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민주일보서 출발 전북 일간신문서 30년 외길 / 미당 문학이 좀 더 의미있게 남도록 역할 다할 것 / 내가 아는 미당은 시인일 뿐… 혁명가로 볼 수 없어
 
    우하(又下) 서정태는 시인이자 언론인이다. 미당(未堂) 서정주의 동생이다. 올해 아흔살이다. 지금도 시를 쓰고 있다. 문인이나 언론인에겐 잘 알려져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겐 낯선 이름이다.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미당길 14번지. 미당시문학관 옆 길로 들어서면 나무로 된 커다란 책걸상 모형의 조형물이 나오고 그 아랫길을 지나면 우하정(又下亭)이다. 우하가 살고 있는 집 이름이 우하정이다. 우하는 '질마재 지킴이'다. 지난주 목요일 우하를 찾았다. 우하정 뜰에 들어서니 팽나무와 감나무가 너울 인사를 하며 반겼다. "어르신 계세요?" 하고 들어서니 기다렸다는 듯 반갑게 맞이했다. 허리가 좋지 않아 거동에 불편을 겪는 것 말고는 정정했다. 목소리는 또렷하고 눈매는 형형하며 기억력은 놀라웠다. 사람에 대한 그리움 탓일까.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오전 11시에 인터뷰가 시작됐지만 오후 3시까지 계속됐다. 오래된 인연처럼 스스럼 없이 대해 주었다. 보신탕을 먹자며 심원면 소재지까지 취재기자 일행을 데리고 나갔다. 아흔살인데도 소주를 석잔이나 했다. 불쑥 왔다가 훌쩍 떠나 보낸 이들이 부지기 수였을 텐데도 작별할 때는 못내 아쉬워 했다. 적적해서 그럴까, 가정의 달이라서 그럴까. 부모 생존 여부를 물으며 아이들 데리고 부모 자주 찾아보라고 기자한테 몇번씩이나 당부했다.
-혼자 생활하시는데 적적하실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 사색하고 사람 만나고…. 아침 6시반이 되면 산 꾀꼬리가 울어주고, 밤 9시반이면 소쩍새가 울어주어. 그러니 사는 것 자체가 시(詩)야. 고독을 즐길 수 있어야 해."
-사람에 대한 그리움도 있을 것 같은 데요.
"찾아오는 사람 만나고 마을 사람들과 얘기 나누고…괜찮아. 아들들이 서울로 모시겠다고 하는데 내가 반대해. 시골에 부모를 혼자 놔두면 효도하지 않는단 소릴 들을까 봐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게의치 말라고 했어. 이곳이 좋아."
-그래도 혼자 음식 해 드시고 생활하시는 게 불편하지 않나요.
"방 안에 싱크대 있고 전기밥솥 있고 불편하지 않아. 쌀 10킬로그램이면 70일을 먹어. 이가 좋지 않아 국물이 있어야 하는데 햇감자로 된장국을 만들어 먹으면 아주 맛있어. 미역국도 자주 끓여 먹지."
-집에 우하정(又下亭= '자신을 낮추는 집'이라는 뜻)이란 현판이 걸려 있던데 '우하'라는 호를 갖게 된 연유가 궁금합니다.
"구한말 열네살에 진사벼슬을 했던 염재선생이 계시는데 염재선생 손자하고 내가 친구라서 집에 놀러갔지. 그 때 염재 선생이 '又下'라고 쓰시면서 '마흔살 넘어 네 호로 쓰라'며 주시더라고. 집에 와서 아버지한테 호가 뭐냐고 물었지. 잊고 있다 예순살 넘어 호로 썼어."
미당시문학관 뒷쪽에 미당 생가가 있고 생가 담 하나 건너편에 우하정이 있다. 초가 지붕을 올린 흙집이다. 방 한칸에 앉은뱅이 책상과 이부자리, 냉장고, 전자레인지,싱크대, 텔리비전, 책장이 갖춰져 있다. 처마에는 드림줄이 달려 있다. 우하는 허리가 불편해 드림줄을 잡고 방문을 출입한다. 방문을 열고 마루에서 바라보면 멀리 야트막한 산 자락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부모님과 미당 내외의 산소가 한 눈에 들어온다. 산소 주변(7000여평)에는 국화가 가득 심어져 있다.
-미당이 너무 유명하셔서 어르신은 항상 '미당 동생 서정태'로, 미당의 그늘 아래 사셨는데 불만이 많았겠습니다.
"미당은 미당이고, 나는 나야. 젊을 때야 서운하기도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
-시를 쓰신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내가 시를 쓴 건 미당의 영향이 컸지. 그런데 시에 대해 이야기를 잘 해주지 않았어. 칭찬도 없었고."
-지금도 시작(詩作)을 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300여편쯤 될 걸. (책상을 가르키며) 그 책상 서랍에 들어있어. 시집으로는 한 세권쯤 될 거여."
-그런데 왜 시집을 내지 않으십니까
"시집 내자고 출판사 사장이 지금도 볶아먹어. 그런데 귀찮아. 분류하기도 어렵고. 시집 내봐야 누가 읽어야지. 출판사는 돈을 벌어야 하는데 시집 내봐야 사는 사람이 없어. 부담만 주는 거지. 지금은 (자신을 과시하러) 자비로 출판을 많이 하던데 원래 시집은 자기 돈으로 발간하는 게 아니야."
-1986년엔 '천치의 노래'라는 시집을 발간하셨습니다만.
"천치는 등신이라는 뜻이여. 당시 동아출판사 사장이 내주었지. 해방후부터 1985년까지 약 120편이 수록됐어. 지금은 절판되고 도서관에도 없어."
-당시 미당이 시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해 주시던가요.
"출판사(동아출판사) 사장이 내 원고를 가져간 뒤 형(미당)한테 시집 낸다고 자랑한 모양이더라고. 형이 서문은 누가 쓰느냐고 묻기에 당시 김광균이란 유명한 분한테 부탁했다고 하니까 '내가 써주마' 하고는 시를 가져오라 하더니 읽어보고는 '네 시 참 좋더라' 하더군.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여."
미당은 서문에 '네가 쓴 시들이 부디 명이 길어서 나와 너의 육신이 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오래 살아있는 것이 되기만을 바랜다. 1986년 1월 29일. 미당 서정주.'라고 썼다.
-선운산문학회 고문으로도 활동하시던데요.
"활동은 무슨…. 나이 많이 먹었다고 이름 넣어준 거지."
-어릴 적 미당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옛날엔 칠팔살이면 서당에 가고 제일 먼저 배우는 게 천자문인데 보통 아이들은 반년 걸려야 뗄 수 있어. 그런데 미당은 열흘만에 천자문을 마쳤어. 드문일이지. 동네에서는 '신동났다'고 했고 아버지는 기분이 좋아 잔치를 벌였지. 암기교육이나 마찬가지인데 뛰어났어. 자상하고 인간미가 넘쳤어."
-미당이 시인으로 등단한 계기가 재미있습니다.
"당시엔 독자투고가 신문에 자주 실릴 땐데 연말에 미당도 '벽'이라는 시를 신문사에 투고했어. 그런데 독자투고한 시와 신춘문예 공모작품이 데스크 잘못으로 합쳐져 버렸어. 심사위원들이 심사를 했는데 신춘문예에 합격했다고 연초에 연락이 오더라고. 독자투고 한 것이 등단한 계기가 돼 버렸어. 스무살 때 투고해서 스물한살에 등단한 셈이지."
-미당은 '모국어의 연금술사'라고 비유할 만큼 언어적 재능과 자질이 뛰어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타고난 겁니까, 아니면 노력의 산물입니까.
"내가 한창 기자생활을 할 때, 나 보고 늦지 않으니까 외국어를 배우라고 해요. 그리곤 영어로 대역된 성경책을 주더라고. 난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 공부를 안했지. 그런데 형은 쉰살이 넘어서 영어 러시아 불어 공부를 했어. 그것도 독학으로. 타고난 것도 있지만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겠어. 술 마시고 노래만 부른 게 아니야."
-미당의 시 '자화상'을 보면 '자신을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어떤 의미입니까.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지 않았나요.
"당시 생가 마당에 1000석 노적가리를 쌓아놓을 만큼 잘 살았지. 기름 바른 조기알을 도시락 반찬으로 싸 가지고 갔을 정도였으니까. 스물 세살 때 자화상이란 시를 지었는데 왜정 때부터 논쟁이 일었지. 바람은 헛 것을 뜻해. '아비는 종이었다'는 말도 나오는데 백철 같은 평론가는 '특수계급의 후예인가 보다'고 평했지만 식민지 시절의 백성을 뜻하는 것이야."
-미당은 친일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데 심정이 편치 않으시겠습니다.
"미당이 직접 당하는 심정 보다도 내가 더 편치 않아. 미당은 그런 사람 아니야. 일제가 한창 발호하던 1943년 정읍의 한 여관에 미당과 둘이 숙박을 했을 땐데 '이러다 일본화되는 것 아닌가' 하고 내가 물었지. 그랬더니 미당이 '역사란 그런 것 아니다. 민족이란 쉽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야'라고 하더라고. 친일정신이 있었다면 그런 식으로 말을 했겠어? 일본과 가깝게 지내라고 했어야 맞지. 어느 인터뷰에서도 얘기했지만 미당은 시인이지 혁명가가 아니여. 내가 잘 알아. 이런 일도 있어. 내가 공사판에 숨어지낼 때 군대 소집영장이 나왔어. 그런데 나 보고 '도망가거라'고 그래요. 내가 도망가면 미당이 호주라서 고통을 당할 게 뻔했지. 그런데도 도망가라고 한 걸 보면 친일한 사람으로 볼 수가 없어."
-미당시문학관에는 일본 찬양 시와 전두환 생일을 찬양 시까지 걸려 있던데요. 동생으로선 이 역시 고통이겠습니다.
"태평양유족회 등이 행사 때마다 친일파라며 데모를 했어. 미당시문학관 이사장이 그들과 협상을 했는데 데모를 안하는 대신 친일시도 문학관에 걸어 두기로 합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야."
-미당 슬하의 자녀 근황이 궁금합니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큰 아들은 미국 하버드대학을 나와 미국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고 있지. 둘째도 미국에 있어. 듀크대를 나와 의사생활을 하고 있어."
-시를 접고 기자생활을 하셨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1946년 5월 민주일보 창간 때 임정 부주석을 지낸 김규식 선생 등이 같이 하자고 해서 기자생활을 시작했어. 그후 30여년간 언론인 생활을 했지. 전북에선 태백신문이 창간될 때 김가전 도지사에게 부산에 피난 가 있던 문인들을 모이게 해달라는 조건을 달고 참여했지. 그 뒤 군산신문 삼남일보 전북매일 등 여러 신문사에 몸 담았고 1973년 3사가 통합된 뒤엔 전북신문사 기획관리실장을 지냈어. 기자 30년 생활하는 동안 편집국장만 18년을 지냈지. 아마 전국 최장일거여."
-뒤돌아본 삶은 만족하십니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어. 하지만 여한은 없어. 잘 헤쳐 나왔다고 생각해. 정신적으로는 모르겠지만 물질적으로는 하나도 빚진 게 없어. 미당 문학이 좀 더 의미 있게 남도록 마지막 역할을 해야겠어. 그런데 내가 언제 죽을 지 몰라."
-'질마재 지킴이'로서 세상 사람들한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미당 시 중에 '질마재 신화(神話)'라는 시집이 있어. 질마재의 실존 인물과 사물, 전래 설화를 소재로 쓴 유일한 산문시집이지. '질마재 신화'를 재현시키고 싶은 욕심이 있어. 그렇게만 된다면 대한민국에 시가 있는 유일한 민속촌이 될거야. 경기 양평에는 황순원 마을이 있어. 소설 '소나기를 재현한 것인데 관광객이 넘쳐나. 내가 얼마나 살지 모르지만 '질마재 신화'가 실현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
'질마재 신화'는 1975년 간행된 미당의 대표적인 시집이다. 이 작품집은 고향으로 회귀하고 싶은 정신적 토대 위에서 창작된 것이다. '질마재'는 시인의 출생지인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의 속칭이다. 길마는 수레를 끌기 위해 소나 말 따위의 등에 얹는 안장을 가르키는 말이다. 길마처럼 높고 가파른 고개가 질마재이다. '질마'는 구개음화가 안된 상태를 이른다.
이 작품집은 토속적이고 주술적인 세계를 창작한 것인데 신화적 내용들은 미당의 고향 마을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한국인의 원형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산업화의 진행으로 우리 고유의 전통이 매몰되어 가던 때에 방언과 속어, 비어를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한국적인 원형의 모습을 지켜내고 있다. 민족 의식의 뿌리와 한국인의 원형을 발견하려는 노력의 소산이라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김남곤 시인(전북일보 사장)은 지난 4월 송하선 시인(미산)과 함께 우하를 만나고 돌아와 '질마재 봄날'이라는 시를 썼다. 백마디 글보다 시 한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스케치 기사를 읽는 것 같아 그대로 옮긴다.
질마재 봄날
未山과 함께
진달래가 미치게 울어 쌓는
질마재에 갔다.
8할이 바람이라던 未堂 형보다
2할을 더 키워
10할이 바람이라는 동생 又下를 만나
뜬 세상 빚 갚아주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찡하게 들었다.
어둑한 안방에는
나들이 양복 한 벌이
헐렁하게 걸려 있고
아직도 뒷짐을 지고 있어
전기 난로가 벌겋다.
가져갈 것이라고는
고목진 시심(詩心) 하나 밖에 없는데
문고리엔 소요산 들 개 불알만한
자물통이
이를 악 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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