 그래요. 3년을 끌다 200만 불 승인이 나서 전주공단에 공장부지를 정하고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정부시책이 바뀌고 2만 평부지의 매입자금을 지불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때마침 이병철씨가 중앙일보를 창간했어요. 전국적으로 용지가 부족한 때였는데 만나자고 해요. 10분 만에 OK했는데 역시 이병철씨는 판단력이 대단해요. 다만 조건이 하나 있다. '전주를 떠나서는 안된다'고 했어요. 당시 공장을 울산으로 옮겨가려고 했는데 전주에 남게되었지요."

 

- '현대문학'은 우리 문학사의 자랑입니다. 단 한차례의 결호도 없었고 기라성같은 문인들을 배출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순수 문예지 창간이 쉽지 않았을텐데요?

 

"우리 아버님이 대단히 폭이 큰 사람이예요. 학교는 국민학교만 다니셨지만 일제때 야학, 신간회,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셨어요. 또 해방 이후 영리에 구애받지 않고 아동문학, 조선교육, 소년, 현대문학 등 4가지 잡지 발행을 주도하셨어요. 나는 군에 있었는데 아버님이 부산에 계실 때 고향이 같은 오영수(吳永壽)선생을 만난 모양이에요. 그 때 권유를 받고 조연현 창간주간, 오영수 편집장, 이렇게 해서 창간을 했습니다."(현대문학은 지난 해까지 570여 명의 문인들을 배출했다. 현대문학사의 수레바퀴 역할을 한 셈이다. 그리고 현대문학상은 시 54명, 소설 56명, 평론 44명, 희곡 11명 등 165명이 수상했다.)

 

- 조-부-손 3대가 이어오고 계시지만 경영 측면에선 밑빠진 독에 물붓기가 아닐까 싶은데.

 

"아버님은 현대문학 창간호(1955년 1월호)가 발행되고 석달만에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현대문학은 잘 팔렸어요. 문학하는 대학생들이 현대문학을 옆에 끼고 다니지 않으면 대학생이 아니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현대문학은 60년 가까이 되었지만 지금도 적자예요. 대한교과서와 전북도시가스, 서해도시가스에서 한달에 각각 1000만 원씩 매년 3억6000만 원을 지원하고 있어요. 그것은 왜 그러냐? 아버님의 유업이고 내 시대에도 계속해야 할 문화사업이니까요."

 

- 회장님은 전북의 문화창달을 위해 목정문화상을 제정하시고, 도내 최초로 목정문화재단을 설립하셨습니다. 계기가 무엇입니까?

 

"외부 사람들은 우리 전라도를 예향이라고 해요. 그러면서도 소리하는 국창 몇 사람 빼고는 존재가 별로 없어요. 도민들의 특기를 좀 살려야 할 것 아니냐, 해서 문화상을 제정했습니다. 문화재단을 만든 것은 개개인들이 인심을 써서 문화상을 만들었는데 그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고, 해서 재단을 만들었어요. 내가 죽더라도 재단이 관리하도록 한 거죠. 그리고 미래의 인재를 키우자는 뜻에서 매년 고교생 대상의 백일장 미술실기 음악콩클 대회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 이제 정치분야로 넘어가겠습니다. 무·진·장 지역구에서 1973년 제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신 이래 5선 의원을 하셨는데 정치 입문의 계기는 무엇입니까?

 

"나는 정치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녜요. 정치할 생각도 없었어요. 나는 국회의원 하기 전에도, 내가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무주에 라디오를 보냈어요. 또 내가 책장사하기 때문에 새소년을 각 면에 돌렸어요. 시골아이들이 읽을거리가 없을 때여서 반품되어 온 것을 보내줬더니 그렇게 좋아하고, 책이 오는 날은 동네잔치가 됐어요. 또 청년들은 신지식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어요. 나는 무주 청년들이 구천동에서 캠프를 여는데 건국대 농과대학 교수 등을 초빙해 줬어요. 10년 동안 계속했어요. 무주지역 청년들의 요청도 있고 해서 8대와 9대 민주공화당에 공천을 신청했는데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어요. 그런데 이상한 전화(이후락 중앙정보부장으로 짐작)가 걸려왔습니다. '공화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할 의사가 없느냐'는 겁니다. 나는 무조건 발로 뛰었고 무주군민의 76%라는 압도적인 표를 얻어 당선됐습니다. 지금도 무주에 가면 30대 넘는 사람은 나와서 나와 손잡고 갑니다."

 

- 20년 가까이 정치활동을 하는 동안 기억에 남는 일이 많으셨을텐데요?

 

"그 당시 정치인의 역할이라는 게 예산 많이 따오는 것밖에 없었어요. 무진장 지역은 전기 안들어가는 곳이 대부분이어서 전기 넣어주고 전화 놓아주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한번은 진안에 오후 5시쯤 갔더니 '우리 눈에 불 좀 켜주세요'하는 거예요. 종일 밭에서 일하고 집에 들어오면 밥을 지어야 하는데 캄캄한 거지요. 그래서 직접 총리공관으로 김종필씨를 찾아가 장시간 면담 끝에 그 이듬해 전기를 넣어줬어요. 장수도 그랬고…. 또 내가 교체위원이어서 무진장 지역에 정읍보다 먼저 우체국을 지었어요. 나는 국민의 민정을 잘 반영시켜 주는 게 내 임무다 생각하고 10호 이상 동네를 다 돌았습니다. 그게 꼭 3년 걸리더라구요."(김 회장은 세비를 타서 써본 적이 없다고 한다. 대부분 사재(私財)로 주민숙원사업을 해결하고 생색도 내지 않았다.)

 

- 황인성 전 총리와는 막역한 사이로 알고 있는데요.

 

"그 친구는 무풍면 증산리 위아래 동네에서 살았고, 동네에서 초등학교 동기생이 우리 둘 밖에 없었어요. 황인성이는 사람이 진지하고 진실하고 자기개발을 굉장히 한 사람이에요. 군에서도 순전히 노력으로 좋은 평을 받았어요. 한때 지역구 확보 문제가 없지 않았지만. 작년에 죽기 전까지 내 사무실에 가끔 들렸어요."

 

- 회장님은 일찍 에너지산업에 눈을 뜨신 것 같습니다. 전북도시가스를 발족시켰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

 

"에너지 산업은 미래 성장산업이고 정부 주력산업입니다. 조철권 지사 땐데 그 때는 대한민국이 막 도시가스를 시작할 땝니다. (당시 대한교과서는 도시가스 사업 진출을 기획하면서 수익성 논의를 하고 있었다.) 한번은 지사를 찾아가 '도시가스 사업이 어떻게 됐느냐?'고 물으니까 '아무도 신청을 안했다'고 그래요. '신청자가 없어 상공부에 반송해야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신청해야겠다'고 했더니 손을 거머쥐면서 '고맙다'고 그래요. 그렇게 해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유기정씨가 '내가 전주지역 국회의원인데 어떻게 무주사람에게 주느냐'고 항의해 내가 '전주사람만 전북사람이고 무주사람은 전북사람 아니냐?'고 했죠.(웃음) 운이 좋았던 거죠."

 

- 이번에 미래엔인천에너지를 설립하셨던데요?

 

"우리가 출판에서 에너지로 사업을 다각화하고 있습니다. 올 8월에 설립했습니다. 인천에너지는 쓰레기를 활용하는 지역난방으로 인천시 남동지역에 집단에너지를 공급하는 회사입니다."

 

- 건강비결이 궁금합니다.

 

"움직일 수 있는 범위에서 다 움직입니다. 조금 걷고… 구부렸다 폈다 하고 그래요. 하체에 힘이 없으니까."(김 회장은 그동안 담석과 전립선암 등 수술을 3번이나 받았다. 하지만 2주에 한번 꼴로 골프장에 나가 15홀까지 돈다고 김영진 사장이 귀띔했다.)

 

- 고향 무주에는 가끔 다녀오시는지요. 끝으로 도민들에게 한 말씀 주시겠습니까?

 

"나이가 들수록 고향 생각이 납니다. 고향 얘기가 나오면 눈물이 나오려고 해요. 그런데 내가 이런 얘기해도 좋을지 모르겠으나 전라북도에도 여야가 있어야 합니다. 정당이라는 게 국민을 대표하는 정당이라야지 정당을 대표하는 정당이어선 안됩니다. 한 예를 들겠어요. 9대 때는 국회의원이 전북에서 공화당 4명, 신민당 4명, 무소속 4명이었는데 서로 얘기를 안해요. 그래서 내가 우리가 국가를 위해서 일한다고 나왔으니, 도민들을 위해 한달에 한번씩 모입시다. 우리 계를 합시다, 해서 강제로 모였어요. 우리 전라북도에도 야당 일색이어선 곤란합니다. 적어도 여당을 대표하는 사람이 1-2명이라도 있어야 도민의 의사를 정부여당에 전할 것 아닙니까."

 

(인터뷰가 끝날 무렵 김 회장은 "나는 전라북도 사람이다"면서"내 집안이 잘돼야 남의 집안도 잘되는 법"이라고 말했다. 그런 뜻에서 그런지 17일에는 전북대에 발전기금 10억 원을 내놓았다. 또 미수(米壽·88세)잔치를 하지 않는 대신 고향 무풍중학교에 1억 원, 무주군장학재단에 2억원을 기부키로 했다. 이달 29일 열리는 무풍면 체육대회 비용 2500만 원도 쾌척했다.)

 

/ 대담= 조상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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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진 chos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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