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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관 안에서 이념상 추구…사회적 책무 지켜나갈 것”

한국 첫 ‘세계보도사진’ 2회 수상  성 남 훈  씨

▲ 한국인 최초로 ‘세계보도사진’(wpp)을 두 번이나 수상한 다큐멘터리 사진가 성남훈씨가 렌즈 너머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안봉주기자 bjahn@
아직도 생생하다. 피난길의 한 소녀가 금세라도 눈물 터뜨릴 것 같은 까만 눈망울로 응시하던 그 사진을 보았을 때의 감동이. 그 밑에 작가 이름이 쓰여 있었다. 성남훈.

 

90년대 중반, 그 이름은 낯설기 만한 세계의 분쟁 지역 난민들을 담아낸 흑백 사진들로 한국의 관객들과 만났다.

 

그리고 지금 성남훈(48)씨는 우리나라의 몇 안 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이면서 한국인 최초로 ‘세계보도사진’(wpp)을 두 번이나 수상한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

 

세계보도사진은 56년 역사를 가진 포토저널리즘의 가장 권위 있는 상이다. 1년에 한번 세계의 보도사진 기자들과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들은 이 의미 있는 상의 수상자 반열에 오르기 위해 나선다. 성남훈은 이미 99년에 일상뉴스 부문에서 수상했고, 지난 2009년 다시 인물사진 부문에서 수상했다. 이번 수상작은 중국의 간쯔현 아추가르 불교학교에서 배우고 수도하는 비구니를 찍은 사진이다.

 

분쟁지역의 난민들을 통해 역사의 이면에서 소외당한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주목해온 그가 <연화지정(蓮花之井)> 이란 주제로 작업한 연작의 결실이다.

 

그는 다시 ‘환경’을 주제로 우리 삶의 공간과 의식의 저변을 훑기 시작했다. 이미 적지 않는 작품들이 우리의 의식을 깨우고 있다.

 

“한국에 들어와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지니 다큐 사진가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그는 격동의 80년대를 치열하게 살지 못했던 마음 빚을 갚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말 그는 전주의 시민단체가 요청한 강연에 기꺼이 달려왔다. 이어지는 프로젝트 참여로 바쁜 일상이지만 ‘진안 촌놈’을 고향에서 불러준 것만도 영광이라며 활짝 웃었다.

 

-여전히 전사 같은 차림이시군요.(웃음) 90년대 초반 ‘루마니아 난민’을 주제로 한 전시회를 봤습니다. 그 후로도 매체를 통해 강렬한 이미지의 사진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이‘유민의 땅‘이란 프로젝트의 연작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지요. 그 작업을 꽤 오랫동안 해오셨지요.

 

“90년부터 2005년까지 했으니까 15년 작업입니다. 일단 마무리 했지만 끝났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전쟁과 기아, 자연재해로 신음하는 현장이 아직도 세계 도처에서 이어지고 있으니까요.”

 

 

-사진집으로도 나온 ‘유민의 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프랑스에서 사진 공부를 하던 90년대 초반, 파리 근교에서 루마니아 난민들을 만났습니다. 파리에서 제가 살고 있던 랭스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밤에 기차 창밖으로 매우 생경한 풍경을 보게 되었어요. 호기심에 이끌려 그들을 찾아갔지요. 80년대 말 루마니아의 사회주의가 붕괴된 이후 파리로 온 난민들이었습니다. 자기 땅에서 내몰려 집시가 되어 떠도는 그들은 고단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돈을 모아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꿈과 희망을 잃지 않았어요. 저에게는 큰 충격이자 감동이었습니다. 이방인으로서의 어떤 동질감 같은 것도 있었지요.”

 

 

-세계의 분쟁 지역에 눈을 돌린 것도 그때부터인가요.

 

“그렇습니다. 루마니아 집시들을 만나면서 국가 간 민족 간 분쟁과 그로부터 소외되는 사람들의 고통에 눈을 뜨게 되었어요.‘유민’이라는 화두가 제 가슴에 들어온 겁니다.”

 

 

-본격적인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경험이 거기서부터 시작되었군요.

 

“그런 셈입니다. 그 뒤 운 좋게 사진에이전시인 ‘라포(Rapho)’에 들어가면서 저의 관점과 의식이 더 확장될 수 있었지요. 운이 좋았습니다.”

 

 

-‘라포’이야기가 나왔으니 성공기가 궁금한데요.‘라포’는 ‘파리의 키스’로 널리 알려진 로베르 두아노 같은 세계적 사진가들이 속해 있는 유럽의 대표적인 사진에이전시인데 입성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습니다.

 

“사진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라포’에 들어가는 일이 큰 꿈이었죠. 마침 제가 다녔던 ‘이카르 포토’에는 라포 회원들이 강의를 나왔었는데, 제 작업을 눈여겨 보아주었습니다. 그러나 정원이 정해져 있어 일단 자리 나기가 어려웠는데 로베르 두아노가 작고하면서 자리가 났어요. 그때 마침 저는 한국에 들어와 전시했던 루마니아 난민들과 소록도, 또 다른 이민자 이야기 등 3개 주제의 작업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라포 회원들이 권해서 포트폴리오를 냈는데 줄곧 제 작업에 냉랭하기만 했던 라포 디렉터가 그 포트폴리오를 보더니 ‘내일 니 문서를 설명할 수 있는 실력 있는 통역자와 함께 오라’고 하더군요. 사인을 해야 한다며. 라포의 회원이 된 겁니다.”

 

 

-그때 심경이 어떻셨나요.

 

“정말 세상이 다 끝난 줄 알았습니다. 이제 가고 싶은 곳, 찍고 싶은 것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희열감에 얼마나 벅차던지. 사인을 하고나서는 파리 시내까지 걸어오는 30분 내내 공중을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바로 달라졌어요. 딱 6개월 잘되더군요. 선배들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꿈같은 시간이 지나니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경기도 안 좋아져서 사진 판매도 저조하고. 다시 갈등에 빠지게 되었지요.”

 

 

-일종의 돌출구가 필요하셨겠습니다. 그때쯤 한국에 들어오시지 않았나요.

 

“그때 큰 실험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두 개의 시장을 개척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프랑스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역이었죠. 그래서 한국에 들어와 머무는 시간을 늘렸습니다. 그러다가 97년쯤 결혼을 하려고 한국에 들어왔는데, 라포에서 연락이 왔어요. 아시아가 심상치 않으니 아예 그쪽에 남아 아시아권을 맡으라는 것이었죠. 저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졌던 셈입니다.”

 

 

-남들은 한 번도 잡기 어려운 기회를 여러 번 잡으셨군요. 오늘이 있기까지 극적인 상황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연극배우에서 사진가로 길을 바꾸었던 것도 그렇고요.

 

“연극도 열심히 했었습니다. 진안 촌놈이 어찌어찌하다가 경영학과를 들어갔는데 영 흥미가 없었어요. 예술에 대한 갈망은 크고. 그러다가 대학 극단을 들어갔는데 숨통이 트이더군요. 졸업 후에는 선택의 여지없이 기성 극단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사진을 공부하고 싶어 유학을 떠나게 되었지요.”

 

 

-국내에서도 사진 공부를 할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았습니까.

 

“일단 나를 둘러싸고 있는 여건을 극복하고 싶었어요. 대한민국에서는 나이 열아홉살이면 인생의 50%가 결정되어버리지 않습니까. 어느 지역 출신에 어느 대학이냐에 따라 서열이 정해지죠. 더구나 저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보면 자신감이 없었어요. 존재감도 없는 것 같고. 나란 존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늘 고민했습니다. 연극하는 선배들과 협업 하면서 자아를 발견하기도 했지만 학연 지연으로 엮어지는 한국사회의 견고한 구조 안에서는 성장의 한계가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다시 작품 이야기를 좀 해보죠. 유민의 땅 이후에 새로 잡은 주제가 궁금합니다.

 

“유민의 땅을 끝내는 시점에서 뒤돌아보니 벅찬 부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열정과 의욕이 앞서 있어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더 크게 다가오더군요. 저의 담론이 개인적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것이 아니었었나 싶어요. 그러면서도 감사한 일은 개인적으로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조금 더 밀착해서 볼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환경과 관련된 것들이죠. 2006년부터 시작했는데, 가능하면 이 작업은 개인적으로 성취해나가기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집단의 화두로 풀어나가는 작업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환경문제는 갈수록 예측하기 어려운 대상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큐멘터리 사진과 같은 기록의 역할이 더 큰 것 아닐까 싶습니다.

 

“바로 그 점입니다. 사실 핵 같이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은 예측이 가능하지만 자연 재앙과 같은 것들은 전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환경 문제는 단순히 찍어서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류학적 인문학적 관점을 어떻게 조합하고 어떤 담론으로 전개해갈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공동의 과제로 삼아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찍어온 사진들을 보면 시대적 역사의 기록이나 사회적 발언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는데, 다큐의 특성을 고려한다 해도 개인의 철학이나 가치관이 맞닿아 있어야 가능한 작업 아니겠습니까.

 

“제게는 시대적 빚이 있습니다. 제가 81학번인데요. 당시 한국사회의 정치적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습니까. 그런데 저는 극단에서 활동하면서도 사회참여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거든요. 기성극단에 들어가서도 사회변혁운동으로부터 벗어나있었죠. 연극 한다는 핑계로 잘 비켜 다녔던 셈입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카메라의 렌즈를 세상에 대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어요. 유학생활을 시작한 80년대 말 90년대 초에 동유럽이 무너지면서 격동의 시대를 맞게 되었고요. 카메라를 메고 보니 이제는 결코 비켜갈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어요. 내 나라에서 먼저 껴안았어야 할 사회적 책무가 더 뜨겁게 와 닿았습니다. 세계 도처의 분쟁지역을 찾아 나선 것도 이런 마음의 빚이 강하게 작용했을 겁니다.”

 

 

-그런데 분쟁지역에서 담아온 사진들을 보면 전쟁의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그 처절하고 치열한 상처의 흔적 보다 소외와 차별 같은 휴머니즘의 이미지가 더 강하게 와 닿습니다.

 

“그럴 겁니다. 제 경우는 루마니아 집시들을 만나면서 사진의 시각적인 것을 익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을 보는 인문적 사회적 관점을 키울 수 있었거든요. 역사의 전면이 아니라 그 이면에 더 주목하게 하는 그런 의식이 싹튼 겁니다. 그래서인지 전쟁터에서도 저는 그 사회 안에서 다시 소외받는 계층과 여성, 어린아이들을 주목하게 되더군요.”

 

 

-치열하고 처절한 분쟁지역의 난민들을 찾아다녔던 지금까지의 작업이 한국과 아시아권으로 옮겨온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 한국사회 역시 정치적 사회적 치열한 현장이 시시각각 도처에서 이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앞으로의 작업이 궁금합니다.

 

“실제로 틀이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겁니다. 한국에서의 작업 역시 지금까지 견지해온 제 가치관과 철학의 틀 안에서 발현될 것이고 그 바탕은 휴머니즘에 있습니다. 사회적 욕망과 개인적 욕망이 부딪치는 경계의 풍경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일전에 광화문에서 있었던 어떤 종교집단의 행사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도저히 상식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그런 풍경이지만 그런 행위가 어떤 사회적 문제를 가져올 것인지는 알죠. 사고의 폭력성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지, 한 사회의 발전을 거꾸로 돌려놓는지를 많은 사람들이 인식 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제 사진이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노숙자나 도시의 개발 현장의 풍경들을 담는 작업도 같은 연상에 있겠지요.

 

“물론입니다. 한국사회가 소비사회로 들어가면서 그 안의 강력한 구조 안에서 우리는 편리라는 형태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만 자본 같은 거대한 권력에 묶이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 거대 권력이 행사하는 암묵적 폭력을 담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의 삶과 직결된 문제니까요.”

 

 

-그동안의 작품 활동만으로도 이미 정치적 사회적 변혁 운동의 중심에서 역할을 하고 있는데요. 한국사회에서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살아간다는 것의 사회적 책무로 받아들여도 좋을까요.

 

“가끔씩 제 작업을 놓고 혹시 가치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으로 판단하는 것은 아닌가 들여다 보게 됩니다. 고백하건대 지금은 오히려 이념에 많이 빠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가치의 기준도 달라지니까요. 내 가치관과 철학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이념상으로도 추구하는 그런 작업이 최선의 선택입니다. 그것이 사회적 책무라면 더 흔들림 없이 해나가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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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kime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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