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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월주 큰 스님 "세간을 떠나 佛法 찾는 건 토끼의 뿔을 구하는 것과 같다"

▲ 송월주 큰 스님이 국제개발구호 비정부기구(NGO)인'지구촌 공생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안봉주기자 bjahn@
송월주(宋月珠·77) 스님이 회주로 있는 영화사(永華寺)는 서울 구의동 아차산 아래 자리 잡고 있다. 혹한이 물러가고 봄빛이 내리쬐는 가운데, 평일인데도 절을 지나 산으로 향하는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대웅전에 들러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스님을 뵈었다. 스님을 찾은 이유는 조계종 총무원장을 두번이나 역임한 불교계의 원로여서만은 아니었다. 이제 세수 77살로 왕성하던 사회활동을 정리할 연치(年齒)인데도 어려운 사람을 돕는 등 자비행(慈悲行)을 실천하는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했다. 더불어 한국 불교계의 산 증인으로서, 불교정화운동이며 실천과정, 깨달음의 사회화 등에 대해서도 듣고 싶었다.

 

 

 

- 안녕하십니까. 굉장히 바쁘신 듯한데 최근 근황을 들려주시죠.

 

"반갑습니다. 요즘 역점을 두고 있는 일은 '지구촌 공생회' 활동입니다. 일본국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삶의 터를 제공하는 나눔의 집'그리고 사회적 기업과 일자리 창출사업을 하는 '함께 일하는 재단(예전의 실업극복국민재단)'일도 계속하고 있고요. 10일에는 공생회 관계로 아프리카 케냐에 다녀 올 예정입니다. 1년에 세번 정도 현지에 나갑니다."

 

 

- 김제 금산사에는 자주 다녀오시는지요?

 

"금산사는 나의 고향과 같은 곳입니다. 초파일과 설날 추석에는 꼭 다녀옵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두번 가서 3-7일 정도 머물다 옵니다."

 

 

- 제가 스님의 일생을 편의상 3단계로 구분해 봤습니다. 출가 전(出家 前)(1935-1956), 수행 및 종단정화와 개혁(1956-1988), 사회활동(1998-현재)단계 입니다. 먼저 사회활동을 하게 된 계기부터 여쭤보겠습니다.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입니다. 불교가 부처님의 법을 전하고 올바른 지혜를 갖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수행해서 확신을 얻고 불교 교리를 연구해서 논리적 체계를 얻었다면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는데 그칠 게 아니라 중생들에게 진리를 전하고 고통을 덜어줘야 합니다. 원효스님은 귀일심원 요익중생(歸一心源 饒益衆生·본래의 청정한 마음으로 돌아가 널리 중생에게 이익을 준다)이라고 했습니다. 또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위로는 지혜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한다)"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 불교는 그 동안 귀일심원과 상구보리에 치우쳐 요익중생과 하화중생을 소홀히 했습니다."

 

 

- 최근에는 지구촌 공생회 활동에 역점을 두고 계시는데.

 

"지구촌 공생회는 국제개발구호 비정부기구(NGO)입니다. 민족의 울타리를 벗어나 지구촌 차원의 나눔 운동입니다. 우리나라는 이제 도움을 받는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성장했지만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국가의 상황은 지금도 처참합니다. 6·25 전쟁 뒤 한끼 먹기도 힘들었던 과거 우리의 굶주림이 그곳에 그대로 있습니다. 글로벌 시대에 국가와 민족을 넘어 돕는 것도 우리의 의무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지구촌 공생회는 천지여아동근(天地與我同根·세상이 나와 더불어 한 뿌리) 만물여아일체(萬物與我一體·모든 존재는 나와 더불어 하나)라는 가르침의 실천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 구체적인 활동상황을 소개해 주시죠.

 

"캄보디아 등 8개 국에 진출해 식수개발과 교육지원, 지역개발을 돕고 있습니다. 식수가 부족한 캄보디아 몽골 등 4개국에서는 생명의 우물'1658곳을 만들었습니다. 내년까지 2300개를 완성할 계획입니다. 이들 나라는 오염이 심한 웅덩이 물을 식수로 사용해 많은 아이들이 피부병과 장티푸스 등 수인성 질환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또 교육분야는 7개 국에 유치원 초·중학교 등 28개의 교육시설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캄보디아 도로 건설을 비롯해 몽고와 케냐에서 농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 필요한 재원은 어떻게 마련합니까?

 

"개인회원도 있고 스님모임, 기업모금, 지역단체 등에서 후원해 줍니다. 후원회원 7000여 명이 공생회 활동을 지원해 줍니다."

 

 

-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도 봉사활동을 펴는 것을 봤습니다. 특히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님과 개신교 강원용 목사님과는 단짝인 것 같던데요.

 

"북한동포를 돕기 위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 활동, 지역감정 해소, 공명선거실천운동 등을 이 분들과 함께 했습니다. 두 분다 나이가 나보다 한참 위였지만 같이 해야 상승작용이 있어서 자꾸 뭉치게 된 것 같습니다."

 

 

-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등을 하면서 북한에 자주 다녀온 걸로 아는데요?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대북지원을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불교계 교류와 인도적 지원을 위해 북한에 10여 차례 다녀왔습니다. 30여 단체가 모인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을 통해 북한에 약 2000억 원 상당(매칭펀드 포함)의 물품을 도와줬을 겁니다."

 

 

- 북한의 불교는 어떻든가요?

 

"북한에는 65개의 전통사찰이 보존돼 있고 스님이 300여 명이 있다고 합니다. 신도는 약 1만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스님들은 우리처럼 삭발염의(削髮染衣·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음)를 하지 않습니다. 또 주체사상이 곧 부처님 사상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 이제 종단개혁 단계로 넘어가겠습니다. 스님은 1980년 17대 총무원장에 취임하셨는데 그 해 신군부에 의한 10·27 법난(法難)으로 6개월만에 물러났습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개운사에서 아침 공양이 막 끝날 무렵, 보안사 직원이 찾아왔습니다. 나를 지프차에 태워 처음에는 총무원장실로 갔다가, 다시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데려갔습니다. 가사장삼을 벗기고 푸른색 미결수복을 입혔습니다. 그곳에서 23일간 조사를 받았습니다. 구속된 상태에서 강압에 의해서 총무원장 직을 사퇴했습니다."

 

 

-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요?

 

"법난이 있기 전에 총무원을 담당하는 보안사 직원이 '구국 영웅 전두환 장군을 대통령으로 추대합니다'는 성명서에 서명을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당시는 각계에서 그런 지지성명이 쏟아질 때입니다. 나는 '정교(政敎)분리 원칙을 지켜야 한다'면서 거절했습니다. 그 뒤 두차례 더 요구가 있었습니다. 또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 때 종로경찰서장이 못가게 하는 것을 뿌리치고 갔습니다. 성금을 모아 광주에 가서 희생자를 위한 법회를 열고 병원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 9월경 이철희·장영자씨 부부가 여의도에서 (전두환 장군을 위한) 호국기도회를 했으면 했는데 그것도 거절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법난이 일어났습니다."

 

 

- 그 후 자의반 타의반으로 3년간 해외 순례포교에 나섰는데요.

 

"1년 동안은 억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미움이 엷어질 무렵 지명스님의 초청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미국과 캐나다, 유럽에서 순례포교를 하고 인도와 동남아시아, 일본의 불교계를 둘러봤습니다."

 

 

- 그 때 느끼신 게 많았습니까?

 

"서구문명의 모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지나친 물신주의가 문제이긴 하지만 무질서 속에서도 분명한 룰이 있었습니다. 우리처럼 작은 나라에서 아웅다웅 싸울 일이 아니라 먼 안목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기간은 내 자신의 내면은 물론이고 해외문명과 불교를 살피면서 새롭게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 불교는 전통적으로 참선 위주의 수행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데 그것도 중요하지만 대중의 고통을 멀리해 왔다는 자각도 들었습니다. 소중한 재충전의 시간이었죠."

 

 

- 귀국 후 다시 28대 총무원장에 뽑히셨는데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은데요?

 

"14년만에 복귀한 것입니다. 법난으로 한 차례 좌절되었지만 나는 이미 종단개혁을 위한 청사진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수행할 자질이 없는 이들이 제대로 된 교육과 수행도 하지 않은 채 가사장삼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승가고시제를 통해 일정 자격을 갖춘 스님에게만 법계를 주도록 했습니다. 그 때 환속해서 승적만 있는 3000명이 넘는 승려를 제적시켰습니다. 또한 총무원과 교육원 포교원을 전문화시키고, 총무원장과 종회 의원의 주요직책 겸직금지, 승가교육체계 정비 등을 했습니다. 총무원장이 본사와 말사 주지를 임명하던 것을 본사 주지는 소속 스님들의 산중총회에서 추천하도록 하고 말사 주지는 본사주지가 총무원으로 품신하여 발령했습니다. 교구본사 자치제를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사회복지재단과 승가대학교를 설립하고 나눔의 집을 설립했습니다."

 

 

- 스님은 종정중심제 보다 총무원장 중심제를 선호하시는데…

 

"종정은 종단의 법통을 계승하는 권위의 상징입니다. 종정 중심제의 폐해는 종단사에서 충분히 드러났습니다. 만약 종정이 종단행정에 나서면 법률소송까지 종정 이름으로 하고 잘잘못의 대상이 되는 등 권위의 손상이 불가피합니다. 종단은 총무원장이 책임지고 이끌어야 합니다."

 

 

- 이제 출가 전 단계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출가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6·25 전쟁은 나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시 우리 마을에는 130호 800여 명이 살았고 면민은 8000명이었는데 전쟁이 나면서 서로 이념 갈등으로 총부리를 겨누는 것을 봤습니다. 또 전쟁 중 가산이 몰수당하고 포격으로 화염이 치솟는 등 흉흉한 분위기를 접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전쟁이 끝나던 1953년 말 나는 국회의원 선거에 낙선한 셋째형의 서울집에 있었는데 우연히 조계사에 들렀다가 친구를 만났습니다. 오랫만에 만난 그 친구는 놀랍게도 스님이 돼 있었습니다. 김혜정스님이 그 이인데 1954년 초 한 달 정도 쉴 요량으로 스님이 수행하던 법주사로 갔습니다. 거기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습니다. 출가하겠다고 발심(發心)을 하게 된 것입니다."

 

 

- 스승인 금오스님과의 일화를 들려주시죠.

 

"은사님은 하도 엄한데다 화엄사 주지를 지내 '지리산 호랑이'로 불렸습니다. 출가 초기 은사님이 화엄사 주지로 있을 때 내가 교무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마주치게 되었는데 허리를 숙여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 때 은사는 '숙여라, 깊이 숙여라, 더 숙여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내가 어리둥절해 하자 스님은 대뜸 '네 놈 전생에 아만(我慢·스스로 높은 척하는 교만)'이 탱천해 있어. 그걸 버려야 돼"하셨습니다. 남에게 자신을 낮추는 하심(下心)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때는 불만스러웠는데, 살면서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전북의 최대 현안인 새만금사업이 한때 환경문제로 기로에 섰던 적이 있는데 스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새만금 개발을 둘러싼 갈등이 한창일 무렵 환경운동에 전념하던 수경스님과 나의 상좌인 도법스님, 그리고 문규현 신부가 찾아왔습니다. 개발을 막아야 하니 도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정보도 없고 전문가가 아니니 좀더 알아보겠다고 했습니다. 그 뒤 자료를 모으고 찬반측 주장을 경청했습니다. 그 결과 새로 조성할 담수호의 수질을 깨끗이 유지하는 등 친환경적으로 개발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국민 합의를 거쳐 상당부분 진행된 사업을 무조건 중단하라는 것은 수술하다 말고 상처를 꿰매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 프로젝트가 국가의 미래를 위한 국책사업인데다 전북 도민 대다수가 원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했습니다. 그렇지만 정부가 만경강과 동진강 수질 개선에 신경을 쓰는 것은 수경스님 등 불교계와 환경단체의 공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 곧 4월 총선이 있고 12월에 대선이 있습니다. 국가를 이끌어갈 지도자의 덕목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우선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소통을 통해 함께 안고 갈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합니다. 또 정책 대안을 제시하고 남북문제도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국제적으로 호혜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그런 정견과 정책을 가진 사람, 말에 일관성이 있는 인물이어야 합니다."

 

 

- 끝으로 불자(佛子)와 도민들에게 좋은 말씀을….

 

"자비행을 해야 합니다. 더불어 함께 사는 이웃의 고통을 덜어주고 베풀고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자비가 부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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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진 chos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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